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312화 (312/1,214)
  • 312화. 현음개맥(玄陰開脈)

    “죄송합니다. 소녀가 추태를 보이고 말았군요. 아버지의 생사와 관련된 일이라 그런 것뿐이니 심 도우께서는 책잡지 말아주십시오.”

    마수수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부친과 관련한 일이니 마음 쓰시는 것은 인지상정이지요.”

    “이해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심 도우.”

    심협이 고개를 끄덕이자 마수수는 감사를 표하고는 억몽부를 챙겨 급히 돌아갔다.

    심협은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다가 몸을 돌려 천천히 걸었다.

    * * *

    장안성 동쪽, 상락방.

    저녁 무렵이 되자, 저잣거리 곳곳에 화려한 등불이 하나둘 켜져 온 거리를 붉게 비추었다. 거리 양쪽에 늘어선 주점과 누각들에서는 간간이 악기 소리와 술잔을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와 대낮처럼 시끌벅적했다.

    작은 골목들에는 음식점과 노점들이 줄지어 늘어섰고, 길가 화로의 솥에서는 하얗고 따뜻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났으며, 왁자지껄한 고함이 울렸다.

    심협은 그 사이를 누비면서도 마음은 줄곧 아득히 먼 곳을 떠돌았다. 머릿속으로 낮에 용혼(龍魂)과의 싸움을 곱씹으면서 분통함에 이를 갈았다. 만약 꿈속의 자신과 같은 경지였다면 결코 그렇게 당하지 않았으리라.

    그런 생각이 들자 실력을 되도록 빨리 끌어올리고픈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다만 이원진수는 이미 동이 난 터라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수분양육(*水盆羊肉: 양고기를 여러 향신료와 오랫동안 끓여 만든 서안 지역의 탕 요리)이오! 뜨끈뜨끈한 양고기 국물에 야들야들한 고깃점…….”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와 코끝을 자극하는 향기가 그의 생각을 끊었다.

    일찍이 벽곡기를 지난 수선자임에도 왠지 모르게 전에 없이 식욕이 동하여 심협은 길가 음식점에 앉아 김이 펄펄 나는 수분양육을 한 사발 시킨 뒤 게걸스레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길가의 상인과 손님들은 이런저런 한담을 주고받았다. 누군가 근래 성안에 요마와 귀물들이 끊이지 않고 나타나는 상황에 개탄하자 모두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공감했다. 이제 대당관부도 안전하지 않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어떤 이는 세상 살기 나쁘다고 불만을 터뜨렸고, 어떤 이는 관부에서 보살필 것이라고 위로했으며, 또 어떤 이는 모두 위에서부터 아래로 신선들의 싸움이니 자신들 같은 백성들과는 무관하다고도 했다. 허나 어느 것 하나 정확하지는 않을 터였다.

    심협은 그저 묵묵히 귀를 기울였지만, 속으로는 내심 탄식했다. 정말 하늘을 뒤흔들 그 마겁이 닥쳐오면 천하에 누구라고 무관하겠는가?

    배불리 먹고 마신 그는 값을 치르고 일어나 만족스럽게 트림까지 하고는 노점을 떠나 처소로 돌아갔다. 이미 현음개맥결을 수련하고 새로운 법맥 개척을 시도하여 자신의 수련 속도를 끌어올리겠다는 생각을 굳힌 터였다.

    “단약이나 진수는 외물일 뿐. 자질을 개선하는 것이야말로 본질이라 할 수 있지.”

    꿈속에서 현음개맥결을 수련한 경험이 있으니 맥을 틔우는 데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었다. 게다가 이미 대개박술의 일부를 대강 이해했으니 성공하지 못한다 해도 손상된 정맥과 혈육의 부상을 회복할 수 있고, 위험도 통제 가능한 수준인데다, 유영단까지 가지고 있으니 허황된 자신감은 아닌 셈이었다.

    특히 유영단은 죽지만 않는다면 마지막 한 호흡만 남았다 하더라도 사람을 죽음의 문턱에서 구해내고 어떠한 부상도 치유할 수 있다고 할 정도이니, 목숨을 보전하는 이기(利器)라 할만 했다.

    독채로 돌아온 심협은 그길로 방으로 돌아가 눈을 감고 좌선을 시작했다.

    한참 동안 운기조식한 심협은 천천히 두 눈을 뜨고 손목을 뒤집어 붉은 도자기 병 하나를 꺼냈다. 이어서 건곤대를 꺼내 손에 쥐었다. 현음개맥결 운공의 세세한 부분을 머릿속으로 수천 수백 번을 돌이켜봤지만, 막상 실행에 옮기자니 우려가 되어 만반의 준비를 해두려는 것이다.

    다음으로 손바닥을 한 번 흔들자 건곤대가 천천히 열리더니 그 속에서 한 가닥 검은 안개가 너울거리며 나왔다. 그리고 뒤이어 응혼기 귀장의 모습도 따라서 나타났다.

    “주인님을 뵈옵니다.”

    장군귀장이 나타나자마자 심협에게 포권을 올렸다.

    “예의 차릴 것 없다. 오늘 너를 불러낸 것은 네 도움이 필요해서다.”

    “주인님을 위해 목숨을 다할 것이니 무엇이든 분부하십시오.”

    귀장은 몸을 바로 세우지 않았다. 군인은 신의를 중요시하는 만큼 일단 항복을 받아내고 나면 십중팔구 더욱 충성하는 법이다. 귀장도 예외가 아니었다.

    “비법을 한 가지 수련하려는데, 네 몸에 있는 음살의 기운을 좀 빌려야 한다. 네게 조금 손상을 줄 수도 있으나, 후에 방법을 찾아 보상해줄 것이다.”

    심협의 말에 귀장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주인님의 일이라면 만 번 죽더라도 마다치 않을 것인데 어찌 감히 보상 따위를 바라겠습니까?”

    “좋다. 너는 그저 가부좌를 틀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된다. 다른 일은 아무것도 신경 쓸 필요 없다.”

    “예!”

    귀장은 짧게 답하고는 곧바로 가부좌를 틀고는 두 손을 무릎 위에 엎은 채 조각상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를 지켜보던 심협은 안력(眼力)을 돋운 채 시선을 자신의 종아리로 떨궜다.

    현실로 돌아온 뒤 처음 시도하는 현음개맥이라 그는 꿈속에서처럼 십이정경(十二正經)보다는 음교맥의 곁가지 경맥부터 시도해볼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그 경맥은 그가 현음개맥결로 틔우는 데 성공한 첫 번째 법맥인 만큼 실수도 가장 많았는데, 이는 경험도 가장 많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심협은 두 손가락을 한데 모아 칼처럼 자신의 종아리에 문양을 새기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복잡한 핏빛 부적 문양 법진이 그 위에 나타났다. 그 위로 개미떼처럼 늘어선 미세한 핏방울들을 보며 심협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현음개맥법결을 가볍게 읊조리며 손가락을 모아 앞쪽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귀장을 가리켰다.

    그 순간, 귀장이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더니 이내 사시나무처럼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이어서 두 눈을 허옇게 까뒤집은 채 입은 무기력하게 쩍 벌렸는데, 그 안에서 걸쭉한 검은 안개가 한 줄기 뿜어져 나와 심협에게로 흘러왔다.

    “육진편에 담긴 음살의 기운과는 조금 다른 것 같군.”

    심협은 긴장한 얼굴로 주저했다. 육진편에서 흘러나온 음살의 기운은 단단하고 짙은 광선이다.

    그러나 그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이내 그 걸쭉한 검은 안개 자락을 자신의 정강이에 떨어져 내리도록 유도했다.

    안개는 종아리를 뒤덮자마자 악귀가 피 냄새를 맡은 것처럼 심협이 이끌지 않았는데도 미친 듯이 파고들었다. 그러나 심협의 다리에 있는 부적 문양이 검게 빛나면서 음살의 기운을 몸 표면에 머물도록 견제한 덕에 균형을 이루었다.

    곧이어 검은 안개가 녹아들어간 법진이 작동하기 시작하면서 곧 개미 떼가 물어뜯는 듯한 얼얼하고도 고통스러운 감각이 몰려들었다.

    심협은 미간이 저절로 잔뜩 찌푸려졌다. 이런 느낌이 낯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런 고통에 완전히 평정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어쨌거나 지금이 바로 개미 문양이 맥을 씹어 삼키는 관문이니 만큼 반드시 맥식(*脈息: 맥박이 뛰는 것과 호흡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 끊이지 않게 해야만 했고, 개미 문양의 유도 아래 음살의 기운과 서로 결합하려면 정신을 온전히 집중해야 했다.

    그러나 잠시 뒤, 날카로운 통증이 느닷없이 휘몰아치면서 그의 곁가지 경맥이 끊어져 버리고 말았다.

    “윽!”

    심협은 맹렬한 통증에 짧은 비명을 내뱉고는 재빨리 대개박술을 운공해 경맥을 회복시켰다.

    경맥이 회복된 뒤, 그는 또다시 음살의 기운을 움직여 이 맥을 다시 틔워보려고 시도했다.

    시간은 조금씩 천천히 흘러 눈 깜짝할 새 밤이 깊어 창밖은 이미 달빛이 몽롱했다.

    일곱 차례나 실패를 거듭한 끝에, 심협은 음살의 기운을 통제하여 마침내 마지막 관문인 삼음교를 꿰뚫는 데에 이르렀다.

    그는 두 눈을 꽉 감은 채 손의 법결을 움직여 다리의 부적 문양이 운행되도록 유지하여 그곳의 개미 문양과 법력이 서로 얽히고 부딪혀 융합되게 하였다.

    그때, 그는 갑자기 두 눈을 번쩍 뜨고 맞은편의 귀장을 바라보았다. 귀장은 두 눈이 이미 생기를 잃었고, 온몸의 빛은 한없이 어두워졌으며, 심지어 몸도 조금 흐릿해진 상태였다. 또한 쩍 벌린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안개도 점차 옅어지고 있었다. 음살의 힘을 너무 지나치게 소모한 것이 틀림없었다.

    심협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귀장의 체내에 담긴 음살의 기운에 한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육진편에 담긴 것만큼 순수하지 않아서 이제 곧 바닥을 드러낼 것임을 눈치챘다. 또한 계속 이어간다면 귀장의 도력(道力)에 심각한 손상을 끼칠 것이고, 육신도 버티지 못할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좋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해보자.”

    심협은 정신을 집중하여 결인한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켜 마지막 음살의 기운을 잘라내 한 가닥으로 응결시킨 후 삼음교혈을 향해 힘껏 내리쳤다.

    쩍!

    가벼운 소리가 울렸다.

    삼음교혈이 마침내 뚫린 것이다!

    그 무렵, 귀장은 거의 혼절할 지경이었다. 투명해진 몸은 하느작하느작 움츠러들어 건곤대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심협의 다리 위 부적 문양의 핏빛이 갑자기 밝아지면서 오그라들더니 곁가지 경맥 전체를 뒤덮었다. 그리고 뒤이어 하얀 빛과 검은 빛이 함께 번득이면서 서로를 뒤덮고 교차해 융합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모든 빛과 함께 심협의 다리 위 부적 문양도 사라졌다. 그리고 한 줄기 기이한 힘이 곁가지 경맥으로 녹아들었고, 마침내 새로운 법맥을 틔우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됐다! 됐어! 하하하!”

    심협은 두 눈을 번쩍 뜨고 몸속 법력이 조금씩 곁가지 법맥 속으로 흘러드는 것을 느끼며 희열을 참지 못하고 외쳤다.

    이 법맥은 십이정경에 속하지는 않지만, 맥을 틔울 수 있다는 믿음을 굳건히 해주었다. 꿈속에서의 노력도 헛수고가 아니었다. 현실에서도 해낼 수 있는 것이다.

    더 많은 법맥을 틔울 수 있다면 그의 자질은 장족의 발전을 이룰 터. 그리 되면 수련 속도 역시 몇 곱절은 빨라질 테니 단약과 영재의 보조만 받쳐준다면 부족한 수명을 극복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터였다.

    그는 효과를 발휘할 기회조차 없었던 요상유영단을 챙기고는 일어서서 건곤대를 손으로 받쳐 든 채 귀장을 풀어 놓고 상태를 살펴보려 했다.

    하지만 그럴 틈도 없이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심협은 신식을 풀어 사방을 살펴보고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난잡하지만 순수하지도 않은 음산한 귀기가 주변 곳곳에서 전해져온 것이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심협은 놀라움과 의아함을 느끼며 방문을 열고 훌쩍 지붕 위로 올라갔다.

    지붕마루에 툭 솟아 있는 주작과 이수(異獸: 기이한 짐승) 조각상에 올라서서 멀리 바라보니, 저잣거리 곳곳에 불빛이 번쩍였고, 더 멀리서는 짙은 연기가 모락모락 치솟았다.

    “사람 살려!”

    겁에 질려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다.

    그쪽을 돌아보니 저녁에 수분양육을 사 먹었던 노점의 주인이 골목 석판 바닥을 힘겹게 기어갔는데, 지나는 곳마다 기다란 핏자국이 남았다.

    그의 뒤로 멀지 않은 곳에는 검은 안개 한 덩이가 드리워져 있었는데, 그 안에는 창백한 안색에 약간 부패한 흉악한 귀신의 얼굴이 어렴풋이 엿보였다.

    “악귀?”

    심협은 굳은 얼굴로 지붕마루를 박찼다.

    귀물은 마치 사냥감을 가지고 노는 흉수처럼 노점상을 뒤따르다가 이내 지루해졌는지, 두 손을 쫙 뻗었다. 그러자 두 손이 순식간에 길어져 노점상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 손끝이 노점상의 등을 막 꿰뚫으려는 찰나, 한 줄기 번갯불이 폭발했다.

    꽈릉!

    소뢰부(小雷符) 한 장이 터져나가면서 새하얀 번갯불이 되어 곧장 귀물의 미간에 내리꽂혔다.

    귀신은 쫙 하는 소리와 함께 뺨이 찢겨나갔고, 비명조차 지를 틈 없이 온몸에 음살의 기운이 사방으로 흘러 넘쳤다.

    심협은 서둘러 허리춤의 건곤대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자 검은 회오리바람이 휘몰아쳐 나와 흩어진 음살의 기운들을 남김없이 휘감고 다시 주머니 속으로 돌아갔다. 건곤대는 잠깐 불룩 부풀어 올랐다가 금세 푹 꺼졌다. 귀장이 음살의 기운을 깨끗하게 먹어치운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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