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264화 (264/1,214)

264화. 오악진형인

핏빛 소용돌이가 연못으로 녹아들기 시작하면서 연못 전체의 끓어오르는 기세는 더욱 강렬해졌고, 하늘을 찌를 듯한 시커먼 살기가 수면 아래쪽에서 흘러넘쳐 짙은 연기처럼 모락모락 솟아올랐다.

이 살기로 인해 심협의 식해 안에 한바탕 광풍이 몰아쳤고, 맑고 깨끗했던 정신은 무거운 망치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혼탁해지기 시작했다.

한편, 육화명을 추격하던 귀장은 연못 쪽의 변화를 알아챈 듯 고개를 돌렸는데, 눈구멍 속의 도깨비불을 거세게 일렁였다. 그러더니 무척 흥분한 듯한 모습으로 육화명을 버려두고는 곧장 날아와 연못 위 허공에 떠올랐다. 그는 법결을 맺지도, 별다른 자세를 취하지도 않은 채 그저 그 자리에 서서 자석처럼 세차게 굽이치는 살기를 끌어당겼다.

살기가 청동갑옷 틈새로 끊임없이 밀려들면서 바싹 말라 쪼글쪼글하던 귀장의 몸이 놀랍게도 차츰 팽창하기 시작했고, 눈구멍의 도깨비불도 더욱 타올라 불꽃 중앙에 작은 청록색 결정이 나타났다.

“으윽!”

심협의 전신에서 기혈의 힘이 점점 빠르게 빠져나갔고, 피부도 광택을 잃어 갔다. 두 눈 빤히 뜨고 자신의 몸이 오그라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큰일이다!”

육화명이 얼굴을 굳힌 채 잠시 망설이더니 이를 악물고는 검날을 손으로 쥔 채 다른 손으로 잡아당겼다. 그러자 손바닥이 갈라지면서 많은 양의 검붉은 선혈이 흘러나와 검신을 따라 물들었다.

“영으로 매개를 삼고 피로써 이끄노니, 하늘에서는 신병(神兵)을 내리시어 저를 도와 마귀를 굴복시키소서!”

낮은 읊조림과 함께 육화명이 손에 든 장검에서 쟁쟁한 소리가 울리더니, 검날에서 갑자기 금색 빛이 나타나 검신을 따라 번져갔고, 이내 그의 온몸을 뒤덮으면서 몇 곱절로 불어났다. 금빛 광선이 연이어 육화명의 온몸을 휘감으며 높이가 4, 5장에 달하는 금갑 법상(*法相: 불상)을 이루었다. 법상은 손에 금빛 검을 쥐었고, 허리에는 금대(金帶)를 찬 것이 위용이 범상치 않아보였다.

“무슨 강신술이기에 저런 수준의 금갑천병을 불러올 수 있단 말인가!”

호용은 낯빛이 굳어지며 긴장한 듯 외쳤다.

세간의 강신술은 난잡하여 소환할 수 있는 신도 각기 다르고, 그 안에 담긴 신성의 양도 모두 다르기 때문에 발휘할 수 있는 전투력 역시 천차만별이다. 그리고 육화명이 불러온 이 금갑천병은 확실히 매우 비범했다.

금갑법상 속의 육화명이 천천히 두 눈을 떴다. 놀랍게도 두 눈동자는 금빛이었다. 눈빛은 다소 차가웠고, 털끝만 한 감정 변화도 찾아볼 수 없어 마치 신명과도 같았다.

“마귀를 죽여라!”

그의 입에서 나지막한 외침이 들리자, 손에 쥔 장검이 곧 빙글 회전하더니 연못 위 허공을 갈랐다.

금갑법상 역시 손에 든 금빛 장검을 휘둘러 허공에 금빛 둥근 호를 그렸다.

연못 바로 위 허공에서 살기와 원력(怨力)을 흡수하던 귀장은 즉시 하던 일을 멈추고 두 손으로 청동장검을 마주 휘둘렀다.

그가 장검을 휘두르자 아래쪽에서 솟구치던 살기가 갑자기 미친 듯이 솟아나왔고, 검의 기세가 살기의 파도가 되어 용솟음치면서 금빛 검광과 요란하게 맞부딪쳤다.

금빛 검광 속에는 일종의 거룩한 힘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처럼, 강렬한 음살의 기운은 뙤약볕 아래의 눈처럼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다만 그 와중에도 귀장의 손에 이끌려 금빛 검광을 빠르게 줄여나갔다.

연못에서 솟아나오던 살기 대부분이 금빛 검광에게로 향하자 심협은 전신을 짓누르던 압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잠시 한숨 돌리고는 손가락을 모아 위를 향해 휘저으며 가볍게 외쳤다.

“공격!”

그러자 그의 소매 사이로 푸른 빛이 한 줄기 튀어나왔다. 자모검의 모검으로, 그 몸체에는 끈처럼 긴 물줄기가 묶여 있었고, 물줄기의 반대쪽은 심협의 팔뚝을 휘감고 있었다. 모검이 마치 푸른색 커다란 구렁이처럼 하늘로 날아오르자 심협도 함께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하지만 아래쪽의 핏빛 소용돌이는 여전히 그를 끌어당기고 있었기에, 마치 줄다리기를 하듯 한동안 벗어나기 힘들었다.

심협이 한 손으로 결인하자 위에서 맑은 금속성이 두어 번 울리더니, 작고 가느다란 비검 두 개가 민첩한 새끼 뱀처럼 소용돌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뒤이어 심협의 발아래에서 두 줄기 힘이 솟아나면서 그는 차츰 핏빛 소용돌이의 속박에서 벗어났다.

“달아날 생각 마라!”

육화명과 귀장의 결투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던 호용이 고함치며 몸을 솟구쳐 곧장 연못 상공으로 날아들었다. 이어서 그가 한 손을 내려치자 손바닥에 번갯불이 모이면서 심협의 머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소용돌이에서 막 뛰쳐나오던 심협은 벼락에 맞아 다시 연못 속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는 그 와중에도 손에 든 모검으로 허공을 말아 올렸는데, 그러자 푸른 회오리가 나타나 호용을 잡아당겨 함께 끌어내렸다.

“네놈이 정녕 죽고 싶은 것이냐!”

내심 당황한 호용은 다섯 손가락을 짐승의 발톱처럼 구부려 심협의 명치 쪽을 사납게 잡아채려 했다. 그의 손끝에는 번개가 감겨 있어 다섯 개의 날카로운 번개 송곳을 이루었는데, 그 위세가 놀라웠다. 피와 살을 지닌 육신은 말할 것도 없고, 평범한 법기로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을 듯했다.

심협은 즉시 한 손으로 검을 눕혀서 가슴 앞을 막고, 다른 손으로는 위를 향해 뭔가를 내던졌다. 곧이어 자그마한 인장이 호용의 머리 위로 날아올랐다.

호용은 심협이 자신의 일격을 받아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기에 상대가 던진 인장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은 채, 한껏 비웃으며 추격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그의 손끝에서 날아간 번개줄기가 막 심협에게 닿으려던 그때,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이에 그는 반사적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거대한 푸른 산봉우리 허상 세 개가 하늘에서 내려와 겹겹이 포개져서는 엄청난 위압감으로 내리 눌렀다.

호용은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려 짐승의 발처럼 구부렸던 손을 위로 쳐들었다. 다섯 손가락 사이에서 가닥가닥 푸른 번개가 엇갈리면서 커다란 푸른 번개 공이 되어 맹렬히 솟아올랐다.

콰르릉!

하늘이 진동하는 듯한 굉음이 거세게 울렸고, 세 산봉우리 아래쪽으로 마치 번개 연못이 하나 생겨난 듯 무수히 많은 번개가 천만 마리 뱀처럼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강력한 힘이 솟구쳤다.

이 일격에 세 개의 푸른 산봉우리는 그대로 몇 장이나 위로 밀려났다.

심협도 전신이 뒤흔들렸고, 신음이 터져 나왔으며, 입꼬리를 타고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는 부상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황급히 삼산결을 맺고는 칙령을 읊었다.

“오악진형, 진산불공, 낙!(五岳真形, 鎭山不空, 落!)”

그의 말이 막 떨어지자마자 높은 하늘에 떠 있던 오악진형인 밑바닥의 ‘진악(鎭岳)’ 인문이 빛났다. 이어서 사방에 새겨진 네 개의 산악 부문(符文)이 동시에 빛나면서 인장 상단에 새겨진 산봉우리까지 눈부신 푸른 빛을 발했다.

허공에서는 잠시 밀려났던 세 개의 산봉우리 위로 또다시 두 개의 산봉우리 허상이 연이어 떨어졌다. 그중 하나는 바위가 우뚝 솟은 데다 산세가 기이하고 험준했으며, 다른 봉우리는 높이 치솟은 데다 절벽 위 곳곳에 마애석각(*磨崖石刻: 절벽에 글이나 불상 등을 새긴 것)이 보였다.

일전에 동관은 오악의 산봉우리를 한꺼번에 불러내지 못했는데, 그의 제련법 등급이 너무 낮아 다섯 봉우리의 인문을 동시에 제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심협은 구구통보결의 능력을 빌려 완전히 제련(*祭煉: 피 등 일정한 대가를 지불하고 법기와 법보의 위력을 향상시키는 것)할 수 있었다.

다섯 개의 봉우리가 일제히 나타나 완전히 하나로 겹치는 순간, 원래는 허무한 빛 그림자 상태였던 것들이 놀랍게도 실제와 같은 빛깔을 드러냈다. 오악이 비로소 진짜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오악진형인이 어찌 네놈 손에 있는 것이냐?”

경악한 목소리로 외친 호용은 다소 어두운 기색이 더해진 눈빛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두 손으로 몸 앞에서 원을 감싸 안은 듯한 자세로 힘을 모았다. 온몸의 옷자락은 바람도 없이 절로 부풀어 오르며 펄럭였고, 수염과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길어졌으며, 온몸 곳곳에 가늘고 푸른 번개줄기가 가닥가닥 모여들면서 치지직 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팔부진뢰, 현응감천, 감뇌결(八部眞雷, 玄應感天, 撼雷訣)!”

호용은 크게 외치고는 하늘을 받치듯 두 팔을 위로 쭉 뻗었다. 그의 온몸에서는 번갯불이 미친 듯이 솟구치면서 굵직한 푸른 번개 기둥이 되더니, 떨어져 내리는 산악에 꽂혔다.

꽈르릉!

요란한 굉음이 울렸다.

온 천지에 큰 지진이 끊이지 않았고, 푸른 번개 기둥과 산악 진형이 격렬하게 충돌하면서 거대한 충격파로 강한 폭풍을 일으켰다. 이어 폭풍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주위에 엉겨 있는 음살의 기운들도 순식간에 흩어져버렸다.

사방으로 흩어진 푸른 번개줄기가 눈부신 불꽃을 일으켰고, 맨흙 바깥 수십 장 안의 고목들은 불빛에 뒤덮여 시커먼 숯덩이가 되어버렸다. 그 위력에 허공에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힘을 겨루던 귀장과 육화명마저 물러났다.

모든 번갯불의 기력이 흩어지자 심협과 호용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심협은 참지 못하고 토해낸 피로 가슴 앞자락이 흠뻑 젖어 있었고, 호용은 두 손으로 산악 진형을 떠받치느라 안색이 새하얗게 질린데다가 관자놀이에는 시퍼런 핏줄기가 툭 불거져 나온 상태였다. 그도 만만치 않게 힘든 것이 분명했다.

그때, 끝내 버티지 못한 심협이 비틀거리다가 쓰러졌다. 그러자 산악의 진형이 응결되어 만들어진 산봉우리들도 빛을 거두며 흩어졌고, 인장은 저절로 심협의 손으로 돌아왔다.

“벽곡기 수사 주제에 이 늙은이를 이 정도로 힘들게 하는 놈이 있을 줄은 몰랐구나. 허나 오늘 이 몸이 수련한 진뢰(眞雷)로 네놈의 육체는 물론이거니와 정신까지 소멸…….”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이내 이를 갈며 일갈하던 호용은 갑자기 안색이 변해 고개를 숙이고 연못을 살폈다.

부글부글 끓어올랐던 연못물은 어느새 평정을 되찾았고, 수면은 다시 맑고 잠잠해졌다. 다만 호용이 수면을 투과하여 살펴보니, 어째서인지 검고 긴 그림자가 용처럼 수면 아래를 헤엄치고 있었다. 그것은 꼭 수면에 붙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깊은 연못에 숨어 있는 것 같기도 해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때, 연못물 아래에서 갑자기 커다란 검은 그림자가 솟아올라 본 모습을 드러냈는데, 놀랍게도 엄청나게 거대한 자줏빛 염룡(髥龍)의 머리였다.

염룡은 두 눈을 꼭 감은 채였고, 수염에는 피가 잔뜩 묻어 있어 더없이 흉측해보였다.

이를 본 호용의 눈에 옅은 희색이 스쳤다.

그가 막 무언가를 말하려는데, 꼭 감겨 있던 염룡의 두 눈이 갑자기 번쩍 뜨였고, 그 눈동자에는 쥐죽은 듯 고요한 녹색 빛이 번득였다.

눈을 마주친 순간, 염룡의 머리는 어둠 속에 잠긴 채 사라져 버렸다.

수면 위에 서 있던 호용은 어찌 된 영문인지 두 눈 모두 흰자가 사라지고 먹처럼 새카맣게 변해버렸으며, 표정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심협은 염룡의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호용의 모습에서 뭔가 잘못됐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일어서려고 몸부림쳤지만, 어깨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통증에 다시 쓰러졌다. 어깨뼈가 부러진 듯했다.

심협은 다소 두려운 눈으로 호용을 살펴봤지만, 그의 안력(眼力)으로는 어떻게 상대방이 순간적으로 자신의 곁으로 왔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호용이 이 절호의 기회를 놔두고 어째서인지 연못 한가운데의 분홍빛 연꽃을 향해 무표정하게 걸어갔기에 심협은 적잖이 당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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