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5화. 수렴동(水簾洞)을 뒤집어놓다
“심호동주, 보아하니 그대가 오산을 한 것 같소.”
회백색 노마호가 웃으며 말했다.
“원 장로, 이놈이 내 단심무애를 가볍게 벗어난 걸 보니 진선 수사인 듯하오. 비웃을 시간이 있다면 힘을 합쳐 저놈을 붙잡는 게 어떻겠소?”
심호(心狐)라는 이름의 여우요괴가 매혹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 늙은이는 그저 구경이나 하러 온 것이라오. 앞서 그대에게 주의를 준 것으로 의무를 다했으니, 뒷일은 관여하지 않겠소이다.”
회백색 노마호는 그녀의 수작에 넘어가지 않고 웃으며 발을 뺐다.
“다들 멍하니 서서 무얼 하는 게냐! 어서 붙잡지 않고!”
심호는 노여움에 눈을 번득이며 곧 교태어린 목소리로 꾸짖었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표 통령 등이 즉시 심협을 공격해왔다.
심협은 재빨리 체내 황정경 공법을 운공하면서 몸을 홱 튼 다음, 허공에 발길질을 했다. 그러자 강력하기 이를 데 없는 기운 파동이 거세게 치솟으며 순식간에 표 통령을 비롯한 작은 요괴들을 날려 보냈다. 그 대부분은 죽거나 큰 부상을 입고야 말았다.
주위를 지키던 요물들은 그제야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아차리고 즉시 몰려들어 심협을 둘러쌌다.
한편, 이 광경을 지켜보던 노마호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하더니 뭔가 의심스러워하는 기색을 떠올렸다.
그사이, 심협은 수많은 요물들이 자신을 에워싸자 더는 망설이지 않고 즉시 산기슭의 폭포를 향해 날아갔다. 수렴동에 뛰어 들어갈 생각이었다.
“이놈, 감히 수렴동에 뛰어들려는 것이냐!”
심호가 화들짝 놀라 외치며 두 손으로 아래를 내리 눌렀다. 그러자 몸 아래에서 갑자기 분홍빛 안개가 용솟음쳤고, 뒤에서 굵직한 여우 꼬리 아홉 개가 연이어 뻗어 나와 각각이 영사(靈蛇)처럼 심협을 향해 돌진했다.
여우 꼬리가 가까워지자 주위에도 분홍빛 안개가 피어올라 심협을 향해 꽃가루처럼 흩날렸다.
두 발이 꼬리에 휘감기려는 순간, 심협은 고개를 홱 돌리더니 크게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몸 뒤편에서 용과 코끼리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기다란 금빛 용 한 마리가 팔뚝을 휘감았고, 금빛 코끼리가 맹렬하게 뛰쳐나왔다. 둘은 거대한 금빛 권영(拳影)으로 뭉쳐 아래쪽을 내리쳤다.
일개 반선(半仙)급 여우 요괴에게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쾅!
커다란 굉음에 이어 온 허공이 거세게 진동했다!
아홉 개의 여우 꼬리는 이 주먹에 휘감긴 강력한 힘이 휩쓸고 지나가자 순식간에 움츠러들었다. 울부짖는 돌풍도 그 뒤를 따라 휘몰아치면서 하늘 가득했던 분홍빛 안개도 모두 흩어져 버렸다.
심호는 더없이 강력한 힘이 충돌해오는 것을 느꼈고, 커다란 산에 몸을 부딪친 것처럼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쿵!
심호가 자신의 동부 앞 문루에 부딪치면서 문루가 무너졌다.
심협은 이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시 몸을 날려 수렴동으로 돌진했다.
한데 그의 몸이 동굴의 물 장막을 뚫고 지나려는 순간, 눈동자가 수축했다. 그는 아주 강력한 기운이 자신과 물의 장막을 사이에 두고 바깥으로 뿜어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심협은 깜짝 놀라 재빨리 손목을 돌려 육진편을 꺼낸 뒤 앞을 가로막았다.
거의 동시에 눈부신 푸른 빛이 새어나오면서 폭포의 물 장막이 쩍 갈라졌고, 눈부신 푸른 빛에 휘감긴 낭아봉(*狼牙棒: 나무막대 사방에 늑대 이빨처럼 쇠못을 박은 무기)이 튀어나왔다.
펑!
낭아봉과 육진편이 충돌하면서 둔중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거대한 힘이 육진편을 통해 곧장 심협에게로 몰려왔다. 이에 그는 끙 하고 신음하면서 백여 장을 거꾸로 날아간 뒤에야 가까스로 몸을 가눌 수 있었다.
심협은 놀란 기색으로 정신을 집중하고 수렴동 쪽을 바라보았다. 소의 머리에 인간의 몸을 한, 푸른 갑옷을 두르고 손에 낭아봉을 쥔 우람한 청우(靑牛)요괴가 물 장막을 뚫고 나와 허공에 떠 있었다.
청우 요괴의 얼굴에는 얼굴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있었고, 두 눈에는 은은하게 금빛을 머금고 있었다. 몸 뒤로는 붉은 안감을 덧댄 널따란 검은 두봉(*斗篷: 소매가 없는 외투, 망토)을 걸치고 있어 바람에 펄럭였다. 얼핏 보아도 그 기세가 사나웠다.
“웬 놈이 감히 나의 수렴동부에 뛰어 들었느냐?”
청우요괴가 노여움에 고함을 지르자, 화과산 전체가 부르르 진동했다.
요물들은 얼른 땅에 엎드려 절하며 한목소리로 외쳤다.
“대왕!”
오직 노마후만은 꿇어 엎드리지 않고 지팡이를 짚은 채 머리를 깊이 숙였다.
심협은 물음에 답하지 않고 청우요괴를 위아래로 슥 훑은 뒤, 놀랍게도 그가 진선 중기의 요괴임을 깨달았다.
‘이거 좀 귀찮아지겠는데?’
심협이 속으로 중얼거리는데 심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왕께 아뢰옵니다. 저자는 범인인 척 가장하고 산을 순찰하던 작은 요괴들에게 잡혀왔사옵니다. 또한 앞서 수렴동에 뛰어들려 한 것으로 미루어, 분명 갇혀 있는 이들을 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옵니다.”
청우요괴는 그 말을 듣고 시선을 돌려 심협을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조롱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지난 몇 년간 누군가 그 폐물들을 구하러 온 것을 본 일이 없는데, 너는 뭐하는 놈이기에 이리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것이냐?”
“배 밖으로 나올 간은 없지만, 이따가 우담(牛膽)은 좀 맛볼 수 있겠구나. 헌데 생으로 먹는 게 좋을지, 아니면 술을 담가 먹는 게 좋을지 모르겠군.”
심협은 이죽거리며 답했다.
“죽고 싶은 게로구나!”
청우요괴는 화가 난 듯 싸늘하게 내뱉었는데, 눈에는 어렴풋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감히 자신에게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인간족을 본 것이 벌써 몇 년전인지조차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는 불쑥 앞으로 돌진했다. 손에 든 낭아봉에 눈부신 푸른 빛이 번쩍였고, 줄줄이 울부짖는 돌풍이 튀어나와 심협에게 휘몰아쳤다.
이를 본 심협이 육진편을 힘껏 휘두르자, 육진편의 몸체에서도 검은 회오리가 휘몰아쳤다.
두 회오리는 서로 맞부딪치자 펑 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부서졌다.
청우요괴의 그림자가 흩어진 돌풍 사이로 불쑥 튀어나와 심협의 머리를 향해 낭아봉을 내리꽂았다.
심협은 재빨리 육진편을 휘둘러 이를 막아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의 눈앞이 갑자기 아득해지면서 분홍 빛이 번득이는 듯하더니, 눈앞까지 달려들던 청우요괴가 돌연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그의 앞에 난데없이 한 여인이 나타나 선녀처럼 눈앞에 아른거렸다.
‘젠장!’
심협이 신식의 힘을 불러일으키려 하던 찰나, 머리 위로 휙 하고 커다란 바람 소리가 울렸다. 이어서 눈앞에서 환상처럼 날아다니던 선녀가 푸른 빛에 찢어지고, 낭아봉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육진편을 세게 내리쳤다.
펑!
둔탁한 소리가 울렸고, 심협의 두 팔은 바들바들 떨렸다. 더욱이 충돌의 힘을 이기지 못한 심협은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그의 몸 아래로 분홍빛 안개가 갑자기 퍼져나가면서 탄탄했던 땅바닥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커다랗고 새하얀 여우 얼굴이 어렴풋이 나타나 시뻘건 입을 쩍 벌리고 고개를 쳐든 채 그를 물어뜯으려 했다.
십협은 갑자기 현실과 환상을 구분할 수 없게 되자, 육진편을 휘둘러 아래쪽 바닥을 내리쳤다.
그러나 새하얀 여우 얼굴은 사라지지도, 피하지도 않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입을 벌린 그대로 심협의 육진편을 꽉 물었다.
철편을 미처 다시 뽑기도 전에 심협은 전신이 확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미 어떤 물건에 묶인 상태였다.
그때, 사방의 분홍빛 안개가 빠르게 흩어지기 시작하면서, 심협의 아래에 있던 새하얀 여우 얼굴도 따라서 사라졌다.
심협은 그제야 눈앞의 진상을 또렷이 보게 되었다.
청우요괴가 그의 육진편을 한 손으로 꽉 붙잡은 채 다른 손으로는 굵기가 엄지만 한 기다란 금빛 밧줄을 쥐고 있었다. 밧줄의 다른 쪽 끄트머리는 쭉 뻗어나가 심협의 몸을 칭칭 감고 있었다.
한편, 청우요괴의 발치에는 분홍 치마를 입은 여우 요괴가 납작 엎드려 있었다. 그녀는 피가 배어 나오는 입을 벌리고 분홍빛 요단을 천천히 뱃속으로 빨아들이는 중이었다.
“이 물건은 이정의 육진편 같은데……. 어찌 네놈 손에 들어갔지?”
청우 요괴는 자신이 움켜쥔 육진편을 빤히 바라보면서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심협이 청우요괴의 물음에 신경 쓸 이유가 있겠는가? 그는 곧바로 전력으로 황정경 공법을 운공했다.
순간 그의 온몸에서 금빛이 폭발적으로 불어나면서 여섯 마리의 용과 코끼리 허상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더할 나위 없이 장엄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용과 코끼리의 허상이 미처 응집되기도 전에, 심협의 몸을 휘감고 있던 금빛 밧줄에서 갑자기 금홍색 빛이 피어올랐다.
겹겹이 조전(*鳥篆: 춘추전국시대에 유행한 새 모양으로 장식된 글씨체) 부적 문양이 빛에서 떠올랐고, 그 안에서 강력한 금제의 힘이 생겨났다.
심협은 자신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법력이 순식간에 금빛 밧줄에 흡수되면서 강둑이 터진 듯 쉬지 않고 흘러나가는 것을 느꼈다. 막 그의 몸 바깥에 응집되었던 용과 코끼리의 허상도 빠르게 흩어져 사라졌다.
‘이게 어찌된 일이지?’
심협은 깜짝 놀랐다.
그는 다시 재빨리 공법을 운공하여 단숨에 속박을 벗어나보려 했지만, 법력을 움직이기가 무섭게 또다시 금빛 밧줄의 금제 부적 문양에 말끔히 빨려 들어갔다.
“헛수고다. 네가 태을 진선이 아니고서야 힘으로 이 황금승(幌金繩)을 벗어날 수는 없어. 못 믿겠으면 시험해보던지. 나도 네가 법력을 얼마나 지녔는지 좀 보고 싶구나.”
청우요괴는 꽉 쥐고 있던 육진편을 놓아주며 비릿하게 웃었다.
이 말에 심협은 움찔하여 몸에서 빛나던 황금빛을 거둬들이고 더는 황정경으로 맞서려 하지 않았다. 대신 방법을 바꾸어 물처럼 파란 빛을 발하며 피수결을 맺었다.
몸 가까이에서 빛나던 푸른 빛이 바깥으로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면서 심협이 벗어날 수 있도록 조금씩 공간을 벌렸다.
하지만 빛이 뻗어나가자마자 황금승의 신통력도 다시 작동하였다.
“보아하니 그리 세상물정 모르는 고집불통은 아닌 모양인데, 이렇게 된 이상 귀찮게 굴지 말고 너의 정체와 목적, 그리고 이 육진편이 왜 네놈 손에 있는지를 밝히거라.”
청우요괴는 심협이 법력을 완전히 거두자 포기하려는 것으로 알고 비웃었다.
“육진편을 아느냐?”
심협은 답하지 않고 오히려 반문했다.
“천상에 있을 때 이정이 몇 번 쓰는 걸 봤지. 한데 그는 벌써 혼백이 산산이 부서지지 않았더냐? 이 육진편이 어찌 네 수중에 들어가게 된 것이지?”
청우요괴가 의아한 듯 되묻자 심협은 깜짝 놀랐다.
“네가 천정의 옛 부하였다고?”
“천정의 옛 부하라……. 허허! 그래, 말하자면 그런 셈이지. 어쨌거나 천정을 공격했을 때, 미련한 놈들은 내가 천정의 편에 서야 한다고 여겼으니까.”
청우요괴가 코웃음을 치자 그 의미를 눈치챈 심협이 날카롭게 외쳤다.
“하! 알고 보니 천정의 반역자였구나!”
“지금 내 화를 돋워봐야 더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될 뿐일 터인데?”
청우요괴는 분노한 듯 싸늘하게 내뱉었다.
하지만 심협은 오히려 피식 웃더니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
“일어나라!”
그 순간, 뒤쪽 등 가까운 곳에서 금빛이 번쩍이더니 온몸이 곧장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청우요괴는 갑자기 앞에서 굵직한 금빛 기둥이 치솟더니 빠른 속도로 곧고 길게 커지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이건…… 여의금고봉(如意金箍棒)?”
노마후의 눈에도 깜짝 놀란 기색이 스쳤다.
그 무렵, 심협의 몸은 진해빈철곤이 빠르게 커짐에 따라 계속 높이 올라가 곧 구름 끝에 닿을 만큼 치솟았고, 등에 붙은 빈철곤도 산봉우리처럼 굵어졌다.
하지만 그와 진해빈철곤을 휘감은 금빛 밧줄도 백배로 길어지면서 여전히 그의 몸을 단단히 동여맸고, 터져나가기는커녕 오히려 그 위의 조전 부적 문양이 갈수록 바짝 옭아맸다.
이에 심협은 다소 절망적인 한숨을 내쉬며 짧게 ‘거둬라’라고 내뱉었고, 그러자마자 진해빈철곤이 빠르게 작아져 순식간에 10장 이내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진해빈철곤이 줄어드는 속도에 맞춰 그의 몸을 감은 황금승도 똑같이 줄어들어 시종일관 그를 꽁꽁 묶어두었고, 심협은 깜짝 놀랐다. 그렇게 진해빈철곤을 완전히 거둬들이자 벗어날 틈을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