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263화 (263/1,214)

263화. 재회

호용은 노기등등한 눈으로 심협을 노려보았다.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지금 그의 눈길에 심협은 백만 번이라도 갈기갈기 찢겨나갔을 터였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했던 파금대진이 고작 일개 벽곡 중기 수사 때문에 무너질 줄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감히 나의 대사(大事)를 망치다니, 곱게 죽지는 못할 것이다!”

호용이 분노를 토해내듯 외쳤다. 그러더니 즉시 몸을 돌리면서 한 손을 들어 다섯 손가락을 쫙 펼치고는 곧장 심협을 붙잡으려 했다.

심협은 통제력을 되찾은 순간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두 다리에도 어느새 신행갑마부 두 장이 붙어 있었는데, 이때는 막 불타오른 두 잿더미가 정강이를 휘감고 그가 왔던 방향으로 빠르게 내달리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가 미처 숲속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뒤에서 폭풍우 소리가 울리더니, 난데없이 커다란 손이 그의 어깨 위에 나타나 거세게 내리치려 했다.

“헛!”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심협은 우뚝 멈춰 섰고, 발밑에 달그림자를 흩뿌리며 사월보를 시전했다. 그리고는 몸을 뒤로 튕겨 다른 방향으로 내달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몇 걸음 달아나자마자 호용이 바짝 쫓아와 또 한 손을 뻗어 다섯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구부린 채 그의 옆구리를 움켜잡으려 했다.

심협은 황급히 몸을 뒤집을 수밖에 없었고, 신법(身法)을 빌려 다시 한번 피한 뒤 또 방향을 바꾸고는 온 힘을 다해 내달렸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피하든 호용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사실상 둘레가 백여 장에 불과한 맨흙 지역에 갇힌 셈이었다.

호용이 점점 바짝 쫓아오자, 심협은 손목을 휙 돌려 낙뢰부(落雷符) 한 장을 바로 앞에 내던졌다. 그리고는 사월보를 급히 틀어 낙뢰부와 엇갈려 지나갔다.

콰르릉!

바로 뒤에서 심협을 바짝 추격하던 호용은 갑자기 우렛소리가 울리며 굵기가 팔뚝만 한 번갯불이 머리 위로 곧장 떨어져 내리자 기겁했다. 너무 가까운 거리라 심장이 덜컥했으나, 그는 고수답게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다만 폭발로 인한 폭풍과 먼지에 가로막혀 잠시 추격이 지체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심협은 다시없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밀림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가 막 맨흙 지역을 넘어서려는 찰나였다.

쐐애액!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둥근 깃의 장포를 입고, 장검 위에 올라탄 한 청년이 숲속의 빽빽한 나뭇가지들을 뚫고 날아왔다.

급작스러운 상황에서 심협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일이 꼬여도 이렇게 꼬인단 말인가! 너무도 재수 없게 꼬인 상황에 심협은 속으로 욕지거기를 내뱉고는 절호의 기회를 날려버린 청년에게로 홱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눈빛은 다소 흐리멍텅해졌다.

거의 동시에, 검을 조종하던 청년도 심협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 눈이 마주친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말했다.

“어찌 그대가……?”

청년은 다름 아닌 육화명이었다!

깊은 밤 송번현의 강줄기에서 두 사람은 딱 한 번 만났을 뿐이었다. 당시 심협은 사람이 검을 조종해 비행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고, 몹시 놀라고 부러웠던 터라 깊은 인상을 받았다.

심협이 어찌 된 상황인지 미처 깨닫기도 전에 육화명이 크게 외쳤다.

“갑정(甲程) 형, 조심하시오! 어서 피하시오!”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싶었지만,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날, 심협은 육화명(陸化鳴)의 이름을 들었을 때 화명(*化名: 가명)이라는 뜻인 줄 알고 자신 역시 가칭(*假稱: 가명)과 발음이 비슷한 ‘갑정’이라고 소개했던 것이다.

심협은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자마자 밀림 속에서 한 차례 폭발음이 울렸고, 검고 음산한 바람이 휘몰아치며 그대로 예닐곱 그루의 고목을 들이받아 쓰러뜨리며 돌진해왔다.

심협이 돌아보니 음산한 바람은 연못 옆으로 몰려가더니 갑자기 검은 안개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청동갑옷을 입은 채 손에 청동장검을 든 파리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는 혈기를 거의 흡수당한 여합처럼 낯빛이 검푸른 색이었고, 피부는 바짝 말라 있었다. 입술은 오그라들어 검은 잇몸과 하얀 치아가 훤히 드러나 있었으며, 깊게 움푹 파인 두 눈구멍에서는 시퍼런 빛 두 덩이가 타올랐다.

이 귀장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본능적으로 육화명을 죽이려 달려들려고 했다. 그러나 곧 우뚝 멈춰 서서는 고개를 돌려 연못가에 떠 있는 호리병을 바라보았다.

귀장은 잠시 그대로 서 있다가 호리병 안에 모인 기혈의 힘에 이끌린 듯 연못가로 질주했다.

심협을 죽일 기회면 엿보고 있던 호용은 이 상황에 깜짝 놀랐다.

“이 미친놈아, 무슨 짓을 하려는 게냐!”

그는 버럭 호통을 치더니, 발아래로 푸른 번개를 번뜩이며 곧장 가로질러 날아가 호리병 앞을 막아섰다. 그러더니 한 손으로 귀장을 후려치려 했다.

“크으어어어!

귀장은 낮고 불분명한 소리를 지르더니, 손에 든 장검을 곧추세우고 호용을 곧장 찔러 들어갔다. 청동검의 끝부분에서 콩알만 한 검은 빛 덩어리가 뭉치며 호용의 장심과 세차게 부딪쳤다.

그 순간, 호용의 손바닥에서는 푸른 부적이 빛났고, 우렛소리가 폭발하면서 푸른 번개가 여러 줄기 뻗어 나와 검은 빛 덩어리와 부딪쳤다.

콰쾅!

푸른 번갯불과 검은 반점이 뒤섞여 폭발하여 사방으로 날아갔고, 그 위력에 귀장과 호용도 뒤로 밀려났다.

호용은 그 힘을 이용해 공중에 떠 있는 호리병을 챙겨 연못의 반대편에 내려선 뒤, 귀장과 심협을 번갈아 살폈다. 이 일은 원래 그리 어려운 임무가 아니었지만 상황이 복잡해진 만큼 그의 낯빛도 갈수록 안 좋아졌다.

잠깐 망설이던 그는 손을 뒤집어 푸른 부적을 하나 꺼내 호리병 위에 붙였다. 그러자 부적이 번쩍이더니 호리병 안에서 흘러넘치던 짙은 혈기의 힘이 곧 가려졌다.

귀장은 영지(靈智)가 높지 않은 듯 그 혈기를 감지하지 못했고, 잠시 가만히 멈추더니 고개를 뻣뻣하게 돌려 사방을 살폈다. 누구를 먼저 공격해야 할지 망설이는 모양새였다.

한편, 심협은 이곳에 모인 자들의 경지를 대략 파악할 수 있었다. 호용과 귀장은 응혼 후기, 육화명은 응혼 중기인 듯했다. 즉, 그가 육화명과 손을 잡는다 해도 호용이나 귀장, 어느 한쪽의 상대도 되지 못할 터였다. 그러니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이는 모두가 마찬가지라, 한 순간 기묘한 정적이 찾아왔다.

하지만 짧은 평화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귀장이 몸을 휙 돌려 번개 같은 기세로 육화명에게 달려든 것이다.

동시에 호용도 싸늘한 눈빛으로 심협을 향해 돌진했다.

‘갑정 형,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육화명은 귀장의 추격을 피하면서 전음(傳音)으로 물었다.

“저 죽일 놈이 산 사람을 제물 삼아 이곳의 봉인을 열고 저 아래 경하용왕의 원혼을 풀어놓으려 하고 있소!”

심협은 전음을 사용할 수 없어 호용을 가리키며 크게 외칠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을 들은 육화명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러더니 돌연 우뚝 멈추어 서서는 귀장의 추격도 피하지 않았다. 그는 한 손으로는 고풍스러운 장검을 쥔 채, 손가락을 모아 검신을 찬찬히 매만졌다.

그의 손끝이 칼날 위를 가로지르자 푸른 검망(劍鋩)이 한층 밝아졌다.

쩡!

육화명이 단숨에 검을 휘두르자 고검(古劍)에서 3장에 이르는 단단한 검광이 뿜어져 나와 허공을 가르고 곧장 귀장의 머리로 뻗어갔다.

귀장은 두 눈에 도깨비불을 일렁이며 두 손으로 청동장검을 쥔 채,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내려찍었다.

그 순간, 청동장검에 갑자기 검은 살기가 한층 생겨나더니 실체가 있는 것처럼 솟아나와 검광과 맞부딪쳤다. 그리고 둘은 동시에 폭발하며 강력한 돌풍이 되어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육화명은 뒤로 물러나면서 갑자기 푸른 잔상으로 변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사라졌…….”

심협은 이를 보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바로 그때, 바로 뒤에서 분노와 비웃음이 뒤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이놈, 감히 한눈을 팔 정신이 있더냐!”

심협은 문득 뒤에서 거센 바람이 몰아치는 것을 느꼈고, 피하기에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새 호용이 손에 움켜쥔 짧고 푸른 도끼가 심협의 뒤통수를 내리찍으려 했다. 도끼의 몸체 위에는 퍼런 번개가 줄기줄기 휘감겨 있었고, 끊임없이 치직거렸다.

심협은 다급한 나머지 몸을 홱 돌려 한 손으로 금도의 손잡이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칼등을 떠받친 채 온몸의 법력을 발동해 막았다.

쨍!

맑은 소리와 함께 금빛 장도에서 번개가 번쩍이더니 뚝 끊어졌다.

호용의 손도끼가 번갯불을 띤 채 허공에 둥근 호를 그리며 심협의 가슴팍 옷자락과 함께 피부를 가르고 지나갔다.

촤악!

제법 많은 피가 흩뿌려졌고, 심협은 앞가슴이 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동시에 금빛 장도가 산산조각 나는 폭발력에 밀려 나동그라졌다.

호용이 이 기회를 두고볼 리가 없었다. 그는 성큼 내달리며 다시 한번 도끼에 빛을 번쩍이며 심협의 머리 한가운데를 노리고 휘둘렀다.

심협은 앞가슴에 극심한 통증을 느끼면서도 일어날 수도, 피하거나 반격할 수도 없었다.

위기일발의 순간, 갑자기 그의 곁에 푸른 빛이 한 줄기 나타났다. 그 빛에서 육화명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장검으로 호용의 명치를 향해 찔렀다. 보이지 않는 광막(光膜)이 뒤덮고 있는 것인지 검신 위에 푸른 빛이 번쩍였고, 그 아래로 가늘고 날카로운 여러 줄기 푸른 검기가 어렴풋이 내비쳤다.

“헉!”

호용은 화들짝 놀라 심협의 머리를 겨냥했던 도끼의 방향을 억지로 틀었다.

육화명의 검과 손도끼가 정통으로 부딪쳤다.

챙!

금속이 맞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고, 동시에 푸른 장검에서 눈부신 빛이 폭발하면서 수백 가닥의 푸른 검기가 뿜어져 나와 사방으로 어지러이 날아다녔다.

호용의 옷에는 순식간에 수백 개의 구멍이 났고, 그중 상당수에서 핏자국이 배어나왔다. 그의 허리춤에 매달린 호리병도 검기에 쓸려 가벼운 소리를 냈다.

“흥!”

호용은 콧방귀를 뀌더니 한 손으로 결인하여 육화명을 물리치고는 담담하게 상처를 살펴보았다. 그는 큰 부상이 없음을 확인한 후 안도했으나, 이내 표정이 급변하더니 허리춤의 호리병을 들어 살폈다.

호리병에는 가느다란 균열이 생긴 상태였고, 그 안에서 피처럼 붉은 빛줄기가 연무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안 돼!”

호용은 절규하다가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려 심협을 노려보았다.

심협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뭔가 잘못됐음을 깨달은 그는 곧장 몇 걸음 물러섰다.

호용은 한 손으로 호리병의 균열로 아무것도 새어나오지 못하게 막은 채 다른 손으로 손도끼를 거두어 들였다.

“다른 방법도 없는 것 같으니 모험을 해보는 수밖에…….”

그는 시선을 떨군 채 침울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푸른 번갯불이 그의 두 다리 사이를 쉬지 않고 맴돌았다. 다음 순간, 호용의 모습이 별안간 흐릿해지더니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조심하시오!”

육화명이 다급히 외치며 심협 쪽으로 돌진해왔다. 그러나 채 절반도 오기 전에 그의 머리 위쪽에서 청동장검이 떨어져 내리며 가로막았다. 귀장이 다시 공격해 온 것이다.

그 사이, 심협은 사월보를 운공하며 몸을 돌려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부상이 제법 심각한 상태라 반응이 더뎌졌고, 결국 호용에게 따라잡혀 견정혈(*肩井穴: 목뼈와 어깨뼈봉우리 사이의 중간지점)을 붙잡히고 말았다.

한 줄기 법력이 견정혈에 주입되면서 심협은 온몸이 찌르르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이어서 다시 온몸의 법력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게 됐다.

“이게 다 네놈이 개판을 쳐놓은 탓이다! 이제 시간이 없으니 네놈을 산 제물로 삼겠다!”

호용은 심협에게 호통을 치더니 그를 잡아끌고 연못가로 향했다. 입으로는 쉴 새 없이 뭔가를 중얼중얼 읊조리는 중이었는데, 이내 말을 끝맺으면서 심협과 호리병을 동시에 연못 속으로 내던졌다.

호리병은 물에 떨어지자마자 몸통이 쩍 하고 갈라졌고, 그 안에서 피처럼 붉은 빛줄기가 솟아나왔다.

빛줄기는 소용돌이가 되어 심협을 휘감은 채 연못 수면 위를 빠르게 회전했고, 그러자 이미 잠잠해져가던 연못물이 다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심협은 좀 전의 저릿한 마비감은 사라진 상태였지만, 온몸이 핏빛 소용돌이에 휩쓸려 여전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는 생각을 바꿔 무명공법을 운공하면서 연못을 통제해보려 했다.

그러나 아무리 어수지술(御水之術)로 물결을 제어하려 해도 연못의 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아래쪽의 핏빛 소용돌이가 그를 점점 옥죄면서 다시 체내 기혈의 힘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심협은 속이 타들어갔다. 이러다가는 자신도 머지않아 다른 사람들처럼 한 구의 마른 시체로 전락하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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