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357화 (357/1,214)
  • 357화. 장공주 오월(敖月)

    “부왕(父王)께서는 지금 어디계십니까?”

    오홍이 물었다.

    “수원궁(水元宮)이 너무 심하게 훼손되어 부왕께서는 잠시 수수궁(水秀宮)에서 수양하고 계신다. 따라오너라.”

    오중도 더는 오홍을 힐난하지 않고 몸을 돌려 떠났다.

    그가 돌아서는데, 그 뒤에 있던 붉은 갑옷 여인이 얼굴에 미소를 띠며 오홍에게 예를 갖추고는 말했다.

    “구태자님을 뵈옵니다.”

    “구태자는 무슨……. 오흔(鰲欣), 아홉째 오라버니라고 불러라.”

    오홍은 인상을 찌푸리며 짐짓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오흔이라는 이름의 여인은 오중의 등을 가리키며 설레설레 흔든 뒤, 쓴웃음을 지으며 입모양으로 소리 없이 ‘아홉째 오라버니’하고 불렀다.

    이를 본 오홍의 얼굴에 그제야 웃음이 번졌다.

    오중은 뒤따르던 사람들에게 주위를 순시하도록 명한 뒤, 오홍과 심협 일행을 데리고 수수궁으로 향했다.

    심협은 그곳에 도착하고서야 용궁의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을 알게 됐다. 어떤 이는 집을 수리했고, 어떤 이는 부상자를 치료하는 중이었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오중 일행을 보는 순간 즉시 모든 동작을 멈추고 예를 갖췄다. 심협이 보기에 그저 신분에 대한 존대가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존경과 감사였다.

    ‘청질 도우, 이(二)태자께서는 용궁에서 아주 존경을 받는 것 같소.’

    심협이 벽수야차에게 전음으로 말했다.

    ‘심 도우는 모르겠지만, 이번에 용궁에서 전화위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태자 전하의 공로였소. 그가 용연을 포위한 요마들을 물리치고 모두를 구했으니까.’

    ‘용연을 포위했다면 분명 아주 강력한 요마들이었을 텐데 말이오?’

    심협이 다소 의문스러운 듯 되물었다.

    ‘삼수마교 한 마리였는데, 그놈이 정말 못돼먹은 놈이긴 하오만 대단하긴 정말 대단했소이다.’

    감탄한 듯한 청질과 달리 심협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더는 캐묻지 않았다.

    잠시 후, 일행은 청옥을 쌓아 만든 듯 전체적으로 새파란 대전 바깥에 이르러 멈춰 섰다.

    대전 문 앞에는 수족 아홉 명이 모여 있었는데, 그중에는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장수도, 유포를 입은 문인도 있었다. 아마도 용궁의 문신과 무장인 듯한 이들은 오중 일행을 보자 곧바로 다가와 하나둘 예를 갖췄다.

    오중도 답례를 한 뒤, 눈으로 뒤쪽을 훑어보며 오홍과 원타에게 말했다.

    “부왕께서는 이 안에 계시니 너는 나와 원 백부님을 따라 들어가고, 다른 이들은 바깥에 남겨 두어라.”

    오홍은 잠깐 주저하더니 심협에게 사과하고는 잠시 바깥에서 기다려 달라 한 후에 오중, 원타와 함께 수수궁으로 들어갔다.

    심협은 전혀 개의치 않고 다른 이들과 함께 문 밖에서 기다렸다.

    “심 도우, 그동안 어디에서 수행하셨소? 왜 줄곧 구태자 전하와는 연락도 하지 않은 거요?”

    청질이 그제야 마음껏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돼 기쁜 듯 웃으며 물었다.

    반면 심협은 일순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솔직한 대답이야 ‘내가 뭘 하러 갔는지 나도 모른다오’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간 세상이 불안정하여 줄곧 산에서 수행을 해왔고, 산 밑으로 내려온 적도, 옛 친구들과 많이 연락한 적도 없소.”

    심협은 어쩔 수 없이 말을 꾸며냈다.

    “감히 묻겠소만, 심 도우는 어느 문파 출신이오?”

    청질이 또 물었다.

    심협은 무의식적으로 춘추관이라고 말하려 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방촌산이라고 답했다.

    “아이고, 보제조사 문하에 계셨었구려. 이거 실례가 많았소!”

    방촌산이라는 유명한 이름을 듣자, 청질은 갑자기 공손히 굴었다.

    심협은 그저 예의상 웃어주고는 말을 이어받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한 가지 일이 떠올라 잠시 망설이더니 전음으로 청질에게 물었다.

    ‘청질 노형, 오홍과 그의 둘째 형님은 어째 관계가 조금 미묘해 보이오?’

    심협의 ‘노형’이라는 말에 청질은 마음이 편안해졌지만, 내색하지 않고 이렇게 답했다.

    ‘심 도우의 경지로 보나 심 도우와 구태자님의 관계로 보나, 나를 그리 부르는 것은 합당치 않소이다.’

    ‘하하! 심모는 그저 노형의 성정이 호탕하고 할 말이 있으면 솔직히 말하는 사나이라고 느껴져서 그리 말했을 뿐이오. 게다가 나이도 나보다 위인 듯해서 말이오. 그러니 적절한 호칭 아니겠소?’

    심협이 이렇게 치켜세워주자, 청질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원래 귀한 분들의 일은 일개 부하인 내가 뭐라 말하기 곤란하지만, 심 아우는 구태자님의 절친한 벗이기도 하니 남이라 할 수 없을 터. 내 말해주겠소.’

    청질은 대단한 비밀이라도 있는 듯 잠시 말을 끊었다.

    ‘청질 노형, 혹여 금기를 범하는 것이라면 말하지 마시오. 난 그저 궁금했던 것뿐이니.’

    심협은 이렇게 말했으나, 이는 나름 치밀하게 계산된 수였다. 뒷말 주워섬기기를 좋아하는 청질은 이미 충동질을 당했고, 말도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니 어찌 이제 와서 입을 다물겠는가?

    ‘괜찮소. 본디 비밀도 아니고, 용궁 안에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니 말이오.’

    ‘아, 그렇다면 듣고 싶구려. 말씀해주시오.’

    심협은 속으로 웃음을 참으며 목소리를 전했다.

    ‘하아……. 말하자면 이 일은 우리 용왕님 탓이오. 어릴 적부터 구태자 전하를 너무도 총애하시니, 용궁에서 처음으로 태어난 용자(龍子)로서 이태자 전하로서는 불만이 생기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소!’

    청질은 가볍게 탄식했으나, 심협은 뭔가 의아했다.

    ‘이태자가 첫 번째 용자라고요?’

    ‘맞소. 이태자님 위로는 오월(敖月)이라는 장공주 한 분만 계시오.’

    청질의 답에 심협이 뭔가를 더 물어보려는데, 수수궁의 문이 갑자기 활짝 열리더니 오중이 나타나 말했다.

    “너희도 들어오너라.”

    이에 청질과 오흔이 동시에 답하고는 앞장서서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

    심협도 따라 들어가 안쪽을 훑어보니, 대전 깊은 곳에 백옥 용연(*龍輦: ‘연’은 황제가 타는 수레를 말함)이 하나 놓여 있었고, 그 위에 건장한 몸집의 금포 차림 사내가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눈썹과 별처럼 빛나는 눈, 우뚝한 콧날, 가시처럼 금빛 뿔이 돋은 이마, 짧은 수염을 기른 턱. 안색이 조금 창백하여 병색을 띠었지만, 여전히 그 존귀한 자태를 가리지는 못했으니, 이 사람이 바로 동해 용왕 오광(敖廣)이었다.

    그의 곁에는 은빛 용 비늘 갑옷에 머리에는 짧은 뿔이 돋은 아름다운 여인이 서 있었다. 보통 여인들보다 훨씬 크고 건장했으며, 푸른 장발은 금과 옥으로 장식한 관으로 올려 묶어, 뒷모습만 봤다면 헌헌한 사내로 오인할 만했다.

    여인은 빼어나게 아름다웠지만, 평범한 여인들의 부드러운 분위기와는 달리 뽀얀 뺨에는 윤곽이 뚜렷했고, 눈썹은 멀리 있는 산처럼 검푸른 빛이 돌았으며, 눈동자는 은하수가 빛을 숨긴 듯했다. 또한 콧날은 커다란 산처럼 오똑했고, 입술은 칼날이 가로로 놓인 것처럼 얇고 가늘어 재기 넘치고 기세가 비범해 보였다.

    심협은 이 사람이 아마도 청질이 말했던 장공주 오월일 것이라 짐작했다.

    용연의 반대편에는 긴 치마를 입은 여인 몇 사람이 서 있었는데, 다들 안절부절못하고 불안해하거나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얼굴 가득 절망스런 표정이었다. 아마도 다른 용녀들인 것 같았다.

    “용왕을 뵈옵니다.”

    세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 예를 갖추며 차례로 포권했다.

    “심 소우, 오홍의 말을 들어보니 동해만에서 요마들의 습격을 받았을 때 자네가 그를 구했다지?”

    용왕 오광은 눈으로 방금 들어온 세 사람을 찬찬히 훑어보고는 몸을 살짝 고쳐 앉으며 먼저 심협에게 물었다.

    이에 막 심협이 답하려는데, 식해 속에서 오홍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심형, 그대가 삼수마교를 죽인 일을 포함하여 우리가 겪었던 일들을 비밀로 해줄 수 있겠소?’

    심협은 그 말을 듣고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그러기로 했다.

    “저와 오홍은 본디 알고 지내던 사이였고, 우연히 마주치게 되어 함께하게 됐을 뿐입니다.”

    심협이 말에 오광이 계속해서 물었다.

    “그대들과 맞붙었던 것이 곤붕 요마였나?”

    “맞사옵니다. 그놈의 신통력이 워낙 대단한지라 저희는…… 당해내지 못하였사옵니다.”

    심협은 오홍의 부탁을 떠올리며 두루뭉술하게 답했다.

    “절세의 괴물과 맞붙었으니 살아남은 것만으로 쉽지 않은 일이지. 내 아들의 목숨을 구해준 것에 깊이 감사하네. 비록 용궁이 변고를 당하긴 했으나 예는 지켜야지. 잠시 뒤에 홍아(弘兒)가 자네를 보고(寶庫)로 안내할 걸세. 가서 보물 하나를 고르게.”

    오광은 심협의 말에 잠시 묵묵히 생각해보더니 말했다.

    심협은 뜻밖의 행운에 가슴이 뛰었다. 용궁의 보물 창고는 평범한 곳이 아니다. 과거 제천대성 손오공이 처음 두각을 드러냈을 때에도 용궁에 와 보물을 빌려갈 정도였으니 얼마나 대단한 곳일지 상상도 하기 어려웠다.

    “용왕의 성심을 이 후배 감히 거절할 수 없사오니 감사하게 받겠사옵니다.”

    심협이 깍듯하게 포권을 했다.

    “오흔은 이번에 중아(仲兒)를 도와 마족을 물리치고 용궁을 되찾았으니, 그 공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잠시 뒤에 마찬가지로 중아와 함께 보고로 가 상으로 보물을 하나 고르거라.”

    오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선을 다시 오흔에게로 옮기며 말했다.

    “감사하옵니다.”

    오흔은 기쁜 표정으로 포권하고는 몇 걸음 물러났다.

    “작금의 천하에는 난리가 끊이질 않고 천정은 이미 무너졌으니, 우리 사해의 용궁도 이 겁운에서 벗어날 수가 없느니라. 이번에 요마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격퇴할 수 있었던 것은 실로 행운이지만, 분명 머지않아 놈들이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쳐들어올 것이다.”

    오광은 약간 가라앉은 눈으로 느릿느릿 말했다.

    “감히 다시 쳐들어온다면, 소자가 반드시 놈들이 살아 돌아가지 못하게 할 것이옵니다.”

    오중이 힘을 주어 외쳤다.

    그러나 오광은 그런 아들을 슬쩍 쳐다보고는 별다른 반응 없이 말을 이었다.

    “이번에 곤붕과의 싸움에서 나는 극심한 부상을 입어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목숨이 다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야. 허나 나라에는 하루라도 임금이 없어서는 아니 되고, 집에는 주인이 잠시라도 없어서는 아니 되는 법. 하여 내 뒤에 용궁의 주인이 될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오광의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용궁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협마저 안색이 변했다.

    그는 용왕의 부상이 깊다는 것을 알아차리긴 했지만, 그 정도로 심각하리라곤 생각지 못했고, 하물며 오광이 이토록 많은 외부인 앞에서 그런 일을 입 밖에 낼 거라고는 더더욱 생각지 못했다.

    “용왕님, 우리 용궁에 남아도는 게 선단이며 영약이옵니다. 그러니 분명 무사하실 겝니다.”

    노승상 원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부왕(父王)!”

    오중이 낮은 소리로 외쳐 불렀다.

    오홍은 비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용연 뒤에 선 오월은 이미 이 일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인상을 살짝 찌푸릴 뿐이었다.

    “나의 상태는 내가 제일 잘 아니, 이 점은 그대들이 더 뭐라 말할 필요 없네. 누가 용궁의 통치자가 되어 동해의 수족을 다스릴 수 있을지 다들 어찌 생각하는가?”

    오광의 질문에 온 대전은 침묵에 잠겼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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