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305화 (305/1,214)
  • 305화. 서생과 다시 마주치다

    순양검배는 건곤대에 들어가자마자 강한 붉은 빛을 뿜어냈고, 가느다란 실오라기 같은 홍련업화가 나타났다. 검 끝이 장군귀물의 미간을 겨누자 사나운 검기가 쉬이익 하는 소리를 내며 울렸다.

    장군귀물은 감히 옴짝달싹 못하게 됐고, 솟구쳐 오르던 귀기도 차츰 수그러들었다. 동시에 영지가 크게 트이면서 생겼던 우쭐함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지금 심협은 이미 응혼기였고, 특별히 귀물을 억누르는 홍련업화까지 지녔으니 장군귀물을 죽이기란 여반장이었다.

    “이번 한 번뿐이다. 또다시 소란을 피운다면 그때는 내 검이 무정하다 탓하지 마라.”

    심협이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맺자 순양검배가 위로 날아갔다.

    “그래, 이놈아! 네놈이 이겼다! 네가 장안성의 귀환을 해결하도록 내 도와주마! 허나 너 또한 음기를 좀 들여와서 나의 수련을 도와야 한다.”

    장군귀물은 콧방귀를 한 번 뀌었지만 말투는 한결 누그러진 채였다.

    “좋다.”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며 응낙했다. 그는 비록 신식을 지녔지만 음기에 대한 감응은 이 장군귀물에 미치지 못했다. 게다가 순양보전에 기록된 순귀술은 한 종류가 아니라서 저 귀물이 자신과 교류하려 들기만 한다면 다른 방법으로도 굴복시킬 자신이 있었다.

    “좋다. 그놈을 죽인 뒤에 그 귀물 몸속에 음기가 뭉쳐져 만들어진 물건은 내게 양보해야 한다!”

    장군귀물의 말에 심협은 고개를 시원스레 끄덕였다.

    “좋다.”

    “저 앞쪽 멀지 않은 곳에 음기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 귀물이 남긴 것이지.”

    장군귀물이 가르쳐준 위치를 바라보았지만 심협은 별다른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법력을 눈으로 응집해 다시 바라보고는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곳의 땅바닥에는 옅은 푸른색 물 자국이 있었는데, 그 물자국에서는 매우 가늘고 엷은 음기가 뿜어져 나왔다. 방금 연향이 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무두귀를 보았다고 했으니 장군귀물의 말이 거짓은 아닐 터였다.

    “음기가 서린 다른 물 자국을 더 감지할 수 있느냐?”

    심협은 주위를 둘러보며 다그쳐 물었다.

    “당연하지. 앞으로 가라.”

    장군귀물은 도도한 목소리로 일러주었다.

    얼마를 걸어가 보니 과연 음기가 서린 물 자국이 또 발견됐다.

    “마냥 허풍선이는 아니었구나.”

    심협이 웃으며 말했다.

    “흥! 당연하지. 이 몸을 어떻게 보고…….”

    일인일귀는 추적을 이어가다가 이내 성 동쪽 어느 나무다리 부근에 이르렀다. 다리 아래로는 제법 큰 강줄기가 콸콸 흐르고 있었다.

    살고 있던 창평방에서 멀지 않았기에 심협은 이 강줄기를 알고 있었다. 금광하(金光河)라는 퍽 기이한 이름의 강줄기였다.

    “저것은……?”

    장군귀물에게 계속 찾으라고 독촉하려던 심협의 눈이 번득였다. 눈앞 다리 위에 누군가가 서 있었던 것이다. 그는 바로 그 중년의 백의서생이었다.

    “또 만났군요.”

    심협은 속으로 지금 상황을 파악하려 애쓰며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당신이구려.”

    심협을 본 중년 서생은 얼굴에 깜짝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저는 무두귀 한 마리를 추적하고 있는 중이온데 흔적을 쫓아오다 보니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귀하께서는 여기에 얼마나 오래 계셨습니까? 뭔가 발견하신 것이 있는지요?”

    심협이 몰래 중년 서생을 살피며 물었다.

    “없소.”

    중년 서생은 시선을 피하고 계속 아래쪽 강물을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신법이 그리도 놀라우신 것을 보니 분명 수선을 하시는 분이겠지요. 무두귀의 물 자국이 바로 이 근처에서 사라졌는데 정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셨습니까? 그럼 묻겠소. 귀하는 또 왜 여기에서 걸음을 멈추신 겁니까?”

    심협이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말을 돌리지 않고 물었다.

    “오래 전 이곳에서 노닐었던 적이 있소. 그때를 추억하러 왔을 뿐이오.”

    중년 서생의 목소리는 평온했고, 딱히 이상한 점도 없었기에 심협은 어찌 대꾸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저 서생에게는 분명 뭔가 문제가 있지만, 아직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게다가 상대는 경지가 매우 높은 사람일 수 있으니 함부로 시험해볼 수도 없었다.

    “오늘 이리 여러 차례 마주쳤으니 인연이라 할 수 있겠구려. 내게 재미난 이야기가 있는데, 들어볼 의향이 있는지 모르겠소.”

    중년 서생이 갑자기 심협을 바라보며 말했다.

    “재미난 이야기라면 언제든 환영이지요.”

    심협은 상대의 꿍꿍이를 알 수 없었기에 일단 지켜보기로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장안성이 백 년 동안 무사태평할 수 있었던 것은 동서 양쪽에 사악한 기운을 억누르는 무엇이 있기 때문이오. 서쪽에는 대안탑이 있고 동쪽에도 보물이 하나 있지. 그게 무엇인지 아시오?”

    중년 서생은 손에 든 쥘부채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저는 모르겠군요. 가르침을 주시겠소?”

    심협은 의아했으나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저으며 답을 청했다.

    중년 서생은 강물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는데, 눈동자에서 섬뜩한 빛이 번득였다.

    “바로 경하용왕을 참살한 참룡검(斬龍劍)이오. 위징이 죽은 뒤, 검기를 진법 삼아 이곳에 진을 치고 있지. 나는 장안성을 한참 뒤지고 나서야 검기가 있는 곳을 찾아냈다오.”

    “참룡검! 경하용왕!”

    심협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때였다. 사람 그림자 하나가 다리 아래에서 뛰어올랐다. 등에는 어람(*魚籃: 물고기를 담는 바구니)을 하나 메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활어가 가득했다. 보아하니 터무니없이 물고기 값을 올려 받았던 그 어부였다.

    “드디어 나리를 찾았네요. 제가 방금 또 물고기를 한 광주리 잡았는데, 사서 방생하시렵니까? 헤헤.”

    젊은 어부는 사근사근하게 비위를 맞추며 묻고는 등에 멘 어람을 서생 앞에 내려놓았다.

    심협은 그가 지독히도 탐욕스러울 뿐만 아니라 남의 선한 마음을 이용하려 드니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인간은 이리 탐욕스러운데도 평안을 누리다니, 실로 불공평하도다! 하하하!”

    중년 서생은 울분이 가득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크게 웃었다.

    “사실 겁니까, 마실 겁니까! 안 사시면 홍소어(*紅燒魚: 생선에 기름, 설탕, 간장 등을 넣고 검붉은 색이 나도록 졸인 음식)나 만들라고 천금루에 가져다 팔지요.”

    어부는 서생의 갑작스런 반응에 벌컥 짜증을 냈다.

    “귀찮게 그럴 필요가 있나. 이 주머니에 든 금을 보았느냐? 네놈이 그리도 돈을 원하니 가서 주워 보거라. 그리 되면 네 것이니라.”

    중년 서생은 품에서 금빛 찬란한 금 덩어리가 가득한 작은 주머니를 하나 꺼내더니 망설임 없이 다리 아래로 던졌다.

    주머니 속의 황금이 강으로 풍덩풍덩 떨어졌다.

    “아앗! 내 금!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청년 어부는 눈이 뒤집혀 중년 서생을 돌아보며 버럭 화를 냈다.

    심협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차렸으나, 중년 서생은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한편, 주위를 오가던 몇몇 사람이 중년 서생이 금덩이들을 던지는 것을 보고 몰려들었다.

    “금! 저 사람이 금을 던지고 있어!”

    그 외침에 더 많은 사람이 몰려들자 어부는 초조한 마음에 버럭 소리쳤다.

    “저건 내 금이야!”

    그러더니 그 높은 다리에서 곧장 뛰어내렸다.

    “이보시오, 잠깐…….”

    심협은 막아보려 했지만, 어부는 이미 강물로 뛰어든 뒤였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앞다투어 강물로 뛰어들었다. 그야말로 황금에 눈이 멀어버린 것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오! 왜 죄없는 자들을 물속으로 끌어들이냔 말이오!”

    심협은 시선을 홱 돌려 중년 서생을 노려보며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그저 금을 좀 던졌을 뿐, 뛰어든 것은 저들이 판단한 것 아니오? 그러니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겠소?”

    중년 서생은 한 손을 흔들어 쥘부채를 펼치면서 느긋하게 말했다.

    심협은 처음 봤을 때와 달리 이 서생은 선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를 외면하고는 손을 들어 아래쪽 강물의 허공을 움켜쥐었다.

    촤라락!

    강물에서 기이한 소리와 함께 10여 개의 물 손바닥이 떠올랐고, 손바닥들은 이미 강으로 뛰어든 사람들을 붙잡아 억지로 강기슭으로 보내려 했다.

    한데 그때, 갑자기 온 강물에 물결이 거세게 일더니 10여 줄기의 촉수 같은 검은 기운이 강에서 솟아올랐다. 이 기운은 거대한 구렁이처럼 물 손바닥들이 물에 뛰어든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못하게 휘감았다.

    한편, 강에 빠진 사람들은 눈에 피처럼 붉은 빛이 어렸고, 얼굴 가득 광기를 띠었다. 그들은 그대로 하나둘 강바닥으로 잠겨 들어갔다. 마치 미혼술(迷魂術)에 마음을 사로잡힌 듯한 모습이었다.

    안색이 변한 심협은 중년 서생이 있던 곳을 돌아보고는 더욱 놀랐다. 방금 전까지 옆에 있던 중년 서생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더욱이 줄곧 신식으로 주위 상황을 감지하고 있었음에도 그 서생이 언제 사라졌는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역시 그 사람에게는 뭔가 있어.”

    그는 씁쓸하게 혀를 찼다.

    하지만 지금은 그 서생을 찾을 때가 아니었다. 강 속의 검은 기운들은 오싹한 사기(邪氣)를 품고 있어 얼핏 보기에도 좋은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저 검은 기운들이 사람들을 구하는 것을 막는 것으로 보아 강바닥에서 심각한 변고가 일어날 터였다. 그전에 반드시 사람들을 구해내야만 했다.

    심협은 곧장 강으로 몸을 날렸다.

    검은 기운이 거세지면서 또다시 검고 굵은 촉수 10여 개가 튀어나와 날아들면서 심협을 휘감으려 했다.

    “어딜!”

    심협이 가볍게 콧방귀를 뀌자 아래쪽에서 붉은 검광이 번쩍이면서 그의 몸을 떠받치고 번개처럼 옆으로 움직이며 검은 촉수들을 피했다. 동시에 그는 두 손을 재빨리 결인하여 손가락 사이에서 강한 푸른 빛을 내뿜었다.

    콰르릉!

    강물이 격렬하게 요동치면서 폭이 30여 장에 이르는 소용돌이를 형성해 강 밑바닥에서 솟아나온 모든 검은 촉수들을 휘감았다.

    천둥이 울리는 듯한 물소리가 소용돌이 한가운데에서 들려왔고, 찢어발기려는 듯한 강하고 사나운 힘이 그 안에서 뿜어져 나왔다. 또한 무언가 찢어지는 소리도 끊이지 않았다.

    강바닥에서 솟아나온 검은 촉수들은 갈가리 찢겨 검은 안개로 변해 흩어졌다. 다행히 심협이 물줄기를 조종해 피한 덕에 다친 곳 하나 없이 무사했다.

    그렇다고는 하나 강에 뛰어든 사람들도 물줄기에 휩쓸려 사방으로 흩어졌다.

    심협은 다시 물 손바닥을 응집시켜 그 백성들을 기슭으로 보내려 했다.

    그때, 갑자기 강 밑바닥에서 윙윙거리는 거대한 검명(劍鳴)이 울렸고, 굵기가 무려 백 장이나 되는 금색 빛기둥이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쳤다. 빛기둥 속에는 크고 작은 무수한 검영(劍影)이 번쩍이면서 더없이 맹렬한 검기의 파동을 일으켰다.

    심협이 법력으로 만들어낸 소용돌이도 이 검기로 인해 순식간에 사라졌다.

    강 속의 백성들은 비명을 지를 겨를도 없이 진흙처럼 잘게 다져진 고기조각이 되어버렸다.

    심협도 금색 빛기둥의 영향을 받았지만, 다행히도 반응이 빨라 곧바로 검을 피할 수 있었다. 그는 뒤로 물러나며 곧장 금갑선의를 꺼내 온몸을 감쌌다.

    댕!

    굉음이 울리면서 굵직한 검영이 빛기둥 안에서 나타나 종 모양 보호막을 베었다. 그 충격에 심협은 보호막과 함께 나가떨어졌다.

    10여 장을 그대로 날아간 뒤에야 심협은 균형을 잡았다. 그의 머리 위에 있는 금갑선의가 웅웅 떨렸고, 몸을 뒤덮은 종 모양 보호막도 격렬하게 진동했다. 그 위에는 커다랗게 베인 자국까지 있었지만, 완전히 잘려나가지는 않았다.

    심협은 금갑선의의 방어력이 예상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에 안도했다. 방금 그 검영은 응혼기 단계를 훨씬 넘어서서 거의 출규기 수사의 일격에 견줄 만했는데도 막아내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는 곧 피로 물든 강물을 보고는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안 돼!”

    심협은 낮게 울부짖었고, 원망과 분노가 치솟았다. 강 속의 검진(劍陣)이 아니라 이리도 많은 백성들을 이곳에서 억울하게 죽게 만든 그 중년 서생에 대한 분노였다.

    하지만 백의서생은 이미 자취를 감추었고, 그는 분노를 분출할 곳이 없어 억지로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