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화. 탈출
“인연도 있고 하니 심 도우도 안심하시지요. 거래를 서두르는 것이 좋겠소. 시간을 끌면 저들의 의심을 살 것이오.”
전통이 웃음기를 거두지 않은 채 재촉했다.
“나도 마침 그러려던 참이었소. 전 도우가 괜찮다면 먼저 틈을 좀 열어주겠소? 그러면 내 검배를 그대에게 넘겨주리다. 어떻소?”
심협은 주위를 쓱 둘러본 뒤 약간 주저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말을 마친 그가 손목을 돌리자, 순양검배가 그의 손바닥 한가운데에 유유히 나타났다. 다만 그 표면의 빛은 안으로 함축되어 있어 전해지는 법력 파동은 거의 없었다.
검배를 바라보는 전통의 눈이 탐욕으로 번득였다.
“심 도우가 성의를 보였으니 나도 꾸물댈 것 없지요.”
말을 마치고 그는 손가락을 모아 허공을 쭉 그었다. 그러자 앞쪽의 검은 점액이 갈라지면서 가느다란 자국이 생겨났다.
“감사하오.”
심협은 한 마디 감사를 표한 뒤 손을 휘둘러 순양검배를 전통에게로 던지고, 동시에 몸을 날려 급히 갈라진 틈으로 돌진했다.
전통은 안색이 밝아져 손을 뻗어 검배를 잡으려 했다. 순양검배는 허공에서 천천히 떠다니는 게 공격력이 전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통이 막 쥐려는 순간, 검배에서 검명이 울리더니 갑자기 살아난 것처럼 붉은 빛을 내뿜으며 쉭 하고 전통의 가슴팍으로 곧장 날아들었다.
전통은 미리 예상이라도 한 듯 전혀 당황한 기색 없이 한 손으로 날아오는 검배를 잡으려 하면서, 다른 한 손은 심협 쪽으로 흔들었다.
심협이 재빨리 돌진하여 틈 앞에 이르자마자 그곳에서 검은 빛이 번쩍이더니 다시 완전히 합쳐졌고, 사방에서 검고 진한 점액이 다시 덮쳐와 살아 있는 촉수처럼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강렬한 음살의 힘이 또다시 파도처럼 몰아치면서 그의 몸속으로 침입해 들어왔다.
다른 한편에서는 쨍 하고 금속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전통의 손에는 어느새 은빛 금속 장갑이 끼워져 있어서 놀랍게도 단번에 순양검배를 휘어잡았다.
순양검배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전통의 손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심 도우. 신용을 지키지 않은 것은 내가 아니라 그대요. 악의적으로 나를 습격했으니 말이오. 그럼 이 전모도 거래를 깨는 것이 당연하지 않소.”
전통은 순양검배를 손에 넣은 흡족함 때문인지 더욱 활짝 웃었다.
심협은 그와 입씨름을 벌이지 않고 그저 냉랭하게 상대방을 주시하면서, 소매 속에서 두 손으로 가만히 인계를 맺었다.
“됐소. 검배를 손에 넣었으니 쓸데없는 이야기는 할 것 없지. 내 바로 황천길로 보내주리다. 안심하시오. 인정을 좀 봐주어 시원하게 보내줄 것이니.”
전통은 심협이 답하지 않자 흥미를 잃은 듯 그리 말하고는 한 손을 세워 허공을 확 그러쥐었다. 그러자 맞은편의 검은 점액이 순식간에 조여들면서 심협의 몸을 사납게 짓누르기 시작했다.
우드득! 드득!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가슴뼈가 안으로 푹 주저앉았고, 심협은 고통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듯했다.
전통의 얼굴에 웃음이 점점 더 환하게 번져가던 그때, 이변이 발생했다!
번쩍 고개를 든 심협의 두 눈에 한 줄기 빛이 스쳤다. 이어서 그는 법결 맺던 손을 멈추고 대신 나지막하게 한 단어를 내뱉었다.
“공격!”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전통 앞에 거대하고 눈부신 붉은 빛이 번득이면서 시뻘건 화염이 무리지어 솟아올랐다.
전통은 화들짝 놀랐지만 곧 이 화염이 보기에는 이글거리는 것 같아도 결코 작열하듯 뜨겁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가 의심하는 사이 가느다란 불꽃 한 줄기가 갑자기 솟구쳐 곧장 그의 두 눈으로 달려들었다.
전통은 이번에야말로 기겁했고, 신혼이 한차례 요동쳤다. 그는 두려운 무기라도 본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순양검배를 내던졌다.
그 순간, 심협이 의식으로 조종하자 순양검배가 온몸에 붉은 화염을 휘감은 채 곧바로 날아오더니 끈적한 검은 액체를 그대로 뚫고 들어갔다.
순양검배에 닿기가 무섭게 끈끈한 검은 액체에 불이 붙으면서 곧바로 커다란 구멍이 하나 뚫렸다.
검배는 날아가던 기세를 멈추지 않았고, 화염이 쉬지 않고 타오르면서 검은 점액 속의 구멍도 점점 깊어졌다. 심협의 몸 바깥을 휘감았던 점액도 화염의 영향으로 차츰 가닥가닥 연기로 변해 사라졌다.
“이것은…… 홍련업화?”
전통은 그제야 문득 깨닫고는 눈에 절로 두려운 기색이 스쳐 지났다.
이 불꽃은 저승의 지옥에서 온 것으로, 음혼과 귀물들을 가장 잘 억누르는 것이었다. 수사들의 신혼에도 더없이 위협적이라 혹여 식해에 침입하기라도 한다면 신혼이 깡그리 불타버리고 빈껍데기 시체만 남게 될 수도 있다.
다행히 순양검배 속 홍련업화의 수량에는 한계가 있어서 그에게는 검배를 내던지고 목숨을 건질 기회가 있었다.
심협은 검은 점액에서 벗어나자마자 사월보를 시전하여 순양검배가 열어놓은 통로로 뚫고 들어갔다. 이어서 살귀의 몸 밖으로 뛰쳐나가는 순간 순양검배가 그를 받아 붉은 무지개로 변하여 빠른 속도로 멀리 달아났다.
전통은 뒷 상황을 수습하기에 바빠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두 눈 뻔히 뜨고 지켜보며 속으로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창목노도와 여천이 이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전통은 가까스로 불길이 전부 꺼지고 나서야 살귀를 거두어들이고는 창목노도와 여천이 빠르게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전통, 이게 어찌된 일이오?”
창목노도가 노기 띤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그놈에게 당했소. 그놈이 홍련업화를 숨기고 있어 하마터면 나를 해칠 뻔했소이다.”
전통은 어두워진 표정으로 말했다.
“홍련업화?”
미간을 찌푸리는 여천의 낯빛도 딱딱하게 굳었다.
“내 생각에 그놈은 저승과 관계 있을 가능성이 높소. 어쩌면 저승에서 파견한 조사원일지도 모르오.”
전통의 이 말은 꽤나 충격적이라 창목노도와 여천의 관심을 심협의 도주에서 저승의 조사로 옮기는 데 성공했다.
“정말 그렇다면 이곳에서 계속 머물 수 없으니 장소를 바꿔야 하오. 성 남쪽 대안방(大安坊) 인근이 좋겠소.”
창목노도는 어두은 안색으로 한참을 고민한 뒤에야 입을 뗐다.
“그렇다고 해도 전 도우는 책임을 피할 수 없소.”
여천이 싸늘하게 전통을 노려보았다.
전통은 고개를 끄덕이며 별다른 변명을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심협에 대한 원한이 치솟았다.
한편, 심협은 체내로 스며드는 음살의 기운을 견디며 온힘을 다해 순양검배를 움직여 성 동쪽 상락방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길을 따라 성안 곳곳에 불과 연기가 자욱했고, 많은 백성들이 성의 수비군과 관부 사람들의 호송 아래 성 북쪽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그는 곧장 선화방에 이르렀지만 감히 멈춰 설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자신의 거처로 돌아온 뒤에야 비로소 내려왔다.
지금 골목은 쥐죽은 듯 적막하여 길거리에는 시체만이 나뒹굴 뿐, 살아 있는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담벼락 한쪽 그늘 속에서 진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돌아오셨군요.”
뒤이어 귀장이 번쩍 하고 나타나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상락방 이쪽에 무슨 일이 생겼느냐?”
심협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주인님께서 떠나신 뒤로 또 수많은 귀물들이 쳐들어와 제가 그중 일부를 처리했습니다. 나중에는 관부에서 사람을 데리고 돌진해 와서는 남은 백성들을 보호해 성 북쪽 황성 방향으로 물러갔습니다. 저는 곧바로 뜰로 돌아와 주인님을 기다렸고요.”
“잘했다. 우선 건곤대 안으로 돌아가거라. 안에 음살의 기운이 적잖이 쌓였으니 흡수하여 정제하도록.”
“예.”
귀장은 짧게 답하고는 몸을 웅크려 건곤대 속으로 날아 들어갔다.
심협은 마당을 쓱 훑어보고는 손목을 돌려 임랑환에서 세모꼴 진기(陣旗) 여러 개를 꺼내 마당에 배치했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으니 예전의 간단한 법진 만으로는 부족할 터였다.
모든 일을 마친 뒤에야 그는 방으로 천천히 되돌아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심협의 가슴이 한 차례 들썩이더니 울컥 피를 내뿜었다.
그는 급하게 가부좌를 틀고 두 손을 결인하며 법력을 운행하여 운기조식을 했다. 순양검배는 지나치게 힘을 소모한 탓에 몇 번을 움직이려 해도 반응이 없었다.
심협은 어쩔 수 없이 반 각 정도 기다린 뒤에야 다시 시도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검배도 그의 경맥 안에서 규혈(竅穴)들 사이를 천천히 돌아다니면서 그 안에 침입한 음살의 기운을 조금씩 몸 밖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심협은 그 음기도 모조리 건곤대 안으로 거둬들였다.
그때, 갑자기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심협은 즉시 경계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벽 쪽으로 다가가 창문을 밀어젖히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마당에 설치된 법진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전해져왔다. 귀물들이 그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듯했다.
“뭔가 잘못됐어. 시간으로 따진다면 지금은 이미 사시(巳時: 오전 9시 반부터 10시 반까지)가 지났을 텐데, 진작 하늘이 훤히 밝았어야 하지 않나?”
심협은 문득 고개를 들어 멀리 하늘을 보았다. 하지만 하늘은 검은 구름으로 뒤덮여 조금의 햇살도 비치지 않았다. 짙은 먹구름이 장안성을 내리누르듯 지면에서 그리 높지 않은 곳에 떠 있었고, 그 안에는 이따금 음풍(陰風)이 휘몰아쳤으며, 살기가 온 하늘에 가득했다.
심협이 놀라는 사이 마당의 법진이 점점 크게 반응하며 물처럼 푸른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쾅!
문루(門樓) 옆의 담벼락이 느닷없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키가 1장쯤 되는 시커먼 그림자가 들이닥쳤다. 온몸에 잔뜩 녹이 슨 갑옷을 입은 강시가 마당 안 바닥의 법진을 밟은 것이다.
법진에 잇닿아 있던 자그마한 삼각 깃발 여러 개가 펄럭거리면서 법진에 이끌려 갑옷 강시를 향해 날아들더니 겹겹이 둘러싼 채 전부 터져나갔다.
펑! 퍼펑!
폭발음이 연이어 울렸고, 작은 깃발에서 노란 화염이 뭉게뭉게 솟아 나와 순식간에 강시를 집어삼키며 거세게 타올랐다.
강시는 허둥지둥 몸의 화염을 탁탁 두드려 끄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오히려 불길이 온몸 곳곳을 휘감으며 타들어갔다. 강시는 처참한 비명을 거듭 내질렀고, 온몸에서는 누린내 나는 검은 연기가 풀풀 피어올랐다.
심협이 이 광경을 보고는 손을 들어 휘두르자 붉은 검광이 눈 깜짝할 새 날아갔다가 빠르게 되돌아왔다. 거의 동시에 강시의 머리가 땅에 떨어졌고, 처절한 울부짖음도 뚝 그쳤다.
하지만 이미 꽤나 큰 기척을 낸 바람에 적잖은 귀물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심협은 더는 여기 머물러서는 안 되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잠시 뒷정리를 한 뒤, 즉시 처소를 떠나 성 북쪽, 정국공의 저택을 향해 내달렸다.
상락방은 여전히 고요에 잠겨 있었고, 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홀로 떠도는 외로운 넋들만 그 사이를 정처 없이 떠돌아 이 방시(坊市) 전체가 하나의 귀역(鬼域) 같아 보였다.
심협은 먹구름 속에 도대체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어 섣불리 어검비행을 펼치지 않고, 최대한 귀물들을 피해 조심스레 길거리를 누볐다. 피치 못할 상황이 아니면 귀물과 마주치지 않으려 했고, 마주치면 최대한 빨리 처치했다.
그러던 중 한 무리의 인간족 수사들을 마주치기도 했다. 그러나 적인지 아군인지 구분하기 어려워 조용히 피했다.
이렇게 큰 난리가 났으니 관부 사람들이 상황을 수습해야 마땅하건만, 어찌 된 일인지 대당관부 사람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