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358화 (358/1,214)
  • 358화. 왕좌의 행방

    한참 후에 용연 뒤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왕, 용왕의 자리를 계승하여 동해를 다스리는 것은 그저 단순히 권위를 이어받는 것이 아니라 조룡(*祖龍: 중국 고대 신화 속 용족의 선조)의 신혼을 이어 받는 것이니, 타고난 자질이 대단히 뛰어난 자여야만 합니다. 그 자리에는……응당 아홉째 아우가 앉아야겠지요.”

    그 말에 모든 사람이 놀란 시선을 오월에게로 돌렸다.

    심지어 오홍 자신도 놀란 듯했다. 평소 친하기는커녕 미소 한번 지어준 적 없는 맏누이가 어찌하여 자신을 지지한단 말인가?

    “장공주님의 말씀은 틀렸습니다. 동해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것은 비단 타고난 자질뿐만이 아니옵니다. 어질고 능력 있는 이를 등용하고 군사를 통솔하는 것 또한 빼놓을 수 없사옵니다. 구태자께서는 이제껏 한운야학(*閑雲野鶴: 아무런 구속 없이 자유롭게 다니는 것)하셨으니, 결코 적임자가 아닐 것입니다.”

    선홍색 판갑(*板甲: 기다란 금속판을 이어 붙여 만든 갑옷)을 입고 눈썹과 눈 사이가 퍽 넓은 중년 무장이 입을 열었다.

    “해(解) 장군께서는 구태자께서 바깥 노화궁(蘆花宮)에 주둔하신 지 불과 300년 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그전에는 용궁의 적잖은 사무를 모두 구태자께서 처리하셨지요. 그때 누구나 칭송하지 않았습니까?”

    깡마른 체구에 유포를 입은 노인 하나가 반박했다.

    “방(蚌) 노인, 바로 300년 전 그 사건 때문에 더욱 구태자께서 용궁을 다스리시는 데 적합하지 않다고 여기는 겁니다.”

    해 장군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힘주어 말했다.

    한편, 외부인으로서 껄끄러운 심정으로 서 있던 심협은 오홍의 반응을 알아채고는 다소 놀랐다.

    오홍이 침묵을 깨고 불쑥 입을 열었다.

    “부왕, 해 장군의 말이 옳습니다. 용궁을 통치하는 일에는 확실히 저보다 형님이 더 적합할 것입니다.”

    허나 오광은 즉각 결정을 내리지 않고, 시선을 옮겨 원타에게 물었다.

    “원 노인, 그대는 본왕을 오랜 세월 보좌해왔지 않은가. 이 일을 어찌 보는가?”

    “이 일은 용궁의 대통과 관련되어 있으니, 응당 용왕께서 스스로 결정하셔야 하는 고로 노신은 본래 말을 아끼려 하였사옵니다. 말세를 만나 용궁이 위태로워진 탓에 줄곧 안정만을 추구했지만…… 결국 안정을 얻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원타의 말은 아주 함축적이었지만 그 뜻은 오히려 아주 분명했다. 평온한 때였다면 안정을 추구해야 할 테니 이태자가 대통을 잇는 것이 더 적절할지 모르나, 말세에는 조룡의 신혼을 최대한 이어받을 능력이 있고 동해를 비호할 능력이 있는 자가 더욱 적임자라는 의미였다.

    “부왕, 소자 그 자리를 탐하는 것은 아니오나, 아홉째 아우는 이미 진선 초기에 머문 지 여러 해 되었고, 소자도 이미 그를 열심히 따라잡아 수련 경지만 놓고 말한다면 전혀 그에게 뒤지지 않사옵니다.”

    오중의 눈에 고집스러운 기색이 어리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너의 노력은 본왕이 줄곧 눈여겨봐 왔느니라. 우리 용족 일맥은 천하의 물과 구름을 관장하고 아득히 많은 수족들을 통솔하지.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며 백성들을 비호하는 일 말고도, 사실 그 어깨에 더욱 오래된 책임과 사명을 지고 있느니라.”

    오광은 평온한 눈빛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명? 책임?’

    사람들은 모두 이 말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용연의 존재는 모두들 알고 있겠지. 심지어 용연 아래의 해저 감옥도 아는 사람이 많을 테고. 너희는 그곳이 동해 용족의 중범죄자를 가두는 곳이라고 여길지 모르나, 사실 그곳이 처음 건립된 이유는 전혀 다르다.”

    오광이 잠시 말을 멈추자 오중이 입을 열었다.

    “소자가 알기로, 그 해저 감옥에 가장 먼저 갇힌 것은 과거에 치우를 따라 황제(*黃帝: 중국의 신화 속 임금 중 하나)와 싸웠던 마족의 포로들로, 우리 동해 용족의 사명 중 하나가 그들이 탈출하지 못하도록 그 감옥을 지키는 것이라 하였사옵니다.”

    오광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들의 말을 받았다.

    “네 말이 맞다. 사실 동해뿐만 아니라, 나머지 삼해(三海)에도 그런 감옥이 설치되어 있지. 서해에는 대학(大壑)이라 하고, 남해에는 귀허(歸墟), 북해에는 염굴(焰窟)이라고 하지. 그 안에는 모두 당시의 마족 전범들이 갇혀 있다. 우리 사해 용족의 사명이 바로 그 네 개의 감옥을 지키는 것이다. 목숨을 잃는다 해도 그들이 탈출하게 해서는 아니 된다.”

    사람들은 이 말에 감동한 표정이었다.

    “말세를 맞았으니 마족들은 조만간 다시 침범해 올 것이다. 내 뒷대의 용왕이 우리 동해 용궁의 마지막 왕이 될 공산이 커. 다른 이들은 달아나더라도 용왕은 그리할 수 없다. 이 점을 알고도 이 용궁의 왕위를 이어받길 원하느냐?”

    오광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오홍와 오중은 서로 눈을 한 번 맞추더니만, 이번에는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소자 원하옵니다.”

    그제야 오광의 눈빛이 약간 부드러워졌고, 흐뭇한 듯 눈에는 약간의 웃음기마저 엿보였다.

    “아버지, 소자 마침 보고드릴 것이 한 가지 있사옵니다.”

    그때 오홍이 불쑥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무슨 일이냐?”

    오광의 물음에 오홍이 무거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심연에 있던 거대한 요괴는 아직 용연 속에 갇혀 있는지요?”

    “용연 밑바닥 2층에 갇혀 있다. 왜 묻는 것이냐?”

    “소자 앞서 심형과 함께 용궁으로 돌아오는 길에 심연거요(深淵巨妖)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하여 당시에는 용연이 함락되어 이 요마가 탈출한 것으로 알기도 하였지요.”

    오홍의 답에 오광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뭐라?”

    원타 등 문무백관들도 표정이 잇달아 변했다. 이들의 머릿속에는 심연거요가 동해에 재난을 일으키던 당시의 기억이 떠올라 두려움에 떠는 이도 있었다.

    “그것이 심연거요임을 확신하느냐?”

    오광이 몸을 앞으로 살짝 기울이며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잘못 보았을 리 없사옵니다. 심 도우 역시 그에 맞서 싸웠고, 그 머리 하나를 깨부수기까지 하였나이다.”

    오홍의 답변에 사람들은 또다시 놀라고야 말았고, 모두의 시선이 심협에게 꽂혔다.

    “놈은 사람 얼굴에 뱀의 몸을 지녔고, 머리 하나가 백 장에 달하였으며, 힘이 아주 강하고 사나웠사옵니다. 제가 머리 하나를 깨부수자 쏜살같이 달아나더이다.”

    심협은 어쩔 수 없이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 이야기했다.

    “웃기는 소리! 정말로 심연거요였다면 어찌 자네 혼자 물리칠 수 있었겠는가?”

    오중이 비웃듯 말하자 다른 사람들도 수군대기 시작했다. 오가는 대화에서 의심의 기운이 엿보였다.

    한편, 원타는 줄곧 뒷짐을 진 채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아무 말도 없었다.

    “본디 용연 안에는 강력한 금제가 걸려 있습니다. 더구나 봉쇄된 지 오래되었지만 지금껏 요괴가 바깥으로 탈출했다는 말은 들어본 일이 없지요. 이번에는 구태자께서 다른 요물을 맞닥뜨리시고 오해하신 게 틀림없습니다.”

    방정(*蚌精: 조개 정령이라는 뜻)이 끼어들었다.

    “우리 두 사람의 말에는 조금의 거짓도 없습니다. 사람을 용연 깊은 곳으로 보내 심연거요 그놈이 그곳에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해보십시오.”

    오홍의 말에 오광이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용연의 일은 예삿일이 아니네. 홍아가 심연거요에게 급습을 당했다고 하였으니, 그가 직접 용연 깊은 곳으로 가 살펴보고 진상을 판단하도록 하겠네. 왕위 계승에 관한 일은 용연의 조사가 끝나면 다시 의논하도록 하지.”

    “부왕, 소자도 함께 조사하러 가고 싶사옵니다.”

    오중이 앞으로 나와 포권을 했다.

    한데 어째서인지 오광은 그 말에 주저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부왕, 용연에 변고가 생겼다면 아홉째 혼자 가기에는 위험이 큽니다. 소자가 함께 가면 그를 살펴줄 수도 있을 겁니다.”

    오중이 재빨리 덧붙였다.

    “소신도 가고자 하옵니다.”

    청질과 오흔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좋다, 그렇다면 너희가 함께 가도록 해라.”

    오광은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부왕, 소자 심협을 동행하게 하여주시길 청하옵니다.”

    오홍의 말에 오중이 꾸짖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요지에 어찌 인간족이 발을 딛게 할 수 있단 말이냐?”

    허나 대답은 오광에게서 나왔다.

    “지금은 마족과 대치 중인데 어찌 인간족과 용족을 가르겠느냐? 심 소우는 일찍이 심연거요를 물리쳤다 하니 함께 동행하게 하자꾸나. 심연에 들어간 뒤에는 무슨 일이 생겨도 반드시 한마음으로 협력해야 함을 명심하거라.”

    오광이 당부했다.

    “소자 명 받들겠나이다.”

    오홍과 오중은 눈을 한 번 마주치고는 동시에 포권하며 답했다.

    “좋다. 가거라.”

    오광은 손을 내저으며 조금 피곤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람들이 명을 받고 물러가자, 장공주 오월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도 천천히 대전에서 물러갔다.

    “두 분 태자님, 바로 심 도우와 오흔을 보고에 데려가 보물을 고르게 하시지요?”

    원타가 기다란 두 눈썹을 위로 살짝 들어 올리며 오홍과 오중 두 사람에게 의견을 구했다.

    오중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오홍도 입을 열었다.

    “수고스럽겠지만, 원 백부께서 길 안내 좀 해주시지요.”

    노승상은 눈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돌아서서 수수궁 뒤쪽으로 안내했다.

    심협은 약간 의문이 들어 오홍에게 직접 물어보려 했지만, 생각을 좀 해보고는 전음으로 물었다.

    ‘청질 노형, 300년 전 오홍에게 무슨 일이 있었소? 왜 그가 노화궁에 머물다가다가 지금에야 용궁으로 돌아온 것이오?’

    청질은 심협의 말을 듣고 한참동안 침묵하다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은 사이가 좋으니 그 일은…… 직접 여쭤보는 게 좋을 듯하오.’

    ‘노형도 참……. 방금 대전에서 누군가 그 일을 꺼내니 오홍의 표정이 조금 이상해 보였소. 그 일이 그에게 마음 아픈 일이라면 내 어찌 무례하게 그에게 물어보겠소? 그렇지 않소?’

    심협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대 생각이 세심하구려. 그 일은…… 참으로 정말 가슴 아픈 일이오. 그때…….’

    청질이 느릿느릿 이야기를 시작했고, 심협은 차츰 사건의 맥락을 파악했다.

    알고 보니, 300년 전 서해에서는 동해와 혼약을 맺고 서해용왕이 아끼는 딸인 십일(十一)공주를 동해로 시집보내려 했다. 동해용왕도 이를 흔쾌히 윤허했고, 서해용왕이 원하는 대로 구태자 오홍과 혼인시키기로 했다. 둘은 집안도 서로 걸맞고 그야말로 선남선녀의 결합이라 할 수 있었다.

    이는 본디 엄청난 경사였으나 안타깝게도 오홍 쪽에서 이를 거절했는데, 이유는 다름 아니라 자신은 이미 마음에 둔 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오홍이 마음에 둔 사람은 영아(盈兒)라는 여인으로, 해파리가 변하여 된 요정이었다. 타고난 자질이 영리하고 미모가 보기 드물게 빼어났지만, 혈통이 낮아 용궁의 눈에 들지 못했고, 용왕의 허락은 더더욱 얻지 못했다.

    당시 오홍은 용궁에서의 명망이 지극히 높아 이미 용궁의 다음 주인으로 낙점된 것이나 다름없게 여겨졌지만, 이 일 때문에 용왕과 사이가 틀어지고 말았다.

    ‘당시 용왕께서는 구태자님을 몰아붙여 순종시키고자 그 영아라는 아이를 감금하는 것도 마다치 않으셨소. 허나 구태자님의 태도가 그리 강경할 줄 누가 알았겠소? 그분은 용궁의 대세와 동서 양해의 관계 따윈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감옥을 부순 뒤, 연모하는 이를 구해내어 용궁을 박차고 나가셨소.’

    청질의 구슬픈 목소리에도 심협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잘했다고 외치고 있었다.

    ‘대세니, 동서해의 관계니, 그게 다 무어란 말인가! 스스로 원하는 여인과 함께할 수 있다면 그게 행복일 터.’

    이런 상황은 그날 섭가에서 찾아와 파혼을 강요했던 것과 비슷했다. 다만 상황이 좀 더 안 좋았을 뿐.

    ‘만약 일이 거기서 끝났다면 별일 아니었을 거요. 허나 그 사건으로 인해 구태자께서는 곧바로 용궁을 떠나 300년 동안 돌아오지 않게 되셨고, 심지어는 수련 경지도 그때부터 난관에 접어들더니 더는 돌파하지 못하게 되셨소.’

    ‘설마 그 영아 낭자가……?’

    심협은 벌써부터 진상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그렇소. 후에 구태자께서 거주하시던 곳이 요마의 습격을 받았을 때, 영아는 구태자님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요마들에게 감금당했지. 구태자께서는 용궁으로 돌아와 도움을 구하면서 3일 동안 무릎을 꿇고 앉아 비셨소.

    하지만 용왕님의 허락은 얻지 못했고, 그때 영아의 한 가닥 잔혼이 마지막으로 구태자님을 찾아왔지. 그 이후로 구태자깨서는 용궁과의 연을 끊고 노화궁으로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셨소. 용왕께서는 후회가 되셨는지 나중에 용궁의 수족들을 노화궁으로 보내 주둔케 하셨고…….’

    심협은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자 비통한 심정이 되어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한데 그때, 뜬금없는 청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말하고 보니, 그 영아 낭자도 그대와 인연이 좀 있는 것 같소.’

    ‘나와 인연이 있다?’

    심협이 의아한 듯 물었다.

    ‘그해 대력산 천갱의 벽안금섬을 기억하시오?’

    ‘설마…… 그때 오홍이 벽안금섬을 찾아서 구하려고 했던 이가 바로 그 영아 낭자란 말이오?’

    심협은 놀라 되물었다.

    ‘그렇소. 바로 그녀요.’

    심협은 그 답변에 마음이 더욱 울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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