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374화 (374/1,214)
  • 374화. 심호동(心狐洞)의 주인

    “저기 사람이 옵니다!”

    외뿔요괴의 다급한 외침에 다른 요괴들도 화들짝 놀라 서둘러 대형을 갖추었다. 그러나 다가오는 사람이 정말 닭 한 마리 붙잡을 힘도 없어 보이는 허약한 서생처럼 보이자 경계를 늦추기 시작했다.

    그 서생은 당연히 변장한 심협이었다. 그는 본래 곧장 산으로 올라가려 했으나, 이 산에는 곳곳에 요족이 있음이 떠올랐다. 만약 숨어서 이동하다가 자칫 발각되기라도 하면 골치가 아파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그는 계책을 세우고는 아예 서생으로 변장한 뒤 버젓이 걸어 나왔다.

    외뿔요괴가 소리를 질렀을 때, 심협도 막 그들을 발견한 것처럼 기겁하는 시늉을 했다.

    “아악! 요, 요…… 요괴다!”

    그러고는 몸을 홱 돌려 벌벌 떨며 내달리다가, ‘그만 실수로’ 돌멩이에 걸려 넘어지고는 요란하게 바닥에 엎어졌다.

    이 꼴을 본 요괴들은 시시덕거리며 그를 에워쌌다.

    “대, 대왕님! 사, 사……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세요!”

    심협은 짐짓 겁먹은 목소리로 애원했지만, 요물들은 개의치 않았다.

    “어허, 이런 시절에 또 이렇게 멀끔한 인간을 만나게 될 줄이야. 대왕님께 바치면 우리의 작은 공을 기억해주실 지도 모르지요.”

    작은 요괴 하나가 심협의 엉덩이를 발고 선 채 낄낄댔다.

    “이깟 것을 바칠 가치나 있겠냐? 우리끼리 불 피워서 구워먹는 게 낫지. 살결이 곱고 부드러운 게, 맛은 분명 괜찮을 거야.”

    또 다른 작은 요괴가 입맛을 쩝쩝 다시며 차갑게 웃었다.

    “좋아, 좋아. 우리도 때마침 아제(*牙際: 매월 초, 중순에 제사를 지내고 고기를 먹는 풍습)를 지냈으니 이렇게 신선한 고기를 놓치면 다시 찾기 힘들지.”

    외뿔요괴도 입안 가득 군침이 돌아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그때, 우두머리인 흑곰 요괴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버럭 외쳤다.

    “언제부터 이렇게 개판이 됐지? 우리 순산소대의 본분이 무엇이냐?”

    “산을 순찰하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면 즉시 보고하는 것입니다!”

    외뿔요괴가 곧바로 몸을 꼿꼿하게 세우며 큰 소리로 답했다.

    “이 인간족이 나타난 것은 이상이라고 할 수 있나 없나?”

    “이…… 이상입니다!”

    작은 요괴들이 그 말뜻을 재깍 알아차리고 얼른 대답했다.

    “그렇다면 상부에 보고를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해야 합니다!”

    “당연히 해야지요!”

    작은 요괴들이 거듭 답했다.

    “음, 다행히 잊지 않았구나. 이 인간족은 우선 내 화과산으로 압송할 테니, 너희는 잘 지켜보고 있어라. 위에서 상을 내리시면 내 너희와 나누도록 하마.”

    흑곰 요괴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럽게 말하고는 작은 요괴들에게 밧줄로 심협을 묶도록 지시했다. 이어서 꽁꽁 묶인 심협을 끌고 화과산으로 향했다.

    “요놈을 구실로 삼동주를 다시 만날 수 있겠구나. 흐흐흐.”

    모든 작은 요괴들의 시야를 벗어난 흑곰 요괴는 그제야 희색을 감추지 못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심협은 그 말을 듣고는 어이가 없었지만, 그 와중에도 더욱 힘없는 범인(凡人)처럼 보이려고 내내 어기적거리다가, 심지어는 체력이 다한 것처럼 갑자기 졸도해버렸다.

    흑곰 요괴는 그를 두어 번 툭툭 차보더니, 그가 계속 깨어나지 않자 그대로 들쳐 메고는 훌훌 내달렸다.

    흑곰 요괴와 심협은 자그마한 어촌에서부터 일고여덟 개의 초소를 연이어 지났다. 길을 따라 산을 순찰하는 여러 요물이 무리지어 출몰했는데, 그중에는 출규기 요물들도 제법 있었다. 심협은 신식으로 몰래 훑어보고는 섣불리 오르지 않고 계획을 세운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만약 몰래 오르다가 저들과 마주쳤더라면, 온 산에 가득한 요괴들의 손에 죽고도 남았을 것이다.

    흑곰 요괴는 이내 화과산 자락에 도착한 뒤,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쉬었다. 심협은 그 틈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화과산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지만, 높은 산과 흐르는 물이 빼어나게 아름다워 풍경만큼은 천혜의 조건을 갖췄다 할 만했다.

    산 전체는 빽빽하게 우거진 숲에 가려져 있었고, 산 중턱에만 탁 트인 곳이 보였다. 바위가 바깥으로 살짝 드러난 그곳에는 중간에 새하얀 폭포가 가로놓여 있어서 멀리서도 콸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기가 화과산 수렴동(水簾洞)은 아닐까?’

    심협이 그런 생각을 하던 무렵, 그와 흑곰 요괴 앞에는 구불구불한 오솔길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뚫은 돌길이 나타났다. 층층의 돌계단이 산허리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는데, 그 길을 따라 많은 요족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두 사람이 산길 끄트머리의 평대에 이르자, 병졸 무리가 그들을 막아섰다.

    그 우두머리는 출규 후기의 멧돼지 요괴였는데, 흑곰 요괴의 신분을 검사한 후 심협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고는 직접 신식을 내뻗어 심협 등을 한 차례 살폈다. 그렇게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뒤에야 그들을 평대 왼편에 가로로 난 산길로 해서 수렴동 쪽으로 보냈다.

    수렴동에 도착하기도 전에 폭포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심협이 실눈을 뜨고 살펴보니, 백여 장 높이의 새하얀 폭포가 산기슭 위에서부터 쏟아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산벽을 따라 물결이 일어났고, 점점이 물보라가 튀는 것이 수만 개의 진주를 흩뿌리는 것만 같았다.

    폭포 옆 산 중턱에는 동굴이 몇 개나 뚫려 있었는데, 그 앞에는 인간이 건설한 것처럼 붉은 벽돌에 푸른 기와를 쌓아 만든 문이 세워져 있었다. 그 문 앞에는 용맹스럽고 기개 넘치는 무장 요괴들이 보초를 서는 중이었다.

    흑곰 요괴는 긴장한 것인지 발걸음이 느려졌다.

    그 순간, 커다란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웬 놈이냐?”

    몸은 인간에 머리는 표범인, 갑옷을 입은 요괴 하나가 허리춤에 호두도(虎頭刀)를 비껴 찬 채 성큼성큼 다가왔다. 굳은 눈빛과 사나운 표정이 포악한 요괴로, 순찰병 무리가 그 뒤를 따랐다.

    “표(彪) 통령님을 뵈옵니다. 백면서생을 하나 잡았사온데 삼동주께 보내드리려고…….”

    흑곰 요괴는 심협을 얼른 땅에 내동댕이친 다음, 표 통령이라는 자를 향해 포권하며 예를 갖추고 유달리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표 통령은 가까이 다가와 발끝으로 심협을 쿡 찔러 엎어져 있던 그의 몸을 뒤집고는, 잠깐 훑어본 뒤 조금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구나. 삼동주께서 좋아하실 만한 놈이다. 됐다, 너는 돌아가거라. 이놈은 내가 삼동주께 데려가겠다. 나중에 네 공을 기억해주마.”

    표 통령은 그렇게 말하며 흑곰 요괴에게 턱짓을 했다.

    흑곰 요괴는 속으로 화가 치솟았으나, 내색하지 않은 채 그저 멋쩍게 웃었다.

    “그럼 표 통령님께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소인 대신 좋은 말도 몇 마디 보태주십시오.”

    “알겠다. 안심하거라.”

    표 통령은 그가 이렇게 꾀에 넘어가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흑곰 요괴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돌아서서 떠났다.

    “가서 이놈을 받쳐 일으켜라.”

    표 통령은 입을 헤벌쭉 벌리고 웃으며 뒤에 선 작은 요괴들에게 분부했다.

    두 요괴가 여전히 기절한 척하고 있는 심협을 부축해 일으켜 표 통령을 따라 폭포 옆의 어느 동부(*洞府: 산 속 신령한 존재가 사는 곳)로 향했다.

    그들이 동부 입구에 이르러 고하기도 전에 문루 안쪽에서 가냘픈 그림자가 하늘하늘한 자태로 걸어 나왔다.

    심협이 몰래 엿보니, 분홍색 얇고 하늘하늘한 천으로 된 치마를 입은 절색의 여인이었다. 봉긋한 가슴에 허리가 가늘었고, 용모는 오밀조밀 빈틈이 없었다. 한 쌍의 동그랗고 예쁜 눈에는 온유한 마음씨가 담겨 있는 듯했고, 자연적인 맵시에서 느껴지는 매력에 심협은 잠시 쳐다본 것만으로도 마음이 흔들렸다.

    “멀리서부터 인간 냄새가 났는데, 동굴에 갇혀 있는 놈들보다 훨씬 낫구나.”

    여우 요괴 여인은 가까이 다가와서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깊게 냄새를 빨아들이며 말했다.

    그녀가 몸을 드리우자 순간 파도가 용솟음치는 웅장한 느낌에, 표 통령은 두 눈을 부릅뜬 채로 멍청하게 말했다.

    “이, 이놈은…… 동주님께만 맛보시라고 드리는 겁니다.”

    “호홋, 역시 너희는 생각이 깊다니까. 이리 넘기거라.”

    여우 요괴는 가볍게 웃으며 섬섬옥수를 뻗어 난화지(蘭花指)를 만들고는 휙 끌어당겼다. 그러자 분홍빛 안개가 그녀의 손끝에서 흘러나와 뭉게구름이 모인 것처럼 심협의 몸을 떠받쳤다.

    그 분홍빛 안개 냄새를 맡은 순간, 심협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즉시 숨을 참았다.

    이어서 여우 요괴가 몸을 돌려 자신의 동부 안으로 들어가려는 그때, 뒤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삼동주, 혹시 남자 생각에 미쳐서 이런 놈과도 감히 몸을 섞는 거요?”

    삼동주라 불린 여우 요괴가 아미를 살짝 찌푸리며 돌아보니, 손에 규룡(*虯龍: 전설 속의 새끼용. 이무기에 갓 뿔이 난 상태)같은 등나무 지팡이를 짚고 푸른 장포를 입은 회백색 노마후(*老馬猴: 천진 지역 전설에 등장하는 늙은 개코원숭이)가 보였다. 뺨은 검붉었고, 털은 어두운 잿빛인 반면, 기다란 두 눈썹은 아주 새하얬다. 한 쌍의 검은 눈동자는 오래된 우물처럼 깊고 그윽했으며, 키가 크지는 않았으나 살짝 구부정한 그 외모와 기백에서는 선인의 모습까지 느껴졌다.

    “원(猿) 장로, 그게 무슨 뜻이오?”

    여우 요괴는 눈을 살짝 게슴츠레하게 뜨며 물었다.

    “심호동주(心狐洞主), 그대는 천 년을 산 여우면서 어찌 이놈이 기운을 가리고 범인(凡人) 행세를 하는 중이라는 걸 몰라보는 거요?”

    노마호가 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삼동주는 심협을 힐끗 쳐다봤지만, 놀란 기색은 아니었다.

    그러자 노마호는 뭔가 깨달았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허, 이거 내가 괜한 말참견을 했소.”

    두 사람의 대화가 주위에 있던 이들의 시선을 끌자 여우 요괴의 눈에는 한 줄기 노여움이 번득였다.

    그녀 역시 심협 몸에 이상을 발견했고, 수행 중인 자라는 것도 알아챘다. 그렇지 않았다면 분홍빛 안개로 그를 혼란스럽게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녀는 비술로 심협의 육신과 혼백이 잡티 없이 맑고, 맥이 막힘없이 원활한 것을 알아채고는 자기 것으로 삼으려고 마음먹었다. 만약 수렴동주(水簾洞主)가 이 사람의 존재를 알게 되면 분명 가로채서 육신단(肉身丹)으로 만들 테니, 자신은 이자의 몸에서 순수한 양의 기운을 흡수할 수 없으리라.

    더욱이 잘생긴 서생이니, 어찌 그녀의 마음이 흐뭇하지 않겠는가?

    심협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다소 우울해졌다. 본래는 기회를 틈타 화과산에 잠입한 뒤, 시험 삼아 수렴동에 들어가서 제천대성과 관련된 흔적을 찾아보고, 가능하다면 이곳에 갇힌 사람들을 구출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뭔가를 제대로 해보기도 전에 들켜버리고 말았으니 씁쓸할 수밖에 없었다.

    “계책이 통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

    차분한 목소리로 그렇게 내뱉은 심협은 두 눈을 번쩍 뜨고 크게 공중제비를 돌아 분홍빛 안개에서 벗어난 뒤, 땅에 사뿐히 내려섰다.

    표 통령 등은 이 상황에 깜짝 놀라 고함을 지르며 분분히 에워싸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나의 단심무애(丹心霧靄)는 평범한 수사들이 조금만 닿아도 그 속에 빠져 허우적대는데, 어떻게 아무 일도 없는 거지?”

    여우 요괴는 심협이 멀쩡해 보이자 뜻밖이라는 듯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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