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331화 (331/1,214)
  • 331화. 물러날 길이 없다

    “저놈의 어수지술(御水之術)은 괴이하여 단시간에 죽이기는 힘들 것 같소.”

    단양자가 심협 뒤로 돌아와 서며 봉수를 죽이지 못한 것이 부끄러운 듯 말했다.

    “우록, 연신단을 배반한 것이냐? 아니면 원래부터 관부의 첩자였던가?”

    현효는 시선을 우록에게로 돌리며 냉랭하게 물었다.

    “그게 중요한가?”

    우록은 한숨을 내쉬더니 어깨를 으쓱이고는 되물었다.

    “중요하지. 너를 죽일 방법이 달라질 테니 말이다.”

    현효가 담담히 답했다.

    “그것보다 나는 네놈이 어찌 우리를 알아챘는지 더 알고 싶은데……?”

    “나와 사부님은 모두 귀수다. 이 길에 얼마나 오랜 세월 빠져 있었는데 귀물을 분별해내지 못할까! 물론 네놈들의 음령부가 범상치 않은 것은 사실이다만, 내 앞에서는 전부 헛수작이지. 흐흐흐.”

    신랄하게 비웃은 현호는 손가락을 모아 자신의 두 눈을 문질렀다. 그러자 동공이 아래로 홱 뒤집히면서 놀랍게도 어두운 자줏빛 동공 한 쌍이 더 나타났다.

    “유명귀안(幽冥鬼眼)!”

    단양자가 깜짝 놀라 외쳤다. 심지어 선망의 눈빛이 드러나기까지 했다.

    그도 똑같은 귀수로서 귀도를 수련하는 데는 타고난 자질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천부적으로 음체(陰體)와 음동(陰瞳)을 타고나 수행에 있어서도 남들보다 한층 뛰어났는데, 이 유명귀안이 바로 그중 하나였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눈은 귀살과 죽은 이의 영혼을 두루 알아낼 수 있다. 심지어 수행이 높은 경지에 이르러 귀선이 되었다고 해도 그 내력을 조금은 알아볼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제 어찌 한단 말이오? 계획이 틀어졌는데 더 싸울 거요?’

    적수진인이 어두운 표정으로 신식을 통해 물었다.

    “싸워야지요! 당연히 싸워야 하오! 이번에 성 전체가 우리를 위해 엄호하고 있으니 실패하면 다음 기회는 없소이다!”

    육화명이 그렇게 외치고는 막 법술을 펼치려는데, 단양자가 불쑥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그의 두 눈은 줄곧 현효의 겹눈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는데, 눈빛에서는 한 가닥 탐심이 엿보였다.

    심협이 씁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황목 선배님께서 우리를 내던지셨을 때 돌아가는 길을 남겨주지 않으셨지요. 도망치더라도 성 북쪽으로 돌아가는 내내 싸움은 피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러자 육화명이 웃으며 말했다.

    “여러분, 너무 낙담하지 마시지요. 우리가 저 법진을 파괴하기만 하면 임무는 완수하는 셈 아닙니까? 저들에게 상갓집 개처럼 쫓겨 도망가는 것보단 그게 나을 겁니다.”

    갈천청은 말없이 그저 현효를 노려보았다. 그의 옷자락이 절로 부풀어 오르며 소매 사이로 간간이 펄럭이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바로 그때, 쿵 하고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노경의 검은 우산이 회전하며 하늘로 솟구쳐 오악진형인을 들이받은 것이다.

    심협이 그 기세를 따라 손을 들자 인장이 그의 손으로 날아 돌아왔다.

    반대편에서는 노경이 손에 검은 우산을 쥔 채 싸늘하게 그를 노려보았다.

    결계 위로 홀연히 틈이 하나 갈라지더니 현효와 두 사람이 바깥으로 나왔다.

    “너희 같은 오합지졸들로 이 칠등인혼진을 파괴하겠다는 것이냐? 바깥의 결계조차 깨뜨리지 못하는 주제에 말이다. 꿈도 야무지구나. 하하하!”

    현효가 한껏 비웃자, 한쪽에 서 있던 봉수가 앞으로 나서더니 황공한 표정으로 말했다.

    “현효 선배님, 너무 방심하셔서는 안 됩니다. 저놈들 중 청삼을 입은 저놈이 바로 심협이온데, 예전에 동관 선배님께서 바로 저놈 손에 돌아가셨습니다.”

    “네놈이 실성한 것이냐! 장로님께 감히 저놈들 중에서도 경지가 가장 낮은 놈을 조심하라고 하다니! 겨우 일개 응혼 초기 수사 아니더냐!”

    혈동자가 날카롭게 꾸짖었으나, 입은 헤벌쭉 웃고 있었다.

    현효도 모욕을 당했다고 느꼈는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선배님들, 이 후배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저놈은 그날 벽곡기 경지임에도 동관 선배님을 살해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응혼기 수사가 되었다니, 분명 이상하지 않습니까?”

    봉수는 현효의 안색이 점점 안 좋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충고를 이어갔다. 그리고 그 결과는 좋지 않았다.

    휙!

    현효가 넓은 소맷자락을 휘두르자 봉수는 곧장 날아가 고목에 부딪혔다.

    “빌어먹을 놈 같으니라고. 나를 동관 같은 폐물과 비교하는 것이냐? 그리 오랫동안 눈여겨보던 벽안금섬을 놓쳐버린 그런 등신 같은 작자는 죽지 않고 돌아왔더라도 힘줄을 뽑고 가죽을 벗겨 등불을 만들었을 것이다!”

    봉수는 나무에 부딪혀 거의 숨이 끊어질 지경이 되어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갑자기 왈칵 붉은 피를 뿜어냈다. 시야가 조금 흐릿해진 부러진 고목에 비틀비틀 기대더니 허탈하게 웃었다.

    “에헤, 괜히 시간만 낭비했네.”

    혈동자는 봉수를 힐끗 보며 그렇게 내뱉고는 고개를 틀어 심협 일행을 보면서 입을 벌려 날카로운 이를 핥아보였다. 그의 눈에는 피에 굶주린 듯한 기색이 언뜻 스쳤다.

    “어서 저놈들을 해치웁시다. 죽여서 곧장 다시 소환해올 수 있을지도 모르잖소. 그러면 귀물 대군 안에서도 좋은 싹들이 많이 나올 게요.”

    묘 부인은 앞가슴에서 하얀 손뼈를 풀며 여전히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봉수가 저놈을 그리도 신경 썼으니 저자는 제게 맡기시지요.”

    노경이 눈빛을 굳히며 말했다.

    “역시 너의 기개는 놀랍구나. 제일 약한 놈을 고르다니 말이야. 헤헤.”

    혈동자가 은근히 비꼬았으나, 노경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속전속결. 음령산의 귀왕도 최대한 빨리 불러와야 한다.”

    현효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옆에서 바람소리가 울렸다. 노경이 시선을 심협에게 고정시킨 채 돌진해온 것이다.

    “나를 택하다니, 마침 잘됐군. 나도 네놈이 그리 곱게 보이진 않았거든.”

    심협이 차게 중얼거리며 발끝으로 땅을 찍고 세차게 튀어나갔다.

    “갈 도우, 현효는 잠시 도우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육화명이 눈썹을 찡그리며 심협을 따라 쌩하니 달려 나갔다.

    갈천청은 무거운 안색으로 손바닥을 내뻗었다. 그러자 손바닥 한가운데에 전체가 거무스름한 쇠 정(돌에 구멍을 뚫거나 다듬는, 한쪽 끝이 뾰족한 연장)이 하나 나타났다. 표면이 울퉁불퉁하고 다듬은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갈천청이 법력을 주입하자 치지직 소리와 함께 검은 벼락이 순간 정을 휘감아 뇌전광검(雷電光劍)이 되었다.

    “갈 도우, 괜찮다면 거들어줄 테니 함께 현효를 상대하는 것이 어떻겠소?”

    단양자가 씩 웃으며 제안해왔다.

    갈천청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튀어나갔다.

    우록과 적수진인은 서로 눈을 한 번 마주치고는 다시 맞은편의 백발 노파와 혈동자를 바라보았다.

    “저 꼬맹이는 내게 맡기시오.”

    적수진인이 잠깐 주저하더니 말했다.

    “내가 묘 부인을 상대하겠소.”

    우록이 말했다.

    말을 마친 두 사람도 곧바로 튀어나가 각자 한 사람씩 달라붙어 싸우기 시작했다.

    혈동자와 적수진인 모두 응혼 중기 수사여서 둘은 그런대로 막상막하였지만, 묘 부인은 응혼 초기이긴 해도 벽곡기 정점 수사인 우록의 상대가 아니었다.

    순식간에 위기에 처한 우록은 어쩔 수 없이 신법(身法)에 의지하여 이리저리 피해 다니기에 바빴다.

    묘 부인은 그를 죽이는 게 전혀 급하지 않은 듯, 그저 하얀 손뼈 법기로 쉴 새 없이 공격해 우록의 몸 곳곳에 처참한 핏빛 상처를 줄줄이 남길 뿐이었다.

    한편, 심협과 노경은 거세게 맞부딪친 뒤 각자 떨어져 나갔고, 육화명은 그 틈에 몸을 날려 뒤쫓아 와 장검으로 곧장 노경을 찔렀다.

    노경은 검이 스치려는 순간 검은 우산으로 맞부딪쳐왔다.

    우산 위로 하늘을 떠받친 역사들이 다시 나타나더니 마치 나한이 동굴을 뛰쳐나오는 듯한 기세로 잇달아 두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자 우산에서 강렬한 검은빛이 폭발하여 육화명의 칼날을 굳건히 막아냈다.

    둘이 팽팽히 맞서는 사이 심협의 그림자가 재빨리 우산을 돌아 스쳐 지나가며 노경 옆에 이르렀다. 그리고는 뱀 모양 장검으로 그의 목을 찔렀다.

    심협의 공세는 질풍 같았으나, 노경의 반응 역시 매우 빨랐다. 그는 목을 홱 기울이는 동시에 한 팔을 치켜들고 검 끝을 내리쳤다. 팔뚝 위에 차고 있던 완갑(*腕甲: 손목부터 팔꿈치까지를 보호하기 위해 두르는 갑옷) 위에는 사나운 사자 머리가 조각되어 있었다.

    검이 가까워지는 순간, 완갑의 사자가 입을 벌리고 검 끝을 물었다. 무는 힘이 어찌나 강한지, 심협은 도저히 장검을 뽑아낼 수가 없었다.

    노경의 눈에 서늘한 빛이 스쳐 지나더니 갑자기 입을 쩍 벌렸다. 그 순간, 초록 빛이 튀어나와 새파랗게 윤이 나는 비도(飛刀)가 쏜살처럼 심협의 미간을 향해 날아왔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 심협은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한데 푸른 빛이 막 심협의 머리를 관통하려는 순간, 미간에 붉은 빛이 번쩍 나타났고, 순양검배도 순식간에 튀어나와 푸른 빛과 충돌했다.

    비도와 검배의 끄트머리가 맞닿은 곳에서는 불똥이 튀었고, 푸르고 붉은 광흔(光痕)을 끊임없이 드리우며 쟁쟁한 소리가 계속해서 울렸다.

    그때, 심협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가더니 검을 쥔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러자 장검에서 1척 길이의 푸른 빛줄기 두 개가 튀어나가 하나는 노경의 인후(*咽喉: 목구멍)로 곧장 날아들었고, 다른 하나는 비도를 향해 날아갔다.

    노경은 양쪽에서 협공을 당한 데다 비도를 조종하는 데에도 신경을 써야 했기에 피할 수 없었다. 이에 그는 온몸의 법력을 끌어모아 머리를 낮추면서 푸른 빛을 입으로 물었다.

    기이한 소리와 함께 노경의 윗니와 아랫니 사이에 자검이 걸렸다. 자검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지만, 입속을 파고들지 못했다.

    노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신식으로 소리를 전해 동료들의 도움을 구하려다가 갑자기 얼굴이 굳어졌다. 붉은 비검 한 자루가 가볍게 그의 머리를 꿰뚫었던 것이다. 이어서 그의 식해 속에서 시뻘건 불길이 일어 순식간에 신혼(神魂)을 흔적도 없이 불태워 버렸다.

    노경의 눈이 눈 깜짝할 사이에 생기를 잃었고, 입에 힘이 풀렸다. 그러자 자검도 순식간에 그의 뒷머리를 관통하여 검은 우산에 부딪혔다.

    이 모든 것이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데다 검은 우산에 가려졌기 때문에 노경이 어떻게 죽었는지 아무도 볼 수 없었다.

    심협은 모든 법기를 거둬들인 뒤, 한 손으로 검은 우산을 잡아 챙겨 넣으면서 육화명을 향해 슬쩍 웃어보였다.

    육화명은 앞서 심협이 도와달라고 신식을 전한 것만 들었을 뿐, 이토록 재빠르고 깔끔하게 노경을 해치울 줄은 몰랐기에 일순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그가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심협은 검은 우산을 챙기고 노경 팔뚝 위의 완갑을 가져가려 했다.

    그때, 그의 눈에는 멀지 않은 곳에서 얼핏 우록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이미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한편 현효의 앞에는 거대한 몸집의 흉악한 귀물 두 마리가 떠다니며, 갈천청과 단양자를 상대로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갈천청의 암뢰 술법은 본디 귀물과 상극이어야 하나, 두 귀물 중 금갑을 두른 외눈박이 귀왕이 시커먼 장극(長戟)으로 막아선 탓에 현효의 몸에 가까이 가지도 못했다.

    한편, 단양자는 가슴 앞자락이 훤히 트여 가슴이 드러나 있었는데, 그 위로 고통스러운 표정의 흉악한 귀신 얼굴 세 개가 떠올라 있었다. 그의 온몸은 살기에 휘감겨 있었고, 머리칼은 산발이 되어 사방으로 춤추듯 휘날렸다. 마치 그 자신이 한 마리 귀물처럼 보일 정도였다.

    단양자가 상대하는 귀물의 두 손은 비어 있었는데, 대신 핏빛 옷소매가 휘날리면서 음풍과 살기가 끊임없이 뿜어져 나왔다.

    적수진인은 빛깔이 화려한 오화선을 든 채 혈동자를 향해 끊임없이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혈동자의 목 양옆에는 혹 같은 작은 주머니 두 개가 자라나왔는데, 각자 입을 벌린 채 하나는 짙은 잿빛 연기를 토해냈고, 다른 하나는 피처럼 붉은 빛 덩어리를 뿜어냈다.

    잿빛 안개는 살짝 닿기만 해도 옷과 피부가 순식간에 썩어문드러졌고, 붉은 빛 덩어리는 일단 맞으면 폭발하여 부상을 입혔다.

    이에 적수진인은 부득불 혈동자와 거리를 벌린 채 멀리 떨어져서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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