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371화 (371/1,214)
  • 371화. 해금(解禁)

    오월이 끌려간 뒤로 대전은 한참이나 소란스러웠으나, 오광이 슬쩍 손을 들어 올리자 조용해졌다.

    “이번에 용궁에서 화를 당한 것이 내부인의 소행일 줄은 생각지 못했소. 본왕은 그 죄와 책임을 면하기 어려우니, 용왕의 자리에서 물러날 때가 된 것이 분명하오. 내 후계자는 오…….”

    오광이 막 후계자를 발표하려는데 오중이 성큼 나섰다.

    “부왕, 소자 드릴 말씀이 남았사옵니다.”

    “말해보려무나.”

    오광이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오중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답했다.

    “부왕, 이번에 용연에 다녀오면서 소자 깨달았사옵니다.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는커녕 그녀가 도리어 저를 위해 목숨을 잃게 만들었으니, 그런 자가 어찌 용궁을 지키고 동해를 지키겠사옵니까? 용궁의 주인이 될 적임자는 소자가 아닙니다. 아홉째 아우야말로 진정 대통을 계승해야 할 사람이옵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피력할 거라 여겼던 오중이 스스로 왕위를 포기하자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앞서 용궁 탈환에 성공한 것도 제게 기회가 온 덕일 뿐, 아홉째가 데리고 온 노화궁 수군이 곤붕에게 먹히지 않았더라면 그가 더욱 손쉽게 탈환했을 것이옵니다. 삼수마교 또한 아홉째 아우와 심 도우가 힘을 합쳐 죽였으니, 그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용궁을 구한 사람들입니다.”

    뒤이어 오중은 용연에서 알게 된 진상들을 덧붙였고, 그제야 앞서 오홍의 왕위 계승을 반대하던 해 장군 등도 생각이 바뀌었다.

    “동해를 다스리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더 큰 책임과 압박이 따른다는 뜻이니 홍아 혼자서는 해내지 못할 수도 있다. 중아, 앞으로 네가 그를 더 잘 보필해야 한다.”

    오광은 근엄한 목소리로 말한 후 천천히 오홍과 오중을 지나 심협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한데 심협을 위아래로 훑어본 용왕의 눈에는 의아한 기색이 스쳤다.

    “소자 명 받들겠사옵니다!”

    오중이 포권하며 답했다.

    “오홍은 들으라. 오늘부터 네가 다음 용왕이 되어 동해를 통솔하고 마족에게 대항하는 사명을 짊어질 것이다. 비록 하늘이 혼란스럽고 땅이 이롭지 못하더라도 천하의 수운을 이끌어 중생을 구원하는 일에 힘써야 하느니라.”

    “소자, 명 받들겠사옵니다!”

    오홍 또한 포권하며 진중한 목소리로 답했다.

    “원 노인, 잘 준비하시게. 사흘 뒤 승룡대(昇龍臺)를 다시 열고 조상의 용혼을 물려줄 것이니.”

    오광은 용연을 붙잡은 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에게 선포했다.

    “명 받들겠사옵니다!”

    모든 사람들이 포권하며 일제히 답했다.

    “좋네. 다들 물러가게나.”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하나둘 물러갔다.

    천천히 자리에 앉는 오광의 얼굴에 짙은 피로감이 떠올랐다.

    심협도 오홍과 함께 떠나려는데, 문득 오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 소우, 잠깐 남아줄 수 있겠나?”

    사람들은 다소 의아해하면서도 감히 묻지 못하고 떠나갔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떠나가고 둘만 남게 되자 오광은 손을 휘둘러 수액으로 의자를 하나 응결시키더니 계단 아래쪽에 두었다.

    심협은 감사를 표하고는 자연스레 가서 앉았다.

    “지난번에 홍아에게 심 소우 이야기를 들었네. 그게 몇 백 년 전 일이구먼. 그동안 심 소우는 어디에서 수련하였는가?”

    오광의 물음에 심협은 내심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행적은 스스로도 설명하기 힘들지 않던가.

    “후배는 방촌산에서 폐관하여 세간에 거의 나다니지 않았사옵니다. 종문이 변고를 당한 후에야 산에서 도망쳐 내려왔지요. 스스로 수련 경지가 부족하다 여겨 줄곧 이리저리 숨어 다니며 수련해왔사온데, 이번에 동해를 지나다가 요마들이 추격해오는 바람에 도망 오게 되었사옵니다.”

    심협은 미소를 띤 채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 자네 방촌산 제자인가?”

    오광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심협은 두말 않고 곧장 황정경 공법을 운공하여 곧 온몸 위아래로 금빛을 밝혔다.

    “과연 방촌산의 공법이로다. 보이지는 않으나 역시 모든 것에는 하늘의 뜻이 있나 보군.”

    오광은 과연 표정이 풀어지면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님, 무슨 말씀이신지……?”

    “진해빈철곤은 정해신침의 모조품에 불과하나 그 역시 정해신침처럼 사명을 띠고 세상에 나온 신기(神器)일세. 그에게 주인으로 인정받는 이는 분명 보통 사람이 아닐 터. 정해신침의 첫 번째 주인은 물을 다스렸던 우(禹) 임금이었고, 그다음 주인은 제천대성, 훗날의 투전승불 손오공이었지.”

    오광이 약간의 생기를 되찾은 눈빛으로 말했을 때, 심협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이 세계에서의 자신은 천부적인 재능과 시공간을 뛰어넘은 것만으로도 평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기의 선택을 받을 만한 점이 도대체 어디 있는지는 정말이지 알 수가 없었다.

    “선배님, 이 후배 마겁의 강림에 관해 조금 여쭙고 싶사온데, 괜찮으신지요?”

    심협은 잠깐 주저하더니 입을 열었다.

    “오? 무얼 물어보고 싶은가?”

    오광이 조금 뜻밖이라는 듯 말했다.

    “당시 이름 없는 취경인(取經人)들이 환생함에 따라 마주(魔主) 치우도 혼백을 다섯으로 나누었고 사람의 몸에 깃들어 환생했다 들은 바가 있습니다. 그들이 훗날 마겁을 막는 데 실패한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는 이야기였지요. 선배님께서 혹시 그들에 대해 아십니까?”

    “보아하니 자네는 방촌산의 중요한 제자였던 모양이군. 숨겨진 내막을 꽤나 자세히 아는 것을 보면 말일세. 당시 그런 다섯 사람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의 정체까지는 거의 아는 사람이 없다네. 나도 모르지.”

    조금 유감스러운 듯한 오광의 답에 심협은 내심 크게 실망했다.

    “솔직히 아뢰자면, 저는 가볍지 않은 짐을 지고 있음을 스스로도 알고 있사옵니다. 어쩌면 어떤 특별한 사명을 짊어진 것인지도 모르지요. 허나 지금은 마치 미궁에 빠진 듯 어찌해야 할지, 또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심협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탄식했다.

    꿈속에서 겪은 많은 과거들, 특히 전에 이정의 당부와 그에게 주어진 천책 모두 어느새 그에게는 책임이자 부담이 되었다.

    “나는 나누어진 혼백에 대한 소식도 모르고, 자네가 어떤 사명을 짊어졌는지도 모르네. 심지어 자네가 지금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도 몰라. 허나 적어도 이것만은 알려줄 수 있지. 운명이 자네를 선택했다면, 자네가 가든 가지 않든 그 거센 물결이 책임져야 할 위치로 자네를 밀어넣을 게야. 만고불변의 진리일세.”

    오광은 조용히 탄식하고는 지난날을 추억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할 수만 있다면, 저는 물결에 휩쓸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거센 물결에 올라타 스스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고 싶사옵니다.”

    심협의 대답에 오광은 감탄하는 기색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불쑥 말했다.

    “진해빈철곤을 내게 줘보게.”

    “선배님, 이 물건이 이미 저를 주인으로 인정했으니 제 것이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어찌 다시 가져가려 하십니까?”

    심협이 긴장한 표정으로 허리를 감싸 안으며 말하자 오광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 방금 전에는 그토록 비범한 기개를 보이더니 생각보다 물욕이 많은 친구로군. 안심하게. 그저 곤봉에 걸린 금제를 풀어주려는 것이니까.”

    심협은 그 말에 멋쩍게 웃으며 진해빈철곤을 건넸다.

    오광이 손을 들고 빨아들이자, 어렴풋한 빛으로 만들어진 용의 발이 어디선가 나타나서 곤봉을 틀어쥐고 휙 잡아당겨 기다란 곤봉을 그의 손에 떨어뜨렸다.

    그는 손으로 저울질하며 중얼중얼 말했다.

    “정해신침보다는 훨씬 가볍군. 그렇지만 누구나 다룰 수 있는 건 아니야.”

    말을 마친 오광이 손을 들어 진해빈철곤의 끄트머리를 꽉 그러쥐자, 손바닥에서 용혈이 새어나오기 시작하더니 곧 불이 붙은 듯 진홍색 빛을 내뿜었다.

    이어서 그는 곤봉의 몸체를 꽉 쥔 채 손바닥으로 한끝에서 다른 한 끝까지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러자 그의 손길이 지난 곳을 따라 붉은 빛이 반짝이면서 쇠를 긁어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쇳가루 같은 검은 물질이 연이어 떨어져 내렸다.

    잠시 후, 진해빈철곤은 한바탕 담금질을 한 것처럼 온통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 위로는 복잡한 부적 문양이 잇달아 밝아지면서 윙윙 울리는 소리와 함께 보이지 않는 파동이 넘실거렸다.

    심협은 진해빈철곤에서 전해져 오는 파동을 느끼고는 크게 기뻐했다.

    이윽고 곤봉 위의 이상한 울림이 사라지자, 오광은 다시 진해빈철곤을 심협에게 돌려주었다.

    심협이 받아보니 곤봉에는 아직 따스한 온기가 남아 있었고, 그 위에 새겨진 여러 부적 문양과 도안들의 빛은 차츰 사그라들어 원래 상태를 회복했다. 그는 법력을 한 가닥 불어넣었는데, 그러자 순간 곤봉에 빛이 진동하면서 마치 그에게 화답하듯 곧 위잉 하는 소리와 함께 안에서 기이한 파동이 일어났다.

    금제를 제거한 진해빈철곤의 영성은 눈에 띄게 강해졌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심협은 빈철곤을 챙긴 뒤 포권하며 감사를 표했다.

    이에 오광은 고개를 끄덕이며 뭔가를 더 말하려 했지만, 부상이 도진 듯 갑자기 맹렬하게 기침을 해대더니 왈칵 붉은 피를 뿜어냈다.

    “선배님!”

    심협이 깜짝 놀라 다가가려 했으나, 오광은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남은 손으로 그를 제지했다.

    “이미 부상을 억누를 수 없게 되었으니 의식을 마치고 나면 이 짐을 내려놓을 수 있겠지. 앞으로 이런 골칫거리들은 자네 같은 젊은이들에게 넘길 걸세.”

    오광은 보좌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장난스레 내뱉었으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씁쓸했다.

    “오홍은 분명 좋은 후계자가 될 것입니다.”

    심협이 눈빛을 살짝 굳히며 말했다.

    “그때…… 내가 그 아이와 영아를 막지 않았더라면 300년이란 세월을 헛되이 놓치지는 않았을 것을……. 다 내 잘못일세.”

    오광은 아련한 눈빛으로 한탄했다.

    “선배님, 이미 지난 일입니다. 이제 와서 옳고 그름을 다시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지요.”

    심협은 오광을 보며 만감이 교차했다. 세상 저 잘난 맛에 사는 동해 용왕, 사해의 우두머리에게서 지금 이 순간만큼은 왕의 위엄이 아닌 아버지로서의 안타까움만이 엿보였다.

    “자네 말도 옳군. 이제 와서 후회해봐야 무의미하지. 아까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도, 자기가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오래국(敖來國) 화과산(花果山)에 가보는 것도 좋을 걸세.”

    “화과산이요? 그곳에 무엇이 있습니까?”

    심협이 의아한 듯 물었다.

    “당시 손오공이 불경을 구하고 성불하기 전에 바로 화과산에 제천대성이라는 기치를 내걸었다네. 정말 자기가 뭘 어찌 해야 할지 모른다니, 가서 손오공의 발자취를 찾다보면 어떤 계시가 있을지도 모르지.”

    오광은 심오한 눈으로 심협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말했다.

    “선배님 말씀이 옳습니다. 화과산을 한 바퀴 돌아봐야겠습니다.”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홍아가 왕위 계승을 마친 다음에 가게나. 그 아이가 자네를 매우 중히 여기는 것 같으니 말일세.”

    “저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심협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광과의 대화를 마친 심협이 수수궁에서 나오자, 오홍이 홀로 복도 기둥 아래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심형.”

    오홍은 심협이 나오자 곧장 다가왔다.

    “왜, 내가 그대의 부왕께 억류라도 당할까 불안하오?”

    심협이 웃으며 농을 건넸다.

    “심형, 농은 그만 하시오. 큰 누님이 반역자라는 걸 알았으면서 왜 내게 미리 한마디 해주지 않았소?”

    오홍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대에게 말한들 어쩔 수 있었겠소? 그대의 성미로 보아 아마도 그녀를 숨겨주고 사사로이 찾아갔을 거요. 허나 용연에서 일어난 일은…… 그 일로 오흔은 목숨을 잃었소. 그런 것들 모두 따지지 않을 수 있겠소?”

    심협이 물었다.

    “나는…….”

    오홍은 입을 떼려다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잔뜩 찡그렸던 미간을 천천히 풀었다. 어딘가 조금 낙담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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