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화. 전무후무
천둥번개가 몰려드는 것을 본 심협은 한 손으로 검결을 맺으며 육진편을 검 삼아 하늘을 향해 비스듬히 쓸어 올렸다.
“하앗!”
그의 기합성에 이어 삽시간에 날카로운 검 울음소리가 울리며 육진편 위에 거대한 검영이 떠올라 천둥과 번개로 만들어진 금룡을 베었다.
콰르릉!
사나운 검기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올랐다. 반경 수백 장 안의 구름이 용솟음쳤고, 번갯불이 사방에 넘쳐흘렀으며, 천둥과 번개로 이루어진 금룡은 단숨에 꿰뚫렸다. 그 너머 허공에도 따라서 거대한 구멍이 뚫려 오랫동안 구름이 모여들지도 않았다.
하지만 사방의 용 모양 번갯불은 눈 깜짝할 사이 심협의 체내로 파고들었다.
콰지직!
한바탕 번개가 번득이며 심협의 전신이 천둥번개에 휩싸여 온통 눈처럼 하얗게 변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요란한 천둥번개 소리가 마침내 잦아들고, 모든 환상이 하나둘 사라지면서 한 사람의 형상이 금빛 대전 위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온몸이 새하얀 빛으로 뒤덮인 그 사람은 심협이었다.
두 눈은 감겨 있었고, 몸은 가부좌를 튼 상태였으며, 두 손은 무릎 위에 가만히 놓인 채, 새카만 머리칼은 하늘로 치솟아 있었다. 온몸의 옷자락은 펄럭펄럭 요동치다가 땅 위에 내려앉은 뒤에야 천천히 가라앉았다.
잠시 후, 심협이 눈을 떴다. 그의 두 눈에는 생기가 감돌았고, 그 풍채는 놀랍도록 비범했다.
그때, 어디선가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도(天道)의 총애를 받아 네게 뇌해(雷海)에서 단련할 기회를 베풀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 진정한 신선이 된 네 몸은 근골(根骨)의 무게와 기초의 견고함이 이미 대다수 선인들을 훨씬 뛰어 넘었느니라.”
심협이 고개를 돌려보니 금갑천장의 얼굴이 다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며 입을 열었다.
심협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팔뚝을 쓱 살펴보았다. 피부는 옥처럼 투명하게 빛났고, 그 안쪽 뼈대는 막 진선기 경지에 발을 내디뎠을 때의 옅은 금빛이 아니라 짙은 순금 빛깔이었다.
“선배님, 이 뇌겁은 도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심협이 물었다.
“천겁은 천도의 관리를 받는 법. 그러니 왜 일찍 찾아왔는지 나도 모른다. 네가 지닌 기상이 남달라서일 수도 있고, 마겁이 일어난 뒤에 천도의 운행이 뒤틀린 탓일 수도 있겠지. 어쨌든 너는 천겁의 시련을 견뎌내고 많은 것을 얻지 않았으냐?”
금갑천장이 답했으나 심협은 여전히 의문이 남아 있었다.
“정말 그러합니까?”
“이 끝없는 세월 동안 신선에 오르는 길에 강하고 용맹한 자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허나 천겁 속에서 너처럼 행동하는 이는 흔치 않았지. 내게 기억을 남길 수 있는 자는 더더욱 드물었고…….”
금갑천장이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말을 돌리자 심협은 고개를 갸웃했다.
“저 같은 행동이요?”
“감히 천겁의 벼락으로 부적을 단련시키는 것은 이전에 본 바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전무후무한 일이다. 일전에 하계(*下界: 천상계에서 인간세상을 이르는 말)의 돼지 요괴 한 마리가 겁을 겪을 때 게걸스레 천뢰를 삼킨 적은 있지만.”
금갑천장이 말에 심협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그런 능력자도 있었단 말입니까?”
“허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천도는 무너져 내렸고, 천정(*天庭: 천신이 사는 궁궐, 천계의 조정)도 사라지고 없어 자연히 너를 선적(仙籍: 신선들의 명부)에 올릴 수 없으니, 너도 산선(散仙) 신세가 되는 수밖에 없겠구나.”
금갑천장은 또다시 화제를 돌렸다.
“산선이 무엇입니까?”
심협이 의아한 듯 물었다.
“너는 방촌산 출신이면서 어찌 그것도 모르느냐?”
이번에는 금갑천장이 의심 가득한 투로 되물었다.
“사실을 말씀 드리자면, 방촌산은 이미 괴멸되어 저의 황정경 공법도 종문에서 정통으로 전수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연한 인연으로 익히게 된 것이지요.”
심협은 그렇게 말했으나, 그렇다고는 해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자신을 방촌산의 일원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금갑천장은 한참이나 말없이 심협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무릇 선적에 올라 천정에 귀속된 자는 천선(天仙)이 되고, 선적에 오르지 못한 자는 산선이 된다.”
“그 둘은 그저 소속이 다를 뿐입니까?”
“천선은 천정의 도움과 비호를 받으니 자연히 선도(仙途)가 순탄하고 목숨을 잃을 위험이 훨씬 줄어든다. 대신 하늘의 여러 규칙에 제약을 받으니 자유롭다 할 수는 없어서 천정의 다스림을 받아야 하니 의무와 책임도 져야 하지. 산선은 천정의 비호를 얻을 수 없지만 책임의 속박이 덜하니 더 자유롭고 말이다. 각자 일장일단이 있는 것이다.”
금갑천장의 설명에 심협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산수와 보첩수사(譜牒修士)의 차이 같군요. 말하자면 역시 천선이 더 대단한 것이겠지요.”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산선 중에도 경지가 높고 깨달음이 깊은 자들도 적지 않다. 그들은 인계를 다스리는 동천복지(*洞天福地: 도교에서 신선들이 사는 곳을 일컫는 말)를 가졌고, 천선에 필적할 만하여 지선(地仙)이라 불린다. 방촌산 종문의 조사(祖師)인 보제노조와 오장관(五莊觀)의 진원대선(鎭元大仙)이 바로 그런 이들이지.”
심협은 그제야 이해가 갔다.
“말씀하신 보제조사 어르신은 어떤 경지이십니까?”
심협은 줄곧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진선 위에는 태을(太乙)이라는 경지가 있다. 보제조사는 그 태을을 넘어서서 천존(天尊)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그 위로 더 올라가도 오직 한 층 더 높은 대천존(大天尊)의 경지뿐이라, 다들 입교(*立敎: 종파, 종문을 창시하다)하여 교조(敎祖)라 불리는, 초탈한 사람들이지.”
“보제조사께서는 과연 그분이 생각한 하늘보다 더 높은 존재셨군요.”
심협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때, 금갑천장이 낯빛을 갑자기 바꾸며 입을 열었다.
“심협, 네가 신선의 경지에 오르고 천겁을 겪으면서 대량의 천지영기를 소모하여 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 서둘러야 한다.”
“시간이 얼마 안 남다니요?”
하지만 심협은 미처 답을 듣기도 전에 금빛에 휩싸여 다른 곳에서 나타났다.
맞은편 백 장 너머에는 키가 무려 10장에 달하고 온몸의 피부가 검푸른, 기이하게 생긴 천장이 서 있었다. 그는 표범 같은 얼굴에 눈은 부리부리해 무척 용맹해 보였다.
붉은 눈썹과 붉은 수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반신과 금빛 갑옷으로 덮인 하반신, 허리에는 사나운 사자 머리가 새겨진 허리띠, 손에는 양날도끼……. 등 뒤로 오색 비단끈 한 가닥을 흩날리고 선 그는 더없이 위풍당당하고 기백이 범상치 않아 보였다.
“이자는 설마…… 거령신(巨靈神)?”
심협은 가벼운 탄성을 내질렀다. 상대의 몸집이나 생김새, 기운과 위력, 손에 든 무기는 놀랍게도 전설 속 거령신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심협은 상대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법력의 파동을 살펴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놀랍게도 그는 진선 후기의 단계에 도달해 있었다.
‘이걸 어떻게 이기란 말인가?’
심협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앞서 대승기 정점의 경지로 진선 초기의 뇌부천장에 맞섰던 것은 지극히 운이 좋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진선 초기의 경지로 진선 후기에 맞서야 하니 어찌 한단 말인가?
하지만 어차피 물러날 길은 없음을 그도 알고 있었다.
심협은 정신을 가다듬고 손에 육진편을 꽉 쥔 채, 두 눈으로 맞은편의 거령신을 응시했다. 이미 황정경 공법을 은밀하게 운공하기 시작한 상태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거령신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고, 두 눈도 꼭 감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기운이 아니었다면 조각상이라 여겼을 정도였다.
심협은 잠깐 망설이더니 뒤로 슬그머니 한 발짝 물러났다.
그런데 그가 움직이는 순간, 거령신이 두 눈을 번쩍 떴다. 동시에 두 줄기 맑은 신광(神光)이 쏘아져 나왔고, 몸에서는 거칠고 사나운 기운을 내뿜으면서 손에 든 양날도끼를 가로로 휙 하고 휘둘렀다.
도끼날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거대한 푸른 도끼가 가로로 날아와 허공을 두 쪽으로 가르며 곧장 날아왔다.
심협은 힘으로 상대할 수 없음을 알고는 두 발로 바닥을 세차게 굴러 도끼 그림자 위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발끝이 허공을 살짝 딛자 발아래에 달빛 허상이 부서져 내렸고, 그 순간 그는 허공에서 몸을 틀어 돌연 사라져버렸다.
잠깐의 틈을 두고 거령신 뒤쪽 허공에 사람 그림자가 난데없이 나타났다. 당연히 심협이었다. 그는 두 손에 금빛을 모아 육진편을 단단히 쥐고 거령신의 뒷목을 거세게 내리쳤다.
그때, 묵직한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
쿵!
거령신이 양날도끼를 손에 쥐고 바닥을 세차게 내리찍으며 울린 소리였다. 도끼자루가 땅에 닿자 금빛 빛고리가 일렁이면서 사방을 뒤덮었다.
이 빛고리에 닿는 순간, 심협은 온몸이 뻣뻣하게 굳으면서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에 의해 그 자리에 갇혀 한순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마음이 다급해져서는 황급히 용과 코끼리의 힘을 움직여 힘으로 깨보려 했다.
한데 그때, 갑자기 한 줄기 세찬 바람이 머리 위로 불어오더니 도끼 그림자가 얼굴을 향해 곧장 떨어져 내리는 게 언뜻 보였다.
휙!
심협의 눈앞에 한 줄기 혈광(血光)이 번쩍이더니 곧 다시 완전히 깜깜해졌다.
* * *
천천히 눈을 뜨자, 익숙한 방안 천장과 침상의 휘장이 눈에 들어왔다.
“돌아왔나?”
심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번 꿈을 꾸면서 그는 이미 여러 번 죽는 데 익숙해졌기에 재빨리 현실로 돌아와 팔로 침상을 짚고 일어나 앉으려 했다.
하지만 그의 팔은 납덩이를 넣은 것처럼 너무나도 무거웠고, 온몸 곳곳에서는 욱신거리는 통증과 강한 졸음이 몰려왔다.
“빌어먹을. 역시 꿈에서 너무 많이 죽으면 이 모양이 된다니까.”
그래도 미리 예측한 상황이라 억지로 눌러 참고 일어나 앉을 수 있었다.
그는 쉴 생각도 않고 즉시 법력을 강제로 운행하여 임랑환에서 회복 유영단과 담록색 단약을 꺼내 먹었다. 이 단약은 풍수혼원단(風水混元丹)이라는, 원기를 회복시키는 단약이었다. 진강의 저물 반지 안에서 찾은 것으로 약효가 매우 뛰어났다.
지난번 깨어났을 때의 경험에 따르면, 그의 몸속에 곧 한 줄기 힘이 나타나 몸의 원기와 수명을 집어먹을 것이다. 지금 두 가지 단약을 복용한 것도 단약의 힘을 빌려 이를 완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협은 가까스로 운기조식하며 두 단약을 정제했다. 단약은 천천히 따뜻한 기운 두 줄기로 변해 그의 몸속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그가 단약을 완전히 정제하기도 전에 시야가 흐릿해지면서 주변 모든 것이 빙빙 돌기 시작했다. 체내에서는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나면서 바닥이 안 보이는 구멍이 나타나 그의 생명력을 미친 듯 빨아들였다.
심협은 급하게 단약의 힘을 불러일으켜 느닷없이 나타난 깊은 구멍을 메워보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전혀 소용이 없었다. 구멍은 단약의 힘 따위는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의 생명을 삼켜나갔다.
“역시 안 되는 건가……?”
심협은 고통스레 중얼거렸다.
그전보다 열 배는 더 강한 고통이 물밀 듯 밀려와 그를 뒤덮었고, 의식을 끌어당겨 몇 토막으로 찢어발길 것만 같았다.
심협은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지만, 찍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주위의 모든 것이 빠르게 흐릿해지면서 눈앞이 캄캄해졌고, 다시 끝없는 암흑 속으로 빠져들며 의식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