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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262화 (262/1,214)
  • 262화. 경하(涇河)의 용왕

    “선배님, 이 후배는 마음을 이미 정했사오니, 선배님의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심협은 다시 한번 포권하며 진각의 위치를 떠나려는 자세를 취했다.

    “흥! 이 늙은이가 예의를 좀 차렸더니 정말 내 성미가 좋은 줄 아는 게냐? 이 오행파금진(五行破禁陳)에서 너희 중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된단 말이다. 정말 네놈이 떠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느냐?”

    호용은 말투를 갑자기 바꾸었고, 사람 자체의 기세까지도 달라졌다.

    “오행파금진? 오원멸살진이 아니고요?”

    운낭이 의심스러운 듯 물었다.

    “역시 우리 다섯 명 각자의 수행속성이 금, 목, 수, 화, 토 오행 속성인 것은 우연이 아니었군. 당신이 의도한 것이지. 이 연못 아래 도대체 무엇이 봉인 되어 있는 게요? 또한 당신의 목적은 도대체 뭐요?”

    심협이 눈빛을 굳히며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봉인……?”

    여합을 비롯한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통 알아듣지 못하고 심협과 호용을 번갈아 바라보며 망설였다.

    “이곳에 왔을 때부터 네놈은 좀 달라 보였지. 과연 네가 알아차렸구나. 안타깝지만 이미 늦었다. 너는 이미 물러날 곳이 없어! 크하하하!”

    호용은 미친 듯이 웃어젖히며 손이 가는 대로 흔들었다. 그러자 아직 다 타지 않은 기다란 향 세 가닥이 연못 앞 땅바닥에 박혔다. 그는 비어버린 두 손으로 빠르게 결인하여 사방을 연달아 가리켰다.

    허공에 떠 있던 다섯 개의 진귀부가 격렬하게 떨리더니 심협과 사람들에게로 빠르게 날아 돌아왔다.

    “헛!”

    여합 등은 미처 방어할 틈도 없이 차례로 진귀부에 명치를 얻어맞았고, 몸이 곧 뻣뻣하게 굳더니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었다.

    반면 일찍이 대비하고 있던 심협은 발아래 달그림자를 번쩍이며 사월보를 펼쳐 피해냈다. 그러나 그의 앞가슴에서 갑자기 한 줄기 부적 문양이 빛나면서 그와 진귀부 사이에 알 수 없는 인력(引力)이 생겨났다.

    “염식부…… 제길!”

    심협은 가슴이 바짝 졸아들었다.

    다음 순간, 진귀부는 그 힘에 이끌려 허공에서 기이하게 각도를 틀더니 곧장 날아와 그의 가슴을 쳤다. 그 안에서는 곧 어떤 힘이 뻗어 나와 그의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꼼짝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호 어르신!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왜 우리를 속박하는 것이오?”

    운낭과 여합이 당황해 따지듯 물었다.

    금돈과 임청의 낯빛도 몹시 안 좋았다. 그들은 호용을 따른 시간이 더 긴 만큼 그를 가장 믿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으로 미루어 자신들은 호용의 계략에 넘어간 것이 분명했다.

    “심 도우가 벌써 말했잖느냐. 모든 것은 이곳의 봉인을 풀기 위함이었다. 너희는 봉인을 풀기위해 필요한 제물인 셈이지. 더 물어볼 게 뭐가 있느냐?”

    호용은 귀찮다는 듯이 그렇게 말하고는 비릿하게 웃었다.

    말을 마친 그는 땅바닥에 꽂혀 있는 기다란 향을 힐끗 보았는데, 눈에는 한 줄기 광기가 스쳤다.

    “용연향(龍涎香)이 거의 다 탔으니 너희를 황천길로 보낼 때가 되었구나.”

    호용은 끔찍한 이야기를 덤덤하게 내뱉고는 두 손으로 결인을 했다. 이어서 구결을 읊조리자 이미 어두워졌던 바닥의 부적 문양이 새빨간 빛을 발했다.

    심협을 비롯한 사람들은 명치가 묵직하게 내려앉는 것을 느꼈고, 온몸의 법력과 기혈의 힘이 빠져나가 피처럼 붉은 빛으로 한데 모였다. 그리고는 앞가슴에 붙은 진귀부에 새겨진 흉신의 입에서 핏빛이 흘러나와 법진 한가운데로 모여들었다.

    법진 정중앙에 핏빛이 모여들자, 그 속에서 피처럼 새빨간 연꽃 한 송이가 떠올랐다. 그 역시 꽃잎은 아홉 장이었는데, 몹시도 요사스러웠다.

    그 붉은 연꽃을 바라보는 호용의 눈에는 더욱 짙은 광기가 스쳤다. 그는 손을 뻗어 허리에 매단 호리병을 떼어내고는 병을 기울여 붉은 연꽃의 꽃술 한가운데로 투명한 액체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후드득!

    투명한 액체가 핏빛 연꽃 속으로 떨어지자, 보이지 않는 파동이 그 안에서 일렁였다.

    심협과 사람들의 앞가슴이 한차례 타들어가는 듯 뜨거워지더니, 단중혈에 붙였던 염식부는 스스로 타 없어졌고, 그들 눈앞의 천지는 일순간 완전히 변하여 본래 모습을 드러냈다.

    주위는 온통 핏빛이었고, 하늘을 찌를 듯한 살기와 강렬한 원념이 거의 실체처럼 뭉쳐져 주위를 이리저리 떠돌았다.

    “이, 이게 뭐야. 어찌 이럴 수가……?”

    “엄청나게 강한 원념과 살기다.”

    여합과 임청이 거의 이성을 잃은 듯 외쳤다.

    가짜 염식부의 비호가 사라지자, 강력한 살기와 원기가 줄줄이 잇따라 사람들의 몸을 뚫고 드나들었고, 이들의 두 눈에는 핏발이 가득 서기 시작했다. 이어 얼굴도 이내 험악하게 변했다.

    심협 주위에도 많은 음살의 기운들과 원한의 염력이 몰려들어 그의 몸속으로 돌진해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체내에서 피가 마치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처럼 그의 온몸을 빠르게 돌면서 보이지 않는 힘을 내뿜어 대부분의 살기와 원기를 차단했다.

    그렇다고 해도 심협은 여전히 식해(識海)가 붉은 그림자에 한 겹 덮인 것 같은 느낌이었고, 울컥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안 돼! 원념이 침식하게 내버려 둘 순 없어!”

    심협은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고 법력을 움직여 앞가슴에 숨겨놓은 낙뢰부의 효력을 불러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이 시도를 하자마자 온몸의 법력이 남김없이 외부의 힘에 통제 당해 앞가슴의 진귀부로 흘러나갔다. 그는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를 잃고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괜한 헛수고 말아라. 이 도부의 진짜 이름은 쇄선부(鎖仙符)다. 신선이라도 빠져나가기 힘들건만 네깟 벽곡기 수사 따위를 제압하여 법력을 말끔히 뽑아내는 것은 일도 아니지.”

    호용은 심협이 저항하려는 것을 알아챘지만 개의치 않고 비웃었다.

    “네놈은 도대체 뭘 하려는 것이냐?”

    평정을 되찾은 심협이 물었다.

    “이미 알고 있는 줄 알았더니 그저 추측에 지나지 않았나 보구나. 아무튼 아직 시간이 조금 필요하니 죽는 이유는 알고 죽게 해주마. 이 연못은 저승의 봉인이다. 밑바닥에는 경하(涇河)용왕의 넋이 봉인되어 있지. 그는 죽을 때 혼백이 소멸되지 않았고, 하늘을 찌를 듯한 원념이 쌓인 지 오래다. 이제 봉인이 느슨해지면 나는 네놈들의 정혈(精血)을 제물로 삼아 그를 풀어줄 것이야.”

    호용은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하더니 껄껄 웃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심협은 생각보다 큰 일에 휘말렸음을 알게 됐다. 용의 혼백이 변해 만들어진 원혼이 일단 봉인을 뚫고 나온다면 그 파괴력은 한낱 귀장이나 귀왕(鬼王) 따위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어쩐지 원념이 그리 깊고 음살의 기운이 짙더라니…….”

    심협이 낮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그러고 보니 이 늙은이도 좀 궁금하구나. 똑같이 어살부(御煞符)를 사용했는데 어찌 여기서 수련 경지가 떨어지는 편인 네놈만 이상을 알아차릴 수 있었단 말이냐?”

    호용은 호기심이 생긴 듯 물었다.

    “그 부적이 어살부였구나! 허나 나의 신혼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강력하다. 덕분에 감지할 수 있었지.”

    물론 거짓이었다. 응혼기조차 되지 않았으니 신혼이 그렇게 강력할 리 없다. 그가 이런 단서들을 알아챌 수 있었던 것은 체내에 흡수된 오홍의 용족 정혈 덕이었다. 그 강력한 핏줄의 힘으로 경하용왕의 원혼을 감지하고 여러 환상들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되는 대로 지껄여 시간을 끌면서 속으로는 무명법결을 운공해보려 시도했다.

    “이 일은 네 소행이냐 아니면 취보당의 소행이냐?”

    심협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허! 곧 죽을 놈이 궁금한 것도 많구나. 네놈은 알 것 없다!”

    호용은 귀찮다는 듯 꾸짖더니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처참한 비명이 연이어 들려왔다.

    심협이 고개를 틀어 보니 각자의 자리에 속박당한 여합 등이 보였다. 그들은 놀랍게도 전부 눈이 시뻘겋게 물든 채 얼굴을 사납게 우그러뜨리고 있었다. 이미 광기에 빠진 듯한 모습이었다.

    “허허, 보아하니 때가 된 모양…… 에? 저들은 원념에게 침식당하여 이미 이성을 잃었건만, 왜 저놈은 아직 무사평안하지? 이상한 일이도다.”

    호용은 의문스럽다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심협의 식해 역시 강과 바다가 뒤집히는 듯 혼란스러웠지만, 그는 아직 정신을 잃을 기미는 없었다. 그러나 법력과 기혈의 힘은 여전히 빠른 속도로 빠져나가고 있었고, 법력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여전히 아무 진전이 없었다.

    그때, 땅바닥의 용연향 세 줄기가 마침내 다 타버렸고, 마지막 연기 한 가닥이 흩어져 사라졌다. 이어서 무언가 부글부글 끓는 듯한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크지 않은 연못이 순식간에 불길 위의 솥처럼 격렬하게 끓으면서 물방울이 솟아올랐다. 연못 한가운데 있던 연꽃잎도 끓는 물에 익은 것처럼 진홍색으로 변해버렸다.

    심협이 용의 울부짖음을 어렴풋이 들은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 연못 아래에서는 이상한 움직임이 전해져 왔다.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대지가 세차게 흔들렸다.

    연못 안의 물결은 더욱 격렬하게 요동쳤고, 가닥가닥 짙은 검붉은 안개가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심협은 그저 힐끗 본 것만으로도 체내의 기혈이 난폭하게 솟구치면서 온 얼굴까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호용도 눈앞의 광경에 저도 모르게 긴장한 듯 침을 탁 뱉어냈다. 뒤이어 그는 재빨리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한 손으로 결인을 하더니 심협 등의 법력과 기혈의 힘이 응결되어 만들어진 연못 앞 핏빛 연꽃을 가리켰고, 손가락을 갈고리 형태로 접고는 힘껏 끌어당겼다.

    그러자 핏빛 연꽃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고, 그 안에서 강력한 흡입력이 생겨났다.

    “아악!”

    임청이 처절하게 울부짖었고, 그의 전신에서 둑이 터진 것처럼 기혈이 쏟아져 나왔고, 원래도 창백했던 그의 피부는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심지어 그의 처참한 비명은 잠시 후 뚝 끊겼고, 온몸이 시커멓게 오그라들면서 마지막 혈기까지 전부 뿜어냈다.

    뒤이어 운낭의 전신에서도 기혈이 세차게 쏟아져 나왔고, 얼마 뒤 목내이(*木乃伊: 미라)처럼 변해버렸다.

    목화토금수, 오행 상생(相生)의 순서에 따라 한 사람씩 연이어 기혈이 빨려 들어갔다. 얼마 뒤에는 여합이 마른 시체로 변했고, 금돈의 끔찍한 울부짖음도 들려왔다. 다음 차례는 바로 심협으로, 그의 기혈과 법력마저 완전히 빨려 들어가면 봉인이 풀릴 터였다.

    ‘안 돼!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심협은 속으로 미친 듯이 외쳤다. 그리고 그 순간, 마침내 법력 한 가닥이 그의 부름에 응하여 앞가슴의 소뢰부 속으로 들어갔다.

    콰지직!

    줄기줄기 새하얀 번개가 꽃처럼 그의 가슴에서 피어올랐다.

    심협은 강렬한 전류가 심장을 곧장 관통하며 호흡과 심장 박동까지 잠깐 멈추게 만드는 걸 느꼈다.

    하지만 곧이어 가슴에서 극심한 통증이 전해져 오면서, 그의 앞가슴에 박힌 듯한 도부가 드디어 툭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떨어졌다.

    ‘드디어 자유를 되찾았다!’

    오행파금진은 금목수화토 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기에, 심협의 진각(陣脚)이 무너지자 대진 전체가 순간 무너졌다. 그러자 여합을 비롯한 네 사람의 혈기와 법력이 모인 핏빛 연꽃이 곧 흩어지려 했다.

    “안 돼!”

    호용이 절규하며 허리춤의 호리병을 풀어 밑바닥을 탁 쳤다. 그러자 호리병 표면에 갑자기 수많은 부적 문양이 나타나 핏빛 연꽃을 향해 날아갔고, 병 주둥이에서는 푸른 빛이 한 줄기 뿜어져 나와 연꽃을 휘감고 그대로 호리병 속으로 빨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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