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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291화 (291/1,214)
  • 291화. 망설임

    심협이 의식을 움직이자, 소인(小人) 형상의 신혼도 그처럼 한쪽 팔을 들어올렸다. 다만 그 손에는 붓이 없었기에 두 손가락을 칼날처럼 모아 허공에 부적 문양을 새기고 있었다. 그러자 손끝에서 한 가닥 신혼의 힘이 실오라기처럼 흘러나와 붓과 먹으로 그림을 그리듯 허공에 굽이굽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이내 반 토막 정도 되는 부적 문양의 윤곽을 응결해냈다.

    하지만 신혼의 힘으로 부적을 그리는 것은 붓과 먹으로 글씨를 쓰는 것과는 달라서, 심협의 마음에 약간의 잔물결이 일자 손끝에서 흘러나오던 신혼의 힘이 갑자기 일렁이며 부문(符文) 윤곽 한가운데에 검은 응어리가 생겨났다.

    한편, 식해 바깥, 허공에 떠 있던 부적지는 심협의 손에 들린 칠성필에 뻥 뚫려서 구멍이 났다.

    심협은 두 눈을 뜨고 황지에 그린 반쪽짜리 부적문양을 다시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야말로 꼬마아이가 낙서를 해놓은 듯하니, 부문이 응당 지녀야할 신령한 기운이 어디 있겠는가?

    심협은 어차피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다. 별다른 재료도 필요치 않은 억몽부가 그리는 것마저 그리 쉬웠다면 저잣거리의 허접한 부적이 되었으리라.

    “다시 해보자.”

    심협은 대수롭지 않게 말한 뒤, 두 눈을 지그시 감고는 다시 팔을 들어 올려 신념(神念)을 길잡이로 삼아 그리기 시작했다.

    * * *

    이 금탑 안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심협도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억몽부를 그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이번이 벌써 297번째로 부적을 그렸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식해의 소인 형상 신혼은 두 눈을 고정한 채 엄숙한 표정이었다. 들어 올린 한 손을 허공에 대고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 앞에 맺힌 부적 문양은 이미 절반 이상 완성된 상태였고, 멈춘 자리는 선이 방향을 트는 곳이었다.

    이곳은 신혼의 힘을 아주 엄격하게 통제해야 해서 혼력(魂力)이 조금이라도 더 흘러나오면 아까처럼 부적지가 뚫릴 수도 있지만, 반대로 너무 적게 흘러나오면 강줄기가 끊어지는 것처럼 부적의 신령한 기운이 부족해지거나 끊어지기도 한다. 그리 되면 쓸모없는 부적이 되는 것이다.

    아직까지 억몽부를 그리는 데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심협의 실수는 대부분이 이곳에서 일어났다.

    이 순간, 그는 모든 정신을 집중한 상태였다. 소인 형상 신혼의 손은 태산처럼 든든하여 조금씩 부적 문양의 흔적을 따라 신혼의 힘을 그려내고 있었다.

    심협은 그 둥근 호가 마치 굽어진 강줄기 같다고 느꼈다. 신혼의 흐름이 그 앞에 이르면 그것을 휩쓸어버릴 수도, 그렇다고 지체할 수도 없기에, 더없이 절묘하게 돌아가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가라!”

    그의 마음속으로 외치자, 신혼의 손이 허공을 빙글 휘감아 돌면서 처음으로 거침없이 그 난관을 돌아 부적 문양을 마지막으로 이끌었다.

    드디어 첫 번째 억몽부에 성공한 것이다!

    심협은 기쁨을 억누르며 식해 속에 떠다니는 부적 문양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후에야 그는 천천히 신념(神念)을 거두었다.

    두 눈을 천천히 뜨자, 앞에 떠 있는 부적지 위의 붉은 부적 문양에서 금색 빛이 퍼져 있는 게 보였다. 부적은 마치 부적지 위에 금박으로 인쇄한 것처럼 선이 거침없고 신령한 기운이 충만하여 언뜻 보기에도 비범한 물건 같았다.

    심협은 이마에 흐른 식은땀을 훔치고 손바닥을 깨끗이 닦은 뒤에야 억몽부를 집어 들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첫 부적을 완성한 경험이 가장 귀중했기에, 그는 자세히 부적 위의 세밀한 부분 하나하나를 살펴보고 모든 요소를 기억하려 했다.

    잠시 휴식을 취한 뒤, 그는 이 억몽부를 챙기고 다시 두 눈을 감은 채 부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실 이렇게 신혼의 힘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으로 부적을 그리는 것은 정신력의 소모가 엄청나서 심협의 신혼이 강력하다 해도 부담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연습을 거듭함에 따라 심협은 신혼의 힘을 통제하는 데 점점 익숙해졌다. 그 사실이 즐거워서인지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367번의 끊임없는 연습을 거친 끝에 심협은 억몽부를 그리는 모든 기교를 차츰 파악하여, 마지막 열 번 중에는 세 장을  성공했다. 이 정도면 성공률이 높다고 할 수 있었다.

    심협은 그제야 부적 그리기를 멈췄다. 어쨌든 꿈속의 부적은 현실로 가져갈 수도 없고, 그가 원했던 것은 부적을 그리는 경험을 쌓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심협은 돌계단 앞에 가부좌를 튼 채 한참을 수행하다가 두 눈을 천천히 떴다. 눈에는 일말의 허탈함마저 스쳐 지나갔다. 꿈속에서 수행할 때의 순조로움은 현실의 그와 대조되었기 때문이다.

    “꿈속의 경지가 아무리 높아서 현실에서는 쓸 수가 없으니 안타깝군. 심지어 여기에서 수명을 다 소모해버리면 다시 돌아가서 경지를 더 끌어올리기도 그리 쉽지가 않은데…….”

    심협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벽곡기에서 응혼기로 진입할 때는 용혈과 천년영유의 도움이 있었으니, 앞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려면 이런 선약이나 영재를 어디 가서 구한단 말인가?

    결국 자질이 문제였다. 현실에서도 자질이 이 정도로 뛰어났더라면 수명의 한계를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질을 끌어올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바로 그때, 마치 누군가에게서 대답이라도 들은 것처럼 머릿속에 갑자기 좋은 생각이 번쩍 떠올랐다.

    “하! 어떻게 그걸 깜빡할 뻔했지?”

    그가 꿈속에서 그토록 수행 속도가 빠른 데에는 체내에 법맥 20줄기가 트인 것도 한몫했다. 사람의 수행은 ‘법맥을 얻어 공법을 운공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기에, 법술 수행에 있어서도 운공 속도와 효율은 법맥이 많은 사람이 월등하다. 그가 만약 법맥의 수를 늘린다면 수행 속도 역시 분명 빨라질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심협은 이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람의 법맥은 벽곡 초기에 진입했을 때나 개척할 수 있고, 그 수량의 많고 적음은 본래 개인의 자질과 기연에 달려 있어 일단 형체를 갖추면 다시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용에게서 얻은 <현음개맥결>이라면 가능성이 있을 터였다. 꿈속에서 이 방법을 능숙하게 익히고 충분한 경험을 쌓는다면 가능성은 더 높아지리라.

    “현음개맥결이 정묘하다고는 해도 위험은 크지. 트인 경맥이 망가져서 심하면 목숨까지 잃을 수도 있어. 꿈속에서야 다시 살아날 수 있다지만, 그래도 현실의 수명을 소모하게 되는데…….”

    그렇게 생각하자 결정을 내리기가 힘들었다.

    그는 한참동안 계단 앞에 앉아 현음개맥결의 모든 세세한 부분들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지만, 끝내 모험을 시도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탑으로 향했다.

    탑 안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또다시 금갑천장이 눈에서 뿜어내는 빛에 의해 다른 공간으로 끌려 들어갔다.

    이번에 나타난 것은 호리호리한 체격에 손에는 장검을 든 은갑천병이었다.

    은갑천병은 곧장 심협에게로 달려들었다. 그가 손에 든 장검 위에는 금색 빛이 한 층 감돌았는데, 그 안에는 광명정대하고 강직한 기백이 담겨 있었다.

    심협은 상대의 수련 경지가 앞서 장창을 휘두르던 은갑천병과 별 차이가 없는 대승 중기임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분명 압박감부터 이 사람이 훨씬 강했다.

    심협은 방심하지 않고 손목을 돌려 육진편을 꺼낸 뒤, 자세를 취하고 은갑천병이 돌진해 오기를 기다렸다.

    두 사람의 몸이 빠르게 가까워지자 은갑천병은 갑자기 속도를 높여 장검을 곧장 찔렀다. 검신에는 물결 한 줄기가 흐르는 듯했고, 금빛이 검코(*검의 자루와 날 사이 튀어나온 부분)에서 솟아나와 검신을 스쳐지나 검 끝을 향해 솟았다.

    심협이 눈빛을 굳히고 집중하자 갑자기 눈앞에 이글거리는 태양이 솟아오르는 것이 보였고, 그 타오르는 금빛에 눈을 거의 델 뻔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시선을 돌리며 한 걸음 물러났다. 원래 이번 일격을 피하고 곧장 반격할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육진편을 가로로 휘둘러 방어하는 수밖에 없었다.

    금빛 햇살이 순식간에 가까워지자 빛이 사방으로 흘러넘치던 모습이 갑자기 움츠러들면서 뿔뿔이 흩어졌던 모든 빛이 한순간 검 끝에 맺혔다. 그리고 모든 예기(銳氣)가 한 점에 모여 심협의 명치로 곧장 날아들었다.

    심협은 동공이 바짝 졸아들어 체내의 법력을 육진편으로 미친 듯이 주입했다.

    철편 위에 검은빛이 번쩍 일더니, 그 위로도 검은 태양 한 덩이가 맺혔다. 그 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선에는 놀랍게도 더없이 순수한 현음(*玄陰: 겨울의 극심한 음기)의 기운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검 끝에 맺힌 금빛은 놀랍게도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단번에 태양을 꿰뚫고 육진편에 닿았다.

    “큭!”

    엄청난 관통력을 지닌 힘이 육진편을 통과해 그대로 팔뚝에 꽂혔다. 이에 심협은 두 팔이 무거워졌고,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헛!”

    그가 가볍게 외치자 황정경이 운공되어 용과 코끼리의 힘이 떨치고 나와 은갑천장을 향해 돌진했고, 육진편에서 빛나던 검은 빛은 갑자기 밀물처럼 튀어나와 금빛을 몰아붙였다. 이에 금빛이 갑자기 폭발하며 작열했다.

    맹렬한 두 태양이 맞부딪치자 두 빛 모두 침식되며 빠르게 녹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빛이 흩어져 사라질 즈음, 심협은 은갑천장이 한 손을 결인하는 것을 발견했다. 이어서 은갑천장 뒤에서 금빛 장막이 번쩍였고, 그 속에는 고리 모양의 부적 문양이 회전하는 듯했다.

    그가 미처 확실히 대응하기도 전에 그 부적 문양에서 쟁쟁한 소리가 울리더니, 금빛 검광 수백 줄기가 뿜어져 나와 검우(劍雨)처럼 쏟아졌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 피할 겨를이 없었기에 심협은 전력으로 황정경 공법을 운공했다. 그는 온몸에서 빛을 발했고, 두 팔은 용과 코끼리의 힘에의해 굵직한 용의 발로 변했다.

    두 발 중 하나는 몸 앞의 검광을 막았고, 다른 하나는 육진편을 거세게 뽑아 크게 휘둘렀다.

    금빛 검광은 용 비늘을 곧장 뚫지는 못했지만, 날카로운 힘이 스며들어 심협은 극심한 통증을 느끼고는 이를 악물었다.

    그가 휘두른 철편은 흐릿한 그림자를 띤 채 파공음을 내며 수백 줄기 금빛 검광을 그대로 흩어버리고 은갑천장의 옆구리를 거칠게 내리쳤다.

    퍽!

    둔탁한 소리에 이어 은갑천장은 순간 허리가 꺾이더니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그는 땅에 몇 번이나 튕기면서도 흩어져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그 기세를 빌려 몸을 뒤집고 일어나더니 두 발로 땅을 박차고 팽이처럼 몸을 거꾸로 회전시키며 꼿꼿이 돌진해왔다.

    그때, 은갑천장의 손에 들린 장검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놀랍게도 점점이 금빛으로 변해 흩어졌다. 하지만 흩어진 금빛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몸으로 모여들었다.

    다음 순간, 은갑천병의 온몸에서 금빛 광채가 피어오르더니 그 기운이 엄청난 속도로 폭증해 순식간에 대승 후기 단계에 이르러 금빛 찬란한 광검(光劍)으로 바뀌었다.

    심협은 이 인검합일(人劍合一)의 광경을 보면서 이것이 은갑천병의 가장 강력한 수단일 것임을 직감하고는 긴장했다. 그리고 그 역시 법력을 총동원해 육진편에 주입했다. 그러자 철편 위에 검은 빛이 감돌면서 기세가 크게 불어났다.

    심협은 시선을 고정한 채 두 다리를 건장한 코끼리 다리로 변화시켜 한 발을 내딛었고, 용의 발로는 철편을 쥔 채 돌진해 오는 금빛 광검을 세게 내리쳤다.

    쾅!

    육진편이 검신을 둔중하게 내리치자, 순간 천둥소리 같은 굉음이 울렸다.

    금빛 광검에서는 딱 하는 소리가 나더니, 그 속에서 여러 갈래의 빛 자국이 나타났고, 뒤이어 굉음과 함께 부서졌다.

    부서진 금빛 속에서는 수없이 많은 작고 가느다란 금빛 광검이 종횡무진 움직이며 사방팔방으로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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