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275화 (275/1,214)
  • 275화. 이원진수(二元眞水)

    단약이 완성되었으니 심협은 가능한 한 빨리 돌아가 복용하고 싶은 마음에 작별인사를 고하려고 했다.

    한데 단양자가 갑자기 깊은 눈빛으로 심협의 두 눈을 바라보며 불쑥 물었다.

    “심 도우, 혹시 자네에게 천년영유가 더 있는가?”

    “역시 대사께서는 고명하시군요. 예, 좀 더 있긴 합니다.”

    심협은 굳이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자신이 척맥단을 더 복용할 경우의 효과에 대해 물은 것만으로도 이미 답을 알려준 것과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단양자에게는 앞으로도 도움을 받을 일이 많을 듯하니 관계를 잘 다져두고 싶기도 했다.

    “역시 그랬군! 진(辰) 도우, 나오시게.”

    단양자는 다행이라는 듯한 얼굴로 몸을 돌려 응접실 깊은 곳을 향해 외쳤다. 그러자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푸른 옷을 입은 중년 사내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아직 마흔은 되지 않은 듯한 사내는 얼굴이 말처럼 좁고 긴 데다 얽은 자국이 가득한 추남이었다.

    “단양자 대사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심협은 표정을 살짝 굳히며 다소 싸늘한 목소리로 따지듯 물었다.

    곁에 선 마수수도 이 사내의 존재를 몰랐던 듯 놀란 표정이었다.

    “심 도우, 노여워 말게. 이분은 진강(辰綱)이라 하네. 이 늙은이의 오랜 벗이지.”

    단양자가 웃으며 말했으나, 심협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심 도우시군요. 이 진모가 급작스레 나타났으니 당황하실 만도 하지요. 허나 제게 정말 급하게 천년영유가 필요한 일이 있어, 무례인 줄 알면서도 이렇게 찾아왔으니, 바다같은 마음으로 용서해주시기를 청합니다. 약소하지만, 이것은 결례에 대한 선물이니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진강은 실로 간곡한 태도로 공수하고는 나무상자 하나를 심협에게 건넸다.

    상자에는 선옥이 그득했는데, 눈대중으로 보아도 50여 개는 될 듯했다.

    “귀하께서는 이리 예의 차리실 것 없습니다. 용건이 있으시면 말씀하시지요.”

    심협은 약간의 노여움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담담히 말했다. 심지어 진강이 내민 나무상자를 받지도 않았다.

    그는 마수수와 단양자를 믿었기에 두 사람에게 천년영유의 존재를 알린 것이다. 한데 단양자가 자신의 허락도 없이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알렸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대면하게 만들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에 배신감마저 들었다.

    진강은 잠깐 어리둥절해 하더니 웃었다.

    “하하! 심 도우는 정말 시원시원한 사람이군요. 그럼 저도 숨기지 않겠습니다. 도우의 천년영유를 제게 좀 팔 수 있을까요? 가격은 충분히 쳐 드리리다. 시가보다 3할을 더 드리겠소.”

    그러나 심협은 속으로 분노를 억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단양자 대사님, 그리고 진 도우. 심모가 두 분의 체면을 깎으려는 것이 아니라, 제게 남은 양도 얼마 되지 않는데다가, 모두 제 목숨을 구하기 위한 것이라 팔 수도,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그는 천년영유가 더 있다고 인정한 것을 이미 후회하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을 미리 알았더라면 아까 진실을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도 이 같은 행동이 도우를 난처하게 한다는 것을 압니다. 허나 저는 정말 그 천년영유가 필요합니다. 선옥 말고도 여러 진귀한 물건을 준비했으니, 심 도우께서는 좀 살펴보시지요. 그중 도우에게 필요한 물건이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심협이 거절할 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것인지, 진강은 품에서 백지 한 장을 꺼내 건넸다. 그 백지에는 물품 목록이 죽 나열되어 있었고, 뒤에는 그 용도도 표시되어 있었다.

    “진 도우,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천년영유는 팔 계획이 없습니다. 그러니 귀하께서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심협은 백지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차갑게 답했다.

    진강도 이제 조금씩 부아가 치미는지 눈을 가늘게 떴는데, 한 줄기 서늘하고 음침한 빛이 흘렀다.

    그때, 단양자가 끼어들었다.

    “심 도우, 우선 어떤 물건을 준비했는지 확인한 후에 거절해도 늦지 않을 걸세. 진 도우는 박물행(博物行)의 공봉으로 이 늙은이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집안이 넉넉하다네.”

    박물행은 취보당, 헌원각과 더불어 대당 3대 상회 중 하나였다. 헌원각은 법기 제련 사업에, 취보당은 연단과 부적사업에 치중했고, 박물행은 주로 각종 영재를 사고팔았다.

    심협은 당연히 박물행의 명성을 들어본 적이 있지만, 그렇다고 생각이 바뀌지는 않았기에 그저 단양자를 흘끗 보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단양자의 얼굴에는 얼핏 어두운 그림자가 스치는가 싶더니 마수수를 향해 흘끗 눈짓을 했다. 그러자 마수수가 다소 씁쓸한 표정으로 심협에게 말했다.

    “심 도우, 여기 진 도우께서는 수련 경지가 높고 지위 또한 높으신 분입니다. 도우께서는 영화가 급히 필요하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진 도우의 수중에 있다고 하더군요.”

    심협은 세 사람을 차례로 훑어보고는 분을 삭인 뒤, 백지를 받아들었다.

    “천잠사(天蠶絲), 금봉우(金鳳羽), 오색신석(五色神石)…….”

    세 사람이 강조한 대로 종이에는 갖가지 진귀한 물건들이 적혀 있었다. 특히 오행신석은 법보를 제련하는 재료로, 그 가치가 경매에 나왔던 현귀갑보다 뒤떨어지지 않았다.

    백지에 적힌 목록에는 놀랍게도 영화가 두 개나 적혀 있었다. 천심영염(天心靈焰)과 백련진화(白蓮眞火)로, 모두 인품영화였다. 둘 다 금양영화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분명 얻기 힘든 영화들이었다.

    물론 이미 홍련업화를 얻어 순양검배를 제련한 심협에게는 더 이상 영화가 필요치 않았다. 그러나 지금 무작정 거래를 거절하면 진강과 단양자가 쉽게 보내주지 않으려 할 수도 있었기에, 그는 차분히 백지를 다시 살폈다.

    그러던 중 그의 시선이 어느 네 글자에 꽂혔다.

    “귀하께 이원진수(二元眞水)가 있습니까?”

    심협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진강은 심협이 영화나 오색신석에 대해 물을 거라 여겼기에 잠시 어안이 벙벙했으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심 도우께서는 진모의 이원진수가 마음에 드셨소? 훌륭한 안목이오. 이 이원진수는 박물행에서 얼마 전에 사들인 것이오. 누군가 동해에서 빈사 상태인 백색 교룡을 우연히 발견하고 죽인 뒤에 그 체내에서 추출해왔지요. 심 도우가 수련하는 것이 물 속성 공법이라면, 이 이원진수가 귀하의 수련 경지를 크게 진전시켜줄 것이오.”

    진강은 품에서 푸른 옥병을 꺼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가볍게 내려놓은 듯했으나 쿵 하고 제법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병에 담긴 진수를 좀 봐도 괜찮겠습니까?”

    심협이 옥병을 슬쩍 보고는 물었다.

    “하하! 당연하지요.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진강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심협은 손을 뻗어 옥병을 집어 들었다.

    옥병은 고작 엄지손가락만 했음에도 그 무게는 족히 백 근은 넘을 듯했다.

    마개를 뽑아보니 은빛 액체가 반 이상 담겨 있었는데, 일전에 얻었던 삼원진수보다 더 밝게 빛났다. 동시에 놀라운 물 속성 영기가 솟아나오면서 병 주둥이에 물안개를 이루었다. 순식간에 응접실이 습해질 정도였다. 이는 분명 이원진수일 뿐만 아니라 수량도 적지 않았다.

    “좋습니다. 이원진수와 바꾸도록 하지요. 다만, 이원진수의 양이 너무 적으니 천년영유는 두 병을 드리겠소.”

    심협은 마개를 잘 닫은 뒤, 아주 차분하게 소매를 휘둘렀다. 그러자 영유가 가득 담긴 옥병 두 개가 탁자 위에 나타났다.

    “두 병은 너무 적습니다. 심 도우, 차라리 제 물건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시고 필요한 것을 말씀하십시오. 나는 영유 두 병이 더 필요하다오.”

    진강이 살짝 인상을 쓰며 말했으나, 심협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제게 남은 천년영유가 다섯 병뿐이오. 두 병이 내가 사용할 수 있는 한계이니, 원치 않으신다면 거래를 접으시지요.”

    심협은 그렇게 말하고는 방금 꺼낸 영유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진강이 재빨리 손을 뻗어 영유 두 병을 쥐고는 다급히 말했다.

    “아, 아니오! 그럼 두 병으로 합시다. 심 도우의 말에 따르지요.”

    심협은 내심 웃음이 나왔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은 채 이원진수를 챙긴 후 작별을 고했다.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마수수가 황급히 따라 나섰다.

    진강도 심협과 마수수가 나가는 것을 보고 단양자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단양 도우, 그럼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도움에 참으로 감사드리오.”

    “흥! 약조한 일이나 잊지 말게.”

    “단양 도우께서는 안심하시오. 내 언제 약조를 지키지 않은 적이 있습니까?”

    진강은 빙긋 웃으며 그렇게 말하고는 정문이 아닌 저택 쪽문으로 향했다.

    그 무렵, 마수수는 심협을 저택 밖까지 배웅하고 있었다.

    “마 소저, 심모는 한동안 장안성을 떠나 있으려 합니다. 소저께 필요한 그 부적은 잊지 않고 있으니, 그리는 데 성공하면 사람을 시켜 취보당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심협은 이렇게 말했지만, 이미 지금까지와 같은 친밀감은 사라진 뒤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소녀는 심 공자님의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마수수는 심협의 말투가 싸늘한 것을 알아차리고는 눈빛이 묘하게 흔들렸지만, 미소를 거두지 않고 말했다.

    심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갔다.

    ‘영화를 두 가지나 준비했다는 건 내가 영화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마 소저가 진강이라는 자에게 알린 것이겠지.’

    마수수는 취보당 사람이니 이익을 꾀하기 위해 그런 선택을 했다고 해서 비난할 것은 없지만, 어쨌든 그는 이제 더 이상 그녀를 벗으로 대할 수 없게 됐다.

    “심 공자님, 돌아가시려고요? 소인이 모시겠습니다요.”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손동은 심협이 나오자 즉시 마차를 몰며 다가왔다.

    “나는 다른 볼일이 있으니 손형을 귀찮게 하지 않겠소.”

    심협은 고개를 저으며 성큼성큼 멀어져갔다. 어찌나 빨리 가버렸던지 손동은 다시 말을 붙여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넋을 놓고 말았다.

    멀어지는 심협의 뒷모습을 어두운 얼굴로 바라보던 마수수는 그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도 한동안 그렇게 서 있다가 저택으로 발길을 돌렸다.

    응접실 안에서는 단양자 홀로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단양자, 일이 전에 말했던 것과 다르지 않소. 우리가 앞서 합의한 대로라면 먼저 그대와 내가 심협에게 거래를 제안하고 그가 동의한 뒤에 진강과 그를 만나게 하는 거였소. 왜 곧바로 진강을 데려온 것이오!”

    마수수가 어두운 표정으로 따져 물었다.

    “무슨 관계가 있느냐? 네 짐작대로라면 그 심협이란 자가 십중팔구 거래에 응할 텐데, 바로 그들을 만나게 하면 수고를 훨씬 덜 수 있지 않느냐?”

    단양자는 담담했다.

    “심 공자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그런 식으로 사람을 대면시키면 그가 우리 취보당을 어찌 보겠소?”

    “흥! 그래봐야 일개 벽곡기 산수일 뿐이다! 저승의 일은 이미 해명을 했고, 이 늙은이의 시간은 소중해서 그놈의 비위를 맞출 여유가 없단 말이다!”

    마수수의 목소리가 냉랭해지자 단양자 역시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흥! 당신 때문에 억몽부 일이 영향을 받는다면 내 가만 있지 않을 것이오!”

    마수수는 평소의 조용하고 차분했던 모습만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매섭고 싸늘한 눈으로 단양자를 노려보고는 몸을 돌려 나갔다.

    * * *

    심협은 연수방을 떠나 어느 번화가에서 사람들 틈에 뒤섞였다. 재빠르게 인파를 통과한 그는 금세 몇 구역을 가로지른 뒤, 어느 강가에 이르렀다. 이어서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더니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물속으로 들어가 피수결과 어수지술을 펼치며 물 밑바닥을 향해 나아갔다.

    심협은 물속에서 한 시진 넘게 잠행하여 성 북쪽에서 동쪽으로 간 후에야 뭍으로 올라와 기슭에 우거진 무성한 관목 덤불에 몸을 숨겼다. 이미 물속에서 옷까지 갈아입고 몸을 철저하게 씻은 터라 누구도 쉽게 추적할 수 없을 터였다.

    그의 낯빛은 조금 굳어져 있었다. 오늘 일은 그에게 경종을 울렸다. 이미 취보당에 너무 많이 의존하고 있었고, 상대에게 너무 많은 것을 알려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만약 취보당에서 내게 나쁜 뜻을 품는다면 언제든 오늘처럼 내게서 무엇이든 가져갈 수 있고, 심지어 나를 죽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 그의 실력으로는 그런 거대한 조직에 저항조차 할 수가 없다. 다행히도 그는 이를 제때에 깨닫고 즉시 빠져나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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