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377화 (377/1,214)
  • 377화. 환생한 화신(化身)

    “그럼 부탁 좀 하겠소.”

    심협의 말에 기련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양손으로 법결을 맺었다. 그러자 체내의 법력이 움직였고, 온몸에서 몽롱한 푸른 빛이 번득였다. 줄줄이 강줄기 같은 푸른 빛 자국이 몸 곳곳에 떠오르면서 법력이 흐르는 물처럼 콸콸 흘러나와 그의 손바닥 한가운데로 모여들었다.

    그때, 기련미의 아랫배에서 돌연 자줏빛 부적이 홀연히 나타났고, 곧이어 어두운 자주색 빛이 그의 아랫배 단전 자리에 떠올랐다.

    “윽!”

    기련미는 신음소리를 내며 고통으로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참아내며 천천히 손을 들어 심협의 몸에 감긴 황금승에 법력을 불어 넣었다.

    황금승은 법력 파동이 나타난 것을 알아채고 즉시 신통력을 작동시켜 법력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심협은 여전히 팔을 들어 올릴 수가 없어서 아래쪽을 향해 법술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가 손바닥을 몸 아래쪽으로 뻗자, 손바닥 한가운데에 순간 푸른 빛이 번득이면서 난데없이 물 한 덩어리가 허공에 나타나 응집되기 시작했다.

    이 덩어리는 점차 커져서 차츰 사람의 형체로 뭉치기 시작했다.

    허나 막 완전한 형체를 갖추려던 그때, 기련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이 격렬하게 흔들리더니 그가 어렵사리 모아놓은 법력이 말끔히 흡수당했다. 이어서 심협이 지닌 법력도 황금승을 향해 흩어지기 시작했다.

    갓 사람 형체로 응집된 물 덩어리도 심하게 바들바들 떨리는 것이, 모두 물거품이 될 듯했다.

    한데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하얀 빛이 한 줄기 홀연히 날아와 황금승 위에 내려앉더니, 곧 심협과 기련미를 대신해 압력을 흩어버렸다. 이에 물 덩어리도 다시 응집되기 시작했다.

    심협이 고개를 돌려 보니, 뜻밖에도 키 작은 노인이 나선 것이었다.

    “보긴 뭘 봐? 그저 심심해서 흥을 좀 돋우려는 것뿐이야. 그러니 어서 법술이나 쓰란 말일세!”

    눈을 부라리며 성을 내는 노인의 모습에 심협은 피식 웃고는 눈을 감았다. 이어서 두 손을 결인하여 독특한 법결을 맺으며 빠르게 구결을 읊조렸다.

    몇 호흡 뒤, 그의 몸에 희미한 하얀 빛이 한 겹 떠오르더니, 몸 앞에서 뭉쳐진 사람 모양 물 덩어리를 뒤덮었다.

    다음 순간, 심협이 두 눈을 번쩍 떴다. 그 눈동자는 더 이상 흑백이 분명하지 않았고, 그 안에 마치 호수가 박힌 듯한 푸른 물빛이었다.

    “물의 법술이 근원과 통하면 신혼을 나눌 수 있나니, 수혼술, 신혼을 이끌라(水法通元, 神魂可分, 水魂術, 引魂)!”

    심협이 가볍게 외친 순간, 그의 몸이 갑자기 굳어지더니 온몸의 법력 흐름이 멈췄다. 또한, 한 쌍의 푸른 눈동자 사이로 희미한 빛이 가득 흘러나와 몸 밖의 물속으로 천천히 녹아들었다.

    “뭉쳐라!”

    심협의 입에서 다시 한번 가벼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온몸을 뒤덮은 물은 그의 몸에서 분리되어 나왔는데, 어느덧 건장한 체구의 잘생긴 청년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놀랍게도 심협과 완전히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 순간, 황금승에 묶여 있던 심협이 갑자기 정신을 잃고 털썩 쓰러졌다.

    곁에 있던 사람들은 이 상황에 깜짝 놀라 엉금엉금 바닥에서 일어났고, 이미 심협을 떠났던 시선이 다시 그에게로 향했다.

    “이건…… 분신술인가?”

    기련미가 놀라서 말했다.

    “그리 간단하지 않아. 이놈은 원신이 몸에서 떠나 저 물로 된 분신에 녹아들어간 게야. 움직임을 보아하니 간단한 술법으로 통제하는 게 아닌 모양인데……?”

    잿빛 옷의 노인은 한마디로 심협의 법술을 밝혀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우의 성함은 어찌 되시는지요?”

    수혼술로 응집된 심협의 분신이 잿빛 옷의 노인을 향해 공손히 포권했다.

    “너, 꽤 재미있는 놈이구나. 어쩌면 정말로 성공할지도 모르겠어. 이 늙은이는 회록(回祿)이다. 일찍이 천정의 화덕성군(*火德星君: 중국 전설 속 불의 신 직책)을 지냈지.”

    잿빛 옷의 노인이 헤헤거리며 다소 경박하게 웃더니 답했다.

    “어쩐지 처음 뵈었을 때 도우 몸에서 알 수 없는 열기가 느껴진다 했는데, 화덕성군이셨군요. 무례를 범했습니다.”

    심협이 다시 한번 포권하며 말했다.

    “입에 발린 말은 그만하고, 어찌 우리를 구할 계획인지 그것부터 말해보게.”

    화덕성군은 체면치레 따위 하지 않고 재촉했다.

    “여러분의 몸에 모두 금제가 걸려 있던데, 제가 좀 봐도 되겠습니까?”

    “그야 안 될 것 없지요.”

    심협의 물음에 기련미가 제일 먼저 답하더니 다시 결인하고 법력을 운행했다. 그러자 그의 단전 부근에서 자주색 빛이 일더니 자줏빛 부적이 나타났다.

    기련미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심협은 그 부적의 복잡한 문양을 가볍게 건드렸다. 그 순간, 날카로운 한기가 손끝으로 갑자기 스며들자 그는 손가락을 파르르 떨며 재빨리 거두어 들였다.

    “이것은 자한쇄원부(紫寒鎖元符)다. 이것조차 제거하지 못한다면 사람을 구하겠다느니 큰소리치지 마라.”

    화덕성군이 못미더운 듯 미간을 찌푸리며 투덜댔다.

    “일단 한번 해보지요.”

    심협은 어느새 화덕성군의 말투에 익숙해진 듯 희미하게 웃으며 답했다.

    말을 마친 그가 황정경 공법을 운공하기 시작하자 한 줄기 금빛이 단전을 따라 솟아나와 팔뚝으로 천천히 퍼져 내려가면서 한쪽 팔뚝을 금빛으로 물들였다. 이어서 다섯 손가락이 마치 용의 발처럼 구부러졌다.

    심협은 두 손가락으로 자한쇄원부를 찍었다. 부적지 위로 자주색 빛이 크게 일렁이더니, 무섭도록 차갑고 시린 자줏빛 기운이 퍼져 나가 기련미의 체내로 파고드는 동시에 심협의 팔뚝까지 물들였다.

    “윽!”

    기련미는 한층 고통스런 얼굴로 신음을 내뱉었다.

    “기련 도우, 조금만 참아주시오.”

    본능적으로 대응하려던 기련미는 심협의 말에 흠칫 떨더니 멈추었다. 그의 아랫배에서 뻗어 나온 자줏빛 기운의 빛깔이 갑자기 짙어지며 곧 검게 변하더니,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심협의 팔뚝을 타고 올라갔다.

    허나 심협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검은 기운들이 뻗어 올라오도록 내버려 두더니, 느닷없이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뒤이어 그의 손끝에서 푹 하는 소리가 울리면서 금색 빛줄기 하나가 순식간에 자줏빛 부적을 관통해 부담(*符膽: 부적을 이루는 다섯 가지 부분 중 핵심이 되는 부분)을 산산조각 냈다. 부적지에도 곧 불길이 일더니 금세 잿더미로 변했다.

    기련미의 얼굴에서는 고통스러운 기색이 사라졌고, 이내 기쁨이 번졌다.

    “정말 풀렸다!”

    누군가 가볍게 외쳤다.

    “이 녀석, 정말 해냈구나!”

    갑자기 감옥 안이 시끄러운 소리로 들썩였다.

    “심 도우, 정말 고맙소.”

    기련미는 단전을 한 차례 살펴보고는 약간의 음산한 기운만이 남아 있을 뿐, 단전에 박힌 못과도 같았던 자한쇄원부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음을 확인했다.

    심협은 별일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심 도우, 내 금제도 없애줄 수 있소?”

    그때, 깡마른 남자 하나가 다가와 물었다.

    “심 도우, 나도 좀 도와주시오.”

    다른 한 사람이 바짝 뒤따라 말했다.

    한순간 감옥 안의 사람들이 모두 사방에서 모여들어 심협에게 도움을 청했다.

    “조급해하지 마시오. 한 명씩, 차례대로 합시다.”

    이들이 얼마나 고초를 겪었으면 이럴까 싶어 심협은 속으로 조용히 탄식했다.

    가장 먼저 다가온 깡마른 남자가 두 손을 결인하자, 단전에서 자줏빛이 반짝였다. 하지만 아까처럼 안개 같은 것이 흘러넘치지는 않았고, 가느다란 자금(紫金)색 번개줄기가 쏘아져 나와 그를 옴짝달싹 할 수 없게 마비시켰다.

    심협은 눈빛을 집중하며 또다시 그의 단전 부위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 * *

    반 시진 정도가 지났을 때, 옥 안의 사람들 중 화덕성군과 심협을 제외한 모두의 속박이 풀린 상태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심협에게 감사해 마지않았고, 그에 일전의 행동에 대해 사과했다.

    “이제 회록 도우 차례입니다.”

    심협이 화덕성군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데 화덕성군은 어째서인지 약간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이내 잿빛 장포를 벗고 상반신을 드러냈다.

    그의 드러난 피부에는 곳곳마다 검붉은 흉터들이 있었다. 그 모양은 마치 뜨거운 화염에 심하게 데인 것 같았는데, 그의 기해, 단중, 부곡(府谷) 등 중요한 혈자리 몇 군데에는 검은색 귀두정(鬼頭釘)까지 꽂혀 있었다.

    심협은 내심 깜짝 놀랐다. 도대체 어떤 화염이기에 화덕성군을 이 지경으로 불사를 수 있었단 말인가?

    “내 몸에는 중요한 규혈에 상사한침(相思寒針) 일곱 개가 박혀 있다. 힘으로는 뽑아낼 수 없고 진혼석(鎭魂石)에 의지해야만 꺼낼 수 있지. 너는 풀 수 없을 게야.”

    화덕성군의 말에 심협은 잠깐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우선 여기서 도망친 후에 진혼석을 찾아 금제를 풀도록 하지요.”

    “심 도우. 이 옥에도 금제 법진이 있는데, 깨트릴 방법이 있겠소?”

    기련미가 물었다.

    “아까 그 작은 요괴에게 영패가 있지 않았소? 그걸 빼앗아 오기만 한다면 옥문을 열수 있을 게요.”

    심협이 웃으며 답하자 사람들은 오히려 어리둥절해졌다. 옥에 갇혀 있건만, 어찌 영패를 빼앗을 수 있단 말인가?

    “다들 잠시만 제 육신을 지켜주십시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심협은 사람들의 의문을 알아채고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고는 몇 걸음 만에 옥문 입구에 이르렀다. 그때, 그의 몸에서 홀연히 푸른 빛이 번득이기 시작하더니 사람 형태의 허상이 분리되어 나와 원신으로 변하여 거침없이 옥문 틈을 지나갔다. 동시에 분신은 물이 되어 바닥에 흘렀다.

    한데 이렇게 흐른 물은 옥문 바깥에서 빠르게 사람 형상으로 응집되었고, 심협의 원신이 그 위에 깃들어 다시 물 분신의 모습으로 변했다.

    이를 본 사람들은 깜짝 놀라더니 경탄했다.

    심협은 곧장 옆 동굴 입구 방향으로 내달려 작은 요괴들을 찾기 시작했다.

    동굴 밖에서는 문지기 요괴 둘이 옆 동굴 입구 양쪽을 지키고 서서 한창 한담을 나누던 참이었다. 그때, 갑자기 그들 발아래에 달그림자가 반짝이더니, 곧이어 눈앞이 아득해지면서 머리를 한 대씩 세게 얻어맞고는 털썩 쓰러졌다.

    심협의 분신이 그 옆에서 번쩍 나타나 그중 한 요물이 가진 영패를 떼어내려 했다.

    그때, 앞에서 홀연히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라면 금제의 영패를 건드리는 모험 따위는 하지 않을 게다.”

    심협은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고는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섰다. 노마후가 멀지 않은 곳에 서서 흔들림 없는 눈으로 고요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영패 자체에도 금제가 있어 일단 저 요괴의 몸을 떠나면 곧바로 작동되지. 그럼 청우 그놈이 곧바로 이상이 생긴 걸 알아차릴 테고, 분명 곧장 달려올 게다. 그리 되면 네가 무엇을 하려는 것이든 실패할 수밖에.”

    “왜 나를 돕는 것인가?”

    심협은 미간을 찌푸리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도와? 정말 너를 도울 것인지는 네놈이 내가 기다리던 사람인지 확인한 후에 정해야겠지.”

    노마후는 잠깐 망설이더니 천천히 말했다.

    “누굴 기다린다는 거지?”

    “네가 수련한 것이 방촌산 황정경 공법이더냐?”

    노마후는 대답 대신 되물었다.

    “그렇다.”

    굳이 숨길 일은 아니었고, 어차피 상대가 간파한 마당에 숨길 이유는 없었다.

    “그럼, 네가 전에 꺼냈던 법보가 여의금고봉이었느냐?”

    노마후가 고요한 눈동자 깊은 곳에 약간 광채를 내보이며 은근한 기대가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이번 질문에는 심협도 속으로 움찔해 잠시 생각한 후 천천히 답했다.

    “그건 나도 모른다. 그 법보 역시 우연히 얻은 것인데, 내 마음대로 길이를 바꿀 수 있긴 하지.”

    “화과산에는 왜 온 것이냐?”

    “나도 모른다. 그저 왠지 모르게 이곳에 한번 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심협의 말에는 진실과 거짓이 적절히 뒤섞여 있었으나, 그 답을 들은 늙은 개코원숭이는 놀라면서도 기뻐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갑자기 허리를 굽혔다.

    “대왕을 뵈옵니다!”

    심협은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깜짝 놀랐다. 생각해보면 전에 청우요괴가 나타났을 때도 다른 요괴들과 달리 이 노마후는 무릎을 꿇지 않았다.

    “선배님, 이게 뭐하시는 겁니까?”

    상대가 갑자기 극진한 예를 다하자 심협 또한 상대를 존대할 수밖에 없었고, 황급히 노마후를 부축해 일으키려 했다.

    “몸에 현공(*玄功: 신공‘神功’과 같이 현묘한 공력)을 지니셨고, 금고봉을 가지고 계시며, 어떤 이끌림에 따라 이곳 화과산까지 오셨으니, 세상에 이런 우연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분명 대왕께서 환생하신 화신이요, 제천대성 손오공께서 윤회하신 몸임에 틀림없습니다.”

    노마후는 심협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