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두 가지 단서
“감사합니다. 선배님.”
여합이 건네받자마자 포권하며 감사를 표했다.
“부적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
금돈과 다른 사람들도 줄줄이 따라서 감사해 했다.
“부적을 주기는 무슨…… 내가 무슨 갑부인 줄 아느냐? 빌려주는 것뿐이니 다 쓴 뒤에는 꼭 돌려줘야 한다.”
호용은 눈을 부라리며 선배의 풍모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이 말했고, 사람들은 그 말에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호용 스스로도 거리낌 없이 먼저 겉옷을 걷어 올리고는 자신의 단전 위치의 안쪽 옷감 위에 부적을 한 장 가져다 붙인 뒤, 몇 번 툭툭 두드렸다. 그리고는 심협이 훑어보는 것을 보고 입을 열었다.
“나의 수련 경지는 너희보다 높아서 기운 파동도 당연히 더 강하지. 그러니 단전에 붙이는 게 더 안전해. 너희들은…… 단전에 붙이든 단중에 붙이든 알아서들 해라.”
여합 등은 모두 별생각 없이 단전 자리에 붙였는데, 운낭은 단전에 붙이는 게 보기 싫다며 자신의 풍만한 가슴 한가운데에 툭 붙였다.
심협도 운낭처럼 부적을 앞가슴에 붙였다.
이어서 호용이 손을 다시 한번 뒤집자, 손바닥에서 또 빛이 나더니 폭이 2척쯤 되는 어두운 금빛 원반이 나타났다. 원반 위에는 그림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고, 둘레는 주천(*周天: 천체가 궤도를 따라 한 바퀴 도는 일) 365도로 나뉘었으며, 안쪽 원에는 24절기가 표시되어 있었다. 더 안으로는 9궁8괘도(九宮八卦圖) 문양도 새겨져 있었고, 한가운데에는 길이 1촌의 용 모양 바늘이 하나 달려 있었다.
사람들이 급히 둘러서서 보자, 심살반에 방향이 나타나면서 그 위의 바늘이 곧 핑그르르 돌았다.
호용이 눈썹을 치켜 올리며 한 손으로 손가락을 모아 결인하고는 원반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그러자 그의 손가락 끝에서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법력 줄기가 흘러나와 용 모양 바늘에 그대로 주입되었다.
바늘의 용머리 부분, 특히 두 눈에서 미세한 금빛이 비쳐 나오는가 싶더니, 쉬지 않고 회전하던 바늘이 갑자기 느려져 차츰 멈춰 섰다.
하지만 사람들이 드디어 결과가 나왔다고 여겼을 때, 바늘이 마치 그들에게 맞서는 것처럼 팔괘의 동남쪽 방향 손(*巽: 팔괘의 하나, 바람을 상징) 자리를 가리키려다가 갑자기 정남향 이(離)자리로 돌아섰다.
그 뒤, 바늘은 꼭 자석 두 덩이가 동시에 끌어당기는 것처럼 손(巽) 자리와 이(離) 자리 사이에서 흔들거리며 왔다갔다 움직였다.
“선배님,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심협이 때때로 자기 쪽을 가리키는 바늘을 보며 의아해 물었다.
“말도 안 돼! 이 물건이 영기를 잃었을 리는 없고…… 설마 두 곳으로 나뉘었단 말인가?”
호용은 심협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처음으로 심각한 표정을 드러내며 의아해 했다.
“두 곳에 나뉘어 있다니, 설마 귀장이 둘인 걸까요?”
금돈은 표정이 굳어지면서 조금 놀란 듯 말했다.
“선배님, 이곳에 음살의 기운이 너무 분산되어 있어 그런 게 아닐까요? 그 귀장은 살기가 가장 강한 놈이긴 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면 심살반도 자리를 정확히 포착할 수 없지 않습니까?”
임청이 의견을 내놓자 여합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호용이 그 말을 듣고서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
“그 말도 일리가 있군. 어쨌거나 가리키는 방향이 정남과 동남 사이에 있으니, 일단 이쪽으로 가보자. 거기서 찾지 못한다면 반대쪽으로 가면 되지. 분명 그놈을 만날 수 있을 게다.”
“좋습니다.”
사람들이 일제히 응했다.
호용은 손에 심살반을 들었고, 사람들은 좌우 양쪽을 따라 심살반이 가리키는 남쪽을 향해 나아갔다.
대략 반 각 정도 지났을 때였다. 호용이 갑자기 손을 들어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선배님, 왜 그러십니까?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심협과 사람들이 긴장해 물었다.
“앞에 음살의 무리가 가까워졌으니 잠시 기다렸다 가자꾸나.”
호용은 일행을 이끌고 커다란 바위 뒤에 숨으며 말했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무리의 음병들이 황급히 달려 지나갔다. 그들도 청동 갑옷을 입고 손에는 칼과 검을 들고 있었는데, 앞서 만난 음병들보다 조금 더 강해 보였다.
“이제 가도 되겠다.”
음병 무리가 떠나자, 잠시 후에 호용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이번에는 호용이 오히려 속도를 높이라고 명했고, 그들은 황급히 낮은 관목 덤불을 가로질러 거대한 소나무 몇 그루가 있는 곳까지 내달렸다. 그리고 곧이어 그 관목 덤불 근처에서 육신이 거의 썩어 문드러진 강시 몇 마리가 사지가 뻣뻣하게 굳은 채로 펄쩍펄쩍 뛰면서 털 빛깔이 검푸른 산토끼를 쫓아갔다.
심협은 그중 강시 하나가 뛰어오를 때 몸에서 뭔가를 떨어뜨렸으나, 사람들은 보지 못한 듯했다. 심협은 사람들에게 잠깐 기다려달라고 하고는 가서 그 물건을 주워 왔다.
“심 도우, 무슨 보배를 주웠소?”
여합이 궁금한 듯 물었다.
심협이 조심스레 손바닥을 펼쳐보니, ‘대당어제(*大唐御製: 대당의 황제가 만듦)’ 네 글자가 새겨진 손바닥만 한 크기의 영패 하나가 놓여 있었다.
“관부의 영패…….”
금돈이 놀란 듯 중얼거렸다.
“전에 임무를 수행하러 왔던 두 무리 중에 대당관부의 사람이 있었다더니.”
여합이 낮게 읊조리며 말했다.
“아까 그 강시가…… 보아하니 그들은 실패한 듯 하군요.”
운낭이 눈썹을 찌푸렸다.
“관부에서까지 끼어들다니. 그들은 한 번으로 안 되면 분명 그 뒤에 더 강한 사람을 보낼 것이다. 그들에게 수석을 빼앗길 순 없지. 우리도 좀 더 힘을 내야겠구나.”
호용은 전혀 놀란 모습이 아니었다. 그저 조금 초조해 보일 뿐이었다.
여합 등은 그의 말에 너도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심협은 손에 든 영패를 챙겼는데,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대당관부까지 끼어든 임무라면 그들이 생각하는 만큼 간단하지는 않을 터였다.
이후로도 호용은 가다가 서기를 반복하면서 음병과 강시들을 피했고, 덕분에 그들은 내내 평안했다. 그리고 마침내 숲속 어느 탁 트인 곳에 멈춰 섰다.
그곳은 매우 특수하여 초목이 우거진 주위 풍경과 어울리지 않게 사방 100여 장은 온통 벌건 맨흙이었고,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았다. 반면 그 한가운데에는 둘레가 몇 장에 불과한 둥근 연못이 하나 있었다.
사람들은 맨흙 구역 앞에 멈춰 선 채 둥근 연못을 바라보았다. 청록색 연못물의 수면에는 연잎 세 장이 떠 있었고, 중간에는 꽃잎이 아홉 개인 분홍빛 연꽃도 한 송이 보였다.
호용은 가장 앞에서 가다가 누런 부적을 하나 꺼내 뭐라 중얼거린 뒤, 몸 앞에서 대강 휘두르고는 벌겋게 드러난 맨흙 위로 던졌다.
부적은 허공에서 잠깐 팔락거리다가 곧 천천히 땅 위에 내려앉았을 뿐, 어떤 반응도 없었다.
호용은 미간을 찌푸리고는 맨흙 구역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몸을 굽혀 부적을 집어 든 뒤, 잠깐 꼼꼼히 살폈다. 그러더니 흙을 툭툭 털어내고는 다시 품속에 챙겨 넣었다.
이를 본 사람들은 그제야 반신반의하며 뒤따라 붉은 맨흙 위로 들어섰다.
심협이 맨흙 위로 들어선 순간, 갑자기 알 수 없이 가슴이 두근댔다. 동시에 시선이 갑자기 흐릿해지면서 눈앞이 붉고 옅은 안개로 뒤덮인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가 눈을 비비고 다시 보니, 붉고 옅은 안개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는 의아했으나, 다른 사람들은 아무런 이상을 알아채지 못한 듯 태연자약한 표정이었다.
“선배님, 이 지역은 주변과 사뭇 다르게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습니다. 뭔가 좀 이상한 것 같은데요?”
심협은 주저하다가 호용에게 말을 건넸다.
그의 말에 사람들도 하나같이 호용을 쳐다보았다. 다들 궁금했지만, 먼저 묻기는 싫은 모양이었다.
“네 말이 맞다. 이곳에 가닥가닥 원념의 살기가 존재하는구나. 모두들 느꼈느냐?”
호용이 고개를 끄덕 거리며 말했다.
“그랬군요. 저는 제가 환각을 본 줄로만 알았습니다.”
심협은 조금 놀라며 방금 전에 겪은 것을 말했다.
그런데 그가 말을 끝내고 나자 여합을 비롯한 사람들이 그를 보는 눈빛이 어딘가 이상했다.
“왜들 그러시죠? 다들 못 보셨습니까?”
심협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고,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소.”
여합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운낭과 금돈도 같은 대답이었고, 임청 또한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지 않다. 이곳의 원념과 살기는 아주 깊숙이 숨겨져 있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건 아니야. 일말의 흔적이라도 느끼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내 짐작컨대, 이곳이 아마 그 귀장이 오랜 세월 자리 잡은 곳인 듯하다. 어쩌면 애써 그놈을 찾으러 갈 필요도 없을 듯하구나.”
호용은 대견하다는 듯 심협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선배님 말씀은…… 그놈이 스스로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지키고 기다리자는 겁니까?”
여합이 물었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 그냥 기다리기만 하면 너무 심심하지 않겠느냐. 그놈의 소굴을 찾아낸 이상, 이곳에 오원멸살진(五元滅煞陣)을 칠 것이다. 이후에 내 정혈을 미끼로 삼아 그놈을 유인해올까 한다. 그리 되면 진법의 도움을 받아 유리한 시기와 지리의 이점, 연합의 효과까지 차지하게 될 게다. 놈을 죽이는 게 손바닥 뒤집듯 쉬운 일은 아니지 않느냐.”
호용은 또다시 고수의 풍모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실로 훌륭한 방법입니다!”
사람들은 그 계획에 크게 탄복했다.
“귀장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일을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 호 선배님께서는 어서 우리에게 포진 법을 전수해주시지요.”
금돈이 정중한 표정으로 먼저 나서서 청했다.
“급할 것 없네. 내 먼저 이 오원멸살진의 배치와 주의해야 할 사항들을 일러주마. 실제로 전투가 벌어졌을 때 절대로 잘못되면 안 돼. 오원이 흐트러지면 우리는 정말 큰 손해를 보게 될 테니 말이다.”
호용이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호 어르신, 안심하십시오. 절대 어떤 사고도 생기지 않을 겁니다.”
임청이 포권하며 호언장담했고, 다른 사람들도 연이어 맞장구를 쳤다.
심협이 막 입을 떼려는데, 갑자기 어질어질하더니 눈앞이 또다시 흐릿해지고 온통 붉은빛이 나타났다. 그는 버티지 못하고 한 차례 크게 비틀거렸는데, 크고 두터운 손이 곧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심협은 정신을 집중하고 나서야 자신을 부축한 사람이 호용임을 알 수 있었다. 호용의 손바닥이 번득이면서 부드러운 힘을 주입해주었고, 그러자 눈앞에 나타났던 환상이 곧 사라졌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심협이 포권하며 감사의 말을 올렸다.
“정말 괜찮은 것이냐? 진을 칠 수 있겠어?”
호용이 따스한 목소리로 걱정스레 물었다.
“그저 잠시 어지러웠을 뿐, 괜찮습니다.”
심협이 답하자 호용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또다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좋다.”
잠시 후, 호용은 사람들에게 오원멸살진에 대해 설명을 마쳤다.
“자, 법진에 관해서 다들 이해했느냐? 아니면 또 궁금한 거라도 있느냐?”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감에 가득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 오원멸살진은 그리 난해하지 않았다. 그저 각자가 한 방위씩 지키면서 손에 진귀부(鎭鬼符)를 하나씩 들고 있다가, 호용이 전수해준 구결을 읊으며 자신의 법력을 불러일으키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들 몇 사람이 대진의 기둥들이요 법진의 줄기인 셈이었다. 그리고 진두지휘하며 적절한 시기에 귀장을 죽여 없앨 호용이 핵심이자 뿌리였다.
“이게 바로 진귀부다. 모두 하나씩 가지고 있다가 진각(*陣脚: 법진의 기반)법기로 써라. 대진이 작동할 때는 법력을 한 가닥만 주입해 유지하면 된다는 것을 명심하고, 귀장이 법진 안에 들어가면 그때 전력을 다하면 된다.”
호용이 당부했다.
심협이 진귀부를 받아 들고 살펴보니 예전에 흔히 보던 종이부적이 아니라, 옛날에 만들어진 직사각형의 도부(桃符)였다. 오래 묵은 복숭아나무를 깎아서 만든 부적으로, 앞면에는 사나운 모습의 흉신(凶神)이, 뒷면에는 진귀부 부적 문양이 줄줄이 새겨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