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318화 (318/1,214)
  • 318화. 만귀장안(萬鬼長安)

    방시 세 곳을 지나 영업방(永業坊) 경계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관부 사람들을 다시 발견할 수 있었다.

    길거리에서 십여 마리 귀물들과 싸우고 있는 관부의 병졸들을 만나 도와주고 한 노병의 인솔 아래 곧장 방문(坊門) 쪽으로 달려온 터였다.

    영업방 문밖 거리에는 일고여덟 개의 막사가 세워져 있었고, 주위에는 많은 병사들이 경계를 섰으며, 막사 안에도 수사들이 지키고 있어 완전히 전시의 경비태세였다.

    심협은 엄격한 검문을 거치고 노병이 증인을 서준 끝에 비로소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한데 영업방에 들어서자마자 놀랄 만한 광경이 펼쳐졌다. 거리 곳곳에 간이 장막들이 쳐져 있었는데, 그곳에는 성 남쪽 곳곳에서 도망쳐온 백성들이 머물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안색이 좋지 않았는데, 다들 놀란 마음이 진정되지 않은 듯했다.

    “어찌 이럴 수가…….”

    심협은 깊게 탄식했다.

    여러 정황들로 미루어 장안성의 이번 재앙은 그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을 정도로 심각한 것이 분명했다.

    “온갖 귀물들이 정말 너무나 갑작스럽게 습격해왔습니다. 성 남쪽의 거의 모든 방시에서 동시에, 미처 손쓸 틈도 없이 성의 방어 시설들을 공격하는 바람에 제대로 반격도 하지 못했지요.”

    노병이 길게 탄식했다.

    “이번 귀환은 분명 누군가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소. 장안성을 겨냥하여 음모를 꾸미고 습격해온 것이니 그리 쉽게 대처하지 못한 것도 당연하오.”

    “암요. 어젯밤 관부에서 성안의 다른 수사들을 긴급히 불러모아 귀환을 정리하러 갔습니다. 비록 모든 힘을 모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만만치 않은 실력들이었습죠. 한데 귀물들을 말살하지 못하고 그저 영업방에서 숭복방(崇福坊) 일선까지 막는 게 전부였고, 성 남쪽 전체가 함락되었지요.”

    노병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심협은 그 말에 앞서 전통 일행에게 죽을 뻔했던 기억이 떠올라 더욱 불안해졌다.

    노병은 그가 한참이나 아무 말도 없자 또다시 푸념하듯 말했다.

    “선사님, 그렇다고 근심하실 필요는 없답니다. 우리 대당관부도 만만하지는 않거든요. 다만 잠시 부대를 통합하지 못한 터라 전면적인 반격을 못한 것뿐입니다. 게다가 이미 화생사를 비롯한 선가 종문에 사람을 보내 지원을 요청했다는 소식이 있고요. 지원병이 도착하면 안팎으로 협공을 퍼부어 그놈들을 모조리 몰살할 겁니다.”

    그의 말에는 대당 병졸이라는 자부심이 잔뜩 묻어났기에 심협도 덩달아 마음이 뜨거워져 미소를 지었다.

    “맞는 말이오. 정국공 대인과 여러 큰 종문들이 있으니 저 잡귀 놈들은 오래 날뛰지 못할 것이오.”

    노병은 교대 후 잠시 쉬러 돌아온 것이라 심협과 잠시 대화를 나누다가 각자 갈 길을 갔다.

    곧장 황성 방향으로 향한 심협이 영업방을 나설 무렵 앞쪽 하늘이 갑자기 밝아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검은 구름이 황성 방향에서 뿜어져 나오는 찬란한 기상에 가로막혀 있었다.

    정국공 저택에 이르러 입구의 수위에게 몇 마디 건네자 머지않아 안에서 누군가가 황급히 걸어 나왔다. 육화명이었다.

    “심형! 드디어 왔구려!”

    육화명이 멀리서부터 외쳤다.

    “어젯밤 귀물들 뒤를 좀 캐다가 일이 좀 생겨서 말이오. 진작 이쪽으로 왔어야 했는데…….”

    “오, 무슨 일이 생겼소?”

    심협의 말에 궁금해졌는지 육화명은 곧장 물었다.

    심협은 곧 연신단의 세 사람과 마주쳤던 일을 간단히 이야기했다.

    “응혼기 수사 세 사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란 실로 만만치 않았겠소.”

    육화명은 심협을 위아래로 훑어본 뒤, 별다른 부상이 없는 듯하자 안심한 듯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며 웃었다.

    “도대체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 것이오? 성의 절반은 함락된 것 같은데…….”

    심협이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상황이 조금 복잡하여 나도 아직 분명히 말해줄 수가 없소. 허나 관부의 윗분들께서 이미 대책을 세우셨으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소. 다만 그때까지 백성들이 고생하게 됐으니 안타까울 따름이오.”

    육화명은 탄식하며 심협을 이끌고 곧장 정부(程府)로 향했다.

    “지금이야말로 사람이 필요한 때요. 아침에야 조정에서도 방을 붙여 종문의 보첩선사든 자유로운 산수든 성안 모든 수사는 잠시 관부 휘하에 징집하여 함께 귀환을 막게 할 것이라고 알렸소.”

    “대당의 백성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것이니 당연히 마다하지 않을 것이오.”

    육화명의 설명에 심협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하하, 심형의 말이 심히 옳소. 이렇게 되면 그대와 나는 또 한 번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울 수 있겠구려.”

    육화명도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허리춤에 달린 요패(*腰牌: 허리에 차던 신분증 겸 출입증명용 패)에서 갑자기 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심형을 안내해주는 차에 잠시 좀 쉬려 했더니 안 될 것 같구려. 관부의 급한 호출이 있으니 가봐야겠소.”

    육화명이 살짝 한숨을 내쉬며 미안한 듯 말했으나, 심협은 손을 내저었다.

    “괜찮소. 만약 도울 수 있다면 나도 함께 가겠소.”

    육화명은 잠깐 망설이더니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전투는 아닐 텐데……. 그럼 이렇게 합시다. 내 그대를 모병소로 데려다주겠소. 그곳의 장병전(藏兵殿)이 바로 수사들의 징집소요.”

    “좋소.”

    심협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곧 다시 대당관부 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심협은 가는 길에 또 자신이 겪은 일을 육화명에게 하나하나 알려주었다.

    “심형의 말들은 하나같이 중요한 정보요. 앞으로 우리 작전에 적지 않은 의미가 있을 테니 이미 큰 공을 세운 셈이구려. 하하하!”

    육화명의 호탕한 말에도 심협은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았다.

    심협을 장병전까지 안내해준 육화명은 곧바로 떠났다.

    심협은 전각 앞의 탁 트인 광장에 서서 웅장한 주홍빛 대전을 슥 둘러보고는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대전 안에는 장식이 많지 않았고, 맞은편에는 거의 천장과 같은 높이의 자물쇠 달린 궤짝이 하나 있었다. 크고 작은 격자무늬가 빽빽했는데, 그 위에 성명이 적힌 이름표가 하나씩 붙어 있었다.

    궤짝 앞에는 책상 세 개가 놓여있었고, 그 뒤로 관복을 입은 관부 사람들이 각각 한 명씩 앉아 있었다. 그들 모두 분주히 문서들을 뒤적이느라 잠시 아무도 심협이 온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어험!”

    심협이 가볍게 헛기침을 하자, 세 사람은 깜짝 놀라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등록하러 오신 선사님이신가요? 성함이 어찌 되십니까?”

    가운데 앉은 사람은 대략 쉰 전후로 보였고, 깡마른 체격에 이목구비는 초췌했다.

    그가 먼저 일어서며 심협에게 포권을 하자 나머지 두 젊은 사람도 곧 몸을 일으켜 공손히 예를 갖춘 뒤, 다시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자기 일에 집중했다.

    “저는 심협이라 합니다. 춘화현 춘추관 수사이지요.”

    심협도 예를 갖추고는 자기를 소개했다.

    “선사님의 높은 뜻은 참으로 감탄스럽습니다. 저는 병부문서(*文書: 관청이나 군부대의 서기, 문서담당자) 하문정(何文正)입니다.”

    가운데 앉아 있던 사람은 ‘춘추관’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지 잠깐 망설였지만, 그래도 공손하게 말했다.

    “하 대인을 뵙습니다.”

    심협이 또다시 예를 갖춰 인사하자 하문정은 손사래를 치고는 다시 물었다.

    “대인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한데 혹시 선사님의 경지는 어느 정도인지요?”

    “응혼 초기입니다.”

    심협의 담담한 대답에 하문정의 눈에는 의외라는 표정이 살짝 스쳐 지났다.

    “이번 수사 징집은 전부 군대의 제식에 따라 배치됩니다. 심 선사님께서는 응혼기 수사이시니 곧바로 십장(*什長: 군대에서 병졸 열 명의 책임자)을 맡아 벽곡기 이하 수사들을 인솔하시면 되겠군요.”

    “십장? 그런 구분도 있습니까?”

    심협에게는 다소 뜻밖이었다.

    “다섯 사람을 한 오(*伍: 5인으로 편성되는 옛 군대의 최소 단위)로 삼아 벽곡기 수사 한 사람이 오장(*伍長: 한 오‘伍’의 우두머리)을 맡고, 두 개의 오가 하나의 십(什)이 됩니다. 응혼기 수사가 이 십장을 맡게 되지요. 또, 세 개의 십을 한 표(標)로 삼아 출규기 수사가 표장(標長)을 맡습니다. 이렇게 상급자가 하급자를 통솔하고 계급이 분명하여 명령이 원활하게 하달됩니다.”

    “그렇군요. 그럼 수고스럽겠지만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하문정은 곧 자리에 앉아 빈 두루마리를 하나 꺼내고는, 심협의 여러 가지 상황을 물으면서 능숙하게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기록하는 내용은 적지 않아서, 출신 본적과 수도 경력을 비롯해 수련하는 공법에 대한 정보도 물었다.

    심협은 이를 귀 기울여 듣다가 은근히 거부감이 느껴져 미간을 찌푸렸다.

    “선사님, 오해 마십시오. 이번 징집 임무에서 맞닥뜨리게 될 위험을 예측할 수가 없기에 기록하는 것뿐입니다. 또한 뜻밖의 상황에 대처하여 조정의 구휼이 두루 미치게 하려 함이지요.”

    하문정은 심협이 조금 언짢아하는 것을 눈치채고는 황급히 설명했다.

    그 말에 표정이 조금 풀렸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아있었다.

    “수련 공법은 왜 기록해야 하는 것입니까?”

    “아, 그 부분은 자세히 말씀하실 필요 없습니다. 공법의 속성과 능통한 것들만 간략하게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대오를 나눌 때 참고하여 속성이 서로 잘 맞는 수사들끼리 조를 짜려는 것뿐이니까요.”

    하문정의 대답에 그제야 심협은 표정을 완전히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문정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보면 심협이 이치를 따지는 사람이라는 점이 오히려 안심이 되기도 했다.

    “선사님, 일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징집된 수사들은 잠시 관부 쪽의 별원(別苑)에서 지내셔야 합니다. 지도를 보여드리지요. 지금 아집원(雅集苑) 쪽 방들은 대부분 비어 있으니 원하시는 대로 고르실 수 있을 겁니다.”

    “수고스럽더라도 조금 외지고 조용한 거처로 알아봐 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말을 마치고 하문정은 지도를 훑어보더니 심협에게 외진 곳을 몇 군데 짚어주었다.

    심협은 남서쪽 모퉁이의 2층짜리 독채 건물을 골라 열쇠를 받고 등록을 마친 뒤 떠날 채비를 했다.

    “선사님, 잠시만요. 이것은 귀물들을 죽이고 임무를 수행한 공적이 기록되는 요패입니다. 후에 그 공적에 따라 보수와 포상을 받을 수 있지요.”

    하문정은 황급히 서랍에서 손바닥만 한 영패를 꺼내 건네며 말했다.

    영패를 받아 들고 보니 육화명의 것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그 위에는 검푸른 정석(晶石)이 하나 더 박혀 있었고, ‘임(臨)’자도 새겨져 있었다.

    “이 자그마한 영패에 어찌 공적을 기록합니까?”

    심협이 의아한 듯 물었다.

    “귀물을 죽인 뒤에 음살귀기 한 줄기만 이 영패 위에 남겨두시면 공적 1점이 기록됩니다. 남긴 귀기가 많을수록 기록된 공적도 높아지고, 포상도 더 커지지요. 허나 이것은 그저 자질구레한 작은 공적점에 불과하고, 큰 공적들은 임무수행으로 얻게 될 겁니다. 대오 단위로 결산하기에 보통 오장과 십장은 일반 일반 조들보다 2할은 더 많습니다.”

    “포상이란 게 정확히 무어요?”

    심협은 관심이 가는지 자세히 물었다.

    “보통은 공적점을 선옥으로 바꿉니다만, 원하신다면 가족들을 위해 토지나 밭 따위로 바꾸실 수도 있습니다. 국고에 소장된 영재와 법기들도 포상으로 내놓을 것이나, 이는 더 높은 공적점이 필요하지요. 자세한 이야기는 교환처에서 들으시면 될 겝니다.”

    하문정의 설명에 심협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또 궁금한 것이 생각났다.

    “그럼 임무는 또 어디에서 받습니까?”

    “이번 징집에서는 모든 것에 군대의 규율을 적용합니다. 따로 임무를 받을 필요 없이 군추처(*軍樞處: 군대의 핵심중추 역할을 하는 곳)에서 임무의 난이도에 따라 직접 파견할 겁니다. 영패가 반응하면 이곳으로 집합하시면 되지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소집 명령을 거부하실 수는 없습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인사한 뒤 요패를 허리춤에 매단 후 그곳을 떠나, 안내받은 숙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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