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0화. 용연(龍淵)
“심형, 괜찮으시오?”
오홍은 오중을 날카롭게 쳐다보고는 심협에게로 걱정스런 눈길을 돌렸다.
“괜찮소.”
심협은 무표정하게 손을 내저었다.
이리 중요한 일을 오중이 어찌 깜빡할 리 있겠는가? 틀림없이 노리는 바가 있었을 터였다. 방금 천책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심협은 큰 부상을 당했으리라.
‘심형, 미안하오. 그대를 용궁의 분쟁에 휘말리게 했구려. 아니면 이렇게 합시다. 그대는 내려가지 말고 여기서 우리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거요.’
오홍 역시 총명한 사람이거늘 오중의 의향을 어찌 읽어내지 못했겠는가? 그는 전음으로 심협에게 제안했다.
‘괜찮소. 방금 전에도 무사하지 않았소? 이왕 왔으니 함께 내려가 봅시다.’
심협은 미소를 지으며 오홍을 안심시켰다.
탁탑천왕 이정이 말하길, 동해에는 환생한 마혼(魔魂)에 관한 단서가 있을 터였다. 용연에는 마족 전범들이 갇혀 있으니 그 단서가 이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오중이 나쁜 마음을 품었다 해도 그는 놓칠 수가 없었다. 더욱이 이미 한 번 자신을 위험에 처하게 한 이상, 오중도 또다시 같은 일을 벌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 좋소.’
오홍은 다소 우려되는 목소리로 응낙했다.
“둘째 형님, 아우는 용연에 와본 적이 많지 않은데, 혹시 또 사람을 해칠 만한 다른 금제가 있습니까? 어떤 것들을 주의해야 합니까? 분명히 말씀해주시지요. 심형은 제 손님이니 반드시 그를 세심하게 보호해야 합니다!”
오홍은 몸을 돌려 오중을 바라보고 느릿느릿 물었다.
“아홉째야, 왜 사서 걱정을 하는 것이냐? 이 형이 방금은 깜빡한 것뿐이다. 이후로는 위험한 금제가 없으니 안심하거라.”
오중은 웃으며 그렇게 말한 뒤, 청동 대문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오른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손바닥에 금빛이 번쩍였다.
그의 오른손은 빠르게 모습을 바꾸어 사납게 생긴 용의 발로 변하더니 청동 대문 위 신룡의 한쪽 발과 단단하게 결합했다.
위잉!
기이한 소리와 함께 눈부신 금빛이 오중의 용 발에서 폭발하자, 곧 청동 대문이 진동하기 시작하면서 문에 새겨진 오조신룡의 몸에 가느다란 은빛이 떠올랐다.
심협은 돌문을 빤히 쳐다보다가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이 청동 대문이 용연의 입구요. 위쪽의 금제는 동해 용족의 사람만 열 수 있지. 전혀 위험하지 않소.’
돌문을 빤히 쳐다보는 심협을 보고는 오홍이 전음으로 전달했다..
심협은 그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은색 빛들은 이내 용이 물고 있는 은빛 용주로 모여들었다. 용주는 환한 은빛 광채를 뿜어냈다.
심협은 강한 은빛을 발하는 구슬에 안력(眼力)을 집중했다. 그리고 이내 용주 안에 무시무시한 위력이 담겨 있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만약 저 용주가 갑자기 폭발하기라도 한다면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그때, 오중이 엄숙한 표정으로 하얗고 작은 거울을 하나 꺼내 들더니 뭔가를 중얼거린 뒤 허공으로 던졌다.
거울은 번쩍 하더니 한 줄기 하얀빛으로 변해 은빛 용주(龍珠: 여의주) 안으로 녹아들었다.
순간 용주의 은빛이 다시 환해지면서 구슬이 바람을 안고 흔들리더니, 놀랍게도 1장 크기의 은빛 문짝이 되어 쩡 하는 소리와 함께 청동 대문에 박혀 들어갔다.
가느다란 검은 빛이 청동 대문에서 솟아나와 은빛 문짝 안으로 흘러들자, 문짝 사이로 빠르게 검은 기운이 떠올랐다. 그 안에는 어디로 통하는지 모를 깊고 검은 통로가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됐다. 들어가자.”
오중이 손을 거둬들이며 말하고는 앞장서서 들어갔고, 그의 모습이 검은 통로 속으로 사라지자 오흔과 청질도 그 뒤를 따랐다.
“우리도 갑시다.”
오홍의 말에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갑자기 우뚝 멈춰 서더니 왼쪽의 텅 비어 있는 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내 그의 눈에는 약간 곤혹스러운 빛이 스쳤다..
“심형, 왜 그러오?”
오홍이 물었다.
“아, 아니오.”
심협은 고개를 저었다.
오홍은 그의 시선을 따라 눈을 돌려 보았으나, 아무것도 없이 텅 빈 곳이었다.
“그럼 됐소. 어서 갑시다. 여기 입구의 통로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소.”
오홍이 설명하며 걸음을 내딛었고, 심협도 뒤를 따랐다. 이내 두 사람의 모습도 눈 깜짝할 사이에 은빛 문 안으로 사라졌다.
그 뒤, 은빛 문이 빠르게 줄어들어 곧 사라지려는 바로 그때, 한 줄기 검은 형체가 갑자기 탑 안에 나타났다.
“강력한 신식이군. 하마터면 들킬 뻔했어.”
검은 형체는 혼잣말을 중얼거린 뒤, 검은 그림자로 변해 은빛 문이 사라지기 직전에 그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심협은 눈앞에 무수한 회색과 검은색 그림자가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어쩐지 몸은 공중에 뜬 것처럼 가벼웠다.
그러나 이런 상태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고, 그의 몸은 곧 무거워졌으며, 눈앞의 그림자들도 흩어졌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 깎아지른 듯한 절벽 근처의 평대 위였는데, 오중과 오홍 등도 그곳에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곳 절벽의 평대는 제법 넓었고, 그 위로 많은 건물들이 세워져 있었다.
놀랍게도 이곳에는 바닷물이 한 방울도 없어서 육지에 온 것만 같았다. 신식으로는 살필 수 없는 거무튀튀한 바위들이 널려 있었다. 반면 절벽 아래는 캄캄한 심연으로, 매우 어두워서 10여 장 거리밖에 보이지 않았다.
심연 속에도 바닷물은 없고 온통 검은 광풍이 휘몰아치며 울부짖을 뿐이었다.
이 광풍은 하늘과 땅을 이으며 심연 전체를 가득 채운 채로 거대한 광풍의 소용돌이들을 이루었다. 어떤 것은 크기가 몇 장밖에 되지 않았지만, 무려 몇 리에 이르는 것도 있었다. 이 소용돌이들은 서로 부딪치고 집어삼키면서 커다란 바람소리를 냈고, 모든 것을 휩쓸어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심협은 심연 속 미쳐 날뛰는 검은 바람을 보며 내심 깜짝 놀랐다.
그는 지금 진선기에 도달한 강자였지만, 이 심연의 광풍 앞에 서니 자신이 아주 작고 보잘것없게 느껴진 것이다. 게다가 이 검은 바람은 기이하게도 심연 안에서만 요동칠 뿐, 바깥으로는 조금도 뻗어 나오지 않았다.
심협은 심연의 검은 바람을 향해 신식을 뻗었으나, 신식은 순식간에 더없이 날카로운 힘에 갈려나갔다. 이에 심협은 잠시 머릿속이 먹먹하게 아려왔다.
“여기가 바로 용연이오? 마치 땅속 같은데…….”
“맞소. 우린 지금 사실 조룡벽 아래쪽에 있는 땅속 깊은 곳에 와 있소.”
심협의 질문에 오홍이 답했다.
“그렇구려. 한데 저 검은 폭풍은 무엇이오? 위력이 아주 무시무시하구려. 신식까지도 가볍게 갈아버리다니…….”
“이 용연은 구유(*九幽: 저승, 지옥, 대지의 밑바닥 등을 뜻하는 말)와 연결되어 있는데, 저 검은 바람들은 저승에서 불어오는 흑염선풍(黑魘旋風)이오. 뼈와 살을 녹일 수 있을 정도로 지독하고, 진선기 존재라 하여도 그 속에 휩쓸리면 잠깐 새에 혼백과 육체가 모두 부서지게 되지. 태을의 경지에 오른 선인이 온다고 해도 온전한 몸으로 물러갈 수 없을 것이오.”
오홍의 밀에 심협은 헉 하고 놀랐다.
“이토록 위험하기 때문에 우리 동해 용족이 요마들을 이곳에 제압해두는 것이오. 허나 저 바람은 심연 안에서만 거세게 날뛸 뿐, 바깥으로는 나오지 않을 테니 걱정할 것 없소.”
오홍은 심협을 안심시키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어찌 그럴 수가 있소? 이곳에 금제가 걸려 있는 게요? 그런 흔적은 없는 것 같소만…….”
“따지자면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아래로 가보면 알게 될 거요.”
오홍은 신비로운 미소를 지으며 뜸을 들였다.
심협은 궁금했지만, 더는 캐묻지 않았다.
그때, 용궁의 병사들 한 무리가 멀리 어느 궁전에서 날아왔다. 우두머리인 잉어 머리 장군은 막 호통을 치려다가 오홍과 오중을 보자마자 태도가 공손해졌다.
“이전하와 구전하를 뵈옵니다! 두 분께서 이곳에 어인 일이십니까?”
잉어 장군이 두 사람을 향해 예를 갖추고는 물었다.
“우린 부왕의 명을 받아 용연에 갇힌 요마들의 상황을 살피러 왔다. 아래쪽에 수상한 움직임이 있는가?”
오중이 물었다.
“이전하께 아룁니다. 저희가 매일같이 각층의 옥들을 살핍니다만, 아무런 이상도 없었사옵니다.”
잉어 장군이 재빨리 답했다.
오중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비웃듯 입꼬리를 올린 채 오홍을 힐끗 한 번 보았다.
“이상이 없다? 제대로 살펴보았는가?”
오홍이 다소 어두워진 안색으로 물었다.
“구전하 분명히 살펴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이제껏 감히 게으름을 피운 적이 없나이다. 아래쪽 감방에서도 아무런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잉어 장군이 다소 황공해하며 말했다.
‘오형, 조급해하지 마시오. 심연거요가 몰래 탈옥했다면 이곳을 지키는 수병들의 경지로는 알아채지 못했을 수도 있소. 우리가 내려가 보면 알게 될 것이오.’
심협이 전음으로 말하자 오홍도 눈빛으로 동의를 표했다.
“보아하니 아홉째는 이(鯉) 장군의 말을 그다지 믿지 않는 것 같군. 그렇다면 우리가 직접 내려가 요마들의 상태를 살펴보자.”
오중이 비웃듯 내뱉고는 평대 근처에 난 돌계단을 따라 아래로 향했고, 오홍을 비롯한 사람들이 그 뒤를 따라갔다.
이 장군은 따라갈 병사들을 보내려 했으나 오홍이 이를 거절했다.
돌계단은 너비가 5척 남짓에 불과했고, 끝없는 흑염선풍이 지척에서 포효하며 언제라도 달려들어 몇 사람을 끌고 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돌계단 바깥쪽이 보이지 않는 금제로 덮여 있는 것인지, 흑염선풍은 돌계단으로 밀려들 때마다 계단에서 1척쯤 떨어진 거리에서 튕겨 나갔다.
일행이 잠시 걸어 내려가니 곧 돌계단이 끝나고 이내 평대가 하나 나타났다.
이곳 평대는 위쪽보다 훨씬 컸고, 한쪽 벽 위에는 무려 수백 개에 달하는 동굴이 촘촘하게 뚫려 있었다. 각 동굴의 입구는 창살로 막혀 있었고, 창살 위에는 갖가지 부적 문양이 빼곡히 새겨져 강령한 법력 파동을 뿜어내고 있었다. 지극히 강력한 금제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심협은 금제들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평대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심연 깊은 곳에서부터 튀어 나온, 몇 장 굵기의 거대한 금빛 기둥 하나가 높이 솟아 있었다.
거대한 금빛 기둥의 빽빽한 별 같은 무늬와 용 문양, 봉전(*鳳篆: 도교에서 사용하는 문자)에는 노을빛이 완연했고, 상서로운 기운이 가득했다. 산처럼 든든한 기운을 내뿜는 것이, 어떤 힘도 이 기둥을 뒤흔들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심연 속 흑염선풍은 금빛 기둥이 뿜어내는 기운에 물러나 아예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바로 이 금빛 기둥이 흑염선풍을 몰아내는 것이로군! 대단한 보물이오. 이건 어떤 보배요?”
심협이 거대한 금빛 기둥을 보며 감탄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기둥은 진해빈철곤(鎭海鑌鐵棍)이라 하는데, 천성구전빈철(天成九轉鑌鐵)과 영양신철(靈陽神鐵) 그리고 구천금정(九天金精)을 섞어 만든 보물이오. 불과 바람을 잠재우고 온갖 사악한 기운을 제압하는 데 최고의 신통력을 지닌, 우리 용궁 최고의 보물이지요.”
오홍이 자랑스레 말했다.
“흥! 최고의 보물은 무슨……. 한낱 모조품일 뿐이다.”
오중이 약간 어두운 표정으로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모조품?”
심협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수천 년 전 우리 동해 용궁에 있던 바다를 다스리는 보물인 정해신진철(定海神珍鐵)은 상고 시대 우왕(*禹王: 성군으로 여겨지는 고대 하‘夏’나라의 개국 군주)에게서 전해 받은 귀한 보물이자 진정한 구천의 신물이었다 하오.
원래는 용연 부근에 보관하여 모든 흑염선풍을 완전히 억눌렀을 뿐만 아니라 그 위력이 온 동해에 두루 뻗쳤다 하지요. 허나 안타깝게도 수천 년 전, 요족 대성(大聖) 하나가 용궁에 와서 그 신철을 가져가 버리는 바람에 우리 부왕께서 어쩔 수 없이 이 진해빈철곤을 모조하여 이곳에 두신 게요.”
오홍이 계속해서 말했다.
‘요족 대성? 설마 전설 속의 제천대성 손오공을 가리키는 것인가?’
심협은 그런 궁금증이 일었지만, 오중의 기색을 보아하니 이 일은 분명 동해의 부끄러운 과거인 듯하여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 일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고, 우선 요마의 일을 조사하도록 하지.”
오중은 두 사람이 진해빈철곤에 대해 더 이야기하는 것을 듣기 싫었는지 말을 끊었다.
“그럼 곧바로 8층으로 갑니까?”
오홍이 물었다.
“아니. 이왕 왔으니 용연에 갇힌 요마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살필 생각이다. 그래야 누구처럼 핑계를 대는 사람이 없겠지.”
오중은 차게 웃고는 몸을 돌려 감방들을 향해 걸어갔고, 오홍은 그런 둘째 형의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본래 의도대로라면 응당 심연거요가 갇힌 곳부터 살펴 최대한 빨리 사건의 전말을 파악해야 했다.
하지만 아우로서 형에게 면박을 줄 수는 없으니 어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