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9화. 원한
신행갑마부의 도움으로 사람들은 한층 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 있었고, 그렇게 한참을 더 나아가자 저 앞 하늘가에 은은한 밝은 빛이 나타났다.
“저 앞에 빛이 보이는데, 곧 이승에 도착하는 걸까요?”
사우흔이 기대가 담긴 목소리로 묻자 다른 사람들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모두 더욱 서둘러 나아가다가 마침내 다리 끝에 이르렀다. 그러자 온통 거무스름한 육지가 앞에 나타났다.
한데 이 육지에는 여전히 음기가 맴도는 것이, 전혀 이승처럼 보이지 않았다.
대신 이곳은 빛이 밝았고, 시야가 확 트여 다리 너머에 있을 때보다 훨씬 멀리까지, 거의 1리에 가까운 거리를 볼 수 있었다.
“잠깐, 저게 뭐지요?”
사람들이 다리에서 내려가려는데 눈썰미가 매서운 사우흔이 강기슭 먼 곳을 가리켰다.
명석교에서 100장가량 떨어진 거리에 높고 커다란 제단 하나가 우뚝 서 있었다. 제단 주위로는 돌기둥 여섯 개가 세워져 있었고, 그 위에는 법진 문양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
돌기둥 끄트머리에는 창백한 화염 덩이 여섯 개가 불타고 있어 눈에 확 띄었다.
일곱 사람의 그림자가 제단 앞에 서 있었고, 중간에 있는 사람은 인간의 몸에 용의 머리를 달고 있었으며, 키가 크고 체격이 건장했다.
심협과 육화명은 그를 보자 경악해 눈이 휘둥그레졌다.
‘경하용왕! 저 요괴 놈이 어찌 여기에!’
심협은 가슴이 철렁하여 속으로 재수가 없음을 한탄했다. 경하용왕은 놀랍도록 막강하여, 당시 황목상인 등이 제때 도착하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결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한데 하필 오늘, 이런 곳에서 또 저 요괴를 마주치다니!
다행히 명석교가 그들의 기운을 숨겨주어 경하용왕은 그들을 아직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한데 심협은 경하용왕을 자세히 살펴보고는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경화용왕의 기운이 조금 불안정한 것 같은데?’
단양자와 적수진인 등은 경하용왕을 직접 만나본 적은 없었지만, 그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왔기에 다들 낯빛이 어두워졌다.
경하용왕 곁에는 검은 옷을 입은 다섯 사람이 서 있었고, 그중 우두머리는 헐렁한 검은 옷을 입은 수사였는데 생김새가 분명히 보이지 않았다.
심협은 그 사람을 한 번 더 보고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정확한 생김새는 볼 수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낯이 익었던 것이다.
‘맞아! 그때 헌원각 경매장에서 현귀판을 낙찰 받아간 그 사람이야!’
심협의 머릿속에 번쩍하고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오악진형인 때문에 현귀판을 낙찰 받아간 사람이 매우 신경 쓰였던 것이다.
그는 둘이 같은 인물이라고 확신하지는 못했지만, 옷은 모양새와 빛깔, 체격까지 거의 흡사한 것만은 분명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 뒤에도 네 명이 나란히 서 있었는데, 그들 역시 모두 검은 옷 위에 연신단의 표식이 있었다.
네 사람은 몸을 반쯤 굽히며 우두머리인 검은 옷의 수사를 더없이 공손하게 떠받들었다. 한데 이 네 사람의 몸은 어째서인지 실체가 아닌 것처럼 투명한 느낌이 들었다.
경하용왕의 오른편에는 그림자 하나가 더 서 있었다. 이 그림자는 온몸이 회색 빛에 뒤덮여 있어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구분하기 힘들었으나, 그 몸매나 생김새가 더없이 신비로웠다.
한편, 제단 위에는 나무로 만든 십자가 하나가 세워져 있었는데, 그 위에는 한 사람이 묶여 있었다. 황색 옷을 입은 그 사람은 이목구비에 위엄이 넘쳤지만, 머리가 하얗게 세어 다소 노쇠해 보였다. 그리고 지금은 깊은 혼수상태에 빠져 깨어나지 못했다.
“폐하!”
육화명이 나무 위에 묶여 있는 사람을 분명히 보고는 깜짝 놀라 낮은 비명을 내질렀다.
“뭣이! 저 사람이 당의 황제폐하시라고? 그분이 어찌 여기에 계신단 말인가?”
육화명의 외침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저 사람은 황제 폐하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 그분의 신혼이오.”
갈천청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 말에 심협이 다시 자세히 살펴보니, 실제로 조금 투명한 것이 실체가 아닌 게 분명했다.
“폐하의 신혼에 어떠한 손상도 입어서는 안 되오! 구해낼 방도를 찾읍시다!”
육화명이 다급하게 말했으나 단양자와 적수진인은 낯빛이 딱딱하게 굳었다.
심협은 거의 눈이 뒤집히려 하는 육화명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육형의 뜻은 이해하오. 지금은 다사다난한 때라 폐하께 천하의 안위가 달려 있으니 응당 우리가 나서서 구출해야지요. 허나 경하용왕의 실력은 감히 우리가 상대할 수 없으니 경거망동해서는 아니 되오.”
육화명은 그제야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몸을 낮추고 다리 아래에 몸을 숨긴 채 제단 쪽을 살폈다.
경하용왕이 뭔가를 중얼중얼 읊조리며 나무 위의 황제를 가리키자, 둘 사이의 허공에 한 가닥 파문이 일었다.
이윽고 황제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정신을 차리고는 천천히 두 눈을 떴다.
“이세민, 고(孤)를 알아보겠는가?”
경하용왕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너는 그때 그 경하용왕! 네놈이 짐을 이곳으로 끌고 온 것이냐?”
황제는 눈앞의 요괴를 자세히 들여다보고는 놀란 기색이었지만, 그럼에도 평정을 유지했다.
“아직 고를 기억하니 되었다. 그때 너는 약조를 지키지 않고 위징이 나의 목을 베게 했다. 저승의 무리들은 더욱이 부귀영화를 탐하여 네놈 편을 들었고, 너의 죄를 다스리기는커녕 고의 용혼(龍魂)을 제압해 밤낮으로 음화(陰火)에 시달리게 했지. 다행히 고가 뛰어난 선인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곤경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니, 비로소 네놈과 그때의 묵은빚을 청산할 기회가 생겼구나!”
경하용왕의 눈에서는 살기가 넘쳐흘렀다.
“경하용왕, 짐이 전에 네게 분명히 말했듯, 그날 짐은 위징을 궁에 남게 하며 너를 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다하였다. 허나 그가 꿈속에서 너의 목을 베었지. 짐이 비록 제왕의 존귀함을 지녔다 한들 수선자는 아닐진대, 어찌 그런 일을 예측할 수 있었겠느냐?”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도 황제의 목소리는 근엄했다.
“흥! 그런 얄팍한 거짓말로 다른 이들은 속여 넘길 수 있겠지만 나를 속일 생각은 마라! 당시 일은 내가 이미 명명백백히 밝혀냈느니라. 네놈이 원천강과 모의하여 고왕(*孤王: 과인과 비슷한 말로 군주가 자신을 낮춰 부르는 말)을 음해하려한 것 말이다! 먼저 네놈을 손봐준 뒤, 그 원가놈을 상대해야겠다!”
말을 마친 경하용왕이 입을 살짝 벌리자 한 줄기 검은 기운이 황제의 얼굴을 뒤덮었다.
명석교 위에서 이를 지켜보던 육화명은 부르르 떨며 뛰쳐나가려 했다.
“육형, 기다리시오. 경하용왕은 폐하를 시해하려는 것이 아닐 거요.”
심협이 육화명을 덥석 붙잡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황제는 검은 기운에 얼굴이 뒤덮이자 두 눈을 뒤집으며 다시 정신을 잃었지만, 다른 해는 입지 않았다.
육화명은 이 광경을 보고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심 도우, 경하용왕이 곧바로 황제 폐하를 시해하지 않으리란 걸 어찌 아셨습니까?”
사우흔이 궁금한 듯 물었다.
“경하용왕이 폐하를 시해하려 했다면 진즉 손을 댔지, 왜 굳이 이렇게 애를 먹어가면서 폐하를 이 유명계까지 모시고 와 해치겠습니까? 그리고 그가 이렇게 제단도 쌓아 놓은 것을 보면 분명 다른 의도가 있을 겁니다.”
“심형의 말이 일리가 있구려. 내가 너무 조급했소.”
육화명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내뱉고는 평정을 되찾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편, 사우흔의 눈에는 탄복하는 듯한 기색이 언뜻 스쳤고, 단양자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심협을 보는 시선이 조금 달라졌다.
“심형, 그대 생각에 어찌 해야 폐하를 구출해낼 수 있을 것 같소?”
간신히 마음을 가다듬고는 있지만 전략을 짜기에는 마음이 어수선했던 육화명은 간절한 심정을 담아 심협에게 물었다.
“저들은 연신단 사람들인 듯하니 우리가 대적할 수 있소. 허나 경하용왕의 실력은 우리를 훨씬 뛰어넘어 절대 힘으로 맞서서는 안 되오. 저 간악한 자들이 어떻게 폐하의 혼백을 이곳으로 끌고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 궁에서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거요. 육형, 정 국공 대인과 연락할 방법이 있소? 그들에게 지원을 요청해야만 경하용왕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오.”
심협이 육화명에게 물었다.
잠시 잠자코 있던 육화명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사부님께 연락할 법기는 내 수중에 없지만, 경하용왕에 맞서려 한다면 방법이 아예 없지는 않소.”
“아, 방법이 있소? 어떤 방법이오?”
심협이 기뻐하며 재빨리 물었다.
“이야기하자면 너무 길어서……. 잠시 후면 알게 될 거요. 다만 제가 경하용왕을 그리 오래 막아낼 수는 없으니, 그때가 되면 모든 것은 여러분께 달려 있습니다. 반드시 황제 폐하를 구해내십시오!”
육화명은 사람들에게 하나하나 공수하며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육형, 마음 놓으시오. 내 최선을 다하겠소.”
심협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다른 사람들도 그러겠노라고 답했다.
육화명은 그들에게 다시 공수한 뒤, 곧바로 눈을 감고는 가부좌를 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몸에 하얀 빛이 한 겹 솟아나며 완전히 다른 기운이 천천히 뿜어져 나왔다.
“이 기운은……?”
심협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전에 육화명이 술에 취해 깊은 잠에 빠진 뒤 갑자기 폭발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당시 그의 몸에서 터져 나오던 기운이 지금과 똑같았던 것이다.
그때, 저 멀리 제단에서 또다시 기척이 일어났다.
심협이 다급히 제단 쪽을 돌아보니 경하용왕이 두 손을 휘두르는 모습이 보였고, 그러자 제단 주위에 있던 여섯 돌기둥 위의 창백한 불꽃이 환하게 뿜어져 나오면서 강렬한 백색광을 피워냈다. 이 백색광은 서로 한데 이어지면서 육각형의 거대한 바퀴를 이루며 천천히 회전했다.
“고가 여기서 법술을 펼치는 것이 정녕 안전한가?”
경하용왕은 잠시 손을 거두고 뒤편의 회색 빛으로 덮인 그림자를 돌아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합당하게 준비해두었습니다. 지부(地府)의 육도윤회반(*六道輪回盤: 육도윤회는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여섯 세계에서 태어나고 죽는 것을 반복한다는 뜻)을 지키는 수위들도 제 사람들로 바꿔 놓았으니, 그곳에 있는 윤회의 힘을 끌어와 쓴다 해도 절대로 들키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귀하께서는 마음 푹 놓으십시오.”
회색 빛 속의 사람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종잡을 수 없이 계속 변해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나이가 많은지 적은지 알아낼 수 없었다.
경하용왕은 그제야 안심하고 비릿한 미소를 띠었다.
“그럼 되었다. 윤회반의 힘으로 당황(唐皇)이 지닌 신혼 근원의 힘과 맞바꾸면 고가 바로 대당의 황제이니, 약조한 일을 반드시 이룰 것이니라.”
“그럼 저는 용왕님의 기쁜 소식을 조용히 기다리겠습니다.”
회색 빛 속의 사람이 웃으며 살짝 허리를 숙였다.
한편, 심협은 이 말을 듣고 아연실색했다. 경하용왕이 황제의 넋을 이리로 잡아온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게다가 뜻밖에 저승 사람들도 경하용왕과 공모하고 있었다니!
다른 사람들도 놀란 표정이었고, 육화명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만 이 환혼비법(換魂秘法)은 하늘을 거스르는 법술로, 육도윤회에 대항할 반서(*反噬: 원래는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는 뜻으로, 일종의 반발작용을 뜻함)의 힘이 필요하여 대승기의 경지에 이르러야만 시전할 수 있습니다. 용왕 폐하께서는 얼마 전 대당관부 사람들과 교전을 치르시면서 중한 부상을 당하셨고, 경지도 조금 하락하신 듯한데 이 법술을 순조로이 쓰실 수 있겠나이까?”
회색 빛의 사람이 또다시 조심스레 물었다.
“흥! 고가 정교금 그 늙어빠진 필부(匹夫)의 흉계에 걸려들어 경지가 출규기로 떨어지기는 했으나, 고는 용족이다! 날 때부터 용맹하고 자질이 보통 수사들보다 월등히 뛰어나니 문제없을 것이다.”
경하용왕의 차가운 목소리를 들으며 심협은 내심 기뻤다. 경하용왕이 정말 부상을 당해 수련기가 출규기까지 떨어졌다면 자신들이 힘을 합칠 경우 승산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