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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348화 (348/1,214)
  • 348화. 그때의 비밀

    “믿기지 않는 이야기겠지요? 만약 그자들이 못된 짓을 벌이지 않았더라면, 저도 아마 그리 우러르는 오(敖)씨 성을 썼을 겁니다. 그럼 저 또한 용궁에서 자라 세상 물정 모르는 소용녀(龍女)가 되었을 테지요.”

    마수수가 넋이 나간 듯한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 심협은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리고는 싸늘하게 물었다.

    “못된 짓을 벌인 자들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오?”

    “세상 사람들은 우리 아버지께서 내기에서 진 노여움 때문에 옥황상제의 뜻을 거스르고 제멋대로 비를 뿌릴 때와 그 양을 어기고 천도를 거슬러 과룡대에 올랐다고만 알고 있습니다. 누가 그 일의 내막을 찾아본 적이나 있답니까?”

    마수수가 따지듯 물었다.

    당시 경하용왕이 원수성과 내기를 했던 일은 심협도 알고 있었다. 한데 마수수의 말을 들어니 그 일에 또 다른 속사정이 있는 듯했다.

    “마 소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똑똑히 말해보시오.”

    심협의 추궁에 마수수가 막 답을 하려는데, 경하용왕이 나섰다.

    “아무래도 내가 말하는 게 낫겠구나.”

    심협은 눈길을 경하용왕에게로 돌렸지만, 손에 쥔 참룡검은 전혀 느슨해지지 않았다.

    “벌써 20년 전 일이군. 당시 경조부윤(*京兆府尹: 당나라 장안의 행정구역인 경조부의 우두머리) 마온례(馬溫禮)가 차녀를 얻었는데, 이름을 원연(苑然)이라 하였지. 재주와 미모를 겸비해 장안성에서 꽤 이름을 날렸는데…….”

    경하용왕은 추억에 잠긴 듯한 시선을 먼 곳으로 던지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심협이 들었던 점괘 내기 사건과는 사뭇 달랐다.

    그해, 당의 황제 이세민은 산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경조부윤 마온례의 집에 잠시 머물며 휴식을 취했다. 한데 그때 재색을 겸비한 마씨 집안 차녀를 보고는 그 재색에 탄복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황제는 당조의 국사 원천강과 그의 배후세력인 원씨 집안을 구워삶기 위해 스스로 나서서 마가와 원가 두 집안을 위해 혼약을 맺어주겠노라 공언했다. 실제로 마씨 집안 둘째소저(二小姐)를 역시 뛰어난 재주를 지닌 경성 원씨 집안 둘째공자(二公子) 원청(袁靑)과 사혼(*賜婚: 황실에서 혼사를 맺어주는 것)시켰다.

    이는 당시 장안성의 모든 사람이 보기에 완벽한 한 쌍을 맺어주는 아름다운 일이었기에, 사람마다 이를 칭송했다.

    그러나 그전에 마가의 둘째소저가 강으로 나들이를 나갔다가 발을 헛디뎌 물에 빠진 적이 있는데, 사람 모습으로 변한 경하용왕이 그녀를 구조했다. 한데 그때, 두 사람이 첫눈에 서로에게 빠져들었다는 것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인간과 신이 유별하여 경하용왕은 줄곧 구혼하지 못했는데, 황제가 끼어들어 이런 난감한 상황이 생긴 것이다.

    마가의 둘째소저는 경하용왕과 정이 깊었지만 예의와 법도 때문에, 또한 아버지의 강요에 못 이겨 원가의 둘째공자에게 시집을 갔다.

    사랑하는 여인이 다른 이에게 시집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경하용왕은 결국 더는 참지 못했다. 이에 그는 원가와의 혼례에 앞서 마가의 둘째소저를 납치해 경하용궁으로 돌아왔다.

    원가와 마가 두 집안은 물론 대당관부까지도 이 일로 뒤집어져 경하용궁을 토벌하려 했으나 원청이 나서서 이를 막았다. 원청은 이미 마가의 둘째소저를 통해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며 평생 함께하기로 정했다는 사실을 직접 듣고는 눈물을 머금고 혼서를 다시 거두어 두 사람을 맺어주었다.

    놀라운 재주를 지닌 원가의 둘째공자는 사랑에 눈이 멀었던 터라, 아픔을 견디며 그들을 맺어주었지만 마음속으로 마가의 둘째소저를 잊지 못했다. 그리고 결국 그리움이 병이되어 죽고 말았다.

    일이 여기서 끝났더라면 그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비극으로 대대로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졌으련만, 그 뒤에 벌어진 일로 인해 이 사건의 결말은 전혀 달라졌다.

    “나와 원연은 혼례를 치른 뒤, 한동안 안온한 시절을 보냈지. 내 평생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 뒤, 원가의 가주 원천강이 조카인 원청의 복수를 위해 점쟁이 원수성으로 변신해 나와 내기판을 벌였고, 결국은 위징의 손을 빌려 나를 참살한 것이다.”

    경하용왕은 말이 이어질수록 점점 격분해 끝내 포효했다.

    “그러니까, 원수성은 원천강이 변한 것이다, 그런 말인가?”

    심협이 미간을 찌푸리며 믿기 힘들다는 듯 되물었다.

    앞서 그도 정 국공에게 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대당관부 역시 원수성의 정체에 의문을 가졌지만 그의 신분은 너무나 신비하여 경하용왕이 참수당한 뒤로 그 역시 증발한 것처럼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했다.

    “그가 아니고서야 누가 점술로 앞을 내다보는 능력을 가졌겠느냐? 또 누가 그리 능숙하게 사람의 마음을 좌지우지할 수 있겠는가?”

    경하용왕이 차게 웃으며 말했다.

    “이후 머지않아 어머니께서는 저를 낳으셨지요. 허나 아버지께서는 이미 돌아가셨고, 우리는 경하용궁에서 쫓겨났습니다. 다행히도 아버지의 옛 벗에게 도움을 받아 살아남을 수 있었고요. 허나 안타깝게도 어머니께서는 하루하루 슬픔에 잠겨 살아가시다가 제가 일곱 살 되던 해에 돌아가셨습니다. 결국 우리 가족은 한데 모이지 못했지요.”

    마수수는 원통한 목소리로 흐느끼며 주먹으로 땅을 내려쳤다.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메마르고 갈라진 바닥에 번져갔다.

    심협은 그들의 말에 애달파하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복수를 하려거든 원천강과 폐하를 찾아갔어야지. 어찌하여 온 장안성에 화풀이를 하며 백성들을 도탄에 빠트리고 무고한 이들을 죽인 것이냐?”

    “무고하다고요? 그때 원청이 죽자 얼마나 많은 장안 백성들이 경하의 양 기슭으로 몰려와 강물에 쉬지 않고 돌을 던지며 우리 부모님을 밤낮으로 저주하고 욕했는데요! 아버지께서 위징에게 참수당하신 뒤로 또 얼마나 많은 장안 백성들이 손뼉을 치고 쾌재를 불렀는지 아세요?

    우리 아버지께서 경하를 다스리시던 긴 세월 동안 파랑 한번 일지 않았고, 바람은 잠잠했으며, 구름과 비가 일도록 조금의 게으름도 피우지 않으셨다는 걸, 때맞춰 비바람이 불고 오곡이 풍성하도록 그들을 보호하셨음을 기억하는 이가 그들 중에 하나라도 있답니까?”

    마수수가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큰 소리로 따져 물었다.

    심협은 그 말에 한순간 어찌 반박해야 할지 몰랐다.

    “그들 모두 배은망덕한 자들이에요. 백번 죽어 마땅하다고요!”

    마수수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노여운 목소리로 저주를 퍼부었다.

    “마 소저, 그대의 말이 틀리지 않다 해도, 그 일은 벌써 20년이나 지났습니다. 그간 적지 않은 새 생명이 장안성에 태어났건만, 그들은 무슨 죄란 말입니까?”

    심협이 탄식하며 말했다.

    “장안성에 태어난 것이 그들의 죄겠지요.”

    마수수는 싸늘한 눈빛으로 표독스럽게 답했다.

    경하용왕은 이런 딸의 모습에 눈빛이 미미하게 떨리더니, 눈에 기이한 빛이 번쩍 스쳤다. 그는 모든 정신력과 체력이 한순간 무너졌는지 더는 곧게 서지 못했다.

    “수수야, 아비가 정말 잘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경하용왕이 조용히 탄식하자 마수수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아버지께서 뭘 잘못하셨습니까?”

    “아비로서 난 네게 아무것도 주지 못하고 일신의 원한만 남겼으니, 그것이야말로 실로 큰 잘못이 아니겠느냐! 내 너무도 큰 잘못을 저질렀어.”

    그는 마수수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아버지, 무슨 말씀이세요? 아버지는 아무 잘못 없어요. 우리 모두 잘못이 없고요. 잘못한 건 그들이에요!”

    마수수는 예상치 못한 아버지의 반응에 돌연 낯빛이 굳었고, 주춤주춤 물러나며 발악하듯 외쳤다.

    경하용왕의 손은 허공에 얼어붙었고, 얼굴에는 비통함이 떠올랐다.

    마수수는 심협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심 대형, 우리를 놓아주신다면 그 은정은 평생 잊지 않고 반드시 백배로 갚겠습니다.”

    “나는 그를 죽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심협이 검을 뒤로 거두며 말했다.

    마수수는 그 말에 순간 크게 기뻐하며 감사를 표하려 했지만, 심협이 손을 흔들며 그녀의 말을 막았다.

    “그러나 놓아줄 수는 없소. 이번 귀환은 장안을 어지럽히고 저승과 이승 두 세계에 심각한 손해를 입혔소. 또 제게는 그를 풀어줄 권한이 없으니 모든 일은 지부와 대당관부에서 결정할 것이요.”

    심협은 말을 마치고 검은 백서 한 장을 꺼낸 뒤, 손바닥을 비벼 부스러뜨렸다.

    검은 백서는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고, 그 사이로 검은 연무가 생겨나더니 끊임없이 회전하는 검은 회오리가 되었다. 그리고 이내 붉은 말[馬] 얼굴이 소용돌이에서 빼꼼 나오더니, 곧이어 다리와 몸이 따라 나왔다.

    심협이 막 다가가서 인사를 하려는데, 구혼마면이 한쪽으로 걸어가 손을 들어 결인하고 검은 소용돌이를 치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가닥가닥 법력이 스며들면서, 흩어져 사라졌어야 할 검은 소용돌이가 바로 사라지지 않고 그 안에서 검은 관화(*官靴: 관리와 그 자제들이 신던 신발) 한 짝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서 눈에 확 띄는 새빨간 관포가 뒤따라 나타났다. 종규도 온 것이다.

    “두 선배님을 뵈옵니다.”

    심협이 즉시 포권하고 말했다.

    “예의 차릴 것 없네. 아주 잘했어.”

    종규가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말을 마친 그는 시선을 돌려 경하용왕을 보았고, 두 눈에 엷은 금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위압이 쏟아져 내려오자 경하용왕이 순간 몸을 수그리며 거의 땅바닥에 쓰러질 뻔했다. 그 옆에 있던 마수수는 이미 땅에 주저앉아 일어서지도 못했다.

    “간 큰 악룡아, 네 죄를 알렸다?”

    종규의 고함은 마치 귓가에 천둥이 울리는 것만 같아 심협도 위암감에 가볍게 떨엇다.

    “죄든 잘못이든 모두 나 혼자 지고 가겠소. 모든 것은 수수와 무관하오.”

    경하용왕은 이렇게 말하면서 울컥 뿜어져 나오려는 피를 가까스로 참으며 천천히 몸을 곧게 세웠다.

    딸 앞에서 아비가 어찌 비굴하게 굽실거리겠는가?

    경하용왕의 말에 종규의 두 눈에 노란 금빛이 차츰 어두워졌고, 보이지 않는 힘도 서서히 사라졌다.

    “잘못을 안다니, 너는 나와 음사(*陰司: 저승, 지옥을 달리 이르는 말)로 돌아간다. 너는 이번에 다시 살생의 업을 지었고, 음양을 어지럽혔으니 무간지옥에 들어가 끊임없는 윤회의 고통을 받아 마땅하다.”

    종규가 눈빛을 굳히며 말했다.

    “홍련업화 아래 20년을 유폐되어 있었으니 나는 이미 원한과 고통의 괴로움을 충분히 받았소. 다시 무간지옥에 들어가는 것쯤이야 고통이라 할 수도 없지. 이미 원연(苑然)이 이 세상에 없는데 나를 계속 살려두는 것은 그저 원한을 키우는 것뿐이오. 차라리 재는 재로, 흙은 흙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낫지 않겠소?”

    경하용왕은 당시의 그 온화하고 현명했던, 그 아름다운 여인을 다시 본 것같은 눈빛으로 아득히 먼 곳을 향해 읊조렸다.

    종규는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수, 네게는 남은 날이 많으니 더는 원한과 벗하고 지내지 말거라. 앞으로는 너 자신을 위해 살아야 한다.”

    경하용왕은 딸을 부축해 일으키며 간곡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마수수는 무언가를 어렴풋이 알아차렸는지 울부짖듯 외쳤다.

    하지만 경하용왕은 그저 딸을 향해 웃으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다음 순간, 경하용왕의 아랫배에서 빛이 번득이더니 임맥을 따라 곧장 위로 올라가면서 끊임없이 빛을 흡수하여, 미간에 모였을 때는 휘황찬란해졌다. 이어서 검은 화염이 온몸에서 솟구쳐 올라 그의 전신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잡고 있던 마수수의 손에 이글거리며 작열하는 힘이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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