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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266화 (266/1,214)
  • 266화. 연합

    심협은 자모검을 거둬들이고는 소매 안에 숨긴 손바닥을 뒤집었다. 쇄갑부(碎甲符) 한 장이 그의 손바닥에 붙어 있었다.

    ‘아홉, 여덟, 일곱…… 다섯! 지금이다!’

    거리가 5장여 정도로 좁혀진 순간, 심협은 손에 법력을 운공하여 쇄갑부를 던지려 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머리 위가 어두컴컴해지더니 촤라락 하는 소리와 함께 칠흑 같이 검은 두봉(斗篷: 소매가 없는 외투, 망토)이 내려와 그대로 그를 뒤덮었다.

    심협의 눈앞은 갑자기 어두워졌고, 사방은 곧 적막에 잠겼다. 방금 전까지 그를 끌어당기던 힘도 사라진 채였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심협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들리는 것도, 그 어떤 냄새도 없었다. 마치 허무의 세계에 빠져 오감까지 상실한 것만 같았다.

    심협은 내심 당황했지만, 금세 냉정을 되찾았다. 그는 자신이 정말 어떤 다른 법보의 공간에 빨려들어 온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일종의 환상에 빠진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가만히 앉아 죽기만 기다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때, 사방이 허무처럼 캄캄한 가운데 홀연히 두 줄기 녹색 빛이 번득였다.

    정신을 집중하고 살펴보니 다른 한편에서 또 두 줄기 녹색 빛이 나타났고, 뒤이어 한 줄, 또 한 줄 연이어 생겨났다. 족히 천 쌍이 넘는 빽빽한 불빛들이, 마치 도깨비불 무리나 귀신의 눈들처럼 그의 주위를 둘러쌌다.

    순식간에 하늘을 찌를 듯한 살기가 사방에서 휘몰아쳤고, 수많은 녹색 빛이 비추는 가운데, 수백수천에 달하는 험악한 귀신의 얼굴이 떠올랐다. 귀면(鬼面)들은 귀밑까지 찢어진 입을 크게 벌린 채 심협을 향해 달려들었다.

    심협이 재빨리 손바닥을 뒤집자, 장심에서 10여 장의 소뢰부가 나타났다. 그는 겨냥 같은 것은 할 생각도 없는 듯 부적을 사방으로 마구 내던졌다.

    쾅! 쾅! 쾅!

    우렛소리가 연이어 울렸고, 새하얀 번갯불이 사방에서 터졌다. 하얀 번개줄기가 귀면들 틈으로 파고들면서 음혼 귀물들이 울부짖었고, 그중 십여 마리의 귀물이 번갯불에 정면으로 맞아 얼굴이 찢겨나가면서 연기처럼 흩어져버렸다.

    그러나 번갯불이 사라진 뒤에도 귀물들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도리어 더욱 사납게 밀어닥쳤다. 이에 심협은 계속해서 소뢰부로 그들을 물리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임무에 앞서 심협은 소뢰부를 꽤나 넉넉히 준비했으나 밀물처럼 밀려오는 귀물들의 공격을 버틸 수는 없었다. 이내 소뢰부가 거의 다 소진되었고,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그의 법력도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는 한 손으로 낙뢰부를 쥔 채, 다른 손으로는 남은 소뢰부 전부를 단번에 던져버렸고, 뒤이어 귀물들이 벌떼처럼 몰려들면 다른 손에 쥔 낙뢰부 다섯 장을 한꺼번에 작동시켜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 했다. 그 정도 위력이라면 이 칠흑 같은 공간을 부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러지 못하다면 더 많은 귀물들을 끌어들여 이곳에서 삶을 마감하게 되리라.

    쾅! 콰쾅! 펑!

    예닐곱 장의 소뢰부가 연이어 폭발하며 새하얀 번갯불이 주위를 온통 눈부시게 밝혔다.

    그때, 심협은 번갯불이 번쩍이는 곳에 한 가닥 균열이 드러난 것을, 그 너머로 육화명의 모습이 번쩍 스쳐가는 것을 보았다. 육화명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구하려 애쓰는 것이 분명했다.

    심협의 발밑에서 부서진 달빛 그림자가 번쩍 나타났다. 동시에 그의 몸이 빠르게 솟구쳐 균열을 향해 돌진했고, 동시에 다섯 장의 낙뢰부가 균열로 향했다.

    쫙!

    다섯 장의 낙뢰부 위로 동시에 부적 문양이 빛났다. 그리고…….

    꽈르릉!

    그 어느 때보다 굵직하고 새하얀 다섯 줄기 번개가 나타나 허공에서 한 줄기로 꼬이더니, 거대한 장창(長槍)이 되어 곧장 내찔렀다.

    한편, 육화명은 속에 타들어가는 듯했다. 그는 귀장이 심협을 두봉에 감싸 넣는 것만 봤을 뿐, 어떻게 구해야할지 몰라 그저 귀장을 향해 고검을 휘두르는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 갑자기 거대한 우렛소리가 울렸다.

    꽈르릉!

    뒤이어 하얀 빛기둥이 귀장의 뒤편 두봉에서 불쑥 솟아나왔고, 빛기둥 안에는 팔뚝 굵기의 번개들이 번득이며 사방으로 내리 꽂혔다.

    검은 두봉에서는 간간이 귀물들의 울부짖음이 들려왔고, 수많은 음혼 귀물들이 끊임없이 끔찍한 소리를 질러대며 앞다퉈 튀어나왔다. 그러나 채 멀리 날아가기도 전에 연기가 되어 흩어져 버렸다.

    육화명이 깜짝 놀라 돌아보니, 심협이 번갯불에 뚫린 구멍 사이로 단번에 뚫고 나왔다.

    귀장은 몸을 틀면서 검을 휘둘렀지만, 심협은 이미 아래로 몸을 날린 뒤였다.

    음살과 귀기(鬼氣)를 띤 청동장검이 심협의 머리 위를 스쳐갔다.

    하지만 심협은 다른 것 따질 겨를도 없이 크게 소리쳤다.

    “육 형, 바로 지금이오!”

    그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한 손을 귀장의 아랫배를 향해 휘둘렀다. 손바닥에 붙어 있던 쇄갑부가 번쩍이더니 한 줄기 빛의 화살이 되어 귀장의 단전을 향해 날아갔다.

    퍽!

    짧고 날카로운 파열음에 이어 귀장의 청동갑옷이 미미하게 떨리더니, 곧 표면에 눈부시게 하얀 빛이 번득였다. 그리고는 단전에서부터 뻗어나가 빠르게 온몸에 퍼지면서 번쩍 하는 사이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청동갑옷 아래에도 촘촘한 하얀 빛이 들썩이면서 살아 있는 생물처럼 귀장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키야아아악!”

    솜털이 쭈뼛 서게 할 만한 날카로운 비명이 울린 순간, 날카로운 빛줄기가 번쩍이며 귀장의 단전을 꿰뚫었고, 백여 장 밖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육화명이 손에 장검을 쥔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이를 본 심협은 충격으로 거의 넋이 나가버렸다. 육화명이 그 일격을 어떻게 가한 것인지 아예 보지도 못한 것이다.

    쨍그랑!

    금속음에 퍼뜩 정신을 차려보니 육화명이 쥐고 있던 장검이 바닥에 떨어져 내렸고, 그 자신도 휘청이며 고꾸라질 뻔했다. 상당한 대가를 치른 게 틀림없었다.

    한편, 귀장의 단전에는 구멍이 뚫리면서 거북이 등껍질 같은 균열이 줄줄이 생겨났다. 그 안에서는 금빛 광채가 새어나와 빛이 비쳤고, 귀장이 온몸에서 살기를 뿜어내자 검은 안개가 솟구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주위의 음혼 귀물들은 뜻밖에도 진수성찬을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전부 몰려들어 순식간에 귀장의 몸뚱이를 거의 다 먹어치웠다.

    “괜찮소?”

    심협은 그제야 비틀거리며 육화명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괜찮소. 법력 소모가 조금 컸을 뿐이오. 이 귀물들이 귀장의 살기를 갉아먹으면 더욱 흉포해질 것이니, 우리는 어서 여기를 떠나야 하오.”

    육화명은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고검을 주워 들며 말했다.

    연이어 악전고투를 치르느라 두 사람 모두 법력이 거의 남지 않았기에 출구를 향해 두 발로 달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귀물들은 모두 귀장이 뿜어내는 살기에 정신이 팔린 상태였다.

    두 사람은 적당한 곳을 찾아 휴식을 취하면서 법력을 조금 회복한 뒤에야 비검을 조종하여 그곳을 벗어났다.

    한편, 심협과 육화명이 사라진 밀림 한가운데의 연못가에는 미풍이 한 차례 불었다. 그때까지 줄곧 무릎을 꿇은 자세였던 호용의 시신이 그 바람에 휩쓸려 앞으로 쓰러졌고, 그곳은 적막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 연못 속 분홍빛 연꽃잎이 아홉 장에서 여덟 장으로 줄었다는 사실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두 사람이 저승으로 돌아왔을 때,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던 종규(鐘馗)는 그들이 동시에 나타나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서 그 안에서의 일을 전해 듣고는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못된 놈들이 감히 경하용왕의 주의를 끌려 하다니, 사는 게 귀찮아진 게로구나!”

    종규가 손에든 쥘부채를 탁 하고 접으며 노기등등한 눈빛으로 말했다.

    “선배님, 이 일은 저승과 이승 두 세계가 관련되어 있습니다. 명부(冥府)와 우리 대당관부 모두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육화명이 포권하며 말하자 종규가 눈빛을 살짝 굳히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래 들어 명계(冥界) 곳곳이 불안정하여 귀심(鬼心)이 흉흉하니 대대적으로 정돈을 한번 해야겠군.”

    말을 마친 그는 심협과 육화명을 훑어보고는 대견하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봉인의 위기를 해결하고 귀장을 참살했으니, 너희 두 사람의 공이 아주 크다. 앞서 말한 포상은 두 배로 주마. 저승에서 너희에게 주는 별도의 포상이라고 할 수 있지.”

    “감사합니다, 선배님.”

    심협과 육화명은 서로 마주 보며 웃고는 포권을 하며 감사를 건넸다.

    종규는 두 사람에게 포상을 한 뒤 저승 밖으로 전송했다.

    * * *

    성황묘 입구. 해는 하늘에 걸려 있었고, 이미 하루가 지난 정오였다.

    함께 성황묘 문을 나서는 심협과 육화명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갑정 형, 그대는 언제 장안에 온 것이오? 어찌 나를 찾아오지 않았소?”

    육화명이 기지개를 켜면서 섭섭하다는 듯 말했으나, 화가 난 기색은 아니었다.

    “육 형, 솔직히 말하겠소. 내 이름은 심갑정이 아니라 심협이오.”

    심협은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육화명은 그 말에 눈썹을 슬쩍 치켜 올리더니, 의아한 듯 심협을 바라보았다.

    심협은 어쩔 수 없이 그날 자기가 가명으로 서로를 불렀던 일을 육화명에게 해명했다.

    “심형에게 그런 재치가 있었구려. 하하하!”

    육화명은 뜻밖에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호탕하게 웃었다.

    “육형, 그대의 본명은 무엇이오?”

    심협 역시 웃으며 슬쩍 물었다. 물론 육화명이 상대의 본명인 것을 알면서도 농을 건넨 것이었고, 육화명 역시 이를 알아들었다.

    “하하! 내 이름은 아버지께서 고르고 골라 지으신 것이오. 어느 날 용이 되어 울음소리 한 번에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라는 뜻이지. 절대 가명이 아니오.”

    육화명의 해명에 심협은 턱을 문지르며 웃었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심형, 농담은 이쯤 하지요. 이번 저승 임무는 예사롭지 않아 정국공(程國公)께 보고를 드려야만 하오. 심형은 원치 않았겠으나, 어쨌든 이 일에 깊게 연루되었으니 수고스럽지만 나와 함께 가야 할 것 같소.”

    육화명이 심각한 목소리로 말하자 일찍이 이런 상황을 예상했던 심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궁금증은 어쩔 수 없었다.

    “좋습니다. 헌데 정국공은……?”

    “심형은 정교금(程咬金) 정국공의 명성을 들어본 적이 없소? 선제를 따라 천하를 다니며 대당성세를 연 어르신이오. 지금은 천하가 태평하니 국공께서는 폐하의 명을 받아 대당관부를 관장하신다오.”

    육화명은 조금 의외라는 듯 설명했다.

    “삼판부(三板斧) 정교금! 당연히 들어본 적 있지요. 수많은 설서(*說書: 중국의 민간 예술로, 악기의 반주 없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선생들이 그분의 기이한 일화를 노래했는데, 대당관부를 관장하고 계셨구려.”

    심협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렇소. 정국공께서는 지위가 높고 권력이 막대하시지만, 인품이 따뜻하고 재치를 겸비한 분이시오. 심형도 보면 알게 될 거요. 자, 갑시다.”

    육화명은 웃으면서 말하고는 성큼 걸음을 옮겼다.

    “우린 지금 황성에 가는 것이오?”

    심협이 물었다.

    그는 수사(修士)지만 당의 백성이기도 하다. 그러니 천지군친사(*天地君親師: 중국 민간에서 제사를 지내는 대상으로, 하늘과 조상을 공경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등 유교적 가치관을 나타냄)의 관념이 뿌리 깊게 박혀 있어, 여전히 조정에 대한 일말의 거리낌이 있었다.

    “황성이 아니라 대당관부로 가는 거요.”

    육화명은 고개를 저으며 황궁 서쪽으로 향했다.

    이에 심협도 더는 묻지 않았다. 예전부터 대당관부에 대해 궁금하면서도 가볼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은 소원 풀이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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