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265화 (265/1,214)
  • 265화. 귀장

    호용은 연꽃들을 뚫어지게 보더니, 갑자기 입을 헤벌쭉 벌리고는 기괴하게 웃으며 연꽃 줄기를 꺾으려 했다.

    하늘에서 이 모습을 본 육화명은 대번에 안색이 변해 호용을 저지하러 가고자 했지만, 귀장이 앞을 막아선 탓에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갑정 형, 어서 저자를 막으시오! 반드시…….”

    육화명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심협은 이미 낙뢰부를 던졌고, 전신의 뼈가 어긋나는 듯한 고통을 견뎌내며 호용을 향해 달려드는 중이었다.

    부적에서 빛이 번쩍였으나, 번갯불이 채 터져 나오기도 전에 푸른 빛줄기가 부적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갔다. 부적 문양의 관건이 되는 곳을 정확하게 파괴한 것이다.

    부적은 즉시 효력을 잃고 떨어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호용의 손은 이미 연꽃 줄기로 향했다. 봉인이 풀려버릴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호용의 손바닥이 꽃줄기에 닿는 순간, 이변이 발생했다.

    꽃잎이 아홉 장인 그 분홍빛 연꽃의 색깔이 순식간에 짙어지더니, 심협이 환상에서 본 것처럼 진홍빛으로 변한 것이었다.

    ‘안 돼!’

    심협은 경악해 극심한 통증 따위 느낄 새도 없이 연못 쪽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하지만 결국 너무 늦어버렸다. 진홍색 화련의 꽃잎 아홉 장이 동시에 펼쳐지고, 순간 새빨갛게 타오르는 맹렬한 불길이 속에서 줄줄이 말려 나와 온통 불바다를 이루며 호용과 심협을 집어삼켰다. 그 불길은 연못 위에서만 타오를 뿐, 그 기슭은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심협은 맹렬한 불길에 온몸이 뒤덮인 순간 자신이 잿더미가 될 줄 알았으나, 사실 일말의 열기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 불길은 활활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지만, 애초에 열기가 아예 느껴지질 않았다.

    그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갑자기 두 눈이 불에 덴 듯 뜨거워졌다. 불꽃이 눈을 파고드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불꽃이 진짜로 파고들기 전에 그의 소매에서 무언가가 홀연히 튀어나와 희뿌연 빛을 피워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 하얀 빛 속의 물건은 뜻밖에도 옥침을 담은 석합이었다.

    철커덕!

    석합 뚜껑이 저절로 열리더니, 그 안에서 알 수 없는 흡입력이 생겨나 그의 눈 속으로 파고들려던 불꽃을 끌어들였다. 그러고는 자기 일을 다했다는 듯 석합이 스스로 닫히더니 떨어져 내렸다.

    심협은 지금의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일단 재빨리 석합을 받아 들었다.

    그러는 사이에 사방을 뒤덮었던 화염이 갑자기 거꾸로 휘몰아치면서 전부 연꽃 위로 모여들었고, 주변은 또다시 본래의 상태를 되찾았다. 마치 아까 불바다가 사방에 번졌던 광경은 그저 환상에 불과했던 것만 같았다.

    하지만 심협의 손에는 석합이 들려 있었고, 아까 본 것들은 결코 헛것이 아니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심협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가 시선을 조금 더 앞으로 옮기자, 앞쪽 멀지 않은 곳의 연못 속에 호용이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두 눈을 가린 기이한 자세로 꼼짝 않고 있었다.

    “이건……?”

    호용의 몸에서는 법력 파동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고, 몸은 차츰 연못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이 반도 넘게 가라앉았다.

    심협은 문득 뭔가 생각났는지 즉시 달려가 호용의 뒷덜미를 덥석 잡아당겨 물 밖으로 끌어냈다. 그리고는 기슭에 내려서면서 호용을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쳤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호용은 좀 전의 자세 그대로 나뒹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호용은 이미 숨이 끊어진 채였다. 놀란 기색이 역력한 표정 그대로 안면 근육은 팽팽하게 굳어졌고, 한 쌍의 눈은 이미 눈알이 없어져 시커먼 두 개의 피구멍이 되어 있었다.

    “그 불꽃이…… 설마 사람의 신혼(神魂)을 그대로 불태울 수 있단 말인가?”

    심협은 문득 고개를 돌려 연못 속의 연꽃을 바라보다가 뒤늦게 몰려온 두려움에 몸서리쳤다.

    그는 앞서 연못 속 불바다에서 두 줄기 불꽃이 그의 눈으로 파고들려 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석합이 불꽃을 빨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자신도 호용과 똑같은 말로를 맞았으리라.

    “온갖 수작을 다 부리더니 결국 자기가 걸려들지 않았소? 그대가 나를 이리 고생시켰으니, 이 저물계(儲物戒)는 내 사양 않고 받겠소이다.”

    심협은 탄식하며 호용의 손 무명지(*無名指: 네 번째 손가락)에서 은색 반지를 빼내 소매에 챙겨 넣었다. 이어서 호용의 소매와 품을 뒤져보고 별다른 물건을 찾지 못하자 몸을 일으켜 주위를 한 차례 살폈다.

    그는 여합 등을 잘 묻어주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더없이 격렬한 전투에 휘말려 그들의 시신은 찾을 수 없었다.

    그가 안타까움에 혀를 차고 있을 때였다.

    쿵!

    한 차례 굉음이 들리더니 사람 형체가 높은 곳에서 비스듬히 날아와 숲속에 세차게 처박혔다.

    심협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인영이 떨어진 쪽으로 내달렸다.

    하지만 그가 도착하기도 전에 하늘에서 검은 회오리바람 한 줄기가 그곳에 떨어져 내리면서 또다시 거대한 진동이 일었고, 육화명이 숲에서 튕겨져 나와 심협 앞에 나뒹굴었다.

    심협은 황급히 다가가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갑정 형, 그 늙은 놈은요?”

    육화명이 입가의 핏자국을 쓱 문질러 닦으며 물었다.

    “봉인의 힘에 죽었소.”

    “그렇군요. 봉인은요? 파괴되었소?”

    육화명이 다급히 묻자 심협은 연못 쪽을 힐끗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도 아닐 거요.”

    “그럼 됐소. 그럼 된 거요.”

    육화명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이 말했다.

    그때, 숲속에서 하늘에 닿을 듯 거대한 고목 두 그루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허리가 잘린 채 두 사람을 덮쳐왔다.

    두 사람은 재빨리 물러나 피했다.

    “처리해야 할 성가신 귀신 놈이 남았소. 이건 천년보심단(千年寶心丹)인데 부상을 빨리 회복하도록 도움을 줄 거요. 법력을 좀 회복하면 함께 싸웁시다.”

    육화명은 소매에서 도자기 병 하나를 꺼내 심협에게 건넸다.

    심협은 잠깐 망설이더니 병을 받아 들고 마개를 열어 기울였다. 그러자 딱 한 알 남아 있던 푸른 단약이 또르르 굴러 나왔다.

    가볍게 냄새를 맡아보니 짙은 풀과 나무의 기운이 콧속에 가득 찼고,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심협은 곧장 단약을 삼켰다.

    단약이 뱃속으로 들어가자 곧 따뜻한 기운이 되어 온몸의 경맥을 타고 퍼져 나갔다. 심협의 가슴과 배 사이 상처부위에 문득 간지러우면서도 얼얼한 기이한 느낌이 전해져 오는 것이, 상처가 차츰 아무는 것 같았다. 단전에도 법력이 쌓이기 시작하면서 공허함이 상당히 사라졌다.

    “고맙소.”

    심협은 육화명에게 포권했다.

    “감사 인사는 일단 살아서 나간 뒤에 해도 늦지 않을 거요. 저놈이 아까 또 살기를 적잖이 흡수해서 실력이 응혼기 정점에 육박했고, 영지(靈智)도 꽤 향상된 것 같소. 우리 둘이 그를 굴복시킵시다.”

    육화명은 시선을 저 앞 어딘가에 고정한 채 낮은 소리로 말했다.

    “좋소.”

    심협은 시원스레 답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바닥을 뒤집어 자모검을 꺼내 손에 쥔 채 경계심을 끌어올렸다.

    그때, 앞에서 포효가 들려오더니 청동갑옷을 입은 귀장이 숲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어느새 그의 뒤에는 1장 길이의 칠흑같이 검은 두봉(*斗篷: 소매가 없는 외투, 피풍,망토)이 나타나 있었다.

    자세히 보니, 두봉 위에는 놀랍게도 흐릿하고 흉악한 귀신의 얼굴이 빽빽하게 한데 모여 있었다. 마치 두봉 바깥으로 뛰쳐나가려 몸부림치는 것만 같았다.

    귀장이 청동검을 들어 두 사람을 멀리 가리키자, 뒤쪽 숲에서 음병과 혈시, 강시와 음혼이 뒤섞인 수백 명의 군대가 튀어나와 돌진했다.

    이를 본 심협은 손에 든 장검을 허공에 크게 털었다. 그러자 법결이 변하며 쨍그랑거리는 맑은 소리가 두 번 울리더니, 검신에서 날렵한 작은 검 두 개가 날아와 날렵한 새끼 뱀처럼 음병과 혈시 떼 사이로 돌진했다.

    검이 지나간 곳마다 가벼운 파열음이 울렸고, 음병들이 머리가 줄줄이 꿰뚫린 채 땅바닥에 엎어졌다.

    뒤이어 심협 자신도 검을 따라 달려 나가며 소매를 휙 떨쳤다. 그러자 노란 부적 10여 장이 동시에 날아갔고, 그 위에 소뢰부 문양이 연이어 빛을 내며 하얀 번개로 변해 내리꽂혔다.

    꽈르릉! 꽝!

    번갯불이 사방을 가득 채우며 일순간 굉음이 끊이지 않았고, 음병과 강시들이 땅바닥에 한가득 고꾸라졌다.

    “잘하셨습니다.”

    육화명이 엄지손가락을 척 치켜세우며 씩 웃었다. 그러더니 손에 장검을 받쳐 들고는 한 손으로 법결을 맺자, 검신 위의 부적이 번쩍 빛나더니 희뿌연 푸른빛이 검신을 감쌌다. 이어서 바람소리와 함께 쏜살같이 날아갔다.

    “흩어져라.”

    그가 가볍게 외치자, 검신의 푸른 빛이 갑자기 흩어져 수십 자루의 똑같은 푸른 검영(劍影)을 이루었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음병들 틈을 파고들었다.

    일순간 음병 대열이 또 한 무더기 쓰러졌다.

    고검의 본체는 음병들 사이를 단번에 뚫고 지나 곧바로 귀장에게로 날아갔다.

    귀장이 손에 든 청동장검을 가로로 휘두르자, 검신에서 강렬한 살기가 쏟아져 나와 육화명의 장검과 잠깐 부딪쳤고, 장검은 주춤거리며 물러나야 했다.

    “저놈이 지닌 살기가 강하니 오랫동안 가까이 다가가서는 안 되오. 살기가 몸에 스며들기 쉬운데, 썩 유쾌하진 않을 거요.”

    육화명이 돌아온 장검을 받으며 주의를 주었다.

    “저자에게 약점 같은 게 있소?”

    심협의 물음에 육화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귀장의 전투력은 보통이 아니고, 저 청동갑옷도 평범하지 않소. 굳이 빈틈을 찾자면 영지가 높지 않다는 것이겠지만, 안타깝게도 큰 의미는 없소. 그를 죽이려면 반드시 단전에 숨겨진 살단(殺丹)을 부숴야 하오. 그러지 않으면 머리를 잘라낸다 해도 숨통이 조금이라도 트이면 다시 살기를 모아 살아날 게요. 허나 하필 단전은 갑옷이 가장 튼튼하게 보호하는 곳이라 내가 전력을 다해도 한 방에 쳐부술 수가 없소.”

    심협은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물었다.

    “만약 내가 먼저 그 갑옷을 부술 수 있다면 육형이 저놈을 죽일 수 있겠소?”

    “그의 단전 갑옷을 부술 방법이 있소?”

    육화명이 조금 놀란 듯 되묻자 심협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안심하시오. 갑정 형에게 저 갑옷을 부술 방법만 있다면, 나는 기필코 그 기회를 낭비하지 않을 것이오.”

    육화명이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본 심협은 심호흡을 하더니 느닷없이 한쪽 옆으로 내달렸다.

    칠흑 같은 검광이 세로로 내리꽂히며 그와 육화명 모두를 물러나게 몰아붙였다. 이어서 귀장이 빠르게 달려와 허공에서 손을 들어 올려 심협을 움켜쥐려고 하는 한편, 단칼에 육화명을 베려 들었다.

    육화명은 황급히 검을 가로로 눕혀 칠흑 같은 검광을 막고 수십 장 밖으로 쳐냈다.

    반면 심협은 압박감이 전해져 오는 것을 느끼고는 지체 없이 피수결(避水訣)을 맺었다. 그러자 곧 푸른 빛의 보호막이 형성돼 온몸을 뒤덮었다.

    그러나 푸른 빛의 장막에는 금세 곳곳에 움푹 들어간 흔적이 생겨났고, 육안으로는 분간할 수 없는 살기가 귀장의 조종 아래 심협의 온몸으로 모여들어 보이지 않는 창살처럼 그를 옥죄었다.

    심협이 막 장검을 들어 올리며 속박에서 벗어나려는데,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온 보이지 않는 힘에 갑자기 그대로 귀장을 향해 끌려갔다.

    심협은 가슴이 철렁하여 황급히 모검을 손에 쥐고는 허공을 크게 베었다. 그러자 물처럼 파란 검광이 허공에서 호광(弧光)으로 변해 귀장에게로 내리꽂혔다.

    귀장은 청동검을 내키는 대로 휘둘러 호광을 흩어버린 뒤, 다른 손으로 심협을 더 세게 잡아당겼다.

    심협과 귀장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져 금세 10여 장으로 줄었고, 머지않아 귀장의 손아귀에 들어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귀장과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심협의 표정은 침착해졌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