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336화 (336/1,214)
  • 336화. 저승

    얼마나 지났을까? 심협은 아랫배에서 따뜻한 기운이 전해지고 몸이 차츰 감각을 되찾으면서 서서히 정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눈길 닿는 곳마다 온통 캄캄했고, 얼음물에 잠긴 듯 싸늘했으며, 음산한 기운이 주위에 가득했다.

    아랫배와 단전에서는 뜨거운 기운이 솟아 체내에 스며든 음산한 기운을 끊임없이 몰아냈다.

    그는 몸을 가볍게 부르르 떨고는 곧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여기는 어딜까? 또 꿈속에 들어온 건 아니겠지?’

    심협은 경계심을 끌어올린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의 땅바닥은 검은 흙과 자갈로 뒤덮여 있었고, 공기 중에는 짙은 음기가 자욱한 것이 일전에 가봤던 저승과 흡사했다.

    ‘주인님, 바깥에 짙은 음기가 느껴지는데, 혹시 제게 좀 주실 수 있으신지요?’

    그의 머릿속에 귀장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아직 꿈속이 아닌 현실에 있음을 알게 됐다.

    ‘진짜 저승이란 말인가? 육형과 사우흔은 어디 있지?’

    심협은 손으로 결인해 건곤대를 움직여 한 줄기 흡입력을 불러일으켰다. 근처의 음기가 몰려들어 여러 하천이 바다로 들어가듯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귀장은 흥분한 듯 깩깩거리며 짙은 음기를 흡수해 수련을 시작했다.

    심협은 묵묵히 공법을 운공하여 법력을 온몸에 흐르게 했다. 단전에서는 뜨거운 기운이 끊임없이 뿜어져 나와 체내에 남아 있는 음기를 말끔히 몰아냈다.

    단전 속의 뜨거운 기운은 바로 순양검배였다.

    순양검배는 가느다란 붉은 빛을 계속 뿜어내는 것이 평소와는 사뭇 달랐다.

    심협의 눈에는 한 가닥 희색이 스쳐갔다. 순양검결로 순양검배를 그토록 오랜 시간 온양(溫養)한 것이 마침내 약간의 성과를 본 것이다.

    그는 곧 운공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사방을 살펴보고는 이내 저쪽 멀지 않은 곳에 두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심협은 급히 다가가 보고는 안색이 밝아졌다.

    두 사람은 사우흔과 육화명으로, 아직 의식이 없는 상태였으나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음기가 몸을 파고든 탓인 게 분명했다.

    특히 사우흔은 이미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 음기가 몸에 침입하여 호흡이 미약한 상태였다.

    심협은 재빨리 유영단을 꺼내 그녀에게 먹인 뒤, 손을 뻗어 사우흔과 육화명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순양의 힘을 두 사람의 몸속으로 불어넣어 그들 체내의 음기를 몰아냈다.

    지금 그의 수련경지에 순양검결의 효력이 더해지자 두 사람의 체내에서는 금세 음기가 사라졌고, 곧 육화명이 눈꺼풀을 바르르 떨더니 깨어났다.

    “으음…… 심형? 여기가 어디요?”

    그가 일어나 앉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나도 모르겠소. 정신이 들어보니 여기 와 있었는데, 보아하니 저승과 아주 비슷하오. 그렇지 않소?”

    심협은 설명하는 동안에도 사우흔의 손을 놓지 않고 계속 법력을 운공하여 그녀 체내의 음기를 몰아내고, 단약을 정제해주었다.

    육화명은 사방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 사우흔 옆에 와서 법력을 운공하여 심협과 함께 그녀의 회복을 도왔다.

    두 갈래의 기운찬 법력이 사우흔의 몸으로 주입되자 유영단이 녹아 약기운이 돌았다. 그녀의 몸에 하얀 빛이 떠오르더니, 외상이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치유되었다. 내상도 빠른 속도로 호전되어 사우흔의 호흡이 금세 평온해졌다.

    “신묘한 단약이군! 심형, 사 소저에게 어떤 묘약을 복용시킨 것이오?”

    육화명이 놀라며 묻자, 심협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내가 영유로 만든 요상 단약인데, 효과가 그럭저럭 괜찮소.”

    사실 그도 요상 유영단으로 중상을 입은 사람을 치료해본 것은 처음이라 그 효력에 놀랍고 기뻤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어찌 괜찮다 뿐이겠소! 대당관부에도 요상 단약이 좀 있긴 하나 어떤 것도 이 단약에 비할 순 없을 게요.”

    육화명이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때, 사우흔이 몸을 부르르 떨더니 천천히 깨어났다.

    “심 도우, 육 도우. 그대들이 저를 구해주셨군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곧 몸속 상태의 변화를 느낀 그녀는 옆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어찌된 일인지 알아차렸다.

    “육모는 한 일이 없소. 심형과 단약 덕분이지.”

    육화명이 손을 거두고 웃으며 답했다.

    “그저 단약일 뿐이오. 사 도우가 회복되는 것이야말로 중요하지요.”

    심협이 손사래를 쳤다.

    사우흔은 몸속에서 맑은 물줄기처럼 순수한 약기운을 느꼈고, 부상이 빠르게 호전되는 것을 알고는 심협이 자신에게 매우 귀한 단약을 복용시켰음을 깨달았다. 속으로는 매우 감격했지만, 그녀는 감정을 표현하는 데 서툴러 더는 감사의 표현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분명히 기억해두었다.

    “한데 여기는 어딥니까?”

    그녀도 곧 일어나서 사방을 두어 번 둘러보고는 물었다.

    심협은 그녀에게 이곳의 상황을 설명해주었고, 자신의 추측도 이야기해주었다.

    “저승이요? 그 법진이 왜 우리를 이곳으로 전송했을까요?”

    사우흔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일개 산수일 뿐이라 귀시는 몇 번 가본 적이 있어도 저승은 그저 전설 속의 장소였다. 그러니 저승에 왔다는 말에 당황하는 것도 당연했다.

    “사 도우, 당황하지 마십시오. 저승은 막다른 곳이 아니라 드나들 수 있는 곳입니다. 저도 예전에 육 도우와 한 차례 다녀왔었지요.”

    심협이 다독이자 사우흔은 조금 진정됐다.

    그녀의 경지는 심협과 육화명에 훨씬 못 미쳐서 부상이 대부분 회복되고도 주위의 짙은 음기에 뼈가 시릴 정도로 추워 무의식적으로 팔짱을 꼈다.

    “내게 홍혼옥(紅魂玉)이 하나 있소. 몸에 달고 있으면 음기의 침입을 잘 막을 수 있지. 사 도우가 가지고 계시오.”

    육화명이 새빨간 옥구슬을 하나 꺼내 사우흔에게 건넸다.

    심협은 그 옥구슬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데도 모닥불 옆에 서 있는 것처럼 작열하는 기운을 느꼈다.

    “감사합니다, 육 도우.”

    사우흔도 사양하지 않고 감사를 표한 뒤 옥구슬을 받아 가슴에 달았다. 따스한 기운이 금세 온몸으로 퍼지자 바들바들 떨리던 그녀의 몸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어째서 갈 도우와 단양자, 적수진인은 보이지 않는 걸까요?”

    “나 역시 그들을 보지 못했소. 그들은 다른 곳으로 전송된 모양이오.”

    육화명의 물음에 심협이 고개를 살짝 저었다.

    “이곳이 저승의 어디인지도 모르고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니, 아무래도 우선 그들을 찾아내 함께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겠소.”

    육화명의 제안에 심협과 사우흔도 찬성했고, 세 사람은 곧 한 방향을 선택해 길을 떠났다.

    이곳은 어두컴컴해서 심협의 시력으로도 30여 장까지밖에 볼 수 없었다. 이에 세 사람은 사방을 살피면서 언제 닥칠지 모를 위험을 경계하며 나아갔다.

    다행히도 별다른 위험은 닥치지 않았고, 어느 정도 가다 보니 앞쪽에서 콸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보니 강줄기인 듯한데, 우선 가보지요?”

    육화명은 심협과 사우흔을 바라보며 그들의 의견을 물었다. 이미 한참을 걸어왔고 앞에 모처럼 변화가 나타난 것이니 두 사람도 반대하지 않았다.

    곧 그들 앞에 물가가 하나 나타났다. 얼핏 보기에는 큰 강 같았다. 그들의 시력으로는 맞은편 기슭조차 안 보일 정도로 폭이 넓었다.

    강은 좌우 양쪽으로 아득히 멀리 뻗어 있어서 끝이 보이지 않는 것이, 건너기 어려운 천연 요새처럼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강물은 황갈색의 혼탁한 흙물 같았고, 수면 위로는 하얀 안개가 떠돌아 더없이 신비로운 느낌이 들었다.

    이제 두려움이 어느 정도 사라진 사우흔은 이승과는 전혀 다른 강줄기를 보고는 궁금한 듯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려 했다.

    그러나 육화명이 손을 뻗어 그녀를 만류했다.

    “유명계(幽冥界: 저승세계)의 강물에는 지극히 강력한 음기가 담겨 있고, 강바닥에는 사나운 귀물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니 가까이 다가가지 마시오!”

    그 말에 사우흔은 재빨리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심협은 강물을 살펴보다가 손을 들어 가리켰다. 그러자 검은 빛 한 줄기가 쏘아져 날아갔는데, 이는 검은 박요삭(縛妖索)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심협은 이 물건을 누구에게서 얻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검은 밧줄의 앞쪽 끄트머리는 곧장 강 속으로 들어갔다.

    쩌적!

    가벼운 소리와 함께 박요삭 앞쪽 끄트머리에 하얀 얼음결정이 맺혔다.

    심협은 재빨리 박요삭을 불러들여 끄트머리의 얼음을 보고는 눈을 반짝였다.

    박요삭은 끝부분에 얼음이 얼었을 뿐만 아니라 지극히 순수하고 놀라울 정도로 차가운 음기가 스며들어 내부 구조가 전부 파괴되었던 것이다.

    그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손가락 사이로 일어난 바람이 밧줄 끝부분의 얼음을 때렸다. 그러자 하얀 얼음이 소리를 내면서 부서져 내리며 밧줄도 산산조각이 났다.

    “실로 차갑고 음산한 강물이로군요. 법기조차 당해내지 못하다니요.”

    사우흔이 깜짝 놀라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아니, 심형의 법기를 망가뜨린 것은 강물이 아니라 수면 위의 하얀 안개요. 저 하얀 안개에 담긴 음산한 힘은 강물의 그것보다 훨씬 강력하니, 설마 명한음기(冥寒陰氣)인가?”

    육화명은 눈썰미가 예리해 한눈에 박요삭이 어떻게 망가졌는지를 알아내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명한음기요?”

    사우흔이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박요삭은 심협의 법기이니 자연히 그가 육화명보다 이 모든 것을 더 잘 알았다. 하지만 그에게도 명한음기라는 이름은 생소했다.

    “명한음기라는 것은 극도로 짙은 음기와 한기가 서로 만나는 곳에서 만들어지는 특수한 음기요. 여기 공간이 너무 넓은 게 안타깝군. 아주 작은 공간 안에 있었다면 명한석(冥寒石)이 맺혔을지 모르니 말이오. 그거야 말로 진정한 보물인데!”

    육화명의 설명에 심협은 새삼스레 수면 위의 안개를 다시 바라보았다. 저 안개가 그토록 대단한 내력을 지녔다니!

    “이 명한음기도 아주 진귀하여 음(陰) 속성 법기를 만드는 데 쓰이는 훌륭한 재료요. 이승에서는 보기 드문 물건이지. 기왕 발견했으니 조금씩 챙깁시다. 허나 보통의 용기를 사용해서는 음기와 한기의 힘을 견뎌내지 못할 거요.”

    육화명은 계속해서 설명하며 벽옥(碧玉) 호리병을 꺼내 결인하고 끌어당겼다. 그러자 벽옥호리병이 날아가 한 줄기 흡입력을 뿜어냈고, 수면 위의 하얀 안개가 모여들어 하얀 기체의 기둥을 이루더니 호리병 안으로 뭉실뭉실 녹아들었다.

    사우흔도 옥병 법기를 꺼내 수면의 명한 음기를 거두었다.

    수면의 명한음기는 무궁무진해서 두 사람이 열심히 거두었지만 줄어들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심협도 명한음기에 퍽 마음이 동했다. 박요삭을 손쉽게 부식시켜버렸으니, 이것으로 다른 법기를 만든다면 그 위력이 분명 대단할 터였다.

    다만 그는 곧바로 손을 대지 않았고, 약간 주저하는 기색마저 보였다.

    그에게는 법기가 많지만, 수납용은 건곤대가 유일했다. 그러나 건곤대는 그에게 매우 중요했다. 귀장을 데리고 다니는 데 꼭 필요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평범한 음기라면 모를까, 이 명한음기의 위력은 무시무시해 건곤대가 버텨내지 못할 수도 있지 않은가.

    “우선 조금만 받아들여 보고 건곤대가 감당하지 못하면 바로 꺼내자.”

    심협은 결인하여 건곤대에 수면의 하얀 안개를 작게 한 덩이 거두어들였다.

    사실 귀장이 명한음기에 다칠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귀물인 귀장은 본디 음기를 좋아하여 한기를 전혀 두려워할 리가 없으니 말이다.

    명한음기는 주머니 속에 들어가자 사방으로 뻗어나가 금세 주머니 벽에 닿았다. 그러자 주머니 벽에서 검은 빛이 일렁이기는 했지만, 전혀 부식되지 않았다.

    이를 감지하 심협은 안도하며 건곤대의 흡입력을 키우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주머니 벽의 검은 빛이 갑자기 번쩍이기 시작하면서 명한음기를 빠르게 집어삼키기 시작해 불과 몇 호흡 사이에 말끔히 먹어치웠다.

    “건곤대가…… 명한음기를 통째로 집어삼키다니…….”

    심협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런 상황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다시 자세히 감지해보니 명한음기를 흡수하고도 건곤대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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