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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308화 (308/1,214)
  • 308화. 자초지종

    그 무렵, 양쪽 기슭에서는 조종당하던 백성들의 몸에 휘감긴 용 모양 검은 기운이 갑자기 커졌다. 그러자 이들의 걸음이 빨라져 종종걸음으로 강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푹! 푹! 푹!

    순식간에 또다시 적잖은 백성들이 목숨을 잃었고, 뒤이어 시체가 폭발하면서 핏자국으로 변해 금색 빛기둥 위를 물들였다.

    이를 본 심협은 마음이 급해졌다.

    바로 그때, 기슭에서 조종당하던 백성 중 한 사람에게서 환한 금빛이 번득였고, 그 사람이 우뚝 멈춰 섰다. 유향각에서 본 연향이라는 소녀였다.

    그녀의 등에서 노란 부적이 날아올라 환한 노란 빛을 내뿜더니 순간 밝은 노란색 구리방울로 변했다.

    딸랑, 딸랑…….

    구리방울이 청아하게 울렸다. 그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멀리까지 퍼져 나가 강줄기의 양쪽 기슭에서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이 소리를 들은 강기슭의 백성들의 멍했던 표정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고, 이들은 모두 걸음을 멈추었다.

    반대로 그 소리의 주변에 있던 귀물들은 갑자기 멍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멈춰 섰다. 심지어 심협과 맞붙어 싸우던 세 귀물도 마찬가지였다.

    어안이 벙벙했던 것도 잠시. 심협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급히 손에 맺은 검결의 효력을 불러 일으켰다.

    순양검배가 번쩍이며 무수한 붉은 검영으로 변해 온 하늘에 가득 찬 검우(劍雨)처럼 검붉은 해골과 두 귀물을 뒤덮었다. 세 귀물은 홍련업화 앞에서 맥을 못 추고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짙은 음기를 품은 세 물건이 그들의 몸에서 툭 떨어졌다. 검붉은 갈비뼈 한 토막과 굽은 핏빛 뿔 하나, 검누른 빛깔의 구슬 한 알이었다.

    심협은 손을 뒤집어 세 물건을 챙기고는 허공에 떠 있는 구리방울을 힐끗거리면서도 순양검배를 움직여 다른 귀물들을 베어 나갔다.

    “그 부적이 어떻게 구리방울로 변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잿빛 옷의 도인은 분명 방울 소리가 울리면 비취색 옥돌을 깨부수라고 했지.”

    퍼뜩 잿빛 옷의 도인이 한 말이 떠오른 심협은 손을 뒤집어 비취색 옥돌을 꺼내더니 땅바닥에 세차게 내팽개쳤다.

    쿵!

    옥돌은 산산이 부서지더니 놀랍게도 거대한 녹색 기체가 되었다.

    녹색 기체는 나타나자마자 나무다리 위의 검은 법진을 향해 빠르게 돌진하더니 그 안에 녹아들었다.

    그러자 검은 법진 위의 부적 문양은 순간 초록빛으로 물들어 갑자기 역방향으로 운행하기 시작했고, 나무다리 근처에 있던 귀물들의 몸이 느닷없이 투명해졌다. 이어서 몇 번 깜빡거리더니 전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흥! 웬 놈이 방해하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이미 늦었다!”

    중년 서생의 차가운 콧방귀 소리에 이어 쿠르릉 하는 굉음이 강 속에서 울렸다. 그러자 금광검진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리고 검은 기운이 그 속에서 튀어나왔다. 바로 용의 머리였다.

    용 머리는 허공에서 춤추듯 빙빙 돌더니 갑자기 떨어져 검은 기운으로 녹아들었다.

    “하하하하! 아하하하!”

    중년 서생의 광기어린 웃음소리가 검은 기운 속에서 흘러나왔고, 고래가 물을 빨아들이듯 모든 검은 기운이 거꾸로 말려들어가더니 곧 전부 사라졌다.

    그곳에서는 서생의 모습이 나타났다. 다만 지금 그의 모습은 전과 달리 금빛 갑옷을 입고 인간의 몸에 용의 머리를 한 괴물이 되어 있었다.

    엄청난 기운이 금갑귀물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는데,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훨씬 뛰어넘는 기운이었다.

    주위 허공에 흩어져 있던 물기가 미친 듯이 모여들고 갑자기 광풍이 일었다. 이어서 허공에 뭉게뭉게 검은 구름이 나타나 별안간 온 하늘을 뒤덮었다. 검은 구름들 사이로는 굵은 번갯불이 언뜻언뜻 비쳤다. 삽시간에 온 장안성에 곧 폭풍우가 몰아칠 것 같았다.

    심협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저 정도라면 진선기보다 더 무시무시할 듯했다.

    “드디어 고의 용 머리를 되찾았구나. 이세민(*李世民: 당나라 태종의 이름)! 원천강(*袁天罡: 수당 시기의 관상가 겸 풍수지리학자)! 이번엔 고가 너희들의 피로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금갑귀물은 하늘을 향해 포효하더니 금을 뚫고 돌을 쪼개듯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냈다.

    심협은 고막이 찢어질 듯한 충격에 수십 장 밖으로 훌쩍 물러났다. 육화명과 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이 일에 끼어들지 말라 하지 않았더냐! 네놈이 그리 고집스레 죽음을 자초하니, 고가 네놈의 황천길을 배웅해주마.”

    금갑귀물이 고개를 돌려 심협을 노려보며 표독스럽게 내뱉었다.

    심협은 얼음 구덩이에 떨어진 듯 온몸이 얼음장 같이 차갑게 식었고, 덜컥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그럼에도 그는 허둥대지 않고 손목을 떨쳤다.

    순양검배가 강한 빛을 발하자 홍련업화가 전부 솟구쳐 나와 맷돌만 한 화련(火蓮)을 이루었고, 금갑선의도 세찬 빛을 발하며 종 모양 보호막이 나타나 그의 몸을 감쌌다.

    그때였다.

    “어떤 놈이 소란을 피우는 것이냐?”

    우렛소리 같은 웅대한 목소리가 멀리서 우렁차게 들려오더니, 거대한 음파가 지면을 뒤흔들었다. 이어서 멀리 하늘 끄트머리에서 족히 백여 줄기에 이르는 둔광이 빽빽하게 날아왔다.

    그중 선두의 세 줄기는 특히 거대하여 족히 수십 장은 되었는데, 그 안에서 느껴지는 기운도 유달리 방대하여 천지를 뒤덮고 허공을 진동시켰다.

    “인간족 버러지들은 쪽수만 많으면 다인 줄 알지. 됐다. 내 오늘은 한번 봐주도록 하지.”

    금갑귀물은 멀리서 다가오는 둔광들을 힐끗 보고는 싸늘하게 비웃었다. 곧이어 그의 온몸에 눈부신 금빛이 떠올랐고, 하늘도 놀랄 만한 용의 울음소리가 울렸다. 이어서 서생은 수십 장에 이르는 금빛 신룡(神龍)으로 변해 하늘로 솟구쳐 구름층을 뚫고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심협은 그제야 한숨 돌리고 나지막하게 숨을 몇 번 몰아쉬었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흥건해진 상태였다. 현실 세계에서 죽음이 이토록 가까웠던 것은 처음이었다.

    금갑귀물이 사라지자 백성들 몸을 휘감았던 검은 기운도 흩어지면서 이들 모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더니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심협은 멀지 않은 곳의 바닥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노란색 구리방울이 떨어져 있었다.

    ‘귀물이 정신을 놓게 만들 수 있으니 꽤나 괜찮은 보물이로군’

    심협은 손을 흔들어 구리방울을 끌어당겨 두어 번 뒤집어 보고는 거둬들였다.

    그때, 멀리 있던 둔광들이 날아와 내려서더니 줄줄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두머리 세 사람은 기품과 위엄이 넘쳤고 눈에서는 신광(神光)이 번뜩이는 것이, 그 경지가 짐작할 수 없이 깊었다.

    그중 가운데에는 누르스름한 옷을 입은 노인이 있었는데, 구부정한 몸에 노란 나무 지팡이를 하나 짚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듬성듬성하고 누렇게 말랐으며, 얼굴과 손의 피부도 늙은 나무껍질 같아서 머지않아 썩어 부스러질 나무처럼 보였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 모두 그에게 더없이 공손했다.

    그 왼쪽에는 은실로 수놓은 금포를 입은 중년 남자가 서 있었는데, 체격이 건장했고, 등 뒤에 은빛 대검(大劍)을 메고 있었다.

    오른쪽에는 하얀 궁군(*宮裙: 궁중에서 입는 치마) 차림에 두 눈이 물처럼 맑은 여인이 서 있었는데, 한 번 보면 눈을 떼고 싶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세 사람 뒤에 선 자들도 하나같이 경지가 심오했다. 복식으로 미루어 대부분 대당관부 사람인 듯했지만, 화생사와 보타산의 수사들도 보였다. 그중에는 심협이 예전에 본 적 있는 보타산의 청화선자와 화생사의 면월거사도 있었다.

    청화선자 옆에는 심협과 다툼이 있었던 무씨 청년도 보였지만, 이씨 소녀는 없었다.

    심협은 창평방에서 나올 때 본래의 외모로 돌아왔기에 무씨 청년 역시 금방 그를 알아보았는데, 눈에는 원한의 빛이 스쳤다.

    그러나 심협은 그 눈길을 철저히 외면했다. 이미 응혼기에 접어든 그로서는 한낱 벽곡기 수사 따위의 원한을 마음에 둘 이유가 없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노란 옷의 노인이 싸늘한 번갯불 같은 눈빛으로 심협과 육화명을 번갈아 훑어보며 물었다.

    “황목(黃木) 선배님을 뵈옵니다. 저희 네 사람은 명을 받고 음령산에서 장안성으로 복귀하던 중 귀물이 소란을 피우는 것을 발견하고 즉시 달려왔습니다. 허나 구체적인 사정은 저희도 잘 알지 못합니다. 여기 심형은 산수이자 저의 벗으로, 저간의 사정을 알 듯합니다.”

    육화명이 앞으로 나아가 노란 옷의 노인에게 예를 갖추고는 심협을 소개했다.

    ‘심형, 이분은 대당관부의 공봉이신 황목 상인(*上人: 지혜와 덕을 갖춘 고승을 높여 부르는 말)이시오. 지위가 매우 높은 분이니 예의를 잘 갖춰야 하오. 이 어르신은 예의가 바른 사람을 좋아하신다오.’

    심협의 머릿속에 육화명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후배 심협, 여러 선배님들을 뵈옵니다.”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노란 옷의 노인에게 예를 갖추고는 또 포권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두루 인사했는데, 그 자세나 태도는 기품이 넘쳤다.

    “젊은이가 교만하지도 조급하지도 않은 것이 괜찮구먼. 우선 말해보게. 이게 무슨 일인가?”

    황목상인은 심협의 태도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심협은 목소리를 가볍게 가다듬고는 대당관부에 육화명을 찾아갔던 것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일의 경과를 상세하게 이야기 했다. 다만 영고라던가 장군귀물 등 자신과 관련된 일들은 숨겼다. 또한 잿빛 옷의 도인에 대해서도 어쩐지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들은 황목상인 등은 하나같이 수련 경지가 깊고 박식한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표정이 매우 무거웠다.

    “육화명, 예전 취보당 사건에 자네도 참여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경하용왕의 귀혼을 다시 봉인했다고 보고했지. 한데 그가 어찌 지금 여기에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궁군 차림의 젊은 여인이 육화명에게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여려서 사람의 몸을 절로 풀어지게 만들었다.

    “그 일은 저로서도 당혹스럽습니다. 저의 판단에 착오가 있어 그 용왕의 귀혼을 봉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최근에 연신단 사람들이 저승에 들어가 용왕의 귀혼을 풀어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육화명이 고개를 푹 떨구고 말했다.

    궁군 차림 여인은 이 말을 듣고 두 아미를 함께 찡그리는 것이 육화명의 대답이 썩 만족스럽지 않은 게 분명했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지난번 그 임무는 육 현질 외에도 산수 한 사람이 함께였다고 들었는데, 분명 심협 소우 자네였겠구먼?”

    옆에 있던 검을 멘 남자가 웃음을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그는 기골이 장대하고 위풍당당했지만, 말을 하기 시작하니 온화한 느낌이었다.

    “궁(宮) 선배님께서는 견문도 넓으시고 기억력도 좋으시군요. 저는 그날 확실히 육 도우와 함께 그 일에 참여한 바 있습니다.”

    심협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육화명이 전음으로 소개한 바에 따르면 황목상인 곁의 두 사람 중 검을 멘 남자의 이름은 궁전(宮滇), 궁군 차림의 여인은 윤일선(尹一仙)으로, 모두 대당관부의 공봉이었다.

    “심 소우는 경하용왕의 귀혼이 봉인을 벗어난 일에 대해 아는 바가 있는가?”

    궁전의 물음에 심협이 고개를 저으며 쓰게 웃었다.

    “저 역시 얼떨떨하여 정말이지 잘 모르겠습니다.”

    심협을 바라보는 궁전의 눈 깊은 곳에 물결 같은 빛이 가볍게 넘실거렸다.

    윤일선과 황목상인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궁전은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미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되었네. 경하용왕이 어떻게 저승에서 탈출했는지를 따져봐야 지금은 의미가 없어. 당장 급한 일은 어찌 그에게 맞설 것인가 하는 점이네.”

    황목상인이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상인 어른의 말씀이 옳습니다.”

    궁전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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