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269화 (269/1,214)
  • 269화. 연꽃잎의 이상한 불꽃

    타오르는 목함이 바닥에 닿자 방바닥에도 검은 구멍이 뻥 뚫렸지만, 잠시 후에 불꽃이 깜빡이다가 이내 꺼졌다.

    놀라운 것은 불이 꺼진 후에 드러난 잿빛 목함에 아무런 손상이 없었다는 점이다.

    심협은 크게 놀랐던 터라 다소 주저하며 목함에 섣불리 다가가지 못하고 결인을 맺었다. 그러자 창밖에서 물줄기가 날아 들어와 두 개의 손으로 변해 잿빛 목함을 가볍게 건드렸다.

    목함은 전혀 반응이 없었고, 그 무시무시했던 검은 불꽃도 나타나지 않았다.

    심협이 손의 법결을 바꾸자, 물로 된 손바닥들이 목함을 움켜쥐고 힘껏 열려고 했다. 그러자 그 순간, 상자 위에 검은 빛이 스치더니 검은 불길이 다시 확 치솟았다. 두 손바닥은 단숨에 사라졌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잿빛 목함이 다시 떨어지면서 방바닥을 태워 구멍을 냈으나, 그 검은 불길은 아까처럼 두세 번 호흡할 시간 정도만 불타오르다가 사라져버렸다.

    ‘물까지 순식간에 태워버리다니, 엄청난 불이로군!’

    이후 심협은 온갖 방법으로 이 검은 불길에 대한 정보를 찾고, 해결방법을 생각해보았으나,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이 검은 불길에서 귀계의 불꽃과 같은 스산한 귀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황천죽은 귀기를 흡수 할 수 있으니까 이 검은 불을 억누를 수 있을지도 몰라.”

    심협은 그렇게 생각하며 황천죽을 꺼내 잿빛 목함 위에 올려 두었다. 그런 뒤에 다시 물로 된 손바닥 두 개를 응결하여 목함을 열었다.

    검은 빛이 스쳐 지나면서 검은 불꽃이 또다시 나타났고, 눈 깜짝할 새에 물 손바닥을 불태우며 황천죽까지도 감쌌다. 하지만 황천죽은 검은 불꽃이 날름거리는 와중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빠르게 검은색으로 변하더니 불꽃을 집어삼키려 들기까지 했다.

    주위의 검은 불이 일렁이기 시작하면서 황천죽을 향해 모여들더니, 천천히 그 안으로 녹아들었다.

    그 광경을 본 심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황천죽마저 이 검은 불을 억누를 수 없었다면 그는 이 검은 불 금제를 풀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만약 힘으로 목함을 깼다가는 그 안의 물건도 함께 망가질 수 있으니 정말로 별다른 수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한데 이 검은 불길은 너무도 강력해 황천죽이 모두 흡수하는 데에는 족히 1각 이상이 걸렸다.

    심협은 기대감을 안고 물 손바닥 두 개를 응결하여 목함을 열어보려 했다. 그런데 잿빛 목함 안에서 쩍 하는 소리가 나더니 놀랍게도 뚜껑이 저절로 열렸다.

    심협은 잠시 멍해 있다가 목함 안을 살폈는데, 백서(*帛書: 비단에 쓴 글) 두루마리가 하나 들어 있었다. 가볍고 부드러운 비단 위에는 깨알 같은 글자가 가득 했다. 목함에는 그 외에 다른 물건은 없었다.

    “백서? 무슨 공법이나 비술 같은 게 적혀 있는 건가?”

    심협은 그렇게 추측하며 백서를 펼쳤다.

    첫머리에 커다란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연신비전(煉身秘典)? 역시 비전이었군!”

    이토록 철저히 숨겨둔 것이라면 내용도 분명 예사롭지 않을 터였다.

    가볍게 훑어보던 심협의 낯빛은 기이하게도 몇 번이나 크게 변했다. 처음에는 놀랍고도 기뻐하는 기색이었으나, 이내 극도의 실망과 낙담의 기색 내비쳤고, 마지막에는 약간 분노하기까지 했다.

    잠시 후에야 비로소 정신을 다잡은 그는 손에 든 백서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연신비전에 기록된 것들은 그야말로 경악할 만했다. 그 안에는 연신단에서 비밀리에 전해지는 공법과 비술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는데, 그중에는 사우흔이 찾던 것도 있었다. 단전을 새로 만들고, 경맥을 다시 만들며, 신혼의 상처를 회복하는 등의 비법이었다.

    이 비법들은 아주 정교하기 이를 데 없어서, 무명공법과 황정경, 순양검전 같은 절정의 공법을 알고 있는 데다가 꿈속에서 대승기까지 수련하여 수선의 도법(道法)에 대해 깊은 깨달음을 얻은 심협조차도 시야가 활짝 트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연신비전에는 육신과 경맥, 신혼에 대해 심오한 설명이 담겨 있었고, 기발한 생각들이 많았다. 특히 육체를 단련하고 신혼을 회복하는 방면에서는 실로 정묘했다.

    심협은 이 연신비전이 연신단에서 가장 높은 진단비전(鎭壇秘典)이며, 호용이 이번에 수행한 경하용왕의 귀혼을 풀어주는 임무는 대당관부와 저승의 세력 범위 안에 발을 들인 위험천만한 일이었음을 알지 못했다. 연신단 총단에서는 호용을 격려하기 위하여 연신비전의 사본을 그에게 하사했지만, 그 위에 아주 강력한 금제를 걸어 일이 성사된 후에야 스스로 풀리게 조치해둔 것이다. 게다가 다른 이의 손에 들어갈 경우를 대비해 금제까지 걸어두었다.

    그러나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호용이 임무에 실패하여 목함이 심협의 손에 떨어졌고, 그가 황천죽 같은 천하의 보물 덕에 이렇게 열릴 것이라고…….

    이 모든 것은 우연의 일치라기보다는 하늘의 안배와도 같은 느낌이었다.

    이 공법의 비술들은 기묘했지만, 심협은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는데, 법맥을 여는 비술에는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전에 사우흔에게서 연신단에는 법맥을 개척할 방법이 있다는 말을 들은 바가 있다. 그때만 해도 그것은 연신단이 신도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만들어낸 허풍이라 여겼다. 어쨌거나 법맥은 수사의 큰 밑거름이고, 수사의 타고난 자질인 만큼 사람의 능력으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 연신비전에는 이 비술로 체내의 평범한 경맥을 법맥으로 바꿀 수 있다고 명명백백하게 설명되어 있었다.

    이 비술의 이름은 현음개맥결(玄陰開脈訣)로, 이름 그대로 음살의 기운으로 몸속 경맥을 비롯한 위쪽의 혈규를 자극하고, 다시 일련의 복잡한 변화와 제련을 거쳐 경맥에 이변을 일으켜 법맥으로 변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개척된 법맥은 타고난 법맥보다는 조금 뒤떨어져 그만큼 넓지 않고, 유연성도 약간 부족하며, 천지영기를 흡수하는 속도도 더 느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력을 저장하는 능력이 있고, 법력의 온양(*溫養: 따뜻한 성질의 약물로 정기를 보양하는 치료법)에 따라 확대될 수도 있으니 그 가치는 상당했다.

    현음개맥결이 정묘하기는 하나, 연신비전에도 말했듯이 이 방법은 매우 위험했다. 높은 하늘에서 외줄타기를 하듯, 어느 한 걸음 잘못 내딛거나 빈틈이 생기면 열린 경맥이 망가지고 완전히 괴사할 정도였다.

    “이 법술은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프군. 자질과 깨달음이 제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해도 문제없이 성공할 거라는 보장이 없어. 자칫하면 경맥이 망가지고 수련자로서의 삶은 끝나버릴 수도 있으니 너무 위험해!”

    심협은 설레설레 저으며 백서를 목함 안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다른 사람에게는 매우 위험해도 나에게는 기회가 있을지도 몰라!”

    꿈속 세상에서라면 경맥이 망가지거나 죽더라도 되살아날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해볼 만했다.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꿈속에서 죽으면 현실의 자신은 수명이 줄어든 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일도 잘 따져봐야만 했다.

    그는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연신비전을 챙기고는 다음번에 꿈속 세상에 들어가게 되면 시험해보기로 했다.

    심협은 곧 물건들을 모두 임랑환에 챙겨 넣었고, 은빛 반지는 잘 숨겨두었다. 저물법기는 매우 진귀해 응혼기 수사 중에도 가지지 못한 사람이 많았다. 그만큼 가치가 상당했다.

    이어서 그는 손을 흔들어 또다시 무언가를 꺼냈다. 바로 하얀 석합이었다.

    석합은 봉인된 땅에서 기이한 진홍색 불꽃들을 적잖이 거두어들였는데, 이후 시간이 나지 않아 줄곧 안쪽이 어떤 상황인지 확인하지 못했다. 이제 살펴볼 때였다.

    심협은 그 진홍색 불꽃에 기괴하게 타 죽은 호용을 떠올리며, 한 걸음 물러서서는 다시 결인하여 물 손바닥 두 개를 응결한 뒤, 가볍게 석합을 열었다.

    얼핏 보니 안에는 달걀만 한 붉은 불덩어리가 둥둥 떠 있었고, 그 깊숙한 곳에는 붉은 연꽃잎이 떠다니면서 튀어나오려는 듯 가볍게 움직였다.

    하지만 석합 안에는 한 줄기 금제의 힘이 있어 연꽃잎과 불꽃 모두를 그 안에 묶어두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석합도 보통 물건이 아닌 것 같군. 그저 저물용 석합인 줄 알았는데, 봉인을 빨아들이는 신통력도 지녔다니…….’

    이어서 심협은 진홍색 연꽃잎 불꽃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는 조심스레 물 손바닥을 움직여 연꽃잎의 불을 건드려보았다.

    그러나 우려와 달리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심협은 잠시 고민하다가 나무와 금속, 돌덩이, 다른 불꽃 등을 연이어 연꽃잎 불꽃에 갖다 대보았지만, 여전히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는 잠깐 생각한 끝에 석합을 다시 닫아 챙기고는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그는 양손에 살아서 펄쩍 뛰는 잿빛 털의 토끼를 한 마리씩 든 채 돌아왔다. 그는 토끼를 탁자 위에 올려두고 물 밧줄로 잡아 묶은 뒤, 다시 석합을 열어 연꽃잎 불꽃을 드러냈다.

    그가 인을 맺어 손을 움직이자 토끼는 물 밧줄에 묶인 채 연꽃잎 불꽃 가까이에 끌려갔고, 이내 한쪽 뒷다리가 붉은 불꽃이 살짝 닿았다.

    치이익!

    진홍색 불꽃 한 가닥이 곧바로 연꽃잎에서 날아와 토끼의 체내로 들어갔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팔팔하게 꿈틀대던 토끼의 몸이 갑자기 굳어졌다.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고, 호흡도 전혀 없었다. 원래 날렵했던 토끼의 빨간 눈도 빛을 잃고 어둡게 변하여 단번에 넋을 빼앗긴 것만 같았다.

    ‘역시 이 불은 신혼(神魂)을 소멸시키는구나! 대체 무슨 불꽃이기에 이렇게 신통하단 말인가?’

    심협은 깜짝 놀랐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남은 토끼로 이 붉은 불꽃의 능력을 시험해보기로 했다. 두 번째 토끼 역시 첫 번째 토끼 때와 같았다.

    연이은 두 번의 시도로 심협은 이 연꽃잎 불꽃의 능력에 대해 확신을 가지게 됐다.

    “붉은색, 연꽃잎 모양, 신혼을 소멸시킬 수 있음……. 설마 이 불꽃은…… 전설 속 십대천화(十大天火) 중 하나인 홍련업화(紅蓮業火)란 말인가!”

    그는 예전에 보았던 책을 떠올렸다. 그 책에는 홍련업화의 정보와 그림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눈앞의 연꽃잎 불꽃과 아주 비슷했다. 책에서 본 내용을 떠올리면서 볼수록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틀림없어! 외형과 빛깔, 효력 모두 고서에 기록된 홍련업화와 같아! 게다가 홍련업화는 저승 깊은 곳에 피어난다고 했고, 이 불꽃도 저승에서 가져온 것이니 틀림없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그의 얼굴에는 흥분감이 가득했다.

    순양검배를 제련하려면 영화가 필요했지만, 영화는 워낙 가치가 높기에 등급에 대해서는 욕심을 부리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사방으로 수소문을 해도 얻지 못했다. 그런데 전설처럼 떠돌던 천화를 얻게 될 줄이야!

    홍련업화는 신혼을 소멸하는 힘이 막강하다. 한데 귀물들은 육체가 아닌 혼체(魂體)이니, 홍련업화는 귀물과 선천적으로 상극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인품 금양현화보다 열 배는 더 강해서 순양검배를 제련하기에 훨씬 적합했다.

    이제 순양검배를 제련할 모든 여건을 갖췄으니, 상황이 허락할 때 순양검배를 제련하기로 했다.

    그는 우선 석합을 닫아 챙긴 후, 살굿빛 깃발과 푸른 도끼를 꺼내 구구통보결을 운공하며 제련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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