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376화 (376/1,214)

376화. 약인(藥人)

청우요괴가 느긋하게 말했다.

“손오공이 동해의 정해신침을 빼앗아간 뒤 대체품을 다시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이게 그것인가? 애석하게도 모조품은 가짜일 뿐이지.”

심협은 그 말을 듣고 잠시 깊이 생각하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천정의 청우는 그리 견문이 넓지 않은데…… 그렇다면 너는…… 태상노군이 타고 다니던 푸른 소인가?”

이번에는 청우요괴가 멍해졌다. 자신은 아직 심협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는데, 도리어 상대가 자신의 신분을 알아맞히지 않았는가!

“긴 말은 필요 없겠지. 물음에나 순순히 답해라. 그러지 않으면 내 너를 죽느니만 못하게 만들 것이다.”

청우요괴가 냉소했다.

“나는 방촌산의 살아남은 제자다. 동해에서 왔고, 이곳 화과산에 온 것은 그저 제천대성 손오공을 기리기 위한 것일 뿐, 다른 목적은 없다.”

심협은 솔직하게 답했는데, 그러자 청우요괴는 오히려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는 심협이 계속 고집을 부릴 줄 알았는데 예상 외로 깔끔하게 대답하자 당황한 것이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다시 신문(訊問)을 이어갔다.

“네 육진편은 어디서 얻었느냐? 너와 이정은 또 무슨 관계지?”

“도대체 아까부터 자꾸 묻는데…… 그 이정이라는 게 누구냐? 난 모르는사람이다. 육진편은 그저 각지를 돌아다니다가 어느 전장의 유적에서 주운 것이다.”

심협의 답을 믿은 건인지는 알 수 없지만, 청우요괴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럼 정해신침의 모조품인 막대기는 또 어찌된 일이냐?”

“전에 동해용궁이 요마들에게 함락됐을 때 혼란을 틈타 훔쳐왔다.”

심협은 청우요괴가 진해빈철곤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확신하고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이야기를 꾸며냈다.

청우요괴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하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단 한 마디도 참말은 없구나. 보아하니 쓴맛을 봐야 바른 대로 고할 모양이지?”

이어서 그가 손목을 돌리자 손바닥 한가운데에 손바닥만 한 향로가 나타났다. 그 속에는 새빨간 불빛이 빛났지만, 연기는 한 줄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향로를 손에 받쳐 든 채, 입을 비죽 내밀고 심협을 향해 가볍게 입김을 불었다.

그러자 향로 속 새빨간 불꽃이 갑자기 밝아지더니 타는 듯 뜨거운 기운이 화르르 솟구치면서, 빨간 불티 하나가 심협의 미간으로 날아왔다.

꽁꽁 묶여 있던 심협은 피하지 못했고, 불티가 이마에 닿은 순간 미간 깊은 곳에서부터 견디기 힘든 뜨거움이 느껴졌다. 마치 머리뼈를 꿰뚫고 곧장 신혼으로 파고드는 것만 같은 느낌에 그는 참지 못하고 처참하게 울부짖었다.

“크아아악!”

심협의 미간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며 불에 탄 구멍이 생겨났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 불티의 위력은 아주 잠깐 동안만 유지된 후 곧 영력을 소진하고 저절로 꺼져서 사라졌다.

“삼매진화의 맛이 어떤가? 견디기 힘들지?”

청우요괴가 차게 웃으며 비웃듯 물었다.

심협은 미간의 통증이 아직 사라지지 않아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 머리를 흔들어 털었다.

심협이 아무 답도 하지 않자 청우요괴는 표정이 싸늘하게 변하더니 손에 든 향로를 들어 올리고 다시 한번 입김을 불려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쿵!

산 안쪽에서 둔중한 소리가 울렸다. 뒤이어 수렴동 입구에 강렬한 폭풍이 몰아치면서 곧장 폭포의 물결을 흩었고, 물보라가 비 내리듯 사방으로 흩어졌다.

“젠장, 단약!”

청우요괴는 얼굴빛이 살짝 변하더니 이마를 탁 치고는 갑자기 돌아서서 수렴동으로 다급하게 달려가며 외쳤다.

“그놈을 내 동부에 가둬라. 그 약인(藥人)들과 함께 말이다!”

노마후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좌우의 작은 요괴들에게 심협을 가두라고 분부한 뒤, 자신이 앞장서서 수렴동으로 향했다.

두 요괴가 심협을 받쳐 일으켰다. 그는 비틀비틀 몇 걸음을 간 뒤에야 미간의 극심한 통증이 차츰 사라졌다. 그러는 동안 대개박술 공법이 저절로 운공되면서 몸속 빛 한 줄기가 미간으로 흘러들어가 상처를 회복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몸에 감긴 황금승이 다시 작동해 이 부분에 돌기 시작한 법력을 말끔히 흡수했다.

심협은 속으로 탄식하며 대개박술의 운공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한편, 노마후는 사람들을 데리고 수렴동으로 날아가 물 장막을 통과한 뒤 어느 홍교(虹橋: 아치형 다리) 위에 내려섰다.

심협이 슥 훑어보니 동부 안 곳곳에 커다란 야명주가 한 알씩 박혀 부드러운 하얀 빛을 뿜어내 사방을 온통 환하게 비추었다.

돌다리를 지나자 동굴에 탁 트인 평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 안에는 돌로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갖가지 채소, 과일과 피범벅이 된 날고기, 그리고 장기들이 가득했다.

양옆으로는 갑옷을 입은 요족 두 무리가 마치 창처럼 꼿꼿하게 서서 지키는 중이었다.

평지 뒤쪽에는 돌로 된 왕좌가 하나 있었다. 그 위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체를 다 벗긴 호피가 한 장 덮여 있어 위풍당당해 보였지만, 그 위에 청우요괴가 앉아 있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자세히 들여다볼 겨를도 없이 심협은 요족들에게 떠밀려 평평한 공터를 지나 오른쪽으로 꺾어 시커먼 옆 동굴 앞에 이르렀다.

“데리고 들어가라.”

노마후가 심협을 힐끗 보더니 분부했고, 작은 요괴들은 즉시 심협을 떠밀어 동굴 입구로 들어가게 했고, 비탈길을 따라 아래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째서인지 노마후는 따라오지 않았다.

옆 동굴 안에는 야명주가 박혀 있지 않았고, 백여 걸음 더 들어가자 주위가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심협의 시야는 빛과 명암에 상관없이 동굴 안 모습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그가 길을 따라 걸어가는 곳마다 군데군데 비어 있는 검은 철장들이 있었는데, 그 위에는 예외 없이 어두운 자줏빛 부적들이 붙어 있었다. 다만 그 위에 그려진 부적 문양은 각자 달라서 어떤 것들은 미약한 영력 파동을 내뿜었고, 어떤 것들은 이미 영력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속으로 한창 의아해하던 심협의 눈빛이 갑자기 희미하게 빛났다. 그중 한 곳에서 하얗게 반짝이는 해골 한 구가 두 손을 몸 옆에 늘어뜨린 채 철장 한 구석에 기대어 있는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그 뼈의 광택으로 보아 생전에 제법 수행에 성과를 거둔 수사였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더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철장 속의 하얀 해골은 점점 많아졌다. 어떤 것은 철장 꼭대기에 비스듬히 매달려 있었고, 어떤 것은 한가운데에 가부좌를 틀고 있었으며, 또 어떤 것은 이미 완전히 부패되어 어지러이 흩어진 뼈 무더기가 된 상태였다.

바로 그때, 한 쪽 옆에서 목구멍 깊은 곳으로부터 쥐어 짜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끄어어어…….”

고개를 틀어 보니 곁의 철장 안에 어린아이처럼 작달막한 노인이 갇혀 있었는데, 옷차림은 남루하기 그지없었다. 두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칠흑 같은 구멍만 휑하니 뚫려 있었고, 코도 날카로운 것에 잘려나간 듯 한 줄기 흉터만이 인중까지 내려와 있었다. 혀 역시 뿌리까지 뽑힌 것처럼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심협은 다시 안쪽으로 떠밀려 들어갔다. 뒤에서는 점점 다급해지는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메아리쳤다.

철장 몇 개를 사이에 두고 심협은 점점 많은 사람들이 안에 갇혀 있는 것을 보았다. 그중 몸이 성한 사람은 드물었고, 하나같이 거지처럼 몸을 가리기 힘든 누더기차림에 뼈만 앙상했다.

더 뒤쪽 수백 개의 철장에 갇혀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늙고 쇠약한 원숭이들이었다. 대부분은 헤져서 너덜너덜해진 옷을 입고 있었는데, 몇몇은 얼룩덜룩 녹슨 자국이 있는 낡은 갑옷을 입고 있었다.

동굴 끄트머리에 이르자 작은 요괴들은 심협을 붙잡고 철창으로 둘러싸인 독방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영패로 옥문의 금제를 연 뒤, 그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심협은 크게 휘청거리다가 몸을 가눈 후, 그 감방에 갇힌 사람들을 살폈다.

앞서 본 철장들과 달리 이곳에 갇힌 사람 일고여덟 사람은 모두 깨끗한 차림새였고, 안색은 좀 창백했지만 대체로 정신은 멀쩡해 보였다. 옥에 갇힌 죄수처럼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이들은 대부분 무덤덤한 눈으로 심협을 슥 쳐다보고는 신경을 껐다.

그때, 짙은 어둠 속에서 낮고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어, 드디어 황금승에 묶인 놈이 또 하나 왔구먼.”

소리를 따라 돌아보니, 잿빛 장포를 입은 키 작은 노인이 가부좌를 튼 채 고개를 들어 그를 보고 있었다.

“도우는 이름이 어찌 되시오?”

말간 얼굴에 깨끗한 비단옷을 입은 청년이 다가와 먼저 물었다.

“저는 심협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심협이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쉰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걸 알아 뭐하겠나. 모두들 약인이라네. 다들 조만간 죽을 목숨이지.”

내용과 달리 그 말투나 목소리에서는 그다지 슬픈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약인이요?”

“그 퍼런 짐승 놈이 단약 만들기를 좋아하는 것도 아직 모르다니, 방금 잡혀 들어온 게요? 우리는 여기 갇혀서 사육당하고 있소. 나중에 우리들을 이용해 단약을 만들 거요.”

비단옷 청년의 말에 심협은 문득 심호가 육신단인가 뭔가 하는 단약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 문득 떠올랐다.

“참, 내 이름은 기련미(祁連靡), 서역 오손(*烏孫: 중국 한‘漢’나라의 역사서에 나타나는 투르크계 유목민) 사람이오.”

비단옷의 청년이 포권을 하며 덧붙였다.

“기련 도우, 이곳에 모두 어떤 이들이 갇혀 있는지 아시오?”

심협은 황금승에 묶인 상태라 포권은 할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슬쩍 숙인 후 물었다.

“이곳 사람들 대부분은 각지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수사들이오. 요마들에게 투항하려 하지 않았던 화과산 원숭이들도 있지. 그밖에 오래국의 평범한 백성들이 제물로 다른 곳에 갇혀 있소. 듣자하니 천정의 진선 일부도 다른 곳에 갇혀 있다더군.”

“이 원숭이들은 요물로 여겨지지 않았소? 왜 요마들을 따르지 않은 것이오?”

심협이 의아해 하며 물었다.

“전에 늙은 개코원숭이 한 마리가 하는 말을 들어보니, 그들 마음속 대왕은 오직 제천대성 하나뿐이라 죽을지언정 그 청우요괴를 왕으로 모시지는 않겠다고 하더이다. 그 청우요괴는 제천대성과 무슨 원한이라도 졌는지, 이 화과산 원숭이들에게는 특히 혹독해 그들을 차례차례 죽인 끝에 남은 원숭이 요괴들을 투항하게 만들었소. 이곳에 가둬놓고 천천히 괴롭히는 것이지.”

기련미의 설명에 심협은 그 원숭이들에 대한 동정심이 절로 생겨났다.

“여러분, 심모 감히 여러분께 도움을 청합니다. 이후에 반드시 방법을 짜내 여러분을 구해드리지요. 어떻습니까?”

심협이 은근한 목소리로 묻자 사람들은 하나둘 그를 돌아보았지만,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약간의 의심과 무덤덤함이 더 많이 느껴졌다.

“말이야 쉽지. 네 몸에 감긴 황금승조차 풀지 못하면서 어찌 우리를 구해주겠다는 망언을 하는 게냐?”

키 작은 노인이 돌연 몸을 꼿꼿이 고쳐 앉으며 비아냥거렸다.

그러자 그나마 약간의 흥미를 보였던 사람들도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도 그럴 것이, 앞서 너무나 많은 사람이 처음 들어왔을 때는 저처럼 호기롭게 탈출을 논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육신단이 되거나, 이 동굴감옥 한구석에서 썩고 있지 않은가. 그런 실망이 거듭되다 보니 더 이상 희망을 바라지 않게 된 것이다.

“심 도우, 정말 우리를 이곳에서 벗어나게 해줄 방법이 있소?”

기련미만이 잠시 후에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성공 여부는 해봐야 알 수 있으나, 어쨌든 생각해둔 방법은 있소.”

심협이 잠깐 주저하더니 말했다.

“우리가 뭘 도와줬으면 하시오?”

기련미는 주저 없이 곧바로 물었다.

“내가 법력을 움직여 법술을 쓸 수 있도록 이 황금승을 잠시 붙들어주시오.”

심협이 말했다.

“이 황금승이 법력을 집어삼키는 속도가 무척 빠르오. 지금 나는 공력이 본래의 4할도 남아 있지 않아 이 법보를 붙잡아두지 못할 수도 있지만, 일단 시도는 해봅시다.”

기련미의 답에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른 사람들을 훑어보았지만, 더는 대꾸하는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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