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372화 (372/1,214)
  • 372화. 왕위 계승

    “오형, 솔직히 말해 그대의 성미도 좀 바꿔야 할 듯하오. 앞으로 동해를 다스리고 나아가 사해의 새 우두머리가 될 테니 우유부단해서는 아니 되오.”

    심협이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 것이오.”

    오홍은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마친 그는 심협을 안내하면서도 용왕과 어떤 대화를 나누었지는지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오홍은 심협을 용궁 수부(水府)에 머물도록 거처를 마련해주고 자리를 떴다.

    심협은 잠시 침상에 앉아 운기조식한 뒤 다시 두 눈을 떴다. 그가 손목을 한 번 돌리자 손바닥에는 용궁의 보물창고에서 얻은 푸른 돌판이 나타났다.

    그의 손가락이 돌판 위에 덮인 푸른 이끼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손가락이 닿은 곳마다 진한 물 속성 영기가 느껴졌다.

    “어째 이 푸른 이끼들이 계속 살아 있더라니, 돌판 자체의 영기를 자양분으로 삼은 것이로군.”

    심협은 혼잣말을 중얼거리고는 가만히 법력을 움직여 돌판에 주입했다. 그러자 돌판 위에 푸른 이끼들이 순간 동물의 털처럼 한 올 한 올 곤두섰다. 그 아래의 돌판 표면에도 드문드문 파란 빛이 번득였다.

    잠시 후, 돌판 위의 빛은 조금 더 밝아졌다. 표면의 푸른 이끼도 약간 더 자라난 것 같았다. 그러나 그뿐,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혹시 법기인가? 제련을 해야 하나?”

    심협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곧바로 구구통보결을 운공해 돌판을 제련하려 했지만, 막상 시도해보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심협은 미간을 팩 찌푸리며 잠시 생각해보다가 다시 법력을 움직였다. 다만 이번에는 동시에 무명공법을 운공하여 물 속성 법력을 주입했다.

    그의 법력이 흘러들기가 무섭게 푸른 이끼가 덮인 돌판에 갑자기 푸른 빛이 환하게 나더니, 곧 표면의 푸른 이끼에서 불타오르는 것처럼 파란 불꽃들이 피어나 유유히 하늘로 올라갔고, 끝내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푸른 이끼가 거의 다 타버리면서 푸른 돌판 표면에 잔물결 같은 빛이 일렁이며 눈부시게 비쳤다.

    그 푸른 빛 속에서 금빛 글자들이 하나하나 떠오르기 시작하더니 빽빽하게 온 방을 비추었다.

    심협은 크게 기뻐하며 정신을 집중하여 재빨리 이 금빛 글자들을 자세히 읽 시작했다.

    잠깐 보았을 뿐인데도 그의 표정은 급변했는데, 거의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이건……?”

    그 푸른 돌판이 비춰낸 글자들의 내용은 놀랍게도 <무명천서>에 기록된 공법과 거의 똑같았다! 처음 돌판을 만졌을 때 왠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을 어렴풋이 느꼈는데, 그게 이런 이유였단 말인가!

    심협은 애써 진정하며 계속 금빛 글자들의 내용을 자세히 정독했다. 그리고 잠시 후, 이 안에 기록된 것이 바로 <무명천서>임을 확신했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은 이 안에 기록된 것이 8층 공법이 아니라 13층 공법이라는 것이었다.

    그중 1층부터 3층까지는 유실되었고, 7층 공법도 내용의 절반 이상이 온전치 않았으며, 나머지 공법들도 그다지 온전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10층부터 15층 공법까지는 온전해서 다행이야. 그 안에도 어떻게 출규기까지 돌파할 수 있는지 기록되어 있으니, 돌아가면 큰 도움이 되겠군. 만약 수행이 순조롭다면 무명공법으로 대승기까지 수련할 수도 있겠어.”

    심협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는 계속해서 살펴보다가 수혼술(水魂術)이라는 법술을 발견했다. 이 법술은 출규기 이후에야 수련이 가능했는데, 원신이 출규(*元神出竅: 수련을 거쳐 강해진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것)하도록 이끌어 물로 응결된 분신과 서로 결합하는 비술이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수행자가 원신을 아직 분열시킬 수 없어 기껏해야 분신을 응결해낼 수 있는 정도다. 한데 이 분신은 육체나 정신이 본체만큼 강인하지는 않지만 나름의 독립된 주체로, 본체의 술법 대부분을 시전할 수 있으며, 힘도 본체의 8할에 가까웠다. 또한 수행이 깊어져 원신이 더욱 튼튼해지면 원신을 여러 개로 나누어 물 분신에 녹아들게 한 뒤 각자 움직이게 할 수도 있다.

    심협은 읽어볼수록 놀랍고 기쁜 마음에 얼른 잡다한 마음들을 거두고 빛 가운데 비쳐 나오는 무명공법 구결들을 전부 외운 뒤, 곧바로 가부좌를 틀고 수련을 시작했다.

    꿈속에서의 수행 경험이 현실에서 상당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반드시 서둘러 이 공법을 익혀야만 했다. 안타깝게도 그동안 고생스레 수련했던 <황정경>은 현실에서는 좀처럼 터득할 수 없었고, 진전이 너무 느렸다.

    불과 1각 만에 심협은 <무명공법> 10층 수련을 완전히 마쳤지만, 일찍이 출규기를 지난 터라 경계가 가까워 오거나 출규기를 돌파할 때의 세세한 느낌들은 다시 느낄 수가 없었다. 그저 수련할 때의 깨달음을 하나하나 자세히 되새기며 현실에서의 수련을 위한 기초를 잘 닦을 뿐이었다.

    10층 수련을 마친 뒤, 심협은 쉬지 않고 그 뒤의 공법들을 수련해나갔다.

    * * *

    시간은 흘러 눈 깜짝할 새 사흘이 지났다.

    동해 용궁 뒤편 용연과 가까운 곳에는 높이가 몇 척에 달하고 둘레가 백여 장에 이르는 높고 거대한 석대(石臺)가 있었다. 석대 주위에는 용 기둥 여든한 개가 우뚝 서 있고, 그 위에는 각각 살아 있는 듯 생생한 푸른 반룡(*盤龍: 측면으로 조각하거나 수놓은 용)이 한 마리씩 조각되어 있었다. 용들은 모두 보배로운 구슬을 입에 문 채 고개를 쳐들고 석대 한가운데를 향하고 있었다.

    지금, 석대는 용궁의 수족들로 가득 둘러싸여 있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은 엄숙한 표정으로 그 영광스럽고 거룩한 순간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심협은 청질과 군중들 앞에 나란히 서 있었다. 주위를 훑어보니 주변에는 기운이 범상치 않은 수족 수사들이 많았는데, 그중에는 전에 본 적이 있는 푸른 피부의 교인(鮫人)도, 난생처음 보는 심해 거인도 있었다. 이 심해 거인은 온몸에 비늘 갑옷이 돋아 있었다.

    청질에게 물어보니 조용한 목소리로 설명해주었다.

    “이들은 모두 동해 곳곳에 주둔했던 용궁의 장병들이고, 본디 동해의 산수인 자들도 있소. 다들 너도나도 용궁으로 되돌아왔는데, 용궁을 지키러 돌아온 자들도 있지만 그저 이 역사적 순간을 두 눈으로 직접 보려는 이들도 있지요.”

    “그렇구려.”

    그때였다. 피부가 청자색인 인어 역사(力士) 여덟이 석대 앞에 서더니 손에 항아리만 한 하얀 소라를 받쳐 들고 입가에 가져다 댄 뒤, 있는 힘껏 불어댔다.

    뿌우우!

    겹겹이 특이한 소리 파동이 전달되면서 사방의 바다를 향해 넘실댔다. 파동은 용궁 바깥의 수정 장막을 타고 확산되어 수만 장까지 퍼져 나갔다.

    해역 주위를 유영하던 수많은 심해 생명체들은 이 소리를 듣자 다들 우뚝 멈추었다. 그러더니 곧이어 그들은 마치 어떤 부름을 받은 것처럼 너도나도 용궁 방향으로 헤엄쳐 왔다.

    용궁 곳곳을 지키던 장병들과 동해의 수족들도 하나둘 하던 일을 멈추고 하나같이 근엄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승룡대 쪽을 돌아보았다.

    승룡대 방향에서는 높은 하늘에 금빛이 번쩍이더니 크고 작은 두 마리 금빛 용이 빙글빙글 선회하며 내려와 석대 한가운데에 내려섰다. 그 빛 속에서 두 개의 형체가 나타났는데, 바로 동해 용왕 오광과 구태자 오홍이었다.

    “용왕을 뵈옵니다.”

    사람들은 곧장 예를 갖추었다.

    “여러분의 도움을 입어 오랜 세월 동해를 지켜냈소. 그러나 마침내 끝마칠 때가 이르렀으니, 오늘 다시 승룡대를 열고 조상들의 혼백을 오홍에게 물려주려 하오. 여러분은 앞으로 온 마음을 다해 그를 보필하여 이 종말의 때에 우리 동해 수족을 보호하고 천하의 백성들이 복을 누리게 해주길 바라오.”

    오광이 손을 흔들며 선포하자 사람들은 슬픈 기색을 드러내며 한동안 침묵에 잠겨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때, 석대 반대편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홀연히 울렸다.

    “용왕의 명을 삼가 받드옵니다.”

    사람들이 돌아보니 오중이 포권한 채 석대 한가운데의 두 사람을 향해 예를 갖추고 있었다.

    “용왕의 명을 삼가 받드옵니다.”

    곧이어 또 한 사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용궁에서의 경력이 깊은 거북이 승상, 원타였다.

    이를 시작으로 용궁 사람들은 하나둘 입을 열었고, ‘용왕의 명을 삼가 받드옵니다’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와 온 사방에 울려 퍼졌다.

    오홍은 앞으로 나아가 두어 번 손짓하며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원타가 금실로 짠 백서 한 권을 손에 받쳐 들고 몇 걸음 나와 천천히 펼친 뒤 그 위에 쓰인 제천문서(*祭天文書: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읽는 글)를 읊기 시작했다.

    “용의 일족은 하늘의 명을 받아 조상을 계승하고 세상에 아낌없이 베풀며…….”

    제천문서를 다 읊자, 그는 눈으로 석대 아래를 훑으며 선포했다.

    “계승 의식을 시작하오!”

    말을 마치자 사방에서 소라 나팔 소리가 다시 울렸다.

    원타가 느릿느릿 승룡대를 걸어 내려가 석대 위에는 오광 부자만이 남았다.

    “계승 과정이 조금 고통스러우나 참고 견뎌야 한다. 참고 견디면 견딜수록, 용혼이 전해주는 효력도 더욱 강해질 것이야.”

    오광이 오홍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며 말했다.

    “아버님께서 견디시는 것에 비하면 이야기할 가치도 없사옵니다만, 소자 아버님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옵니다.”

    오홍은 가까스로 한 줄기 미소를 내비쳤다.

    “너는 이제껏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때…… 내가 너를 실망시켰을 테지.”

    오광의 탄식에 오홍은 고개를 저었다.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알고 있습니다. 결국 제 실력이 부족하여 영아를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요. 허나 앞으로 저는 목숨을 다해 용궁을 지켜내고, 동해를 지켜낼 것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낭랑하고 호쾌하며 힘이 있었다.

    오광은 아들의 말에 눈동자를 희미하게 빛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 이상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두 눈에 금색 빛이 감돌기 시작하더니, 그 순간 몸이 다시 한번 우뚝 곧추 솟았다. 그 뒤, 그는 아주 오래된 용족의 노래를 낮은 소리로 읊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심협이 이제껏 들어본 적도, 전혀 알아들을 수도 없는 언어였지만, 그 음률이 처량하면서도 웅장하여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관통력으로 마음을 곧장 파고들었다. 그 노래를 듣고 있노라니 심협은 체내의 피가 자극을 받은 듯 요동치면서 회전하기 시작했으며, 마음속에는 무한한 전의가 일어났다.

    그때, 용족 군가 소리가 차츰 줄어들더니 뒤이어 우렁찬 용 울음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

    사람들은 번쩍 정신을 차리고 승룡대를 바라보았다. 오광의 온몸에서 금빛이 치솟으며 몸이 백 장 길이의 금빛 용으로 변해 높은 하늘을 빙빙 맴돌았다. 용의 머리는 아래쪽에 있는 오홍을 주시했고, 눈동자 속에는 금빛 화염이 불타올랐다.

    오홍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아버지와 눈을 맞추더니, 두 눈에 금빛이 차츰 밝아지기 시작했다.

    화르륵 불길이 솟구치는 듯한 소리에 이어 오광의 눈에 타오르던 금빛 화염이 힘차게 솟구쳐 그의 거대한 몸을 뒤덮고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가닥가닥 더없이 진한 신룡의 진원(眞元)이 황금색 빛 덩어리들로 변하여 무수한 반딧불처럼 흩날려 사방 여덟 개의 거대한 반룡기둥 위로 흘러갔다.

    금빛이 흘러 들어가는 순간, 승룡대 전체가 맹렬하게 진동하더니 여덟 반룡기둥 위를 맴돌던 용 조각들이 갑자기 살아난 듯 꿈틀대면서 거대한 머리를 내밀어 오홍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이 계승자에게 조상들의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심사하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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