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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356화 (356/1,214)

356화. 무너진 담벼락

심협은 상대에게서 전해져오는 강한 압박감에 주저 없이 전력으로 황정경 공법을 운공했다. 순간 그의 온몸이 환한 금빛을 발하면서 거의 실체에 가까운 기운이 뿜어져 나와 주위 바닷물을 밀어내고 커다란 구멍을 만들어냈다.

동시에 용과 코끼리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커다란 금빛 허상들이 하나하나 떠올라 주위를 맴돌더니 여섯 용과 코끼리의 힘이 치솟았다.

그를 태우고 있던 오홍은 마치 웅대한 산을 짊어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금룡인 그의 몸으로도 하중을 견뎌낼 수 없어 서서히 아래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심협은 힘을 끌어모은 뒤 높은 곳으로 곧장 뛰어올랐다. 그는 한 팔을 허리춤에 붙인 채, 금빛 대전에서 싸웠던 천강병을 떠올리면서 상대가 지녔던 권법의 진의(眞意)를 응집시키고, 용과 코끼리의 힘에 결합해 맹렬하게 쳐올렸다.

심협이 주먹을 뻗는 순간, 거대한 금빛 권영(拳影)이 금룡 무리와 거대한 코끼리의 돌격 속에 곧장 위로 솟구쳤다. 그리고 권영이 채 닿기도 전에 천둥이 치는 듯한 파공음이 울렸다.

콰르릉!

바다 밑에서 금빛이 번쩍이더니 금빛 권영이 거대한 짐승의 창백한 얼굴을 정통으로 때리며 격렬한 폭발음이 퍼졌다. 뒤이어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더니, 순식간에 거미줄 같은 거대한 균열이 온 얼굴에 가득 뻗어 나가면서 곧이어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크아악!”

그 거대한 짐승은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르며 빠른 속도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아직 살아 있단 말인가?”

심협의 눈에 의외라는 기색이 스쳤다.

그는 몸에 빛을 번쩍이며 상대를 쫓아가려 했는데, 그때 아래에서 오홍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형, 쫓아가지 마시오!”

심협이 그 다급한 목소리에 멈칫하다가 돌아보니, 오홍이 이미 사람의 모습을 회복하고 빠르게 다가왔다.

“오형, 저놈은 이미 중상을 입었는데 왜 쫓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오?”

심협이 의아한 듯 물었다.

“오랜 옛날부터 동해 깊은 곳에 존재해온 거대한 요괴들인데, 그리 만만한 놈들이 아니오. 그대가 방금 깨부순 것은 그의 머리 중 하나일 뿐, 그 정도 부상은 그들의 본체에는 아무것도 아니오.”

“머리 하나? 그렇다면 저놈은 머리가 몇 개나 된단 말이오?”

오홍의 어두워진 표정을 보며 심협은 신기한 듯 되물었다.

“머리가 모두 아홉 개요. 또한 그 몸뚱이는 늘어날 수도, 줄어들 수도 있어서 크기를 바꿀 수 있소. 방금 몸집의 크기로 보아, 나머지 여덟 개의 머리는 근처에 없을 것이오. 좀 전에 달아나는 것을 보아하니 본체가 있는 곳으로 피하려는 게지요. 혹시라도 다른 머리들까지 합류하게 된다면 심형이라도 위험할 거요.”

“음, 머리 하나 만으로도 저토록 강력하다면, 태을진선쯤 되어야 저놈을 죽일 수 있지 않겠소?”

심협이 더욱 놀란 듯 감탄사를 내뱉었다.

“예전에 저놈이 동해를 어지럽혀 천정에서 정말로 태을진선 한 명을 파견해 동해 용궁을 돕게 했소. 덕분에 결국 놈을 용연 깊숙한 곳에 봉인할 수 있었지요. 한데 지금 저놈이 용연에서 탈출한 것을 보니 용궁이 위태로운 모양이오.”

오홍이 근심을 감추지 못하자 심협은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너무 많은 생각은 하지 맙시다. 일단 최대한 빨리 용궁으로 가봐야 어찌 된 일인지도 알 수 있을 거요.”

그 말에 오홍은 마음속 잡념들을 억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곧장 출발하여 용궁을 향해 빠르게 내달렸다.

깊은 바닷속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하여 감히 다가오는 다른 짐승들은 더 이상 없었고,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몰래 엿보던 놈들까지도 지금은 소리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약 두 시진 뒤, 심협과 오홍이 해저 산맥을 넘자 마침내 해저의 산봉우리 한가운데에 드넓은 면적을 차지한 건물 군락들이 보였다. 멀리 바라보니, 건물 군락들 바깥은 거대한 반투명 빛 덮개로 덮여 있었는데, 그 위로 오색 빛이 반사되어 바다 전체를 눈부시게 비추었다.

“저곳이 용궁이오?”

심협이 물었다.

오홍은 복잡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고. 한데 평소 용궁 수백 장 안에는 순해야차(巡海夜叉)들이 늘 부대를 이끌고 순시하는데, 지금은 용궁 전체에 생기라고는 전혀 없는 것을 보니 부왕(父王)을 비롯한 사람들의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소.”

“그들이 후퇴하여 용연을 지킨다고 하지 않았소? 곧장 그리로 가보는 게 어떻겠소?”

“좋소! 용연은 용궁 깊은 곳에 있으니, 우선 용궁에 잠입한 다음 용연으로 갑시다.”

짧은 대화를 마친 두 사람은 각자 기운을 거둬들인 뒤, 더 이상 법력을 쓰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용궁의 투명한 빛 덮개 바깥에 도착했다.

빛 덮개의 정동 방향으로는 수정 문루가 하나 세워져 있었다. 그 위에는 금빛 세로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고대 전서체로 수정궁(水晶宮)이라는 세 글자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오홍은 심협을 안내해 대문을 돌아 어느 수정벽 앞에 이르러서는 손을 뒤집고 수정 영패를 꺼냈다. 이어서 한 손을 결인하고 영패를 가볍게 한 번 눌렀다.

그 순간, 영패 위에 용 그림자 하나가 나타나더니, 금빛이 한 줄기가 솟아나와 투명한 빛 덮개 위를 때렸다. 그러자 금빛이 자욱하게 피어오르면서 6척 높이의 금빛 가상의 문을 비추었다.

두 사람이 문을 지나 용궁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느닷없이 커다란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간덩이가 부은 요괴 놈들! 감히 용궁을 범하러 오다니! 죽고 싶은…….”

심협은 눈썹을 슬쩍 치켜 올리면서도 어쩐지 조금 낯익은 목소리를 느꼈다.

한데 그가 돌아보기도 전에 갑자기 머리 위에서 거센 바람이 불더니 매우 날카로운 은빛이 허공을 가르며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심협은 인상을 찌푸리며 황정경 공법을 운공해 단번에 그 은빛을 움켜쥐었다.

은빛은 순간 몸부림치면서 심협을 찌르려 애썼고, 간간이 윙윙 울리는 소리를 냈다.

심협이 차게 웃으며 팔을 홱 떨치자, 펑 하는 가벼운 소리와 함께 그 은빛이 순식간에 흩어지고 비늘무늬 가득한 은빛 오고탁천차(五股托天叉)가 그 사이로 본 모습을 드러냈다.

이를 본 오홍이 한숨을 내쉬며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청질, 무작정 나서는 네 버릇은 언제나 고쳐지겠느냐?”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러더니 이내 귀신이 곡하는 듯한 외침이 들려왔다.

“아이고, 구태자 전하! 구태자 전하시군요. 드디어 돌아오셨습니까?”

곧이어 낯익은 건장한 형체가 다급히 앞의 한 건물 뒤에서 달려왔다.

건장한 형체는 웃통을 벗은 상태였는데, 검푸른 얼굴에 뾰족한 이가 드러난 험상궂은 얼굴 위로 머리에는 불꽃 두 덩이가 머리카락처럼 일렁였으며, 등과 팔꿈치에 지느러미가 달린 것이, 일전에 대력산에서 만났던 벽수야차였다.

다만 당시 만났을 때와는 달리 지금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두텁고 우렁찼는데, 뜻밖에도 이미 대승 후기에 도달해 있었다. 다만 몸 곳곳의 상처들로 보아 격렬한 악전고투를 치렀음을 알 수 있었다.

청질은 오홍을 향해 예를 갖추고는 조금 의심스러운 눈으로 심협을 한 차례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머리를 긁적이며 잠시 생각하다가 마침내 그를 기억해내고 화들짝 놀랐다.

“너는!”

“청질, 무례히 굴지 말거라. 심형은 지금 이미 진선의 경지에 오른 수사다.”

오홍이 웃으며 말했다.

“얼핏 봤을 때는 변한 게 없어 보였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기운이며 기개, 풍채…… 모두 달라졌구려. 대단합니다. 대단해요!”

청질은 그제야 알아차리고는 습관처럼 아래턱을 문지르며 감탄했다.

심협은 손목을 빙글 돌리더니 은빛 오고탁천차를 거꾸로 쥔 채 청질에게 돌려주면서 웃었다.

“청질 도우. 오랜만이오.”

“그러고 보니 정말 오랜만이오. 그때를 생각하면…….”

청질은 두 손으로 자신의 무기를 받아 들며 옛일을 회상하려는 듯 시선을 먼 곳으로 향했다.

이를 본 오홍은 그가 입을 열까 저어되어 황급히 말을 막았다.

“청질, 용궁은 어찌 되었느냐? 우리 부왕께서는……?”

“구태자님, 직접 들어가서 보시지요.”

청질이 다소 어두워진 안색으로 길게 탄식하자 오홍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청질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돌아서서 앞장 서 길을 안내했고, 심협과 오홍은 곧장 그의 뒤를 따라갔다.

용궁 정문에 이르니 웅장했던 3층 9주(柱)에 금과 백옥으로 장식된 패루(*牌樓: 거리나 공원에 장식용으로 만들어 놓은 처마가 달린 건축물)는 절반쯤 무너져 내렸고, 부서진 옥돌 무더기가 깨진 벽돌이나 기왓장처럼 한쪽에 쌓여 있었다.

문루를 지나 곧장 안으로 들어가 보니 양쪽으로 늘어선 정교하고 아름다운 건물들은 온전한 곳을 찾아보기가 힘들었고, 시선이 닿는 곳마다 무너진 담벼락이 즐비했으며, 그 위로 선혈이 낭자했다.

“청질 도우, 낭생은 무사하오?”

심협이 눈빛을 살짝 굳히며 물었다.

“그 꼬마 새우를 말하는 거요?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났소이다.”

청질의 말에 심협은 일순 대꾸할 말을 잃었다가 한참 후에야 물었다.

“이번 전쟁 중에 죽은 것이오?”

“아니오. 그 꼬마새우는 수행 자질이 그저 그래서 몇 년 전까지 좀처럼 경지를 돌파하지 못했소.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고는 위험을 무릅쓰고 경지를 높이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성공하지 못했지요.”

심협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수행의 길에는 늘 뜻밖의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나 씁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 근심 많은 난세에 살아갈 필요가 없게 됐으니 나쁜 일만은 아닐 게요.”

침묵을 참기 힘들었는지, 청질이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심협은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여전히 침묵했다.

용궁 깊숙한 곳일수록 가옥들은 심하게 훼손되었고, 무너진 폐허에는 수많은 용궁 수족들의 시신이 보였다. 갈수록 싸움이 더욱 처참했음을 알 수 있었다.

길을 따라 새우 병사와 게 장군 등 용궁의 병사들이 상황을 정리하고 그나마 구제할 수 있는 건물들을 보수하면서 그 안에 파묻힌 시신들을 수습하고 있었다.

그때, 앞에서 한 무리의 군대가 달려왔다.

우두머리는 훤칠한 키에 잘생긴, 건장한 남자였다. 금실로 수놓은 자줏빛 원령장포를 입고, 허리에는 용이 조각된 옥패를 단 채, 뒷짐을 지고 서 있었는데, 표정은 냉담했다.

그의 오른쪽 반걸음 정도 뒤에는 선홍색 갑옷을 입은 미모의 여인이 보였다. 몸매가 풍만했으나 요염하다는 느낌보다는 깨끗하고 수려한 이목구비와 어우러져 반전의 아름다움으로 느껴졌다.

여인의 등에는 몸집이나 미모와 어울리지 않는 넓적하고 커다란 검이 한 자루 매여 있었다. 시선은 거의 앞쪽의 훤칠한 사내에게 머물렀는데, 아리따운 눈길 속에 여인의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 여인과 거의 나란히 선 사람은 수염과 머리칼이 하얀, 등이 굽은 노인이었다. 표정은 온화했고, 긴 눈썹이 무릎까지 드리워져 거의 눈을 가릴 정도였으며, 손에는 영롱한 녹색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한 무리의 용궁 군대가 세 사람을 뒤따랐는데, 하나같이 엄숙한 표정으로 손에는 무기를 든 채였고, 제법 살기가 짙었다.

오홍은 발걸음을 재촉하며 그들을 맞이했다.

“둘째 형님, 원 백부님.”

오홍이 앞으로 나서서 포권을 하는 동안 심협의 마음속에도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내 둘째 형님인 오중(敖仲)과 용궁의 원타(元鼉) 승상이시오.’

청질도 재빨리 앞으로 나아가 허리를 굽히고 예를 갖췄다.

심협도 발걸음을 늦추고 가까이 다가가 포권했지만, 큰절을 하지는 않았다.

“구태자께서 돌아오셨군요. 아주 잘되었습니다. 용왕께서 오랫동안 기다리셨습니다. 이 늙은 놈이 하마터면…… 구태자님을 뵙지 못할 뻔 하였습니다.”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비척비척 앞으로 나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원 백부님, 다 저의 잘못입니다. 제가 늦게 돌아온 탓이니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오홍은 탄식하면서 원타를 재빨리 부축해 일으키고는 괴로운 듯 말했다.

“아닙니다. 돌아오셨으니 되었습니다. 돌아오셨으니 됐어요.”

오홍의 손을 가볍게 도닥이는 원타의 눈시울이 조금 붉어졌다.

“아홉째야, 어찌 너 혼자 돌아온 것이냐? 네 수하의 외주군(外駐軍)들은?”

자줏빛 옷의 남자, 오중이 심협 뒤쪽을 쓱 훑어보고는 그 칼날 같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쌀쌀맞은 투로 말했다.

“그건 부왕을 뵙고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여러분께 소개해 올리지요. 이쪽은 심협으로 저와 오랫동안 사귀어 왔으나 이제껏 용궁에 방문해본 적이 없는…….”

오홍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오중이 불쑥 끼어들었다.

“때가 어느 때인데 바깥사람을 데리고 돌아왔느냐? 집안이 충분히 어지럽지 않아서 그런 것이냐?”

그 말에 오홍은 말문이 막혔는데, 불쾌한 듯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그는 나이 차이가 꽤 나는 이 둘째 형과 줄곧 맞지 않아서 이제껏 형님으로 예우했을 뿐, 조롱과 비난을 받아도 따지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생명의 은인이기도 한 심협이 이런 무시를 당하니 오홍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가 따지고 들려는 순간, 심협이 전음으로 일깨워주었다.

‘오형, 하찮은 일은 넘어갑시다. 우선 용왕님을 뵈러 가서 현재 상황을 분명히 알아본 뒤에 다시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소.’

오홍은 잠깐 주저하더니,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

하지만 원타는 오홍이 잠시 멈칫했던 것과 표정의 변화를 포착했다. 용왕을 오랫동안 보필했던 노신답게 그는 세상물정에 정통했고, 자연히 심협이 오홍을 말렸으리라 짐작하게 됐다. 이에 절로 심협에게 호감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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