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9화. 다른 이를 위한 부탁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이들은 바다 밑바닥의 산벽 위에 난 창고 문 앞에 다다랐다.
문 위에는 청동을 부어 만든 묵직한 문짝 두 개가 박혀 있었고, 그 위로는 10여 개의 부적 문양 흔적이 종횡으로 교차되어 있었다. 또 아래쪽 1장 높이에는 팔각형의 홈이 하나 보였다.
원타가 품에서 거북이 등껍질 문양이 새겨진 푸른 영패를 느긋하게 꺼내 휙 던지자, 영패가 푸른 빛으로 한 겹 뒤덮인 채 날아올라 청동문의 움푹 파인 홈에 딱 맞게 박혀 들어갔다.
곧이어 푸른 영패에서 한 줄기 빛이 뻗어나가 청동문의 부적 문양을 전부 밝혔다. 그러자 굉음과 함께 무겁기 그지없어 보이는 커다란 문이 안쪽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열린 문 안에서는 눈부신 빛이 새어나와 심협은 거의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빛이 흩어지고 나서도 심협이 상상했던, 금은보화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거나 보물이 겹겹이 놓인 광경은 볼 수 없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거대한 몸집의 황금 문어였다.
문어의 주변과 위쪽 절벽 곳곳에는 크기와 모양이 재각기인 동굴들이 있었는데, 모두 빛에 뒤덮인 채 금빛 금제 부적문양이 허공에 떠 있었다.
일행이 들어가자 황금 문어는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뜨고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핀 뒤, 두 눈에 한 줄기 광채를 반짝이며 인간의 말을 내뱉었다.
“원 늙은이, 오랜만에 이리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왔구먼. 어이구, 저기 저건 꼬맹이 구태자이신가? 전하를 뵌 지 벌써 수백 년이나 되었군요. 저는 아직도 그리고 앞으로도 명주(明珠)를 훔치러 오는 자는 없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지요.”
“장(章) 백부님을 뵈옵니다. 이전엔 철이 없어 폐를 많이 끼쳤습니다.”
오홍이 조금 부끄러운 듯 앞으로 나아가 포권을 했다.
“장팔조(章八爪), 헛소리 좀 그만하게. 오늘 이 아이들을 데려온 것은 용왕님의 분부로 보물을 하나씩 상으로 주기 위해서라네. 자네가 적당한 걸 좀 찾아주겠나?”
원타가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보물? 용왕님께서 분부하신 것이라면 말만 하게. 우리 부고(*府庫: 관청에서 문서 등을 보관하던 창고)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내 꼭 가져다 줄 테니.”
황금 문어, 장팔조가 웃으면서 말했다.
오흔은 오중을 바라보았고, 오중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그제야 앞으로 나와 예를 갖추었다.
“선배님, 후배는 불 계통의 술법을 수련하고 있습니다. 대승기 정점에 도달했사온데 난관을 돌파하지 못하고 있으니, 도움이 될 만한 단약이나 보물이 있다면 베풀어주십시오.”
“대승기 정점 경지를 돌파하면 겁(劫)을 겪고 진선의 경지에 이르게 되지. 이 난관은 다른 것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때때로 돌파하지 못하는 것은 일종의 자기방어야. 약의 효과를 빌려 억지로 돌파한다 해도 네가 뇌겁의 위력을 받아낼 수 있으리란 법이 없다. 그래도…… 원하느냐?”
장팔조의 말에 오흔은 오중을 힐끗 보고는 굳건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원합니다.”
진선의 경지를 돌파하기만 하면 그녀는 그와의 거리를 진정으로 좁힐 수 있을 것이고, 그리되면 진정으로 그의 근심을 나눌 수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부고에 태상노군의 도솔궁(兜率宮)에서 삼매진화(三昧眞火)로 정제한 교화단(絞火丹)이 하나 있다. 그걸 먹으면 네가 난관을 돌파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감사합니다. 선배님.”
장팔조의 제안에 오흔은 곧장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장팔조는 잠깐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갑자기 몸 아래쪽 머리 위에 있는 동굴을 향해 다리 하나를 높이 뻗었다. 이윽고 촉수 끄트머리에 부적 문양이 빛나더니 동굴 위 금제의 빛과 어우러져 서로 융합되기 시작했다.
곧이어 촉수가 금제의 빛을 통과해 동굴 안으로 들어갔고, 이내 단로(*丹盧: 단약을 만드는 화로)와 흡사한 진홍색 구리 상자 하나를 꺼내 오흔에게 건넸다.
오흔이 두 손으로 받아 들고 조심스레 뚜껑을 열자, 화로 안에서 곧 뜨거운 열기가 솟구쳐 나오며 붉은 광채를 뿜어냈다.
그녀는 재빨리 뚜껑을 다시 잘 닫고는 거듭 감사를 표하며 단약을 챙겼다.
“심형, 그대도 원하는 것을 장 백부님께 알려드리시오.”
오홍이 심협을 바라보며 말했다.
“선배님, 후배는 안전하게 출규기를 돌파할 수 있는 방법을 구하고자 합니다.”
심협이 앞으로 나서며 미리 생각해둔 바를 말하자 모두가 깜짝 놀랐다.
“후배가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해 부탁드리는 것이옵니다.”
심협은 조금 무안한 듯 덧붙였다.
“그 사람이 어떤 술법을 수련하는고?”
장팔조는 심협의 요구를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물었다.
“그, 그는…… 물 계통의 술법을 수련합니다.”
장팔조는 그 말을 듣고 다시금 깊은 생각에 빠지더니,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방법은 열세 가지가 있다. 그중 적당한 것은 세 가지로군. 일단 네게 들려줄 터이니 선택은 스스로 하거라.”
“감사합니다. 선배님.”
심협은 재빨리 포권으로 답했다.
“첫째는 수정단(水晶丹)을 복용하는 것이다. 그 단약은 용원정기(龍元精氣)로 정제한 것인데, 신혼을 굳건하게 만들어 출규의 경지에 이르게 할 수 있다. 둘째는 <수부개원공(水腑開元功)>을 수련하는 것이다.
이 공법은 기초인 연기기에서 곧장 대승기 정점에 이를 수 있는데, 그 과정에서 순서를 따라 차츰 발전하여 출규기에 통달하게 되는 방법이지. 셋째는 실전된 물의 법술로, 등급이 <수부개원공>보다 훨씬 높고, 그중에 출규기에 이르는 방법이 있다. 다만 전승되면서 순서가 뒤죽박죽되어 온전치 않다.”
“그렇다면 <수부개원공>으로 하지요.”
심협은 잠깐 망설이더니 말했다.
그가 출규기의 돌파법을 찾는 이유는 당연히 현실의 수련을 위함이다. 수정단의 약효가 제아무리 현묘하다 한들 현실로 가져갈 수 없고, 온전치 못한 공법은 등급이 아무리 높아도 불완전하니 어떤 숨겨진 위험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 남은 것은 <수부개원공>뿐이다.
허나 말을 마치자마자 심협은 혹시나 싶어 다시 물었다.
“그 온전치 못한 공법도 함께 살펴본 후에 골라도 되겠습니까?”
“안 될 것 없지.”
장팔조는 말을 마치고 다시 다리를 벽 위의 동굴 두 곳으로 집어넣더니, 잠시 후에는 두께가 2촌 정도인 금빛 백서 한 부와 푸른 이끼가 가득 자란 돌판 하나를 심협 앞에 내려두었다.
심협은 눈으로 둘 사이를 번갈아가며 훑어보다가 문득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볼품없어 보이는, 이끼가 낀 돌판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익숙한 기운 한 가닥이 그를 이끄는 것만 같았던 것이다.
이 느낌이 너무도 미묘해서 심협은 잠깐 망설이다가 곧 말을 바꿔 그 푸른 돌판을 선택했다.
“이건 이제 네 것이다.”
장팔조는 금빛 백서를 거둬들이고는 푸른 이끼가 낀 돌판만 심협에게 건넸다.
심협은 두 손으로 받아들고는 손가락으로 돌판 위를 한 차례 어루만졌다. 그러자 순간 바람이 수면 위를 가볍게 스쳐 지난 것처럼 손끝 아래로 잔잔한 물결이 일렁이는 듯했다. 더없이 기묘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세히 살펴볼 때가 아니니 일단 챙겨 넣을 수밖에 없었다.
일행은 곧 인사를 하고 용궁의 부고를 떠났다.
“보물도 다 골랐겠다, 일을 지체하여 좋을 게 없으니 용연으로 출발해야겠지?”
오중이 사람들을 쓱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이태자 전하, 구태자 전하와 심 도우는 방금 용궁에 돌아왔고, 오는 도중에 격전을 치르기도 했으니, 잠깐 쉬었다가 용연으로 향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원타가 입을 열고 권했다.
“원 백부님, 심연거요가 정말로 탈출했고 용연 밑바닥에 정말 문제가 생겼다면 쉴 틈이 어디 있겠습니까? 촌각이 늦어지면, 촌각만큼 더 위험해질 겁니다.”
오중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둘째 형님 말씀에 저도 동의합니다.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되지요.”
오홍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 노신은 이제 말을 줄이겠습니다. 두 분 태자님들, 몸조심하십시오.”
원타가 살짝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건넨 후, 사람들은 그와 헤어져 용연으로 출발했다.
심협 일행은 용궁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주위에는 건물이 차츰 줄었고, 반 시진쯤 지나자 해저의 어느 거대한 산 근처에 도착했다.
산은 전체가 시커먼 데다 높이 우뚝 솟아 있어서 해수면 바깥까지 솟아 있을 것 같았으며, 음산한 기운을 뿜어냈다.
심협은 이 거대한 산을 보고는 눈썹 꼬리를 슬쩍 치켜 올렸다.
이 거대한 산의 바위들은 거무튀튀했고, 무거우면서도 난해한 기운을 풍겨 그의 강력한 신식으로도 반 장 거리밖에 살펴볼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떤 재질의 바위인지 궁금하군.’
커다란 봉우리 아래에는 탑 같은 건물들이 우뚝 서 있었지만, 아주 오랫동안 돌본 사람이 없는 것처럼 모두 낡아 있었다.
오중은 사람들을 이끌고 앞으로 나아가 곧 잿빛 작은 탑 앞에 이르렀다.
“도착했다.”
오중이 말했다.
그 탑은 높이가 8장 남짓했고, 주위에 늘어선 수십 수백 장이 넘는 다른 탑들에 비해 볼품없었다.
심협은 다소 의아했다. 입구에도 이토록 많은 엄호물을 설치해 두다니, 동해용궁에서는 용연을 실로 삼엄하게 돌본 모양이었다.
탑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한가운데에는 손바닥 크기의 홈이 하나 있었다.
오중이 손을 휘두르자 금빛 영패가 그의 손에서 날아가 문의 움푹한 홈에 박혀 빈틈 하나 없이 딱 맞게 들어갔다.
액체 같은 금빛이 영패에서 흘러나와 탑문 위로 빠르게 퍼져 나가면서 용 모양의 도안을 이루었다.
끼이익!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혔던 대문이 천천히 열렸다.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서자 돌문 안의 영패는 오중의 손으로 날아 돌아왔고, 이어서 대문도 스스로 닫혔다.
문 너머로는 탁 트인 커다란 방이 있었는데, 그 안은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가장 깊숙한 곳 벽에 거대한 청동 대문 하나가 박혀 있을 뿐이었다.
대문 위에는 똬리를 틀고 있는 다섯 발톱의 신룡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었는데, 입에 은빛 용주(龍珠: 여의주)를 물고 있는 것이 금방이라도 문을 부수고 날아갈 것처럼 생동감이 넘쳤다.
심협이 눈앞에 있는 오조신룡(五爪神龍)의 부조를 두어 번 살펴봤을 때, 마치 이 조각상의 눈이 되살아난 것처럼 심드렁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동시에 거대한 용의 기운이 신룡 부조에서 폭발하여 심협을 덮쳐왔다.
심협은 몸이 크게 떨렸고, 체내 경맥도 심하게 진동해 피가 심장과 폐를 향해 거꾸로 솟구쳤다.
한데 그 순간, 그가 지닌 천책이 갑자기 뜨거워지면서 한 가닥 열기가 그 안에서 솟구쳐 나와 이 거대한 용의 위세를 대부분 없애버렸다. 심협은 낯빛이 살짝 굳어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압박해오는 용의 나머지 위세를 견뎌냈다.
“심 도우, 어서 고개를 숙이게. 우리 동해 용족의 핏줄을 지닌 사람 외에는 이 조룡벽(祖龍壁)을 똑바로 마주봐서는 안 돼!”
오중은 언뜻 의아해 하는 눈으로 심협을 보다가 이내 초조한 듯 외쳤다.
그 말에 심협은 얼른 시선을 내리깔며 옆에 있던 오흔과 청질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줄곧 고개를 숙인 채 청동대문을 쳐다보지 않았다.
반면 오중과 오홍 두 형제는 청동대문을 똑바로 쳐다보아도 아무렇지 않았다.
“조룡벽에 이런 제한도 있었군요? 둘째 형님, 이를 알고 있었다면 왜 미리 주의를 주지 않은 것입니까!”
오홍은 어두워진 낯빛으로 소리쳤다.
“잠깐 깜빡한 것뿐이다. 심 도우, 미안하게 됐소.”
오중은 이마를 탁치며 그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