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화. 천책(天冊)
심협은 다시 의식을 움직여 다른 혼백과 소통해보려 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 뒤로도 몇 번이나 연달아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한 심협은 이내 천천히 두 눈을 뜨고 물었다.
“선배님, 소환하는 데 어떤 요령이라도 있는 겁니까? 거듭 시도해봐도 아무 성과가 없군요.”
“천책의 소통 방법은 온전히 신혼에 의지한다. 나는 남겨둔 게 아무것도 없어. 지금 이런 상황은 천책이 나뉠 때 천선에 대한 구속력이 크게 줄어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 천병, 천장들과 천책에 담긴 신혼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누군가 철저하게 끊어버린 것이지.”
이정이 잠시 생각을 정리하더니 말했다.
“그렇다면 이 천책은 이미 계륵(鷄肋)으로 전락한 것 아닙니까?”
“아니, 그저 내 추측이었을 뿐이다. 어쩌면 천병과 천장들이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궁여지책으로 자아를 봉인한 것인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천책이 그들을 소환할 수 없는 것은 매한가지다.”
여기까지 들은 심협은 무언가 추측되는 바가 있어 움찔 떨었다.
“선배님, 이 천책은 여러 권으로 쪼개졌다면 누군가가 다른 일부를 틀어쥐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만약 그 사람도 천책 속 천병과 천장들을 소환하고 있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게 바로 내가 말하려던 세 번째 추측이다. 다른 사람이 너보다 한 발 앞서 천책의 다른 부분을 얻었고, 그 힘을 이용해 천병과 천장들을 거머쥐었다면, 너는 그들을 소환할 수 없게 되는 거지.”
“알겠습니다.”
심협은 그제야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은 천책을 잘 챙겨두어라. 훗날 모든 천책을 모아 완전히 장악하면, 그때는 태을진선에 맞먹는 요마를 마주친다 해도 맞설 수 있을 것이다.”
심협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말하는 이정의 모습은 마치 집안 어른이 손아랫사람에게 당부하는 것과 비슷했다. 실제로 이는 당부이자 가르침이기도 했다.
“선배님께서는 제 수련도 도와주셨고 천책도 전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이 후배가 어찌 해야 할지 나아갈 길도 가르쳐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심협이 손을 휘둘러 천책을 미간으로 불러들이며 조심스레 물었다.
“운명이 너를 내 앞으로 이끌었으니, 앞으로도 네가 갈 길도 운명이 인도해줄 것이다. 그러니 나로서는 더 가르칠 것이 없느니라.”
이정이 말을 마치자 온몸에서 빛나던 금빛이 차츰 엷어지기 시작하면서 그의 힘도 점점 사라지는 듯했지만, 눈빛만큼은 여전히 잠잠했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그는 마침내 뭔가가 기억난 듯 눈빛이 생기를 되찾았고,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닫았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선배님, 뭐라 하셨습니까?”
심협은 즉시 한 걸음 다가가 물었으나, 이정의 한 가닥 혼백도 마침내 그 기운을 다하여 하려던 말을 미처 내뱉지 못했다. 그의 얼굴에는 해탈한 듯한 표정이 드러났고, 뒤이어 금빛이 흩어져 사라지며 한 줄기 연기로 변했다.
“선배님…….”
심협은 알 수 없는 슬픔이 차올라 입속말로 이정을 불렀다.
보좌 위의 금빛 해골도 한순간에 무너져 내려 금빛 먼지로 변해 완전히 흩어져 버렸고, 자그마한 금빛 보탑만이 홀로 남아 땅바닥에 떨어졌다.
심협은 재빨리 다가가 금탑을 주워들었다. 층층이 탑신(塔身)을 살펴볼수록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그는 점점 더 많은 종말의 징조를 보게 되었고, 더 많은 세간의 위험과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또 더 많은 능력을 익히게 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더 많은 책임을 지게 되는 것만 같았다.
우몽의 아버지가 전수해준 부적부터, 마 파파에게서 배운 법기 제련 비결, 방촌산의 여러 가지 선법(仙法)들, 그리고 오늘 탁탑천왕이 맡긴 천책까지……. 이 모든 것들이 한 걸음 한 걸음 그를 오늘날의 심협으로 만들었다.
그는 금탑을 챙기고 다시 한번 사방을 둘러보았다. 허공에 점점이 금빛이 나타나 반딧불처럼 찬란하게 떠올랐다가 불꽃처럼 빠르게 흩어졌다.
* * *
이장이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 심협이 자신의 사명을 받아들인 그 순간, 끝없이 광활한 쪽빛 바다 위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느닷없이 거대한 형체가 나타났다. 그림자만으로 온 하늘을 가리고 바닷가에 떠 있는 둘레 수백 장의 거대한 섬을 완전히 뒤덮어버렸다.
그 거대한 형체가 두 날개를 활짝 펼치니, 너비가 무려 천 장에 이르렀다. 놀랍게도 이 형체는 전설 속의 거대한 새, 곤붕이었다.
한데 이 곤붕은 처량하기 이를 데 없이 울부짖는 중이었고, 몸의 깃털들은 빠른 속도로 떨어져 나가 광풍에 휩쓸려 하늘로 흩어졌다.
몸에서 떨어져나간 회백색 깃털들은 온 하늘을 가득 메웠으나, 채 백 장을 날지 못하고 빠르게 부패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솟아나면서 눈에 보일 만큼 빠르게 천지에 흩어져 사라졌다.
깃털을 잃은 곤붕의 몸뚱이 또한 빠르게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맨살이 드러난 육신에서도 하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면서 한순간 반경 수십 리를 뒤덮었다.
콰르릉!
요란한 굉음과 함께 추락하던 곤붕은 어느 외딴 섬에 거세게 처박혔고, 거대한 몸뚱이는 섬 전체를 가로질렀지만, 머리와 두 발, 꼬리는 섬에 담기지 못해 바닷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곤붕의 육신에서는 여전히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솟았고, 피와 살, 근육은 빠르게 부식되어 대부분 증발하고 이내 새하얀 뼈대만이 남았다.
뼈대 하복부의 텅 빈 구멍에서는 금빛 한 조각이 끝내 최후의 빛을 번득이고는 이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금빛이 사라진 곳에서 세 사람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가운데 있는 사람은 바로 심협이었다.
그는 이 거대한 곤붕의 뼈대를 보고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한 사내를 보고서야 자신이 금탑에서 빠져나왔을 뿐만 아니라 꿈속 세상에서 자신과 심옥 등을 집어삼켰던 곤붕의 뱃속에서 빠져나왔음을 알게 됐다. 그가 고개를 돌려서 본 사내는 금비늘 갑옷을 입고 머리에는 짧은 뿔이 우뚝 돋은 잘생긴 청년이었다.
“오홍!”
심협은 무의식적으로 사내의 이름을 불렀으나, 시선은 반대편에 나타난 다른 형체에게로 옮겨갔다.
거대한 곤붕의 유골 아래, 검은 장포를 입고 머리에는 팔면흑관(八面黑冠)을 쓴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 장발을 풀어헤친 채였지만, 처음 봤을 때 몸을 휘감았던 검은 마기는 사라지고 자못 평범한 중년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일전에 곤붕에게 집어삼켜지기 전, 오홍과 결전을 벌이던 그 머리 셋 달린 교룡이었다.
“심형, 조심하시오!”
오홍은 경계하는 목소리로 외치고는 손목을 빙글 돌려 비룡재천창(飛龍在天槍)을 쥔 채 심협 쪽으로 다가왔다. 한데 어째서인지 그의 동작은 조금 더뎌 보였다.
심협은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는 몸을 가누고 선 뒤에야 지금 자신은 이미 진선 초기 수사로서 결코 예전처럼 나약하지 않음을 문득 기억하고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오청이라는 이름의 삼수교(三首蛟)는 기습해오지 않고 단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열 손가락을 구부리고 달려들 자세만을 취했다.
심협은 신식을 움직여 사방을 슬쩍 훑어본 뒤, 뭔가 발견한 듯 눈썹을 슬쩍 치켜 올렸다. 하지만 이내 신식을 삼수교에게 집중하여 거리낌 없이 살펴보기 시작했다.
오청도 자연히 이를 알아차리고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자 머리에 쓴 팔면흑관에서 갑자기 새카만 빛이 번득이더니 커다란 우산처럼 펼쳐졌다.
심협의 신념은 검은 관에 닿자마자 툭 하고 튕겨 돌아왔다.
그러나 찰나의 접촉만으로도 그는 무언가를 눈치챘다.
“중상을 입어 원기가 크게 상한 모양이오.”
심협이 가까이 다가온 오홍에게 말했다. 동시에 그는 오홍의 기운도 똑같이 불안정함을 알아차렸다. 안색이 조금 창백한 것이, 마찬가지로 원기가 심하게 소모된 것 같았다.
심협의 말에 오홍도 빤히 오청을 노려보며 신식을 뻗어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신식은 팔면흑관의 검은 빛에 맞고 튕겨나갔을 뿐,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오홍은 조금 낙심한 시선을 심협에게로 돌렸다가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심형, 그대의 기운이……?”
심협은 무의식중에 자기 몸을 살펴보았고, 이내 안색이 급변했다.
“이게 어찌된 일이지?”
그는 놀랍게도 자기 몸에 전해져 오는 법력 파동이 겨우 대승 중기밖에 되지 않는 것을 알아차렸다.
“심형, 전에 금탑 바깥에서 그대를 보았을 때는 출규기 경지에 불과했는데 어찌 단숨에 대승 중기에 이르렀소?”
오홍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심협도 순간 넋이 나가 다시 신식으로 단전과 온몸의 법맥을 샅샅이 살펴보았고, 곧 그 안에 축적된 법력의 중후함이 절대 대승 중기의 그것일 리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나 스스로도 잠시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그날 나는 금탑에 들어가 한 차례 수련을 거치며 기연을 조금 얻었소. 그래서 이런 변화가 생긴 것이오. 아, 그대는 혹시 다른 사람을 보았소?”
방금 주위를 살펴본 결과, 이 작은 섬과 주위의 넓디넓은 바다에서는 다른 이의 흔적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요괴와 마귀, 용궁의 후손들까지 모두 세상에서 증발해버린 것만 같았다. 백벽과 심옥 등도 보이지 않았다.
심협은 문득 뭔가를 알아차리고 낯빛이 어두워졌다. 한데 추측을 정리해보기도 전에 그는 표정이 딱딱하게 굳더니 고개를 오른쪽으로 홱 꺾었고, 거의 동시에 짧고 빠른 검은 빛이 그의 귓가를 쏜살같이 스쳐 지났다. 그 기척이 미약해서 오홍조차도 전혀 알아채지 못했을 정도였다.
이 검이 빛은 멈추지 않고 날아가 바다에 꽂히더니 요란한 폭발음이 울렸다. 이에 거의 백 장쯤 되는 높이의 거대한 물결이 일어났다.
오홍은 그제야 퍼뜩 놀라 삼수교를 돌아보았다.
오청은 입을 살짝 벌린 멍한 얼굴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피할수가 없을 텐데……. 우연의 일치인가?”
한편, 심협은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 몸을 돌려 무겁게 가라앉은 눈으로 오청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에서는 섬뜩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때, 심협의 식해(識海)에 문득 오홍의 목소리가 울렸다.
‘심형, 조심하시오. 저 삼수교는 본디 진선기 경지였는데, 마화(魔化)된 뒤로 공력이 더 강해졌소. 저놈은 심한 부상을 입었지만, 나도 마찬가지요. 그대가 이미 대승 중기에 올라섰다지만 우리가 협공한다 해도 이길 확률은 절반도 되지 않소. 일이 잘못되면 내 막아설 테니 심형은 주저하지 말고 달아나시오.’
허나 심협은 별다른 설명 없이, 육성으로 짤막하게 답했다.
“오형은 마음 놓으시오.”
한편, 오청의 눈에는 다시 한번 싸늘한 빛이 스쳐 지났다. 그는 한 손을 세로로 세우고는 심협을 향해 재빨리 휘둘렀다.
허나 오청의 몸에 법력 파동이 막 일렁이기 시작했을 때부터 심협은 이미 이상한 기미를 알아채고는 속으로 몰래 황정경 공법을 운공했고, 한 발 앞서 법력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의 신혼에 녹아든 천병과 천장들의 잔혼이 신혼에 큰 도움이 되었고, 신식 또한 이전보다 몇 배는 민감해졌음을…….
한데 옆에 있던 오홍이 한 발 앞서 번쩍 몸을 날려 심협의 앞을 막아섰다. 그가 손에 든 장창을 꼿꼿이 세우자 창끝에서 서슬 퍼런 빛이 번득이더니 뒤이어 금빛 진강이 생겨나 교룡이 물에서 튀어나오듯 곧게 뻗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