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261화 (261/1,214)
  • 261화. 속사정

    “모두 준비를 마쳤으니 이제 포진을 시작하자꾸나.”

    호용이 말했다.

    “예.”

    사람들은 대답한 뒤, 진법 배치에 따라 각자 자신의 자리로 이동하여 분홍 연꽃이 피어 있는 연못을 둘러싸고 흩어졌다.

    심협은 도부를 손에 쥔 채 연못 오른편으로 향했다.

    그는 연못을 지날 때 안력을 집중해 연못 안을 살폈는데, 그 물이 투명하고 맑아 한눈에 바닥까지 훤히 들여다보였다. 못 바닥에는 일종의 부적 문양 같은 이상한 흔적들이 가득 퍼져 있었다.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이번에는 연못 한가운데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바로 그때, 사방에서 갑자기 미풍이 한 차례 부는가 싶더니, 연못 수면에 경미한 잔물결이 일렁이면서 물에 반사된 빛이 반짝였다. 그 순간, 심협의 눈앞에 붉고 옅은 안개가 다시 나타났다.

    정신이 아득해진 사이, 그는 연못의 분홍빛 연꽃이 갑자기 붉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연꽃은 마치 불이 붙은 것 같았고, 그 속에서 새빨간 불꽃이 치솟아 순식간에 연못 전체로 퍼져 나가면서 수면 위에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불길 속에서 난데없이 흐릿한 형체가 나타났다. 용 같기도, 뱀 같기도 한 것이 꿈틀거렸는데, 온몸에 짙고 검붉은 살기가 가닥가닥 휘감겨 있는 것만 같았다.

    심협이 속으로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려는데, 갑자기 가슴께에서 다시 따뜻한 열기가 치받쳐 올라왔다. 이번에는 열기가 또렷하게 임맥의 규혈을 타고 위로 솟구쳐 그의 얼굴과 머릿속에 이르렀다. 이 따스한 열기가 어루만지자, 심협은 눈앞에 한 줄기 빛이 스치는 듯했고, 시야는 다시 원래 상태를 회복했다.

    ‘어찌된 일이지?’

    그는 속으로 잠시 의아해 했다.

    “심 도우, 왜 그러시오. 또 무슨 환각 같은 게 나타났소?”

    멀지 않은 곳에 있던 금돈이 심협이 멈춰 선 것을 보고 물었다.

    심협은 퍼뜩 무언가를 깨닫고는 목구멍까지 치솟았던 우려를 꿀꺽 삼키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자 그를 잠시 살피던 호용이 굳건한 목소리 말했다.

    “모두 본마음만 굳게 잘 지키면 된다. 한낱 환상에 불과하니 너무 걱정할 필요 없느니라.”

    “예.”

    여합 등은 그의 말을 진심으로 깊이 받아들이며 답했다.

    하지만 심협은 희미하게 범상치 않은 냄새를 맡은 상태였다. 그는 묵묵히 자기 자리로 가서 서더니 손바닥을 앞가슴에 대고 단중혈의 부적을 문지르며 고민에 빠졌다.

    “자, 다들 제자리에 섰으니, 내 술 한 모금만 하고 곧 법진을 작동시키마.”

    호용은 사람들을 훑어보며 호쾌하게 웃더니 허리춤의 호리병을 풀었다.

    다른 사람들은 한바탕 싸움을 준비하면서도 이미 승리가 눈앞에 있다고 느끼는 듯했다.

    심협은 한참을 주저하다가 결국 앞가슴에 붙인 염식부(斂息符)를 떼어내고는 몰래 조용히 챙기려고 했다. 그러나 부적을 몸에서 떼자마자 곧바로 눈앞이 흐릿해지더니, 붉은 안개가 자욱했던 그 느낌이 다시 나타났다. 게다가 안개는 이전보다 더 짙어졌고, 심지어 그 사이로 목화솜 같은 진홍색 안개들이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떠돌며 끊임없이 사람들 곁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자세히 보니 다른 사람들의 앞가슴에는 흐릿한 금빛이 번득이며 솜털 같은 진홍색 안개가 다가오는 것을 막고 있었다. 염식부를 떼어내 부적의 비호가 사라 진 그에게 더 많은 붉은 안개가 몰려들었다.

    불혀듯 심협은 이 붉은 안개들이 단순한 음살(陰煞)의 기운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 속에는 짙은 원기(怨氣)도 맺혀 있어 조금씩 체내로 흘러들어올 때마다 그의 마음속에는 음울함과 분노가 조금씩 일기 시작했다.

    심협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아 황급히 염식부를 다시 앞가슴에 붙였다. 그러자마자 따뜻한 기운이 다시 앞가슴에서 번져나갔고, 치솟던 우울감과 분노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시야도 금세 원래대로 맑고 깨끗해지면서 모든 핏빛 안개가 다시 사라졌다.

    ‘이 부적은 절대 염식부 같은 것일 리가 없어.’

    심협은 그런 생각을 감추며 몰래 호용을 곁눈질로 살폈다.

    지금 상황으로 미루어 이 부적은 결코 호용이 말한 것처럼 자신의 기운을 숨기는 데에 쓰는 것이 아니라, 음살의 기운이 몸에 침입하지 않도록 막는 용도 같았다. 다만 그는 왜 호용이 이를 숨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숨겨진 내막이 있을 터.’

    일단 의문이 일자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그는 손목을 가볍게 돌려 소매에서 또다시 소뢰부를 한 장 꺼내고는 조용히 품에 넣어 염식부와 겹쳐 놓았다.

    그때, 연못 바로 앞에 서 있던 호용이 사람들에게 법진을 작동시키라고 지시했다.

    심협은 잠깐 망설였지만, 손에 도부를 쥔 채 호용이 전수해준 구결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간간이 이어지는 주문 외우는 소리에 따라 사람들이 손에 쥔 진귀부(鎭鬼符)도 하나둘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다만 사람마다 수련하는 공법이 각자 달라서인지 도부에서 나는 빛도 제각각이었다.

    심협의 도부는 물처럼 푸른빛이었다. 그와 가까이 있는 금돈은 황금빛이었고, 여함은 황토색이었으며, 운낭은 진홍빛, 임청은 청록색으로, 수(水), 금(金), 토(土), 화(火), 목(木) 오행에 딱 들어맞았다.

    심협은 더욱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들의 법력 속성이 오행에 딱 들어맞는 것은 그저 우연이란 말인가? 처음에는 그저 공교로운 일이라 여겼지만, 지금 이 법진을 보니 의도한 바가 틀림없었다.

    “일어나라!”

    호용이 크게 외치자 다섯 개의 도부에서 동시에 빛이 폭발했다.

    심협은 뭔가가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을 느끼고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놓아버렸다. 진귀부가 손에서 떨어져 내렸고, 검붉은 핏방울이 따라서 투두둑 흩뿌려졌다.

    하지만 진귀부는 땅으로 떨어지지 않고 빛을 반짝이며 그의 앞 허공에 둥둥 떠올랐다.

    여합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손에 들고 있던 진귀부가 그들의 손바닥을 찔렀고, 각자의 몸 앞에 떠 있었다.

    “호 어르신,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운낭의 표정이 살짝 변하며 큰 소리로 물었다.

    “미리 말해준다는 걸 깜빡했구나. 걱정하지 마라. 진귀부는 효력을 발휘시킬 때 양혈(陽血)을 조금 흡수해야 해.”

    호용은 술을 한 모금 들이켠 뒤 호리병을 다시 허리에 찼다.

    그는 두 손바닥을 맞비비고 기지개를 켠 뒤, 두 손을 몸 앞에 모았다. 그리고 손바닥을 돌리자 손바닥 한가운데에서 핏빛이 번쩍였고, 그 속에서 자욱한 핏빛 안개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곧이어 사람들 앞에 가로로 떠 있던 진귀부가 갑자기 세로로 서더니, 그 위에 새겨진 흉신 조각상의 두 눈에서 두 줄기 핏빛이 반짝였다. 동시에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가늘고 새빨간 실이 뻗어 나와 중앙으로 모여들었다.

    이 실들은 호용 주위의 핏빛 안개에 닿자 서리가 내리는 것처럼 하나둘 가라앉기 시작했고, 땅바닥으로 들어간 뒤 복잡한 검붉은 색의 진문(陣紋)이 되었다. 진문은 원래 있던 붉은 흙과 어우러져 육안으로 거의 구분할 수 없었다.

    진문이 만들어지자 주위의 모든 것이 다시 평소 모습을 되찾은 듯했다.

    “자, 다들 한동안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으니 잠시 쉬어라. 내가 귀장을 유인해 오면 법력으로 진귀부를 발동해 그를 죽이고 돌아가면 된다. 하하하!”

    호용은 그렇게 말하더니 호탕하게 웃으며 또다시 술을 기울였다.

    여합 등은 원래 그를 굳게 믿고 있었기에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니 여전히 의구심을 가진 심협도 뭔가를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그는 호용이 자신들에게 계속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불안감도 점점 커져만 갔다.

    호용은 덤덤한 표정이라 별다른 이상한 점을 알아낼 수 없었다. 그는 손목을 뒤집어서 선명한 붉은색의 기다란 향을 세 개 꺼내더니 두 손으로 쥐고 사방 천지를 향해 절을 올렸다. 이어서 두 손가락으로 향들의 끄트머리를 쥐고 비틀었다. 그러자 향들의 끄트머리에서 밝은 붉은 빛이 나더니 세 가닥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라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한편, 향에 불이 붙은 순간, 심협은 곧 공기 중에서 짙고 기이한 향기를 맡았다. 그 향기는 매우 특이해서 흔한 단향과는 전혀 달랐고, 비릿하면서도 들척지근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 냄새가 자욱하게 퍼져 나가자 심협의 심장이 갑자기 쿵쾅거리며 세차게 뛰면서 체내의 피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혈관 속에서 미친 듯이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눈앞이 온통 새빨갛게 변했고, 주위에는 핏빛 안개가 자욱하며 원기가 무성하게 뒤얽힌 기괴한 장면이 다시 나타났다.

    그의 시선은 자기도 모르게 연못 쪽으로 돌아갔다.

    그 순간, 연못 속의 연꽃은 다시 붉게 물들었고, 그 사이로 요사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불꽃이 솟아올라 순식간에 연못 전체를 가득 채웠다.

    연못 속 불바다를 바라보던 심협은 희미한 불 그림자 속에서 다시 한번 환상을 보았다.

    이번에는 아까의 용 같기도, 뱀 같기도 한 괴상한 허상이 아니라 체구가 거대한 남자였다. 그는 자줏빛 비단 옷을 입고 허리에는 옥대(玉帶)를 찼으며, 발로는 구름을 밟고 있었지만 머리 위로는 텅 빈 상태였다. 그러니까 머리 없는 사람인 것이었다.

    심협이 깜짝 놀라 흠칫한 순간, 머리 없는 남자가 뒤쪽에서 한 손을 내밀었다. 뜻밖에도 그는 다섯 손가락으로 금빛 피가 뚝뚝 떨어지는 험상궂은 머리 하나를 쥐고 있었다. 뿔이 두 개 달린 용의 머리였다.

    심협이 자세히 살펴보던 그때, 용의 머리가 갑자기 두 눈을 번쩍 떴다. 두 눈은 온통 시뻘건 핏빛이었고, 그 안에 담긴 끝없는 원념이 실체가 된 듯 돌진해왔다.

    다음 순간, 사방의 불길이 순간 모여들더니 화련(火蓮)의 허상으로 변하면서 아홉 개의 화염 꽃잎이 사방에서 하나로 오므라들며 그 괴상한 시신을 감쌌다. 동시에 모든 환상이 사라져버렸다.

    심협은 깜짝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정신이 다시 돌아오며 주변은 평소의 모습을 되찾았다. 다만 눈을 돌려 바라보니 호용이 손에 든 기다란 향들은 이미 절반정도 타버린 상태였다.

    이렇게 되자 심협도 더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척할 수가 없었다. 그는 손의 결인을 거두고 곧장 도부와의 법력 연결을 끊어냈다. 그러자 그의 앞에 떠 있던 진귀부의 빛이 어두워졌지만, 여전히 허공에 떠 있었다. 법진 전체도 완전히 작동을 멈추지는 않았지만, 땅 위의 부적 문양은 조금 흐릿해졌다.

    호용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심협을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알아채기 힘들만큼 미묘하게 불쾌한 기색이 스쳐 지났다가 곧 원래 모습을 회복했다.

    “어찌 된 일이냐? 왜 법력 공급을 끊은 게야?”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심협을 돌아보았는데, 의아한 기색이 가득했다.

    “선배님, 후배의 무능함을 용서해주십시오. 대진을 작동시킬 때, 몸속에 불편한 느낌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습니다. 이러다가는 버티지 못하고 선배님의 큰 계획에 방해가 될 듯합니다.”

    심협이 포권하고는 어쩔 수 없었다는 듯 말했다.

    그러나 누구든 그게 핑계임을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어설픈 거짓말이었다.

    “심 도우, 이게 뭐 하는 짓이오?”

    여합이 따지듯 물었다.

    “어서 대진을 유지 하시오. 귀장을 죽여 없애는 일을 그르친다면 그대가 감당할 수 없을 것이오.”

    임청이 화를 내며 꾸짖었다.

    “심 도우, 지금은 소란을 피울 때가 아니에요. 모든 것을 호 어르신의 지시에 따라야지요.”

    운낭도 그를 타이르며 말했다.

    금돈은 별다른 말이 없었으나 잔뜩 인상을 쓴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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