소설리스트

대몽주-378화 (378/1,214)
  • 378화. 중생예불도(衆生禮佛圖)

    “이 후배, 선배님께서 말씀하신 환생한 몸이라느니 하는 것들을 알지 못합니다. 그와 관련된 기억도 하나도 없고요. 그게…….”

    심협은 난처한 듯 말했다.

    “괜찮습니다. 환생한 사람은 영규(靈竅)가 트이지 않은 어린아이와 같지요. 일단 저를 따라 오십시오. 제가 대왕께서 예전에 남기신 물건들을 좀 보여드리면 기억을 일깨울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노마후는 그제야 일어서서 심협의 팔을 덥석 잡아끌었다.

    “선배님, 혹시 마족에게 투항하신 겁니까?”

    심협은 남은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주저하며 한숨을 푹 내쉬고는 물었다.

    노마후는 순간 움직임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비통함과 분노가 뒤섞인 눈빛으로 말했다.

    “그 악마는 당시 불경을 구하러 가는 길에 있었던 대왕과의 과거사 때문에 대왕에 대한 원한이 아주 깊습니다. 그래서 화과산에 오자마자 살계(殺戒)를 크게 범했지요. 많은 오랜 벗들과 후배들이 화를 피하지 못하고 그의 칼 아래 비참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본디 이 늙은 종도 구차하게 살려 하지 않았습니다. 허나 저는 대왕께서 반드시 다시 돌아오실 것이라 믿었지요. 화과산이 혼세마왕(混世魔王)에게 점거 당했을 때처럼 대왕께서 돌아오시면 우리의 주인이 되어주실 거라고요.”

    심협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조금 뭉클해져 그저 조용히 귀를 기울일 뿐, 상대의 말을 끊지 않았다.

    “그래서 이 늙은 종은 죽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날을 기다려야만 하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대왕께서 돌아오셨을 때 이곳 화과산에 원래의 숨결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고 느끼실 게 아닙니까? 그래서는 안 되지요. 우리가 이 집을 제대로 지키지는 못했지만, 마지막 한 치의 기운까지 사라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노마후는 끝에 가서는 조금 목이 멘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심협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다행히도 제가 기다려냈습니다. 기다려 냈어요!”

    노마후는 이내 통쾌한 목소리로 환호했다.

    “선배님께서는 저를 데리고가서 무엇을 보여주시려는 겁니까?”

    “따라오십시오.”

    노마후는 대답 대신 그렇게 말하며 돌아서서 수렴동 깊숙한 곳으로 걸어갔다.

    심협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그를 따라갔다.

    한 늙은 원숭이와 한 사람의 분신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돌로 된 보좌를 돌아 동굴 뒤쪽 매끈한 산벽 앞에 이르렀다.

    노마후는 앞으로 다가가더니 손을 들어 돌벽을 슥 닦았다. 그러자 매끈하던 돌벽 한가운데에서 먼지가 우수수 떨어지면서 곧 손바닥만 한 홈이 드러났다.

    심협이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것은 뜻밖에도 다섯 손가락을 쫙 편 손자국이었다. 그러나 손바닥은 조금 짧았고, 손가락 마디가 이상하리만치 긴 것이 분명 사람의 손은 아닐 터였다.

    “여기에는 본래 아무 장치가 없었는데, 그때 대왕께서 떠나신 뒤 제가 몰래 장치를 설치하여 이곳을 봉쇄하였답니다.”

    노마후가 그렇게 말하면서 손바닥을 그 위에 대고 눌렀다.

    심협은 문득 예전 방촌산에서 보았던 그 엄청나게 거대한 손바닥 자국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제야 그곳에 있었던 게 거대한 원숭이의 손바닥 자국이었음을 깨달았다.

    노마후가 딱 맞게 손을 끼워 넣자, 단단한 돌벽이 갑자기 부드러워진 것처럼 우웅 하고 울렸고, 표면에는 물결무늬 같은 영력파동이 떠올랐다.

    “오시지요.”

    노마후가 설레는 소리로 입을 열었다.

    심협이 재빨리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자 노마후가 손을 내밀어보라는 눈짓을 해보였다. 이에 심협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돌벽을 향해 손을 뻗어 쓰다듬었다.

    그런데, 그의 손바닥은 돌벽에 닿자마자 보이지 않는 흡인력에 휩싸였다. 뒤이어 그는 거대한 힘이 정면으로 덮쳐오는 것을 느끼고 비틀거리면서 돌벽을 향해 엎어졌다.

    가슴이 철렁한 그가 막 뭔가를 하려던 순간, 몸이 돌벽을 뚫고 녹아들듯 단숨에 그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이를 본 노마후는 따라 들어가지 않고 느릿느릿 팔을 거둬들였다.

    “만약 당신이 정말 대왕께서 환생하신 몸이라면, 분명 자기 능력으로 나올 수 있을 겁니다.”

    노마후는 돌벽을 바라보며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한편, 돌벽 안의 심협은 앞으로 재빨리 중심을 잡고 섰다.

    주위를 살펴보니 그곳은 어느 절벽 위로, 앞은 탁 트인 허공이었다. 불과 백여 장 앞에서는 절벽 가장자리 바깥쪽에 구름과 바다가 한데 엉켜 쉬지 않고 용솟음치는 것이 보였다.

    심협은 노마후가 따라오지 않자 미간을 찌푸리며 황급히 돌아서서 살펴보기 시작했다.

    뒤에는 수직으로 우뚝 선 산벽이 있었고, 그 위에는 더없이 거대한 부조가 새겨져 있었다. 심협은 부조의 전체 모습을 살펴보기 위해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절벽 가장자리까지 물러나자 비로소 벽화 전체가 또렷이 보였다.

    그것은 놀랍게도 엄청나게 거대한 중생예불도(衆生禮佛圖)였는데, 위에 새겨진 생명체에는 사람만이 아니라 흉측한 요물들과 영식(靈識)이 트이지 않은 동물들도 있었다. 어떤 이는 두 손 모아 합장하고 있었고, 어떤 이는 고개를 조아려 절을 했으며, 또 어떤 이는 아예 오체투지를 하고 있었다. 하나하나, 그 무엇을 보더라도 지극히 경건해 보였다.

    이 생명체 형상들은 전부 화면 오른쪽에 몰려 있었고, 그들이 참배하는 대상은 그림 왼쪽에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벽화의 왼쪽에는 부처의 신상이 아니라 사람 모습이 비칠 정도로 매끈한 하얀색 수정벽이 박혀 있었다.

    심협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곧바로 신식을 움직여 하얀 수정벽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역시, 그때와 마찬가지로 신식이 뚫고 들어갈 수 없어.”

    곧 그는 신식을 거두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거울 같은 수정벽에서 가느다란 하얀 빛이 은은하게 새어나오는 것을 보고, 심협은 수정벽의 크기가 조금 더 크다는 것 외에는 일전에 방촌산 관도동에서 보았던 그 수정벽과 거의 똑같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잠시 생각해본 뒤, 두 눈을 집중하여 그 수정벽을 자세히 살폈다.

    처음에는 별다른 점이 없었지만, 그의 시선이 오랫동안 머물자 하얀 수정벽의 빛은 갈수록 강렬해져서 곧 눈동자 가득 비쳐 들어왔다.

    그는 눈앞에서 천지가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하면서 두 눈도 흐릿해졌고, 어질어질한 느낌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심협은 지금 이 상황이 전혀 낯설지 않아서 그저 신식을 조금 단단히 가다듬었을 뿐, 이런 느낌에 저항하려 애쓰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얀 수정벽이 점점 투명해지면서 그의 모습이 그 위에 비쳐 자신과 마주선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돌벽 위에는 더 이상 새로운 변화가 없었다.

    심협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어렴풋이 뭔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친 그는 다시 오른쪽의 예불을 드리는 생명체들을 하나하나 훑으며 지나갔다. 시선을 옮기던 그는 다시 왼쪽의 하얀 수정벽을 바라보는 순간 문득 뭔가가 떠올랐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모든 중생이 부처라고 하셨지. 이 중생예불도 속 생명체들이 예불을 드리는 부처는…… 설마 그들 자신인가? 그렇다면 나 자신을 비춰봐야 한단 말인가?”

    심협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수정벽을 빤히 쳐다보면서 머릿속으로 당시 관도동에서 보고 들은 바를 떠올렸다.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여 자기의 본성을 보아야 비로소 진정한 자신을 얻게 되리니.”

    그때, 허공에서 신비하고 웅장한 목소리가 예고 없이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심협은 번개라도 맞은 듯한 느낌에 갑자기 온몸이 경직되어 수정벽을 올려다보던 동작 그대로 우뚝 굳어버렸다.

    그의 두 눈에는 푸른 영광(靈光)이 떠오르면서 눈앞에 보이는 사물에 차츰 변화가 생겼다.

    수정벽에 비친 그림자는 이미 더 이상 수려한 청년이 아니라 예전에 본 바 있는 청삼을 입고 뺨이 옴폭 들어간 뾰족한 주둥이의 금빛 원숭이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 금빛 원숭이가 갑자기 목을 비틀어 그를 향해 씩 웃더니, 곧 수정벽에서 몸을 돌려 무언가를 향해 손짓했다.

    다음 순간, 온 수정벽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수정벽에 비치는 것은 더 이상 금빛 원숭이의 모습이 아니라 산을 가득 채운 깃발과 고함소리가 하늘을 찌르는 산봉우리였다. 그 위에는 깃발을 흔들고 함성을 지르며 흥분해서 칼을 휘두르는 원숭이들이 가득했다.

    심협이 시선을 돌리자, 화면 속 풍경도 그의 시선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산봉우리 아래에는 거대하고 탁 트인 초원이 하나 있었고, 그 위에도 생김새가 기괴하고 형상이 제각각인 수많은 요물들이 서 있었다.

    그 우두머리인 요왕(妖王) 몇몇은 몸집이 유달리 거대했고, 각자 화려한 갑옷을 입고 있어 백만의 병사를 거느린 대장군 못지않게 위풍당당했다.

    그때, 위에서 한 줄기 금빛이 번득이는 것이 문득 눈에 띄었다. 심협이 재빨리 위를 올려다보니, 금빛 원숭이의 몸에 빛이 모여드는 것이 보였다. 원숭이의 몸 밖에는 어디선가 보광(寶光) 찬란한 쇄자황금갑(鎖子黃金甲)이 나타났고, 머리에는 봉시자금관(鳳翅紫金冠)을 썼으며, 발에는 우사보운리(藕絲步雲履)를 신고 있어 보기에도 늠름하고 위풍당당했다.

    수많은 요괴들이 너도나도 몰려왔는데,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축하인사를 올리는 분위기였다.

    잠시 후, 금빛 원숭이가 손목을 빙글 돌렸다. 그러자 그의 손바닥 한가운데에 금빛 곤봉이 하나 나타나 허공을 빙빙 돌며 휙휙 바람을 일으켰다. 놀랍게도 그 모습은 진해빈철곤과 매우 흡사했다.

    심협의 가슴이 요동쳤다. 그가 어찌 상대방을 몰라볼 수 있겠는가?

    그 벽화 속 금빛 원숭이는 다름 아닌 제천대성 손오공이었던 것이다.

    수정벽 위의 화면은 갑자기 바뀌어 금갑을 입은 원숭이 왕이 허공에 우뚝 서 있었고, 그 뒤로 선홍색 피풍(*披風: 오늘 날 망토처럼 생긴 겉옷)이 펄럭였다. 그는 한 손으로 금고봉을 들어 올려 마치 도발하듯 다른 요왕들을 가리켰는데, 실로 의기양양하고 대범해보였다.

    그중 우융요왕(禺狨妖王)은 키가 거의 1장에 달했고, 온몸이 금빛 털로 뒤덮여 있었다. 생김새는 원숭이에 가깝지만, 퉁방울 같은 눈과 날카롭고 험악해 보이는 이빨이 가득한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해졌고, 귀신들도 90리를 달아났다.

    그는 곧바로 훌쩍 뛰어오르더니 양동혼철곤(陽銅混鐵棍)을 휘둘러 손오공과 맞붙어 싸웠다.

    손오공보다 몸집이 훨씬 큰 우융요왕이 양동혼철곤을 휘두르자 음산한 바람과 사나운 불길이 함께 일어나 온 수정벽 화면에 회오리치는 불꽃이 가득했고, 지나간 자리마다 균열이 생겨났다.

    그 기세로만 보면 우융요왕이 우세를 점할 것 같았지만, 심협은 손오공이 능력을 전혀 쓰지 않은 채 줄곧 피하기만 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니나 다를까, 10여 번의 공격을 피한 손오공이 몸을 뒤로 뺐다가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 금고봉을 슬쩍 들어 올리자, 그 끄트머리가 화염 회오리를 곧장 흩어버리면서 우융요왕의 혼철곤을 막아냈다.

    이어서 그는 입꼬리를 벌려 하얗고 뾰족한 이를 드러내며 씩 웃더니, 갑자기 돌진하면서 곤봉을 홱 돌려 우융요왕의 혼철곤을 단번에 쳐냈다. 그리고 그 앞에서 한 바퀴 빙글 돌아 흐릿한 곤봉 그림자를 드리우며 우융요왕의 허리를 가로로 때렸다.

    우융요왕은 거의 백 장이나 나가떨어진 뒤에야 겨우 멈춰 섰다.

    그는 낮게 고함을 지르면서 다시 사납게 달려들었다. 손에 든 혼철곤은 갈수록 빠르게 회전했고, 곤봉 그림자가 회오리 불꽃을 동반한 거대한 화염 그물을 만들어 손오공을 뒤덮었다.

    그러나 손오공은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훌쩍 다가가 발아래 달빛을 반짝이며 돌연 거대한 화염 그물 속으로 들어갔다. 이어서 금고봉을 위로 치켜들자, 곤봉이 순식간에 10여 장으로 늘어나 우융요왕의 아래턱을 그대로 가격했다.

    이에 우융요왕의 몸이 하늘로 솟구쳤다.

    한편, 이 광경을 본 심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월보!’

    방금 손오공이 쓴 것은 분명 사월보였다. 다만 그의 특이한 곤법(棍法)과 결합하자 뜻밖에도 작은 힘으로 큰 힘을 제압하는 효과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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