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서시의 성회
“맞습니다. 이 부적은 확실히 제 손에서 나왔습니다.”
심협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군요! 심 공자께서 당시 백가에 머무실 때는 소뢰부 같은 낮은 등급의 부적만 그리셨는데, 벌써 고급 부적을 그리기 시작하시다니……. 심 공자는 과연 부적에 있어 과연 백 년에 한 번 보기 힘든 부적 천재라 할 만합니다!”
마수수는 흥분한 목소리로 눈까지 반짝이며 말하자 심협은 쑥스러웠다.
“과찬을 하시는군요. 한데 마 소저께서는 무슨 일로 이리 고생스레 저를 찾아 오셨습니까?”
심협은 습관적으로 겸양의 말을 하고는 물었다.
“아! 실은 부탁드릴 일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심 공자, 저간의 인정을 보아 꼭 도와주세요.”
마수수는 갑자기 일어서더니 깊이 고개 숙여 예를 갖췄다.
“마 소저,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대와 이 심모는 가깝다면 가까운 사이 아니겠소? 능력이 닿는 일이라면 내 필히 도울 것이오. 한데 어떤 일을 부탁하시려는지요?”
심협은 황급히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복잡한 일은 아닙니다. 그저 부적을 한 장 그려주십사 청하고자 합니다.”
마수수는 그렇게 말하면서 품에서 백지를 한 장 꺼냈는데, 그 위에는 부적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심협이 자세히 살펴보니, 이 부적은 문양이 더없이 복잡하여 낙뢰부나 정신부 같은 고급 부적보다도 훨씬 위였다. 틀림없이 상당한 고급 부적이리라.
다만 그 옆에는 이 부적은 흔한 황지와 보통의 부묵으로 그려도 무방하다는 설명이 덧붙어 있었다.
“이, 이게 무슨 부적입니까?”
심협은 다소 당황한 듯 물었다.
“억몽부(憶夢符)라 합니다. 다른 사람의 꿈속으로 숨어들 수 있게 해주는 부적이지요. 그 성질이 특수하기 때문에 강한 위력을 불러일으킬 필요가 없다 보니 평범한 부적지와 부묵으로 그릴 수 있답니다.”
“억몽부라……. 그렇군요. 부적의 길은 역시 넓고도 깊습니다. 다른 사람의 꿈속에 숨어들 수 있는 신묘한 부적도 있다니요. 허허!”
심협은 그렇게 중얼거렸는데, 시선은 줄곧 부적에 꽂혀 있었다. 그리고 이내 눈 한 번 돌리지 않고 억몽부의 문양을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마치 넋을 잃고 매료된 듯한 모습이었다.
마수수는 방해하지 않고 옆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족히 1각이 지나서야 심협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이런, 제가 부적을 살펴보느라 잠시 정신이 팔려서 마 소저를 이런 곳에 그냥 내버려 두었군요. 죄송합니다.”
그는 자기 머리를 툭 치며 한탄했다.
“아닙니다. 심 공자께서 이렇게 부적 연구에 골몰하시니, 소매는 그저 탄복할 따름입니다.”
맑게 웃으며 답하는 마수수를 멀거니 바라보던 심협은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물었다.
“한데 마 소저께서는 이 부적을 만들어 무엇에 쓰려 하십니까?”
“심 공자님, 안심하세요. 소매는 절대 이 부적으로 나쁜 짓을 저지르려는 게 아닙니다. 설명하자면 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답니다. 취보당 일원이신 저의 아버지께서는 다른 당원과 함께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시다가 간악한 자의 음모에 넘어가 혼수상태에 빠지신 뒤로 여태 깨어나시지 못했답니다. 취보당의 한 고수께서 살펴보시고 말씀하시길, 아버지께서 그자의 사술(邪術)에 걸려들어 신혼(神魂)이 꿈속 깊이 빠졌다 합니다. 이 억몽부로 아버지의 꿈속에 잠입하여 그 사술을 풀어야만 아버지를 깨울 수 있다고…….”
마수수는 가볍게 탄식하며 말끝을 흐렸다.
“영존께서 의식을 잃고 깨어나지 못하신다고요? 설마 마 주인장입니까?”
심협은 화들짝 놀라 물었다.
“아닙니다. 사실 마 주인장은 소매의 먼 친척이에요. 그때 건업성에서는 편의를 위해 서로를 부녀로 불렀을 뿐, 소매의 아버지는 따로 계십니다.”
“그랬군요. 허나 제가 알기로는 취보당 휘하에도 부적의 대가들이 많을 텐데, 이 억몽부를 만들어내지 못했단 말입니까?”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또다시 물었다.
“억몽부는 만들기가 아주 어렵답니다. 소매 이미 여러 부적술사들께 도와달라 청해보았습니다만, 안타깝게도 다들 실패하였습니다. 취보당에 고명한 부적술사가 있긴 하지만 저는 취보당에서 힘이 없는 신분이라…… 그런 대가들을 청할 수가 없고요. 요즘 들어 아버지의 상황이 더욱 안 좋아져서 예의가 아닌 줄 알면서도 심 공자께 부탁드리러 온 것입니다.”
마수수는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고, 심협은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심 공자님, 제가 단약으로 아버지 육체의 생기를 유지시키고는 있지만, 저희 아버지는 경지가 높지 않으셔서 오래 버티시지는 못할 거예요. 그러니 제발 도와주세요. 절대로 헛수고하시게 하지는 하겠습니다. 원하는 것이 있으시면 무엇이든지 말씀하세요!”
마수수는 심협이 아무 말도 없자 비통한 목소리로 간청했다.
“마 소저, 저는 돕지 않으려는 게 아닙니다. 사실 저는 타고난 재능이 변변찮아 고수 한 분의 조언과 많은 숱한 수련 끝에야 고급 부적 몇 장을 가까스로 그릴 수 있게 되었을 뿐입니다. 지금 저를 가르치시던 그 고수께서는 이미 떠나셨으니, 저 혼자는 도저히 소저를 도와 이 억몽부를 그려낼 자신이 없습니다.”
심협은 마수수의 붉어진 눈망울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로서도 말하기 어려운 고충이 있었다.
심협이 낙뢰부와 정신부 같은 고급 부적을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은 꿈속의 경험 덕이 컸다. 현실에서의 그의 자질로는 10년을 고되게 수련해도 성공하리란 법이 없다. 하물며 이 억몽부는 얼핏 보기에도 낙뢰부나 정신부보다 훨씬 복잡하니, 지금 그로서는 얼마나 걸릴지 헤아리기도 힘들었다.
“괜찮습니다. 심 오라버니, 천천히 연구하셔도 돼요. 1년 안에만 그려주세요. 만약 끝까지 성공하지 못한다면…… 절대로 무리하게 부탁드리지는 않을게요.”
마수수는 기대와 다른 답에 잠시 흔들리는 듯했지만, 곧 굳건한 말투로 말했다.
“마 소저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한번 시도해 보지요.”
심협은 마수수의 애타는 눈빛에 단호히 거절하지 못했다.
“심 공자님, 이번에 가년성회 때문에 장안성에 오신 건가요? 어떤 물건을 사시려고요? 소매가 조그마한 힘이나마 공자님을 돕겠습니다.”
마수수는 심협의 대답에 안도하며 물었다.
“실은 영화를 구하려고 장안에 왔습니다. 들어보니 이번 대회에 그 보물이 나타날 것이라고는 하던데, 진짜인지는 모르겠군요.”
마수수는 취보당 사람이니 장안성과 가년성회에 대해 사우흔보다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과연 마수수는 깜짝 놀란 눈으로 말했다.
“이번 가년성회에 확실히 영화가 나타나긴 할 거예요. 백팔종인품 영화의 하나인 금양현화(金陽玄火)이지요.”
“금양현화!”
심협 또한 화들짝 놀라 두 눈을 번득였다.
금양현화는 그에게 쓸모가 있는 몇 안 되는 인품 영화 중 하나로, 이에 대해서는 따로 알아본 적도 있었다. 순수한 양기의 불꽃인 금양현화는 귀물에 대한 억제 효과가 더없이 강력해 순양검배를 제련하기에 딱 좋았다.
“아직 그 소식이 퍼지지는 않아서 저도 우연히 알게 되었어요. 다만…… 영화는 워낙 진귀하니 심 공자께서는 많은 선옥을 마련하셔야 할 것입니다.”
마수수는 잠깐 주저하더니 그에게 주의를 주었다.
“마 소저께 가르침을 청하고 싶은 일이 또 하나 있습니다. 고명한 연단사를 혹시 아시는지요?”
심협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묻자, 마수수가 활짝 웃었다.
“심 공자께서 사람을 제대로 찾으셨군요! 마침 소매가 연단사 한 분을 알게 되었는데, 그 대인의 연단술은 온 장안성에서도 윗자리에 오를 수 있을 정도랍니다.”
“정말입니까?”
심협은 크게 기뻐하며 벌떡 일어났다.
“당연하지요. 심 공자님께서 원하신다면 제가 대신 가서 다리를 놓아보겠습니다. 다만 그 대인은 지금 가년성회 일로 한창 바쁘고, 그게 아니더라도 성격이 좀 괴팍해서 원하시는 것을 쉽사리 얻으시기는 힘들 거예요.”
“그럼 마 소저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억몽부는 제가 온 힘을 다해 보지요.”
심협은 애써 억눌렀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묻어났다.
이 점을 알아챈 마수수는 심협에게 어떤 단약을 만들려는지 물었고, 심협은 숨김없이 천년영유 반 병을 얻었노라고 답했다.
두 사람의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마수수는 이내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심협은 그녀를 마당까지 배웅하고는 방으로 돌아와 곧장 억몽부가 기록된 백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그 부적의 문양을 전부 기억했고, 일부 문양의 미세한 변화도 마음 깊이 새겼다. 그리고 부적지와 부묵을 가져다 시도해 보았다. 그렇게 연이어 10장이나 그렸지만, 결과는 모두 실패였다. 심지어 감조차 잡지 못했다.
“부적을 그리는 재능은 그리 향상되지 않은 모양이군. 아무래도 꿈속에 들어가야 이 억몽부를 그릴 수 있으려나.”
그는 슬며시 한숨을 내쉬고는 당장 억몽부에 매달리지는 않기로 했다.
“1년 안에 꿈속에 들어가서 억몽부를 그리는 데 성공하기만 한다면 현실로 돌아와서도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허나 그건 나중 문제야.”
당장은 선옥을 벌어들이는 데 거의 모든 시간을 써야 했다.
* * *
한 달여가 훌쩍 흘러, 1년에 한 번 있는 중원절이 마침내 찾아왔다.
당나라 조정에서는 성 서쪽 숭안사(崇安寺)에서 성대한 제천의식을 거행했다. 당대의 천자와 문무백관들이 운집한 가운데 숭안사의 불빛이 하늘을 비추며 향기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장안성 내 일부 도관(*道觀: 도교 사원)과 사찰에도 복을 비는 도장과 법단이 설치되었다. 백성들의 집에도 하나같이 향대를 세우고 선조들에게 제사를 지내며 지전을 태웠다. 강에 하등(*河燈: 중원절에 공양을 위해 운하에 띄워 보내는 등롱)을 띄우면서 망령들을 천도하여, 곳곳마다 떠들썩한 광경이 펼쳐졌다.
땅거미가 내려앉은 후로도 성안이 조용해지기는커녕 더욱 북적거렸다. 심지어 성안 곳곳에 숲처럼 빽빽한 등롱과 강 위를 떠다니는 무수한 종이등 덕에 낮에는 볼 수 없었던 아득한 아름다움이 눈을 즐겁게 했다.
그런 장안성 내를 한 쌍의 남녀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심협과 사우흔이었다.
사우흔은 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 옷을 입었고, 검은 천을 둘러 얼굴을 가린 채였다. 사람들에게 진짜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게 분명했다.
“장안성은 역시 평범하지가 않아요. 건업성보다 훨씬 시끌벅적하군요.”
심협이 눈앞의 광경에 감탄한 듯 말했다.
“그야 당연하지요. 허나 이것들은 모두 범속세계의 왁자지껄한 정경일 뿐, 서시에 이르면 진정한 선가의 절경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사우흔은 웃으며 그렇게 말했는데, 눈에는 기대가 가득했다.
심협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도 장안성 서시의 명성을 오랫동안 흠모해왔는데, 요 며칠간 창평방에서 폐관하고 부적을 그리느라 오늘에야 대당 제일 방시의 풍모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은 곧 커다란 거리에 이르렀다. 거리 입구에는 거대한 패방(*牌坊: 남에게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을 기리기 위해 만든 문짝 없는 문) 하나가 우뚝 솟아 있었다. 폭이 족히 30장에 이르는 패방에는 용과 호랑이가 서로 다투는 부조 도안이 조각되어 있었다. 용과 호랑이는 모두 커다랗고 용맹했으며, 하늘을 우러러 길게 포효하는 것이 중생들을 내려다보는 제왕의 기상을 띠고 있었다.
그 패방 너머 거리에는 상점이 즐비했는데, 저녁때라 그런지 사람은 많지 않았다.
“도착했습니다. 이 안쪽이 바로 장안성 서시입니다.”
사우흔이 발걸음을 멈추고는 말했다.
“여기가 바로?”
심협은 어안이 벙벙했다. 눈앞의 광경은 그의 예상과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명성이 자자한 장안 서시가 이런 모습이었단 말인가?
“오, 이곳에는 금제가 쳐져 있군요!”
그는 눈앞의 거대한 패방을 잠시 훑어보고는 감탄했다.
패방 사이 허공에는 하얗고 희미한 빛의 장막이 있었는데, 그의 눈썰미가 남다르지 않았더라면 발견할 수 없었을 터였다.
“서시의 가년성회에는 수사(修士)들이 구름처럼 몰려듭니다. 금제를 설치한 것은 백성들이 소란을 피우지 못하도록 막기 위함이겠지요.”
사우흔의 설명에 심협은 문득 완구성 방시가 떠올랐다.
“혹시 완구성 방시처럼 특별한 부적이 있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겁니까?”
“아니에요. 이 금제는 단지 이상 현상을 가리기 위한 것일 뿐, 아무런 수단 없이 지나다닐 수 있답니다.”
사우흔은 그렇게 말하며 성큼성큼 걸어가 하얀 막 너머로 자취를 감추었다.
심협도 곧장 바짝 따라붙었고, 이내 그도 하얀 막 안으로 녹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