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279화 (279/1,214)
  • 279화. 천음곡(天陰谷)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술단지를 절반 가까이 마시고 나서야 멈췄다.

    “심형, 오늘 이리 좋은 술까지 가지고 온 걸 보면 그저 옛날이야기나 하자고 찾아온 것은 아니겠지요?”

    육화명이 술잔을 내려놓고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육형에게는 아무것도 숨길 수가 없구려. 하하하! 심모가 이번에 온 것은 확실히 육형에게 가르침을 청하고픈 일이 있어서요.”

    심협도 체면 차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괜찮으니 무슨 일인지 말씀해 보시…… 어라? 심형, 벌써 응혼기가 거의 다 되었구려!”

    육화명은 기이한 눈빛으로 심협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는데, 다소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동안 기연이 좀 있었소.”

    “아무리 기연과 행운이 있었다 해도 수련 경지가 그리 빠르게 발전하다니, 놀라운 자질이오. 이 육모는 부끄럽기 그지없구려.”

    육화명의 탄식에 심협은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자질을 논하자면, 그는 용혈을 복용한 지금도 평범한 수준이었다. 수련 경지가 이토록 빨리 발전한 것은 첫째로 이원진수의 효능 덕분이자 꿈속에서의 경험 덕분이었다.

    “자, 그 얘기는 여기까지로 마무리합시다. 심형은 오늘 무슨 일로 오셨소?”

    육화명이 말을 돌리자 심협도 고개를 끄덕이고 본론을 꺼냈다.

    “내가 이번에 온 것은 어디로 가야 강력한 귀물을 잡을 수 있을지 육형에게 물어보고 싶어서요.”

    “강력한 귀물? 얼마나 강력해야 하오?”

    육화명은 어리둥절해졌다.

    심협은 육화명이 의리를 중하게 여기고 재물을 탐하지 않아, 마수수 같은 사람들과는 달리 깊이 사귈 만하다 여겼기에 숨김없이 말하기로 했다.

    “최소한 벽곡기 정점의 귀물을 찾고 있소. 또한, 특별한 신통력 하나를 수련하려 하는데, 도와줄 귀물도 하나 잡아야 하오.”

    “벽곡기 정점의 귀물이라……. 찾기 쉽지는 않겠지만, 내가 알기로 있을 만한 곳이 딱 세 군데 있소.”

    육화명은 잠시 생각해보고는 별다른 조건도 달지 않고 곧바로 말했다.

    심협은 원하던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기쁨에 즉시 물었다.

    “그 세 곳이 어디요?”

    “첫째는 저승이오. 그곳에는 귀물이 무수히 많으니 벽곡기 절정의 귀물은 말할 것도 없고, 응혼기, 출규기 귀물도 넘쳐나지. 보름 뒤, 우리 대당관부에서 다시 한번 사람을 모아 저승에 임무를 수행하러 가야 하오.”

    육화명의 답에 심협은 지난번 저승의 착귀(捉鬼) 임무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대당관부 사람이 아닌 자신이 이번 임무에 참가한다면 육화명에게 폐를 끼치는 것은 아닐까 우려가 됐다.

    “두 번째 장소는 장안 서북쪽 청봉군(靑峰郡)의 파읍(巴邑)산맥인데, 지독한 귀물 하나가 출몰하여 이미 적잖은 수사와 범인(凡人)들의 목숨을 해쳤다 하오. 그중에는 응혼기 산수도 있다더군. 관부에서 응혼기 수사 두 사람을 파견했으나, 한 달이 넘게 찾고도 결국 성과 없이 돌아왔소. 산맥이 너무 넓기도 하고, 귀물의 영지(靈智)가 높은 모양이오.”

    이번 설명에는 심협도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응혼기 수사를 해쳤다면 그 귀물의 실력은 그 이상일 터. 더욱이 파읍산맥은 청봉군의 이름난 거대한 산맥으로, 매우 넓었다. 대당관부의 두 응혼기 수사들조차 찾지 못했다면 제아무리 영고의 도움을 받는다 해도 찾기는 힘들 터였다.

    “세 번째 장소는 장안성 수백 리 밖의 천음곡(天陰谷)이오. 전대 왕조 어느 왕야(*王爺: 왕의 작위를 받은 사람에 대한 존칭)의 묘였는데, 당시 왕조가 바뀌면서 전대 황실에서 그 고분 안으로 피신해 그곳을 거점삼아 우리 대당의 군대에 저항했소. 허나 결국 우리 천조(*天朝: 조정에 대한 존칭)의 군대를 당해내지 못하고 패망하여 그 안에서 전멸했다 알려져 있지.”

    육화명은 자부심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고분은 본래도 음살이 강한데, 그리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죽으면서 무덤 안의 음기가 더욱 짙어져 지금은 그 고분에 강력한 귀물의 출몰이 잦소. 그 안에서 응혼기의 흉악한 귀신을 본 이도 있지. 대당관부에서 몇 번이나 사람을 보내 깨끗이 정리하려 했지만, 모두 실패하여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소. 다행히 그 고분 속 귀물은 이제껏 밖으로 나온 적이 없어 큰 화를 빚어내진 않았지요.”

    심협은 잠시 고민한 끝에 결정을 내렸다. 천음곡 고분이 가장 가까운 데다 귀물이 많다고 하니 그 주변에 숨어 있다가 적당한 놈 한 마리만 잡으면 될 터였다.

    “보아하니 심형음 이미 결정을 내리신 모양이구려.”

    육화명이 심협을 흘끗 보고 웃으며 말했다.

    “천음곡에 좀 가볼 생각이오.”

    심협의 대답에 육화명은 그럴 거라고 예상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좋지요. 우선 거기 가서 살펴보고, 적당한 귀물을 잡지 못하면 나와 저승에 한번 다녀옵시다. 그때는 내 조그마한 힘이나마 보태겠소.”

    “고맙소, 육형.”

    심협은 진심을 담아 포권을 하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곧 천음곡의 자세한 위치를 들은 후 작별인사를 했다.

    귀신을 잡고자 하는 마음이 절실했던 그는 적당한 곳을 찾아 건곤대를 제련한 후, 곧장 장안성을 나섰다.

    성 밖의 어느 외진 곳에 다다른 그는 약간 흥분한 채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자 붉은 검광이 소매에서 뿜어져 나와 그의 몸을 휘감고 하늘로 날아오르며 눈 깜짝할 새에 수십 장 높이까지 치솟았다. 이어서 검광은 붉고 긴 한 줄기 무지개가 되어 높은 하늘 속으로 사라졌다.

    주위 풍경이 빠르게 뒤로 스쳐갔고, 발아래의 장안성은 점점 작아져 검은 점이 되었다. 그리고 이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 속도에 심협은 전율했다. 일전에 뜰에서 순양검배로 어검비행을 잠깐 시험해 봤지만, 전력으로 발휘한 어검지술(御劍之術)의 속도는 상상 이상이었다.

    ‘책에서 어검비행은 속도가 가장 빠른 비행술 중 하나라더니, 사실이었구나!’

    심협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전에 겪어본 적 없는 속도를 만끽했다.

    천음곡은 장안성에서 600여 리나 떨어져 있어 그의 본래 속도대로라면 하루는 걸릴 거리였다. 그러나 순양검배의 어검비행 덕분에 반 시진도 채 걸리지 않아 눈앞에 검은 산줄기가 나타났다. 이곳은 음령산(陰嶺山)으로, 그가 찾으려는 천음곡이 있는 산이기도 했다.

    음령산은 길이가 무려 백 리에 달하고, 폭도 30여 리나 되었으며, 장안성 부근에서 위험하기로 이름난 산맥이었다. 산에는 범과 이리 같은 산짐승과 장기(*瘴氣: 축축하고 더운 땅에서 일어나는 독기)는 물론이고 독충이 많아서 근처 평범한 백성들은 10리 안에는 살 수가 없었다.

    허나 수사들은 달랐다. 이곳은 밑바닥의 음기가 매우 짙어 들짐승과 뱀, 벌레 심지어 풀과 나무들까지 오랜 시간 음기에 물들면서 변이가 일어났는데, 보통 백성에게는 큰 해가 될 이런 것들이 수선하는 사람에게는 보물에 가까웠다. 그래서 이곳을 찾는 수사가 적지 않았다.

    심협은 머릿속으로 이곳의 정보들을 떠올리며 산맥 안으로 날아들었다.

    칼끝 같은 산봉우리 근처에 내려앉자마자 주위에서 짙은 음기가 느껴졌다. 더욱이 이곳의 공기에 담긴 부식된 기운이 체내로 끊임없이 스며들어 그를 불편하고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가 이곳에 오기 전에 육화명에게서 들은 바로는, 이곳은 음기가 너무 강해서 음장(*陰瘴: 음험하고 독한 기운)의 힘이 형성되어 있어, 그 영향을 받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공법을 운공해야만 한다고 했다.

    현재 심협은 수련 경지도 벽곡기 정점에 이르렀고, 척맥단을 복용하여 법맥을 개척한 덕분에 법력이 두터운 편이라 전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묵묵히 무명공법을 운공하여 음장의 힘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막아내면서 신행갑마부 두 장을 꺼내 다리에 붙이고 산맥 깊은 곳으로 빠르게 내달렸다.

    육화명의 조언대로 그는 산맥을 반 시진 정도 누비다가 이내 지세(地勢)가 평평하고 유달리 탁 트인 산골짜기 앞에 이르렀다. 바로 천음곡, 전대 왕조의 고분이 있는 곳이었다.

    천음곡은 산맥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고, 음장의 힘도 산맥 바깥쪽보다 훨씬 짙어 거의 골수에 스며들 정도였다. 경지가 조금 낮은 사람들은 막아내지도 못했을 터였다.

    그러나 심협은 털끝만큼도 두려워하지 않고 푸른색 짧은 도끼인 뇌부(雷斧)를 손에 쥔 채 골짜기 안으로 들어갔다.

    골짜기는 짧은 편이라 잠시 후 곧 끄트머리에 이르렀다. 깎아지른 듯한 벽이 눈앞에 나타났는데, 한쪽에는 커다란 동굴이 있었다. 높이는 무려 10여 장에 너비는 7장이 조금 넘어 보였다.

    동굴 입구에는 인위적으로 보수한 흔적이 있었고, 그 안은 온통 어두컴컴해서 밑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탓에 어디로 통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육화명에게서 고분의 상태를 미리 전해 들은 터라 이 시커먼 산굴이 바로 전대 왕조의 고분 입구임을 알고 있었다.

    우우! 우우우!

    간간이 음산한 바람이 칠흑 같은 산굴 속에서 불어와 쉬지 않고 기이한 소리를 냈다. 소리는 높았다가 낮았다가, 마치 사나운 귀신이 흐느껴 우는 것 같기도 해 오싹했다.

    심협은 이미 이런 상황을 예상했음에도 막상 직접 보니 조금 충격적이었다.

    “이곳은…… 그야말로 저승의 귀역(*鬼域: 귀신들의 세계)과 다름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는 재빨리 정신을 가다듬고 구귀부 몇 장을 꺼내 몸에 붙인 뒤, 피수결을 운공해 몸 주위에 물결 방어막을 한 겹 만들어냈다. 이어서 소매를 떨치자, 녹색 빛이 스치며 비취색 여의가 튀어나와 머리 위를 끊임없이 맴돌았다.

    이렇게 겹겹이 방호조치를 한 뒤에야 심협은 마음 놓고 동굴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동굴 안은 예상했던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바닥과 양쪽 벽 모두 평평했다. 벽은 거대한 돌덩어리를 쌓아올려 만들었는데, 간간이 작고 검은 구멍이 있었다. 바닥에는 부식된 화살들이 떨어져 있었다.

    이 벽 안에는 분명 기계장치가 설치되어 있는 듯했지만, 일찍이 누군가가 작동시켜 해제된 상태였다.

    심협은 그동안 적지 않은 수사들이 이곳에 왔었음을 깨닫고는 약간 마음이 놓였지만, 서두르지도, 속도를 높이지도 않았다.

    얼마쯤 걸어가자 마침내 통로가 끝나고 석실이 하나 나타났다. 석실 문은 이미 파괴되어 바닥에 흩어져 있었고, 그 안은 매우 넓었다. 폭이 백 장쯤은 되었고, 무척 웅장했지만, 휑하니 빈 상태로 커다란 돌기둥 몇 개와 부서진 자갈들 그리고 바닥에 나뒹구는 병마(兵馬) 석상 몇 개가 남은 전부였다. 나머지는 누군가가 모두 가져간 듯했다.

    석실 양옆의 벽에는 무덤 주인의 생애를 담은 듯한 정교하고 아름다운 벽화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분채(*粉彩: 가루로 된 안료)로 칠해져 아직까지도 빛깔이 선명했다. 그러나 이 무덤 주인이 전쟁에 참전했던 이야기를 담은 듯한 이 벽화들도 적잖이 훼손되어 있었다.

    심협은 이 벽화들을 잠시 훑어보고는 곧 흥미를 잃고 석실 곳곳을 살폈다.

    석실 깊숙한 곳에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통하는 세 개의 통로가 있었고, 그 너머는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어서 어디로 통하는지 알 수 없었다.

    육화명은 이 고분에 와본 적이 없어서 이곳의 상황을 자세히는 알지 못했기에 별다른 조언을 해주지 않았다. 이제 심협은 모든 것을 자신의 임기응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심협은 잠깐 고민한 끝에 가장 왼쪽 통로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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