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340화 (340/1,214)
  • 340화. 다시 나타난 참룡검

    심협은 생각에 잠긴 와중에도 회색 빛의 그림자를 자세히 살펴보고는 또다시 놀랐다. 마치 진짜 한 줄기 그림자인 것처럼 그의 몸에서는 털끝만큼의 기운도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았는데, 그 점이 그를 더욱 두렵게 했다. 이전에 출규기 이상의 수사에게서만 느껴봤던 두려움이었다.

    “내가 잘못 봤구나. 이토록 무시무시한 인물이 또 있었다니!”

    심협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겨우 진정되어가던 그의 마음이 다시 조마조마해지기 시작했다.

    “연신단에서 고를 많이 도와주었으니, 자연히 고 또한 잊지 않을 것이다. 고가 당의 황제 자리에 오르면 반드시 연신단을 국교로 정하고 힘써 장려하여 대대로 섬기리라.”

    경하용왕은 연신단의 다섯 수사에게 말했다.

    “그리 해주신다면 용왕 폐하께 깊이 감사드리겠나이다.”

    우두머리인 검은 옷의 수사가 매우 기뻐하며 허리 숙여 공수했다.

    경하용왕은 그에게서 눈길을 거두고 제단 위의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에 점점 흉악한 빛이 돌더니 두 손을 결인했다.

    제단 상공에 떠 있던 육각 회전판의 허상이 즉시 하얀 빛을 거세게 내뿜기 시작했고, 회전 속도도 열 배는 빨라졌다.

    옆에 있던 회색 빛의 사람이 손을 휘두르자 손에서 한 줄기 하얀 빛이 쏘아져 날아갔다. 그 빛은 육각 회전판 도안이 새겨진 회백색 영부(靈符)였는데, 제단 상공의 육각 회전판의 허상 속으로 녹아들었다.

    육각 회전판의 허상은 금세 단단히 응결되어 반은 허상이고 반은 실체를 지닌 상태가 되었다.

    기이한 법력의 파동 한 줄기가 육각 회전판에서 뿜어져 나와 널리 퍼져 나가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던 명석교 위의 심협과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이 미쳤다.

    이들은 몸을 바르르 떨더니 눈빛이 멍하고 흐리터분해졌다.

    심협 또한 눈앞에 갑자기 수많은 흐릿한 화면들이 스쳐 지나면서 마치 자신의 전생과 현생을 보는 듯 정신이 아득해졌다.

    절체절명의 순간, 그는 부주진신법(不周鎭神法)을 운공했다. 그러자 머릿속에 우뚝 솟은 거대한 산봉우리 하나가 나타났고, 요동치던 신혼의 힘이 곧바로 가라앉으면서 눈앞의 환상이 빠르게 사라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돌연 그의 몸이 움찔 흔들렸다. 명석교가 느닷없이 진동하기 시작하면서 이 기이한 법력과 모종의 공명을 이루는 듯했다.

    다리 위 곳곳마다 예스러운 검은 문양이 솟아나오면서 검은 빛이 피어올랐다.

    심협을 비롯한 사람들의 기운은 명석교의 금제에 완전히 가려져 있었지만, 금제가 진동하는 바람에 일순 바깥으로 새어나갔다.

    “웬 놈이냐!”

    경하용왕이 명석교 쪽을 홱 돌아보면서 오른손을 쫙 펴고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심협 등의 머리 위 허공에 파동이 일더니 한 묘(畝: 논밭 넓이의 단위로, 1묘는 약 100㎡) 정도 크기의 검은 용의 발이 나타나 아래쪽을 그러쥐었다.

    용의 발에서는 엄청난 흡입력이 흘러나와 심협과 사람들을 전부 빨아들여 그들은 의지와 상관없이 위로 끌려갔다.

    “네놈이었구나! 네 이놈! 네놈의 천성이 선량한 것을 보아 목숨을 살려주려 했건만, 거듭 고의 대사를 그르치려 드는구나! 오늘 또다시 고의 비밀을 엿들었으니 네놈을 용서할 수 없다. 죽어라!”

    경하용왕은 심협을 보고는 눈에 살기를 번뜩이며 오른손에 검은 빛을 거세게 내뿜으면서 힘껏 움켜쥐었다. 그러자 강력하고 날카로운 압력이 거대한 용의 발에서 새어나와 심협 등을 감싸면서 맹렬하게 압박해왔다.

    심협이 굳은 얼굴로 양손을 휘두르자, 옆에서 기이한 빛이 연달아 번쩍였다. 순양검배와 오악진형인, 묵갑순, 건곤대, 푸른 단부 등 그의 강력한 법기가 모조리 나타났다.

    심협은 체내의 모든 법력을 쏟아내 법기들에 주입하여 필사의 각오로 맞붙어 싸울 생각이었다. 단양자와 적수진인, 갈천청, 사우흔은 여전히 정신이 혼미한 상태라 홀로 해결해야 했다.

    바로 그때, 더없이 눈부신 백색광이 돌연 그들 옆에서 터져 나왔다. 육화명이 보상장엄(*寶相莊嚴: 장엄한 불상을 높여 이르는 말)처럼 허공에 가부좌를 틀고 있는 것이었는데, 그의 몸에서 별안간 뜨거운 햇빛 같은 하얀 빛이 폭발하여 똑바로 쳐다볼 수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이 하얀 빛은 환하게 뿜어져 나왔다가 빠르게 사그라들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지름이 5장에 이르는 공 모양 덮개를 이루어 모든 사람들을 뒤덮었다.

    땅! 땅! 땅!

    여러 차례 굉음이 울리고 하얀 빛 덮개가 심하게 흔들리면서 움푹 파인 자국이 다섯 개 생겨났지만, 갈라질 기미는 없었다.

    이 장면을 본 심협은 바짝 졸아들었던 마음을 조금 내려놓았다.

    이때 육화명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는데, 평소의 한들한들거리고 가벼워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경건하고 엄숙한 표정이었다.

    그의 몸 바깥에는 허상이 하나 어렴풋이 떠올랐다가 다시 그의 몸에 합쳐졌다. 하늘 높이 치솟았던 하얀 빛이 바로 그 허상에서 뿜어져 나온 것이었다.

    육화명이 내뿜는 기운도 몇 곱절로 강해져서 출규기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그가 양손을 결인하여 좌우로 휘두르자 하얀 빛 덮개 위로 부글부글 끓는 듯한 소리가 울리면서 수많은 별무늬가 떠올랐다.

    육화명은 양손을 다시 결인하여 바깥쪽으로 휙 떠밀었다.

    꽈르릉!

    짧지만 강렬한 굉음과 함께 빛 덮개 위에서 도저히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작열하는 하얀 빛이 피어났다. 그러더니 한순간 빛 장막 전체가 폭발하면서 거대한 하얀 빛의 물결이 사방으로 솟구쳤다.

    이에 주위를 에워쌌던 용 발의 거센 힘은 썩은 나무 꺾이듯 튕겨나갔고, 발톱도 진동에 날아가 버렸다.

    심협과 사람들은 몸의 통제권을 되찾고 바닥으로 가벼이 떨어져 내렸다.

    사우흔과 단양자 등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지 못했다.

    심협은 이미 명석교를 벗어나 있던 터라 이제 신식을 움직일 수 있었기에 방금 전의 일을 사람들에게 간단히 설명해주었고, 네 사람은 그제야 어떤 상황인지를 깨달았다.

    “아까 정한 대로 내가 경하용왕을 상대할 테니, 폐하를 구출하시오!”

    육화명의 목소리는 그대로였지만 말투는 완전히 바뀌어 마치 위엄 있는 장군이 훈시하는 것만 같았다.

    그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오른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하늘을 찌를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그의 손바닥 한가운데에 금빛이 한 줄기 떠오르더니 금빛 보검으로 변했다.

    이 보검은 모양이 기이했는데, 몸체가 살짝 구부러져서 검 같기도 하고 도(刀) 같기도 했으며, 자루 부분에는 금빛 화염이 불타고 있었다.

    “저것은……?”

    심협의 눈썹이 움찔 떨렸다. 그는 이 특이한 보검을 전에 경하용왕과 싸울 때 본 적이 있었다. 강 속의 금빛 검진에서 이 검과 비슷한 거대한 검영이 나타나 일격에 경하용왕의 수단을 베어버렸고, 당시 깜짝 놀란 경하용왕은 그 검영을 참룡검이라고 불렀다.

    ‘설마 이게 바로 참룡검?’

    육화명은 이 보검을 꺼낸 뒤, 위쪽 상공에 떠 있는 용의 발을 올려 베었다.

    너비가 족히 10여 장에 길이는 80장쯤 되어 보이는 금빛 찬란하고 거대한 검기가 보검에서 쏘아져 나와 허공을 가르며 곧장 솟아올랐다. 그리고는 번쩍하면서 검은 용 발 앞에 나타나 매섭게 베었다.

    위세가 무쌍해 보이던 용의 발은 쩍 하고 동강 나더니 무수한 검은 기운이 되어 흩날렸다.

    심협 일행은 머리 위의 압력이 완전히 사라지자, 속으로 한시름 놓으면서도 매우 놀란 눈으로 금빛 보검을 쳐다보았다.

    “참룡검! 오늘 이 검을 다시 보게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는데……. 좋아, 아주 좋아! 백 년 전의 깊은 원한을 갚아주마!”

    경하용왕은 증오에 가득 찬 눈으로 육화명의 손에 들린 보검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

    “사악한 용아, 그때 황제께서 자비심으로 너를 위해 저승에 용서를 구하시어 네놈의 신혼을 멸하지 않고 남겨두었거늘, 네놈은 감사는커녕 도리어 복수나 하려 드는구나! 오늘은 네놈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육화명이 입을 열자 목소리가 쩌렁쩌렁 퍼져 나가면서 온 허공이 진동했다.

    “네 이놈! 네놈이 비법으로 전생의 법력을 끌어와 나와 무리한 싸움을 벌였음에도 승패가 갈리지 않았으니, 네 몸이 견디지 못하고 부서져 내릴까 걱정이로구나!”

    경하용왕은 육화명을 위아래로 슥 훑어보고는 차게 웃었다.

    “사마외도(*邪魔外道: 사악한 마귀와 이교의 무리) 따위가 우리 대당관부의 깊은 충절을 어찌 알며, 우리 대당관부의 비법을 네놈의 망령된 말로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느냐? 사악한 용아, 죽어라!”

    육화명은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참룡검에서 금빛을 미친 듯이 내뿜으며 경하용왕을 향해 높이 휘둘렀다.

    번쩍!

    거대한 금빛 검기가 하늘을 가르고 경하용왕에게로 날아들었다.

    “네놈이 죽음을 자초했으니 나를 탓하지 마라! 네게 경하지보(涇河至寶)의 위력을 보여주마!”

    경하용왕이 오른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자 넓적하고 짙푸른 군도(軍刀) 한 자루가 손에 나타났다. 표면은 기이한 청록빛을 띠었고, 칼등에는 푸른 비늘조각이 가득했으며, 칼끝과 칼자루에는 용무늬가 있었다.

    이 도(刀)가 나타나자 주위가 용 울음소리로 가득했고, 방대한 용의 기운이 뿜어져 나와 대기가 진동했다.

    경하용왕은 칼자루를 움켜쥐고 팔을 치켜들어 크게 휘둘렀다.

    금색과 푸른색의 빛 고리 두 개가 비할 데 없는 위세로 허공에서 요란하게 맞부딪쳤다.

    콰쾅! 쿠르릉!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굉음 가운데, 충격파가 빙글빙글 원을 그리면서 사방으로 퍼져 나가 순식간에 희뿌연 소용돌이가 하늘로 솟구쳤다. 그 속에는 금색과 하얀색 빛이 뒤섞여 온 하늘에 휘몰아쳤다.

    반경 수십 장의 바닥도 한 꺼풀 깊게 쓸려나갔고, 심협 일행은 물론 연신단 사람들도 맹렬한 폭풍에 휩쓸려 날아가고 말았다.

    충격파의 영향을 받은 듯 육각 회전판이 빛을 발했다. 그리고 빠르게 회전하면서 미친 듯이 깜빡거리는 것이, 폭풍의 충격을 견뎌내지 못할 것 같았다.

    경하용왕이 대경실색하여 급하게 손가락을 구부려 가리키자, 하얀빛 한 줄기가 날아가 회전판으로 녹아들면서 금세 안정을 되찾았다.

    그가 잠시 주의를 돌린 순간, 육화명이 오른손을 휘둘렀다. 열여섯 줄기의 금빛이 그의 손에서 튀어나가 눈 깜짝할 사이 경하용왕의 사방팔방에 나타났다. 이 빛은 열여섯 장의 금빛 부적들이었다.

    부적 위의 문양은 마치 별들의 궤적처럼 구불구불해서 매우 신비로워 보였다.

    “성두나이부진(星斗挪移符陣)!”

    경하용왕이 안색을 굳히며 벗어나려 했지만, 한 발 늦었다.

    금빛 부적들은 그를 둘러싸고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고, 눈부신 금빛이 스쳐 지나면서 경하용왕과 육화명의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다음 순간, 멀리 하늘가에서 우르릉 하고 요란한 굉음과 함께 맞부딪친 금색과 푸른색 빛이 떠올랐고, 방금 사라진 두 사람이 분명했다.

    한편, 제단 근처에서 매섭게 휘몰아치던 폭풍이 마침내 조금 잦아들면서 그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몸을 가다듬고 섰다.

    심협이 몸을 가누자마자 아래쪽에서 붉은 검망(劍芒)이 번쩍 나타났다. 그는 순식간에 인검합일 법술을 시전해 온몸을 붉은 검홍(劍虹)으로 변하게 한 뒤, 번개처럼 제단을 향해 돌진했다. 거의 눈 깜짝할 새에 제단 앞에 이른 그는 돌기둥 하나를 베려 했다.

    그는 경하용왕이 어떤 법술을 쓰기에 황제와 신혼의 기억을 바꿀 수 있는 것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이 여섯 개의 돌기둥이 그 법술에 중요한 부분임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 기둥들을 파괴하기만 하면 그 비술을 멈출 수 있을 터였다. 다행이라면 육각 회전판은 제단만을 뒤덮었을 뿐, 여섯 돌기둥은 육각 회전판의 영향 바깥에 남겨져 있다는 점이었다.

    한데 바로 그때, 옆에서 심협보다 빠른 속도로 노란 그림자 한 줄기가 날아와 돌기둥 앞에 먼저 섰다. 그리고는 주위에 은은한 노을빛이 감도는 집채만 한 황색 구리거울로 변했다.

    붉은 검홍은 기세를 멈추지 않고 황색 구리거울 위를 매섭게 베었다.

    땅!

    고막을 찌르는 날카롭고 거대한 소리에 이어 거울이 진동했고, 그 위의 노을빛이 마치 물결처럼 위아래로 일렁였다. 붉은 검홍 또한 튕겨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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