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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370화 (370/1,214)
  • 370화. 달갑지 않은 마음

    심협은 눈길을 돌려 용왕인 오광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옮겨 그 뒤에 있는 한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 사람은 바로…… 장공주 오월입니다.”

    “뭐라!”

    대전 안의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냐! 어찌 장공주 전하이실 수 있단 말이냐?”

    방 노인이 대경실색하여 호통을 쳤다.

    “정신 나간 인간족 주제에 허튼소리 마라.”

    해장군이 두 눈을 부라리며 노기 띤 목소리로 꾸짖었다.

    이들의 반응은 사실 당연한 것이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장공주 오월은 더없이 고귀하고 높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당시 오홍이 용궁과 연을 끊고 떠난 뒤, 용궁의 방어 임무를 통솔했던 것은 이태자 오중이 아닌 장공주 오월이었다.

    그녀는 가냘픈 다른 용녀들과는 달리 어려서부터 수행에 탁월한 재능을 보여 같은 어머니 소생인 당시의 삼(三)태자 오병(敖丙)과 남매가 쌍벽을 이루었다.

    오병의 수행 자질은 지극히 높아서 심지어 지금의 오홍보다도 특출했다. 그야말로 용궁이 공들여 키운 후계자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채 장성하기 전에 이정의 아들 나타(哪咤)와 싸움이 붙어 죽고 말았다.

    그 뒤로 장공주 오월은 더욱 부지런히 수행했고, 용궁을 위해 여러 차례 출정하여 동해의 평화를 수호했다. 그런 만큼 동해에서의 평판과 신망은 용왕 못지않게 높았다.

    한편, 오월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평온해 보였다. 그녀는 마치 다른 사람 이야기라도 되는 것처럼 덤덤한 얼굴로 심협을 빤히 직시했다.

    “심 소우, 오월은 우리 용궁의 장공주일세. 아무 증거도 없이 이 아이를 지적한 것이라면 홍아의 벗이라 해도 결코 용서받을 수 없네.”

    오광은 눈을 살짝 가늘게 뜨고는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알고 있습니다. 후배 역시 까닭 없이 장공주께 누명을 씌우려 드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용연 안의 금제가 그리 강력한데, 정통 용족 혈통이 아니라면 어찌 봉인을 풀고 요마를 놓아줄 수 있었겠습니까?”

    심협은 여러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거리낌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 해도 봉인을 푼 사람이 장공주 전하라고 단정 지을 순 없지 않은가?”

    해 장군이 약간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사실 제가 장공주의 소행이라 확신한 것은 이것 때문입니다.”

    심협은 말을 잠시 멈추고는 손가락을 맞비볐다. 그러자 손가락 끝에 빛이 한 점 떠오르더니, 팔뚝 굵기의 검고 긴 곤봉이 뻗어 나와 본모습을 드러냈다.

    “이것은……?”

    사람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오직 용왕인 오광만이 살짝 표정이 변해 놀란 눈빛으로 물었다.

    “진해빈철곤! 그대가 이 곤을 항복시킬 능력을 지녔단 말인가?”

    그 말을 들은 오월의 표정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진해빈철곤이라면 용연을 지키는 보물 아닌가! 어찌 감히 사사로이 가져 온 것이냐!”

    해 장군이 눈을 더욱 둥그렇게 뜨며 큰 소리로 따져 물었다.

    상황을 본 오홍이 재빨리 나서서 용연에서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완전히 납득하지 못했고, 여기저기서 웅성거렸다.

    “그렇다 해도 용궁의 귀중한 보물을 이리 그냥 가져와서야 되겠사옵니까?”

    “이 보물은 예사 물건이 아니오니 절대로 남에게 내줄 수 없사옵니다!”

    누구도 진해빈철곤이 심협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은 당연했다.

    심협 역시 이 보물을 가져갈 생각이 없었지만, 앞서 그것을 일부 제련하는 바람에 이 보물과 연결고리가 생긴 터였다. 그런데 다들 이렇게 포기하라고 하니 오히려 살짝 마음이 상했다.

    이제 사람들은 모두 용왕인 오광에게 시선을 집중한 채 그의 결단을 기다렸다.

    “진해빈철곤은 정해신침(*定海神針: 정해신진철의 다른 이름)을 본떠 만든 것으로, 신침처럼 태상노군의 손에서 나온 것이며 그 자체로 영성을 지닌 무상신기(無上神器)라네. 절대 함부로 범인(凡人)을 주인으로 인정할 리 없어. 한데 심 소우가 주인으로 인정을 받았으니 분명 특별한 기연이 있는 것일세. 더욱이 진해빈철곤은 본디 우사를 진압하기 위해 세운 것이지. 그 우사가 이미 죽었으니 진해빈철곤의 선택을 받아들이게나.”

    오광은 잠깐 침묵하더니 그렇게 말했다.

    이 말에 많은 사람이 여전히 못마땅한 듯 수군거렸지만, 더 이상 나서서 직언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오광의 위엄이 대단했던 것이다.

    “진해빈곤철이 네게 알려주었다고 했는데, 설마 이 물건이 정말 영혼을 지녀 옳고 그름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냐?”

    해 장군이 따지듯 물었다.

    “그럴 리가요. 이 곤봉이 신묘하기는 하나 인간의 말을 할 정도는 아니지요.”

    심협이 웃으며 말했다.

    “심 도우, 뜸 들이지 말고 말해보시오. 도대체 어찌 된 일이란 말이오?”

    청질이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보시면 알 겁니다.”

    심협은 더 이상 질질 끌지 않고 손에 진해빈철곤을 쥔 채 체내의 황정경 공법을 운공했다. 가닥가닥 법력이 곤봉의 몸체로 쏟아져 들어가면서 곤봉이 환하게 빛을 발했고, 그 위로 물결 같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곤봉 무늬에 파인 홈들에서 옅은 혈기가 무럭무럭 솟아오르기 시작하더니, 붉은 수증기로 변해 날아올랐다. 이 수증기는 사람들 앞을 지나 마침내 천천히 오월에게로 흘러갔다.

    “이 빈철곤은 우사를 진압하는 관건(關鍵:빗장과 자물쇠) 인데 그 위에 오월 공주의 혈기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금제를 파괴한 사람이 그녀가 아니면 또 누구겠습니까?”

    심협의 목소리에 사람들은 하나같이 적잖이 충격을 받아 말없이 오월을 바라보았다.

    “월아…….”

    오광이 낮은 목소리로 딸을 불렀다.

    “맞아요. 모두 소녀가 한 것이옵니다.”

    오월이 앞으로 나와 오광에게 포권하며 예를 갖추고 말했다.

    그녀가 이리 깔끔하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자, 심협조차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장공주, 어떻게……?”

    “대체 왜……?”

    “장공주께서 어찌하여 마족과 결탁하셨단 말입니까?”

    한참 후에야 점차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더니, 마치 물이 끓어오르듯 떠들썩해졌다.

    “왜 그런 것이더냐?”

    오광이 침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소녀 그저 달갑지 않은 마음이 들었을 뿐이옵니다. 우리 용족의 운명이 이럴 수는 없습니다.”

    오월은 몸을 숙인 채 한참을 일어나지 않고 고개를 푹 숙였다.

    “우리 용족의 운명이 어떠하다는 것이냐?”

    “부왕, 황제가 치우와 탁록에서 대전을 벌일 당시, 우리 선조이신 응룡(應龍)께서는 그를 따라 싸우며 가시밭길을 헤쳐 나갔고, 탁월한 전공(戰功)들을 세웠사옵니다. 한데 결과는 어떠했사옵니까? 그의 후손들이 무엇을 얻었사옵니까? 아무것도 없었사옵니다. 도리어 죄수를 지키는 옥졸로 전락했지요.”

    오월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고 변론하듯 말했다.

    “죄수? 옥졸? 너는 우리 용족의 사명을 그리 여기느냐?”

    오광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반문했다.

    “소녀가 그리 여기는 것이 아니라 천정에서 그리 여기는 것이지요. 그들이 언제 우리 용족에게 신경이나 썼답니까? 당시 경하용왕도 그저 작은 잘못을 저질렀을 뿐인데 말로가 얼마나 처참했사옵니까? 그때 부왕과 다른 숙백부님들 모두 천정에 상소를 올려 그를 위해 용서를 구하셨지요. 한데 결과는 어땠습니까?”

    오월이 이를 악물고 토해내듯 말하자 좀 전까지의 떠들썩함이 차츰 잦아들었다. 다들 어느 정도 그녀의 말에 공감하는 듯했다.

    한편, 심협은 경하용왕의 일을 떠올리자 더욱 유감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천정의 법도가 지엄하고 말한 대로 반드시 집행하기에 삼계를 통솔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경하용왕이 하늘의 법도를 지켰더라면 어찌 목숨을 잃었겠느냐?”

    오광이 깊게 탄식했다.

    그 말에 자극을 받은 듯, 오월이 고개를 번쩍 쳐들며 따지듯 물었다.

    “퍽이나 대단하신 법도로군요! 경하용왕의 죄가 죽어 마땅한 것이라면, 제 셋째 아우는요?”

    그녀가 말하는 셋째 아우는 바로 용왕 오광이 가장 총애했던 삼태자 오병임을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녀의 날카로운 지적에 오광은 안색이 어두워지며 잠시 침묵했다.

    “셋째 아우는 어떤 법을 어겼사옵니까? 그저 탁탑천왕 이정의 어린 아들이 동해에서 장난질하는 것을 막고, 바람과 파도가 일어 해안가 백성들이 화를 입는 것을 막으려 했을 뿐이옵니다. 한데 나타에게 그리도 잔인하게 살해당했고, 용근(龍筋)까지 뽑혀 시신도 사라졌지요. 그 아이의 용혼은 의지할 곳 없이 결국 바닷바람에 흩어져버리지 않았사옵니까!”

    오월은 두 눈에 핏발을 세우 격분한 표정으로 외쳤다.

    오홍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차마 더는 못 견디겠다는 듯 오월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막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당시 천정에서는 이 일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지요. 우리 스스로 바닷물을 끌어다가 몰아붙이지 않았더라면 그 나타라는 놈이 자결로 사죄했겠습니까? 더욱이 자결했다 해도 결국 태을진인이 그를 되살려내지 않았사옵니까. 우리 셋째 아우는요? 어디 가서 그 아이를 찾는단 말이옵니까? 이게 천정의 지엄한 법도인가요? 그저 우리 사해 용궁을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고요?”

    오월은 이제 거의 포효하듯 외쳐댔다.

    “함부로 지껄이는구나! 그때 나타의 혼백 역시 의지할 곳 없는 상태였음을 너도 알 것이다. 그의 어미가 그를 위해 진흙으로 몸을 만들어 신혼을 거둬주려 했으나 탁탑천왕 이정은 공정치 못하다며 그 신상을 직접 때려 부쉈다.”

    오광이 딸을 꾸짖었다.

    “마음에도 없는 짓을 한 것뿐입니다. 오직 부왕께서만 믿으시겠지요. 이제 되었습니다. 마족의 칼날 아래 천정, 인세(人世), 용궁…… 모든 곳이 마침내 진정으로 공평해질 테니까요. 하하하!”

    오월은 말 끝에 쓰게 웃었다.

    “네가 이런 일들을 저지른 것이 용궁을 끌어들여 함께 멸망시키기 위함이냐?”

    오광은 눈의 광채가 조금씩 어두워졌다.

    “부왕, 아직도 모르시옵니까? 그저 끈질기게 버티는 것이야 말로 완전히 망하는 길입니다. 이제 삼계는 곧 무너지게 되었으니, 우리 용궁은 마족을 당해낼 수 없단 말입니다. 부왕께서 이리 고집을 부리시는 것이야 말로 용족의 미래를 끊고 멸망으로 향하는 것이옵니다.”

    오월은 슬픔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너는 아비가 마족 휘하에 의탁하기를 바라는 것이냐?”

    “부왕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은 진즉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하여 용연 안의 마족들을 풀어주고 그 위세로 저항을 포기하도록 몰아붙이려 했지요. 허나 심 도우가 뜻밖에도 우사를 참살할 줄은 몰랐군요. 되었습니다. 앞으로 용족과 동해 수족들이 어찌 될지 저로서는 더 근심할 필요 없게 되었으니 말이지요.”

    오월은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불쑥 팔을 들어 올려 손가락을 칼날처럼 모은 뒤, 손바닥에서 날카로운 은빛을 발하며 곧장 자신의 머리를 내리쳤다.

    사람들은 대경실색했지만, 미처 막을 겨를조차 없었다.

    그때, 질풍 한 줄기가 홀연히 스치면서 찬란한 달그림자가 흩뿌려지더니, 심협이 오월 곁에 나타나 그녀의 팔을 꽉 움켜쥐고는 몸부림치지 못하게 막았다.

    “용족과 수족의 운명이 결국 어찌 될지, 살아 있지 않으면 어찌 본답니까? 살아서…… 당신이 틀렸다는 것을 확인하십시오.”

    심협은 살짝 굳어진 눈빛으로 천천히 말했다.

    그때, 오광이 한 손으로 법결을 맺은 뒤 휘둘렀다. 그러자 허공에서 용 울음소리 같은 것이 울리더니 용의 발 모양 허상들이 나타나 오월의 여러 혈규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몇 번 신음소리를 냈고, 입가에 한 줄기 핏자국이 천천히 흘러나오더니 놀랍게도 곧 몸의 기운이 사라져 버렸다.

    “아비가 너의 수련 경지를 봉인하였으니, 용연에 가서 반성하거라. 언젠가 너를 데리고 다시 햇빛을 보는 것이 마족이라면, 네가 옳은 것이겠지. 허나 그렇지 않다면…… 너는 계속 그 안에 있어야 할 것이다.”

    오광은 침통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손짓하여 그녀를 가두도록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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