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350화 (350/1,214)
  • 350화. 전장(戰將) 조비극(趙飛戟)

    사우흔은 잠시 뭔가를 말하려는 듯했지만, 이내 입을 다물었다. 이를 본 심협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왜 그러십니까, 사도우?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하시지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건 반드시 돕겠습니다.”

    그러자 사우흔은 소매 안에 감춰둔 손을 살짝 움켜쥔 채 잠깐 주저하더니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저 이번에 운주 경계로 돌아가려니 길이 멀어 다음에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알 수 없어서요. 이 수운패(水雲佩)를 드릴 테니 훗날 운주에 오시면 이 물건을 가지고 헐운산장(歇雲山莊)으로 저를 찾아오세요.”

    심협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옥패를 건네받았다.

    사우흔은 그 모습에 눈을 반짝이며 조금 기쁜 듯도 실망한 듯도 했지만, 심협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가 인사를 남기고 떠난 뒤, 심협은 아직까지 그녀의 체온이 남아 있는 옥패를 받쳐 들고 있다가 그제야 문득 숨겨진 의미를 깨달았다. 그리고 이내 그는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옥패를 확인한 뒤, 심협은 하인을 불러 식탁의 술과 음식을 치우게 한 뒤, 방문을 걸어 닫고 품속에서 저물계 두 개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적수진인과 단양자, 두 역도들의 것이었다.

    심협은 먼저 적수진인의 저물계를 집어 들고 구구통보결을 운공하여 제련했고, 이어서 손 가는 대로 문질러 반지를 열었다. 그러자 저물계가 환히 빛을 발하며 안에 보관된 물건들이 하나하나 나타나 탁자 위로 떨어졌다.

    심협은 하나하나를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첫 번째로 살펴 본 것은 적수진인이 사용한 바 있는 오화선이었다. 그 위의 깃털은 선명하고 빛깔이 제각기 달라서 날짐승 요괴 몇 종의 깃털로 만든 것 같아 보였는데, 간간이 영력 파동을 일으켰다.

    그는 손가락을 부채 위 허공에 가져다 대고 천천히 법력 한 가닥을 그 안에 흘려 넣었다. 그러자 부채 위로 여러 가지 고운 빛이 일면서 부적 문양의 15도 금제가 겹겹이 연이어 떠올랐다.

    “오악진형인보다 금제가 2도나 더 많은 극품법기였다니! 허나 아쉽게도 불 속성이라 나의 무명공법과는 어울리지 않으니 온전한 위력은 발휘하기 힘들겠어.”

    심협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혀를 차더니, 오화선을 내려놓고 이번에는 비취빛의 긴 막대 모양 잎사귀를 살피기 시작했다.

    결이 가늘고 길어서 온전한 잎사귀라기보다는 어떤 잎을 재단한 것 같았다. 전체가 푸른 옥처럼 투명하게 반짝였고, 표면에는 옥돌 질감의 영롱한 광택이 감돌았다.

    심협은 그 잎을 비틀어보고는 꽤 묵직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흔들거릴 때는 나뭇잎의 부드러운 촉감이 아직 남아 있었다. 하지만 심협이 법력을 그 안에 넣어보니 잎사귀에서 빛이 약간 나는 것 외에 이렇다 할 특이한 점은 없었다. 아무리 봐도 법보나 기물은 아닌 듯했다.

    잠시 더 살펴봐도 별다른 점을 찾지 못한 심협은 이 잎사귀를 내려두고 다른 것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 두 물건 외에 심협은 그의 저물계에서 푸른 부적지 한 뭉치와 자줏빛 부적지 수십 장, 하얀 도자기 네 개를 찾아냈다.

    부적지는 모두 청상지와 자운지라 별로 특별할 게 없었지만, 하얀 도자기 병들은 범상치 않아 안에 하나같이 대황단 못지않은 상승 단약이 들어 있었다.

    그중 세 개는 심협이 이미 아는 것이었는데, 각각 수행에 보탬이 되고 부상을 치료하는 단약들이었다. 마지막 한 병에는 단약이 세 알밖에 남아 있지 않았는데, 불처럼 새빨간 빛깔에 그 위로 특별한 화염무늬가 맺혀 있었다. 심협으로서는 이제껏 본적이 없는 단약이었다.

    하지만 이 단약은 타는 듯한 냄새를 풍기는 것이 얼핏 보아도 온기를 보충하는 단약은 아니었다.

    이 외에도 적수진인의 저물계에는 200여 개의 선옥만 남아 있을 뿐이라 응혼기 수사 치고는 넉넉하다고 할 수 없었다.

    심협은 이것들을 모두 챙긴 뒤, 이번에는 단양자의 저물계를 제련했다.

    그가 단양자의 저물계를 손가락으로 훑자 반지 위로 빛이 따라서 스쳤다.

    그 순간, 심협은 표정이 돌변해 코와 입을 막고 뒤로 훌쩍 물러나면서 손을 들어 반짝이는 수액 한 덩이를 내던졌다.

    곧이어 검푸른 독기가 반지에서 퍼져 나갔지만, 곧바로 수액에 휩싸여 그 바깥으로는 조금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뿜어져 나오는 독기가 점점 많아지자 이를 둘러싼 수액도 점점 팽창했다.

    이윽고 저물계 속의 독기는 차츰 다 뿜어져 나왔고, 바깥을 감싼 커다란 수액도 크게 불어나서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흐물거렸다.

    “저물계에도 함정을 파놓다니, 역시 귀수답구나.”

    심협은 피식 웃으며 천천히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러자 수액이 물처럼 파란 빛을 발하더니 심협의 움직임을 따라 차츰 움츠러들었다. 그 안에 담겨 있는 독기도 빠르게 압축되어 주먹만 해졌다.

    심협은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밀어젖히고 액체 덩어리를 밖으로 던지고는 한 손을 결인했다. 그러자 수룡 한 마리가 즉시 허공으로 솟구쳐 그것을 물고 백 장 밖 높이까지 날아올랐다.

    퍼펑!

    보통 사람에게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겠지만, 심협의 발달한 청력에는 작은 폭발음이 들려왔고, 녹색 연기가 바람을 따라 천천히 흩날렸다. 이어서 저물계가 떨어져 내렸다.

    심협이 손가락을 튕기자 물줄기가 한 가닥 뻗어나가 반지를 끌어당겼다.

    다시 손바닥으로 훑으며 저물계에 법력을 주입하자, 그 안에 보관된 물건들이 탁자 위에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적수진인에 비하면 단양자의 저물계는 실로 풍족했다. 각양각색의 병과 단지가 10여 개에 옥갑과 나무상자도 세 개나 있었고, 그 외에도 선옥 백여 점과 가죽 재질의 고서 한 권이 있었다.

    심협은 눈으로 이것들을 훑었고, 더 이상 다른 수작이 없음을 확신한 후에야 하나하나 자세히 살폈다.

    가장 먼저 가죽 재질 고서부터 집어 들어 표지를 자세히 살핀 그는 순간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서는 걸 느꼈다. 그 고서의 표지에는 사람의 이목구비 윤곽이 어렴풋이 보였는데, 한 사람의 얼굴 가죽을 그대로 벗겨 만든 것 같았다.

    그 얼굴 위에 붉은 실로 글자가 봉제되어 있었다.

    <백귀온신대법(百鬼蘊身大法)>

    심협은 궁금한 마음에 서책을 펼쳐 잠깐 훑어보았다. 이 책은 귀수로서 어떻게 살귀(煞鬼)를 정련하여 자신에게 녹아들게 하는지를 전수하는 사파(邪派)의 공법이었다.

    이 공법은 많은 살귀들을 흡수할수록 강해지는데, 책은 ‘백귀를 몸에 수용할 수만 있다면 겁(劫)을 겪어내고 신선이 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지극히 위험한 천겁을 정말로 견뎌낼 수만 있다면 이 공법을 수련하는 모든 사람은 환골탈태하여 귀선이 될 수 있고, 그 몸에 깃든 백귀들도 덩달아 승천하여 해탈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다만, 이 공법의 창시자 자신도 이를 성공하지 못하고 역으로 살귀에게 잡아먹혀, 죽기 직전에 가까스로 이 공법을 인피(人皮)에 기술한 듯했다.

    단양자도 도중에 이 공법으로 바꿔 수련한 듯했는데, 그래서인지 그의 몸에 수용한 살귀는 몇 마리 되지 않았었다.

    다른 병과 단지들에는 대부분 부상을 치료하는 단약이 들어 있었다. 그중에는 은시(*陰屍: 주술로 되살려낸 산송장)의 고독(*蠱毒: 고충의 독기)에 대한 특효약처럼 효과가 특수한 것도 몇 가지 있었다. 산혼단(散魂丹)과 화골분(化骨粉) 같은 맹독을 지닌 독약도 보였다.

    이제 남은 것은 아직 열지 않은 세 개의 상자뿐이었는데, 심협은 그중 어딘지 낯익은 것을 먼저 가져와 열었다.

    상자를 열자마자 심협은 눈살을 찌푸렸다. 안에 든 것은 다름 아닌 현효의 귀목(鬼目) 한 쌍이었다. 네 개의 동공은 이미 모두 풀려 위쪽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고, 주변에는 아직 핏자국이 남아 있어 보기에도 섬뜩했다.

    심협은 뚜껑을 닫고 상자를 내려놓으려다가 문득 무언가가 생각나 <백귀온신대법>을 다시 집어든 뒤 뒷부분을 펼쳐보았다. 그리고는 그중 한 단락 찾아 기록했다.

    그런 뒤 그는 인피 서책을 챙기고 손을 들어 건곤대를 문질렀다. 그러자 주머니 속에서 검은 연기가 솟아나더니 곧이어 귀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인님을 뵈옵니다.”

    귀장이 포권하며 말했다.

    “인사치레는 되었다.”

    심협의 말에 귀장은 몸을 꼿꼿하게 세운 뒤, 곧 하얀 얼음결정 한 토막을 받쳐 들고 건넸다.

    “주인님, 이 보물은 이미 주인님을 위해 오랫동안 보관해두었으니, 이제 돌려드리겠습니다.”

    심협은 얼음결정을 쓱 훑어보고는 그것이 바로 그날 경하용왕에게서 빼앗은 금빛 송곳임을 알아차렸다.

    그가 얼음결정을 받아들고 가볍게 손으로 쓸어내리자, 빠르게 녹기 시작하더니 반 척 길이에 전체가 황금으로 된 금빛 송곳이 드러났다. 그 끄트머리는 날카롭기 그지없었고, 몸체는 살짝 구부러진 형태였다. 이것은 놀랍게도 용의 뿔을 연단해 만든 것이었다.

    심협은 본래 곧장 이 물건을 제련해볼 생각이었으나 귀장이 바로 옆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그제야 자신이 하려던 일을 떠올렸다. 그리고 뒤이어 금빛 송곳을 챙기고는 탁자 위의 옥합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 물건을 아느냐?”

    그 말에 귀장은 옥합을 잠깐 자세히 살펴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감히 주인님께 여쭙습니다만, 이것은 쌍동귀안(雙瞳鬼眼)이 아닙니까?”

    그가 조금 주저하며 말했다.

    “그렇다. 이 물건이 네게 쓸모가 있겠느냐?”

    “물론입니다. 쓸모가 아주 많습니다. 속하가 이 눈을 갖게 된다면 분명 앞으로 수행에 적은 노력으로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 눈의 신통력으로 주인님을 도와 온갖 귀신들을 두루 살필 수 있을 테니, 절대로 주인님께서 귀물들에게 속지 않도록 할 수도 있습니다.”

    귀장이 재빨리 말했다.

    “좋다. 그렇다면 내 너를 도와 이 귀목을 제련할 제련술을 가르쳐주마.”

    심협의 말에 귀장은 깍듯하게 포권을 했다.

    “주인님의 은덕에 감사드립니다. 속하 반드시 백배로 보답하겠나이다.”

    심협은 방금 인피서책에서 골라낸 단락을 전음을 통해 귀장에게 전달해주었다. 이에 귀장은 거듭 고개를 끄덕이고는 감격해 마지않았다.

    “됐다. 이 제련 구결을 잘 기억하여 이 귀목을 확실히 제련하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주인님.”

    귀장은 그 자리에 엎드려 절하며, 두 손을 높이 들고 귀목을 받고서도 한참을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왜 그러느냐? 또 무슨 일이 있느냐?”

    심협이 물었다.

    “감히 사실대로 아뢰겠습니다. 이전에 저는 줄곧 떠도는 혼백의 몸이었던지라 전생의 기억을 거의 다 잃었사온데, 최근 수련 경지가 높아지자 놀랍게도 몇 가지 일을 어렴풋이 기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제 생전의 이름 같은 것 말이지요.”

    귀장이 바닥에 몸을 낮춘 채 말했다.

    “그 이름을 쓰고 싶은 것이냐?”

    심협이 물었다.

    “들어주시길 주인님께 청합니다.”

    귀장이 청했다.

    “좋다. 네 본명이 무엇이냐?”

    “속하의 본명은 조비극(趙飛戟)으로, 전대 왕조의 전장(戰將)이었으나 전사한 뒤에야 홀로 구천을 떠도는 혼령이 되었습니다.”

    귀장이 포권하며 말했다.

    “조비극이라…… . 기개 넘치는 이름이로구나.”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었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귀장은 그 말을 듣고 다시금 포권하며 감사를 표했다.

    심협은 귀장 조비극을 건곤대로 거둬들인 뒤, 무언가를 하려다가 잠시 주저했다. 그러나 고심을 거듭한 끝에 그는 한동안 <백귀온신대법> 전부를 조비극에게 맡기기보다는 조금 더 지켜본 뒤에 결정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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