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화. 이상한 꿈
심협은 얼굴로 칼이 다가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숨을 멈춘 채 고개를 기울이고 가까스로 피해냈다. 동시에 발아래 달그림자가 반짝이면서 한쪽 옆으로 물러났다.
쾅!
육화명의 손바닥이 벽을 때리면서 벽돌 벽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고, 방 안의 가구들은 진동에 낙엽처럼 날아갔다.
심협은 경악했다. 지금 육화명의 이 일격은 그의 평소 실력보다 몇 곱절은 더 강했기 때문이다.
“육형, 왜 이러는 거요?”
심협이 목소리 높여 물었으나, 육화명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온몸에 희뿌연 빛을 한 겹 띠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심협은 반사적으로 사월보를 써서 옆으로 날아갔지만, 육화명이 꼬리처럼 길고 하얀 빛을 드리우며 그 앞에 나타났다.
육화명은 팔을 검처럼 휘둘렀다. 하얗고 거대한 빛이 그의 팔뚝에서 쏘아져 나와 온 방을 가득 메우며 천 명의 군사를 휩쓸어버릴 기세로 내리 꽂혔다. 하얀 빛이 지나간 곳마다 모든 것이 토막 나는 것이, 그의 팔은 검기보다도 더 날카로운 것이 분명했다.
심협은 급히 뒤로 물러나면서 두 손을 홱 휘둘렀다. 그러자 노랗고 푸른 두 갈래 빛이 번쩍 스쳐 지나더니, 비취색 여의와 금갑선의가 함께 나타나 환한 빛을 내며 희뿌연 빛에 맞섰다.
꽝!
굉음이 터져 나왔다.
비취색 여의와 금갑선의는 진동에 전부 날아가 몇 번이나 나뒹굴었고, 심협의 몸도 크게 흔들리면서 연달아 두 걸음을 물러났다. 다행스럽게도 날카로운 하얀 빛 역시 부서진 상태였다.
하지만 미처 숨 돌릴 틈도 없이 육화명이 그의 뒤에 귀신처럼 나타나 팔뚝 위로 그전보다 강한 눈부신 하얀 빛을 휘감은 채 매섭게 휘둘렀다.
심협은 반사적으로 두 손을 다시 흔들었다. 그러자 노랗고 자그마한 인장이 빙그르르 돌며 등 뒤에서 나타났는데, 그 위로 노란 빛이 미친 듯이 번쩍이며 황토색 산봉우리 다섯 개가 응결되어 나타났다.
마치 진짜 산봉우리와 거의 다를 바가 없어 산과 같은 웅혼한 기운을 뿜어냈다. 응혼기에 접어들면서 극품 법기인 오악진형인의 위력이 드디어 발휘되기 시작한 것이다.
다섯 산봉우리가 만들어지자마자 하얀 빛이 빠르게 날아와 성난 파도처럼 봉우리들을 베었다.
쾅!
한데 놀랍게도 굳건해 보이던 다섯 산봉우리에 산의 절반 가까이를 관통한 깊은 자국이 생겨나더니, 수많은 균열들이 퍼져 나갔다.
심협은 기겁해 번개처럼 몸을 돌리면서 두 손으로 산봉우리를 누른 채 체내 법력을 미친 듯이 주입했다.
다섯 산봉우리의 노란 빛이 환해지더니 그 위의 균열도 더 이상 퍼져 나가지 않게 됐고, 흔들리던 산의 형체도 안정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뒤에서 희뿌연 그림자가 흐릿하게 어른거리더니 또다시 육화명이 번쩍 나타났다. 팔뚝의 하얀 빛은 더 밝아져서 이제 거의 그의 몸을 절반쯤 집어 삼켰고, 내뿜는 기운도 몇 배는 강해졌다.
심협은 경악해 뒤돌아서려 했으나, 몸을 완전히 돌리기도 전에 육화명이 팔을 들어 올렸다. 그 위로 하얀 빛이 솟구쳐 하늘을 떠받칠 듯 거대한 검을 이루며 베려 했다.
심협이 식은땀을 흘리며 오른손에서 붉은 검망을 강하게 내뿜자 순양검배가 번쩍 나타났고, 홍련업화가 활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반면 그의 왼손에는 은빛이 번쩍이더니 은색 옥탁이 나타났다.
순양검배와 은옥탁 모두 공격법기지만, 비취색 여의와 금갑선의, 오악진형인 모두 쓸 수 없는 상태라 어쩔 수 없었다.
바로 그때, 육화명의 몸이 돌연 굳어지더니 공허했던 눈동자가 빛깔을 띠면서 몸의 희뿌연 빛이 빠르게 사라졌다.
심협은 위기에서 벗어나 재빨리 뒤로 물러났지만,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몇 번의 호흡이 지난 뒤, 육화명은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그는 온통 아수라장이 된 방과 심협의 낭패한 몰골을 보면서 잠시 멍해졌다.
“심형, 괜찮으시오?”
육화명이 미안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조심스레 다가왔다.
심협은 육화명이 완전히 회복된 것을 확인한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손을 뒤집어 순양검배와 은옥탁을 거두어 들였다. 또 날아갔던 비취색 여의와 오악진형인도 거두어들이고는 그제야 물었다.
“나는 괜찮소. 한데 육형 방금은 왜 그런 것이오? 꼭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던데…….”
육화명은 대답하기 어려운 듯 머뭇거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말하기 어려운 비밀이라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소.”
심협은 다그치지 않고 손을 흔들며 가볍게 웃어보였다.
“아, 아니오. 내 심형을 다치게 할 뻔했으니 심형에게는 해명을 해야지요.”
육화명이 고개를 들고 싱긋 웃으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윽고 말했다.
“내 몸에 조금 이상이 있소. 잠들면 때때로 이상한 꿈을 꾸는데, 그럴 때면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한 이로 변하오.”
그 말을 들은 심협은 순간 멍해졌다. 남의 일이 아니지 않은가!
“꿈속에서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고요?”
“그러하오. 게다가 일단 그런 꿈을 꾸기 시작하면, 현실의 몸이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오. 때로는 방금처럼 곁에 있는 사람을 공격하기도 하고, 나 자신을 훨씬 뛰어넘는 힘을 발휘하기도 하지.”
육화명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찌 그럴 수가……. 정국공께서는 이 일을 알고 계시오?”
“물론 알고 계시지만, 사부님께서도 그 원인은 분명히 말씀하시지 못하셨소. 그래서 나는 잠을 최대한 줄였고, 어쩔 수 없을 때만 최대한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서 잠을 자오. 다만 이번에는 음령산 고분에 가서 며칠을 연달아 싸우느라 더없이 지친 몸에 술이 들어가니 심형이 있다는 것도 까맣게 잊고 잠이 들어버렸소. 정말이지 미안하오.”
육화명은 연신 사과했다.
“아, 괜찮소. 어쩐지 정국공께서 육형이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하시더라니, 그런 이유가 있었구려.”
심협이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고는 웃으면서 말하자 육화명은 겸연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좋소. 그 얘기는 그만하고, 방금 정국공께서 사람을 보내 우리를 부르셨소.”
심협의 말에 육화명의 표정이 진중하게 변했다.
“그럼 어서 갑시다. 사부님께서는 남들이 늦는 걸 가장 싫어하시오!”
두 사람은 차림새를 가다듬고 방을 정리하지도 못한 채 곧장 방을 나섰다.
두 사람이 방 안에서 한바탕 맞붙었으니 이미 많은 사람이 와 있을 줄 알았으나, 뜻밖에도 아무도 와 있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밖에 나와서야 그는 두 사람의 싸움으로 난장판이 된 방과 달리 바깥에서 보면 육화명의 처소는 아무런 손상도 입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잠이 들었을 때 몸이 제멋대로 날뛰어 불필요한 손실을 만드는 것을 막고자, 이 처소의 사면 외벽은 모두 특수한 재료로 지어졌소. 금제도 약간 걸려 있고……. 그래서 안쪽의 움직임이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소.”
육화명은 심협의 의문을 알아채고 설명해주었다.
두 사람은 처소를 떠나 대당관부의 주전에 이르렀다.
그곳의 꾸밈새는 여전히 그전과 똑같았지만, 상석에는 정교금 말고 황목상인도 있었다.
심협과 육화명은 황급히 나아가 예를 갖추었다.
“이놈의 새끼, 왜 이리 늦은 것이야! 술 냄새가 풀풀 풍기는 것을 보니 또 가서 술을 퍼마셨구나!”
정교금은 두 사람을 쓱 훑어보고는 곧바로 육화명에게 호통을 쳤다.
육화명은 고개를 떨군 채 감히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하루 종일 말썽만 피우고, 수련할 때도 여기저기 한눈이나 팔고……. 심협을 좀 보아라. 전에는 수련 경지가 너보다 훨씬 뒤떨어졌었는데 이제 너를 따라잡았지 않으냐. 그런데 너는 아직도 발전할 줄을 모른단 말이냐!”
정교금은 심협을 힐끗 살펴보고는 놀란 기색이었으나, 입으로는 계속해서 육화명을 꾸짖었다.
심협은 조금 민망해졌지만 끼어들기도 그래서 그저 묵묵히 서 있었다.
“됐소. 국공 대인, 심 소우가 아직 여기 있지 않소. 남 앞이니 육 사질(師姪)의 체면을 좀 남겨 주어야지요.”
황목상인이 만류하자 정교금은 그제야 입을 꾹 다물었다.
육화명은 뒷짐을 지고 서서 몰래 심협에게 고비를 넘겼다는 손짓을 해보였다. 심협은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하, 심 소자. 이번에 또 대당관부를 크게 도왔구나.”
정교금은 곧 심협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활짝 웃었다.
“과찬이십니다. 후배는 비록 산수이긴 하나 대당의 백성이고, 정의가 무엇인지는 압니다. 사악한 것이 백성들을 도륙하는 것을 보고 좌시할 수는 없지요.”
심협은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재빨리 말했다.
“그래, 이것이 바로 협객의 품격이지!”
옆에 있던 황목상인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칭찬했다.
“황목 선배님의 칭찬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오늘 한 일은 그저 백성들과 마음을 같이한 것뿐인데, 일부 사람들은 심모가 요마들과 결탁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심협은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심 소자, 안심하게. 그런 헛소문은 내 단언컨대 확실히 밝혀줄 것이다!”
정교금이 가슴팍을 탁탁 치며 말했다.
“그럼 감사드리겠습니다, 정국공 대인!”
심협은 속으로 안도했다.
무명의 모함이 당장 보기에는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한 것 같지만, 상대는 필경 보타산 제자일 터. 당대 대파(大派)의 영향력을 얕잡아볼 수는 없다. 하지만 정교금이 이렇게 말해주니 안심이 됐다.
“국공 대인, 황목 선배님, 두 분께서는 저희를 어인 일로 부르셨습니까?”
심협은 화제를 돌리며 물었다.
“자네들을 부른 것은 두 가지 일 때문이네. 첫째로, 우리 대당관부에서는 줄곧 상벌이 분명했네. 지난번 저승 임무에 이번 경하용왕을 막은 것까지, 심 소우는 연달아 두 번이나 큰 공을 세우지 않았는가. 하여 나와 정 국공이 상의하여 자네에게 상을 내리기로 했다네. 그래서 말인데, 원하는 물건이 있는가? 이름을 댈 수 있는 물건은 어지간하면 다 찾을 수 있을 걸세.”
황목상인의 말에 심협은 잠시 고민한 뒤 공수했다.
“황목 선배님과 정 국공 대인의 두터운 신의에 감사드립니다. 후배가 확실히 원하는 것이 있기는 합니다. 염치없게도 두 분께 이원진수를 조금 내려주시길 청하옵니다.”
그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수명을 연장시켜주는 물건과 이원진수였다. 대당관부에서는 수명을 연장시켜주는 보물을 가지고 있을 테지만, 그런 요구는 황목상인과 정교금의 의심을 살 수도, 옥침의 비밀이 폭로될 수도 있었다.
“이원진수? 창고에 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오만?”
황목상인은 성긴 눈썹을 움찔 떨고는 정교금에게 물었다.
심협은 그 말에 기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안타깝군. 작년 박물행과의 교역에서 그 이원진수를 팔았지요.”
정교금이 고개를 젓자 심협은 실망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와중에 의문이 들었다. 진강의 이원진수가 대당관부에서 얻은 것이란 말인가!
“아, 그렇구려. 그럼 바깥에서 구해올 수밖에. 그러려면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요. 심 소우, 기다려줄 수 있겠는가? 아니면 물 속성 공법을 보조하는 다른 보물로 바꿔도 되겠나?”
황목상인의 물음에 심협은 또다시 공수하며 답했다.
“기다리겠습니다. 다른 것으로 바꿀 필요 없습니다.”
물 속성 공법의 수련 보조에 이원진수보다 좋은 물건은 없었다.
“알겠네. 두어 달쯤 걸릴 테니, 그때 대당관부에 와서 받아 가게나.”
“예.”
“육 사질 또한 이번에 공로가 있으니, 자네의 상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지. 자네들을 부른 두 번째 이유는 오늘 경하용왕을 만난 일에 대해 자세히 듣기 위함일세.”
황목상인은 웃음기를 거두고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