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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351화 (351/1,214)
  • 351화. 탁탑천왕(托塔天王)

    이후 남은 두 개의 나무 상자를 연달아 열어보니 그 안에는 호두알만 한 방울 하나와 여우가죽으로 된 부적 한 장이 각각 들어 있었다.

    그중 호두알만 한 방울에는 커다란 귀를 가진 기괴한 짐승이 새겨져 있었는데, 흔들어도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법력을 주입해 다시 흔들어보니 딸랑 하고 소리가 울렸다.

    이 방울은 소리의 투과성이 매우 강해 신혼을 교란시키는 작용을 하는 듯했다. 다만 방울 자체의 등급은 높지 않아서 겨우 중품법기라 그 효과는 변변치 않을 것 같았다.

    반면 여우 가죽 부적은 꽤나 흥미로웠다. 부적에 금제 따위는 없었는데, 심협이 법력을 불어넣자 표면에서 휘황찬란한 빛이 번득이더니 자못 아름다운 여인의 껍데기로 변했다.

    이것을 뒤집어쓰면 쉽게 외모를 바꿀 수 있었는데, 사우흔의 수법보다 훨씬 교묘했다. 다만 모습은 하나로 정해져 있어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었고, 사용할수록 손상돼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없었으며, 일단 망가지면 고치는 것도 불가능했다.

    심협은 이 물건들을 몽땅 챙긴 뒤 임랑환에서 몇 가지 물건을 꺼냈다. 각각 검은색 커다란 우산과 녹색 비도(飛刀), 그리고 짐승의 머리가 조각된 팔 보호대였다. 모두 노경의 것으로, 그중 검은 우산이 가장 등급이 높은 극품법기였다. 15도 금제를 모두 제련하고 나면 우산 위에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역사(力士)의 힘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데, 그 방어력이 실로 비범했다.

    녹색 비도와 칠성보갑(七星寶甲)은 모두 중품법기였는데, 효과도 그리 대단치 않아 심협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다. 기회가 되는 대로 팔아서 선옥으로 바꾸기로 했다.

    심협은 그간의 전리품들은 다 헤아려본 뒤, 만족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는 그중 등급이 높은 법기 몇 가지를 제련해보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머릿속이 갑자기 몽롱해지더니 저항하기 힘든 졸음이 밀려와 도저히 정신을 집중할 수 없었다.

    심협은 고개를 세차게 도리질하며 침상으로 비틀비틀 다가갔다. 그는 옥침이 침대머리에 놓인 채 몽롱한 백색광을 내뿜는 것을 어렴풋이 보았고, 다음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며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 * *

    심협은 아스라이 자신의 몸이 점점 무거워지고 두 발은 힘없이 허공에 뜬 채, 온몸이 끝없이 어두운 심연으로 추락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죽을힘을 다해 두 손을 휘저으며 뭐라도 붙잡으려 했지만, 손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고, 추락 속도는 점점 빨라져 곧 숨조차 가누지 못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끊임없이 추락하던 그는 갑자기 뚝 멈췄고, 두 발이 다시 땅을 밟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눈앞에는 눈부신 금빛이 번쩍였다.

    심협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두 눈을 가렸지만, 몸 앞에 거역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기운이 나타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구십니까?”

    심협은 가까스로 묻고는 눈을 찌르는 금빛을 견디며 천천히 두 눈을 떴다.

    눈앞의 금빛은 차츰 옅어졌고, 시야도 차츰 정상으로 돌아와 비로소 주위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뜻밖에도 이곳은 예전의 그 금빛 대전이었다. 다시 꿈속에 들어온 것이다.

    그때, 비탄에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이 얼마 없다.”

    심협이 곧바로 돌아보니, 높고 큰 보좌 위에 금갑천장이 앉아 있었다. 한데 이전과 달리 지금은 시신이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금빛 갑옷 또한 전과 달리 먼지에 덮여 있지 않았고, 머리에 쓴 보관(寶冠)의 금빛 날개는 곧 날아오를 것만 같았으며, 앞가슴에 늘어진 검은 수염은 미미하게 흔들렸다.

    금갑천장은 손에 작은 금탑을 받쳐 든 채 위엄 있는 눈으로 심협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심협은 저도 모르게 자기 몸을 한 번 훑어보고는 문득 소스라쳤다. 아까까지 흐리멍덩했던 머릿속도 이 순간 환하게 맑아졌다.

    “꿈이…… 아닌가!”

    지금까지 꿈속 세계에 들어왔을 때와는 달리 옷과 손발, 몸뚱이 모두 현실 세계의 자신 그대로였다.

    ‘설마 이 신장(神將)이 정말 되살아난 것인가?’

    심협이 의아함에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됐다.

    “너무 많은 생각은 오히려 해가 될 것이다. 나는 진짜로 다시 태어난 것이 아니다. 네 눈에 보이는 것은 단지 나의 한 가닥 잔혼(殘魂)이 잠시 유해에 머문 광경일 뿐이니라. 원래는 네가 한층 더 성장하여 적어도 거령신을 이긴 뒤에야 이것들을 당부하고 싶었다만, 안타깝게도 시간이 없구나.”

    금갑천장은 사람의 마음을 읽는 수완이라도 부린 것인지, 심협의 생각을 알아차리고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선배님께서는 도대체 누구십니까? 왜 줄곧 시간이 없다고 강조하시는 것이지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까?”

    심협이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연이어 물었다.

    “나는 천정(天庭)의 이정(李靖)이다. 시간이 많지 않으나 네게 알려야 할 일이 좀 있다.”

    금갑천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정? 탁탑천왕(托塔天王) 이정!”

    심협은 흠칫했다. 이전에도 그 정체에 대해 추측은 해봤지만, 실제로 당사자의 입을 통해 듣자 경악을 감출 수 없었다.

    “놀랄 것 없다. 전에 너와 싸웠던 삼십육천강병들은 내 휘하의 부하들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이 남긴 한 가닥 신혼들이지. 그들의 진신(眞身)은 이미 천정을 멸망시킨 전쟁 중에 모두 전사하였다.”

    이정의 목소리에는 비통함이 담겨 있었다.

    말을 마친 그가 입을 슬쩍 벌리자 금빛 한 줄기가 날아가 공중에서 빙글 돌더니 금빛 서책으로 변했다.

    심협은 예전에 천책(天冊)에서 뿜어져 나오는 금빛에 속박당했던 기억이 떠올라 무의식적으로 뒤로 한 발 물러섰다.

    “긴장하지 말거라. 이 천책은 천정에서 천체의 운행을 통제하는 데 쓰는 신물(神物)이다. 당시 천정에 들어가 천록(*天籙: 천제가 내리는 관작)을 받은 모든 신선들은 반드시 신혼 한 가닥을 이 천책에 봉인해두어야만 했지. 전에 너와 겨뤘던 모든 하늘의 군사들은 이 속에서 풀려나온 잔여 신혼들이었다.”

    “그렇다면 천정에 소속된 모든 신선의 잔혼이 이 천책에서 불려나올 수 있는 것입니까?”

    심협이 믿기 어려운 듯 물었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이 천책은 일부에 불과하다. 천책 전체의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이지. 하여 그 안에 담긴 신혼 또한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네가 원한다면 이들을 불러낼 수 있고, 그들을 이긴다면 그 신혼에 남아 있는 힘을 흡수할 수도 있지.”

    이정의 설명에 심협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다시 물었다.

    “천체의 운행을 통제하는 신물인데 어찌 일부만 남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그건…… 나도 잘 모른다. 나도 그저 한 줄기 잔혼일 뿐이라 기억이 온전치 못하다. 이 천책이 어찌 부서졌는지는 기억이 없다. 심지어 이게 어찌 내 손에 떨어지게 됐는지, 또한 어찌 내 탑에 봉인되었는지도 전혀 기억이 안 나.”

    이정은 탄식하듯 내뱉었다.

    “저를 이 금빛 대전으로 끌고 들어와 천병이나 천장들의 신혼과 억지로 싸우게 한 것만큼은 어찌된 일인지 아실 테지요?”

    심협은 다소 의아했으나,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

    이정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뭔가를 기억하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그 일에 관해서도 기억이 없다. 그저 내게 어떤 사명이 있어서 어떤 한 사람이 이곳에 오기를 기다렸고, 반드시 그리 해야 한다는 것만 기억할 뿐…… .”

    이정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선배님이 기다리시던 이가 바로 저고요?”

    “처음에는 나도 확신할 수 없었다. 너의 경지가 너무 낮았으니까. 허나 네가 그 많은 천병과 천장들을 거듭 무찌르고 그리 짧은 시간 안에 진선기로 접어드는 것을 보며 내가 기다리던 그 사람이 될 자격이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이정의 말투는 평온했으나 심협은 심히 부끄러웠다. 꿈속 세상이 아니었다면 어찌 그 모든 천병과 천장들을 이길 수 있었겠는가?

    “선배님, 그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심협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입을 열고 물었다.

    “어떤 해를 말하는 것이더냐? 마겁이 발발한 해? 아니면 천정이 멸망한 해? 물론 결국은 매한가지다만…… .”

    이정은 무슨 말인가를 더 하려다가 씁쓸하게 웃으며 자조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해, 마겁이 일어난 구체적인 상황을 알려 주십시오.”

    마겁에 대해 그가 아는 것은 매우 적었고, 아직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았기에 전설로만 떠돌았다. 만약 마겁의 자세한 상황을 미리 알 수 있다면 현실로 돌아가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해 보니 심협 자신도 탁탑천왕의 신혼이 기다리던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약간의 확신으로 변했다.

    “내 기억은 온전치 않아 네게 알려줄 수 있는 것도 일부일 뿐이다. 배후와 진상은 네 스스로 찾고 알아내야 한다.”

    “알겠습니다, 선배님.”

    “상고 시대에 한바탕 삼계를 휩쓴 대전(大戰)이 막을 내렸을 때, 마족의 왕 치우(蚩尤)는 패배하여 머리가 잘리고 사지가 끊어졌으며, 그 마혼(魔魂)이 봉인을 당하였다. 그때부터 삼계는 나름 안정된 세월을 보냈지. 허나 삼계를 어지럽히려는 요마들의 탐욕은 사그라들지 않았고, 일부 마족들은 치우의 봉인을 풀려 했다.”

    여기까지는 심협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그는 이정의 말을 끊지 않았다.

    “이후 천지간에 기이한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지맥(地脈)이 더는 안정되지 않았고, 인간 세상 곳곳에는 요괴들이 판을 쳐 삼계의 혼란이 시작되었지. 천정의 신불(神佛)이든 지계(地界)의 대가들이든 모두 비바람이 몰아치리란 것을 예감했다.

    천정에서는 마겁이 마족으로부터 일어날 것임을 알았기에 마족에서부터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도 알았지. 옥황상제께서는 서천(*西天: 고대 인도인 천축국을 달리 이르는 말)의 불조여래(佛祖如來)와 손을 잡고 영산(靈山)계획을 세우셨다.”

    “영산계획이요?”

    심협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당시의 영산계획은 너도 알 것이다. 단지 그 이름이 서천취경(*西天取經: 서천에 가서 불경을 구해오다)으로 바뀌었을 뿐…… .”

    심협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는 것을 본 이정은 살짝 어두워진 눈빛으로 말했다.

    “뭐라고요? 당시 현장법사(玄獎法師)께서 서역 만 리 불경을 구해왔던 것이 영산계획이었단 말입니까?”

    심협은 경악한 듯 다시 물었다.

    일찍이 누군가 이 전설을 화본소설(*話本小說: 당‧송 시기 민간문학의 한 갈래)로 썼을 정도로 그 일은 민간에 널리 퍼져 있었다. 하여 심협은 그들 다섯 사제(師弟)가 시련을 겪으며 진경(*眞經: 도교, 불교의 경전)을 구하는 이야기가 전혀 낯설지 않았다.

    다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들 다섯 사제는 장안에 돌아와 성안 대자은사(大慈恩寺)에서 전에 없이 성대한 수륙대회(*水陸大會: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영혼들에게 공양하는 불교의식)를 연 뒤,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법사의 존칭)가 대안탑에 들어가 경문을 번역하겠다고 선언한 뒤로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신통력이 막대했던 그의 세 제자도 그를 따라 종적을 감추었다. 그래서 후대의 많은 사람들은 그 서사시 같은 경험담을 철저히 문인들의 붓끝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로만 여겼다.

    “네가 모르는 게 이상한 것도 아니다. 그때의 영산계획은 처음부터 천계의 기밀이었기에 그 속사정을 아는 이가 극히 적었으니까. 옥황상제님과 불조, 태상노군(*太上老君: 도교에서 노자에 대한 존칭), 관음보살, 미륵불과 보제조사를 포함해 다 합쳐 열 명이 채 되질 않았다. 심지어 그 다섯 사제 자신들조차 처음에는 상황을 몰랐지.”

    이정의 말에 심협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그 정도로 은밀하게 행해졌다면, 설마 그들 일행의 진정한 목적이 진경을 구하는 것이 아니었단 말입니까?”

    “꼭 그렇게만 볼 수는 없다. 당시 대당 국경 안에서는 요마들의 말썽이 갈수록 심해지고 인심과 세태도 점차 나빠져서 사람들에게 대승불법(大乘佛法)의 교화가 필요하긴 했으니까.

    한 사람의 마음이 인심이 되고, 한 나라의 인심이 사람들 간의 화합이 되며, 한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 곧 하늘의 뜻과 천운이 되는 법이지. 대세가 선을 추구한다면, 천지의 탁한 기운은 자연히 사라지고 대재앙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변하게 될 테니까.”

    이정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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