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245화 (245/1,214)
  • 245화. 영고(影蠱)

    콰르릉!

    산봉우리와 방패가 맞부딪치자 커다란 굉음이 터져 나왔다. 둥근 황토색 방패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허공에서 짓눌렸다. 그러나 그 위의 노란 빛은 여전히 영롱하여 깨질 기미조차 없었다.

    방패가 밀리는 듯하자 청삼 사내는 대경실색하여 피하려고 했지만, 이미 한 발 늦었다.

    우르릉!

    커다란 소리가 울리는 듯하더니 다섯 산봉우리가 떨어져 내려 짓눌렀고, 사내의 기척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이 때문에 주위의 지면은 더욱 심하게 흔들렸고, 마치 지룡(地龍)이 몸을 뒤채는 것처럼 반경 몇 리의 땅과 산이 움직였다.

    청삼 사내가 산봉우리 허상에 진압당하자 비취색 여의도 빛을 잃고 뚝 떨어져 내렸다.

    “저, 저게 무슨……?”

    막 개산월로 다시 공격하려던 엽중은 청삼 사내가 순식간에 진압당하자 놀라서 우뚝 멈추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서는 사우흔이 신행갑마부의 영향까지 더해져 빠른 속도로 연기기인 벽수문 제자들 틈을 헤집고 다녔다. 벽수문 제자들은 그녀의 그림자도 찾지 못한 채 근처 숲속을 이리저리 헤매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 엽중은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아 물러나고 싶어졌다.

    바로 그때, 그의 발치 쪽 땅에서 작은 소리가 나더니, 분홍색 머리 하나가 쑥 튀어나왔다. 이어서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분홍빛 안개 화살이 나타나 엽중의 오른쪽 정강이를 단번에 관통했다.

    “끄아악!”

    엽중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안개 화살이 지나간 상처 부위의 피부는 빠르게 분홍색으로 변했고, 그 분홍빛이 몸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엽중은 오른쪽 무릎 아랫부분이 감각을 잃고 나무토막처럼 무감각해졌는데, 이 무감각한 느낌마저 빠르게 위쪽으로 번져갔다.

    엽중의 얼굴은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그는 청삼 사내와 벽수문 제자들을 내버려둔 채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는 어떤 신통력을 썼는지 독에도 곧장 쓰러지지 않았고, 절뚝거리면서도 속도는 느려지지 않아 금세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한편, 벽수문 제자들은 청삼 사내가 제압당하고 엽중이 도망가는 것을 보고는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모두가 몸을 돌려 뿔뿔이 도망쳐 사라졌다.

    심협은 잠시 망설였지만, 벽수문 사람들을 내버려둔 채 산봉우리 허상에 짓눌려 있는 청삼 사내에게 다가갔다.

    그때, 눈부신 노란빛 한 줄기가 산봉우리 허상 아래에서 폭발했고, 그로 인해 다섯 산봉우리도 부들부들 떨렸다. 거의 동시에 노란 빛이 한데 모이더니 어디론가 날아갔다.

    이를 본 심협은 재빨리 두 손을 결인하고 휘둘렀다. 그러자 우웅 하고 울리는 소리가 나면서 노란 노을빛이 다섯 산봉우리 위에서 뿜어져 나와, 커다란 그릇 모양을 이루며 주위를 뒤덮고는 땅속으로 잠겨들었다.

    그러나 그 눈부신 노란 빛은 노을빛 덮개가 내려오기 전에 재빨리 날아갔고,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토둔신통(土遁神通)? 역시 보타산 제자답군.”

    심협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금세 다시 펴고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뭔가를 중얼거리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다섯 산봉우리가 날아올라 다시 커다란 황색 인장으로 변해 그의 손에 떨어졌다.

    청삼 사내는 이미 자취를 감췄고, 둥근 방패도 사라진 후였다.

    심협은 이를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았다. 어차피 청삼 사내를 잡았다 해도 죽일 생각은 없었다. 보타산 제자를 죽여 큰 말썽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몸을 돌려 한쪽 옆으로 걸어가 비취색 여의를 주워들었다. 청삼 사내는 정신이 없었는지 이 여의를 챙겨가지 않은 것이다.

    심협은 한옥(寒玉)처럼 차디찬 여의를 만지작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이 여의는 분명 상품일 터였다. 여기에 자모검까지 더하면 그는 오늘 두 가지 상품 법기를 얻었으니 풍성한 수확을 거둔 셈이었다.

    그는 손을 뒤집어 푸른 여의를 챙기고는 대머리 사내에게로 다가갔다. 사내 주변의 독기는 이미 엽중이 날려버린 터라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었지만, 사내의 시체는 맹독을 띠고 있어 건드릴 수 없었다.

    심협이 손을 휘두르자 물줄기 하나가 날아와 진짜처럼 생생한 두 개의 손바닥으로 변했고, 두 손바닥은 대머리 사내의 시신을 더듬더듬 뒤져 뭔가를 끄집어냈다.

    물빛 영패 하나와 하얀 옥간, 검푸른 책 한 권, 그리고 전에 그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작은 녹색 주머니가 있었다.

    “심 도우, 괜찮으시오?”

    사우흔이 멀리서 빠른 걸음으로 달려왔다.

    “괜찮습니다. 사 도우는요?”

    심협은 자세히 들여다볼 새도 없이 물건들을 모조리 석합에 챙겨 넣으며 물었다.

    “그저 한 무리 연기기 졸개들과 맞섰을 뿐입니다. 또 도우의 신기한 부적이 도움을 주었으니 당연히 아무 일 없지요. 그 며칠 사이에 심 도우의 실력이 또 적잖이 발전했을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사우흔은 심협을 빤히 바라보며 감탄한 듯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이곳은 오래 머물 곳이 못 되니 어서 떠나는 것이 좋겠군요.”

    심협은 그렇게 답하며 또다시 물을 한 덩어리 불러와 통령역요 술법으로 검은 통로를 열었고, 이 통로를 땅속으로 보냈다. 그러자 해모충 무춘은 땅속에서 통로를 통해 사라져버렸다.

    무춘은 직접적인 공격 수단은 없었으나 심협에게는 강력한 비장의 무기였다. 아무리 사우흔과 가까운 사이라고는 하나 그녀에게 보이고 싶지는 않았고, 그녀 역시 이를 이해한 듯 눈빛이 살짝 움직였지만 아무것도 캐묻지 않았다.

    두 사람은 전투 흔적을 잠깐 정리한 뒤, 곧장 천갱을 떠나 밤새 길을 재촉해 해가 밝았을 때는 이미 대력산을 떠나 동해만 해변 근처에 이르러 있었다.

    전투를 치르자마자 밤새도록 내달리느라 몹시도 피곤했던 두 사람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는 각자 은신처를 찾아 휴식을 취했다.

    심협은 거대한 바위 아래 가부좌를 틀고 무명공법을 운공하며 소모된 법력을 회복했다. 용혈이 몸속에 녹아든 뒤로 그는 물의 영기를 흡수하는 속도가 크게 빨라져, 반 시진도 지나지 않아 모든 법력을 회복했다.

    심협이 회복을 마치고 나왔을 때, 사우흔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수련 중인 듯했다.

    심협은 방해하지 않고 푸른 자모검과 비취색 여의 그리고 대머리 사내에게서 얻은 물건 몇 가지를 하나하나 꺼내 늘어놓았다. 먼저 대머리 사내의 물건들부터 살펴보기로 했다.

    푸른 영패의 한쪽 면에는 흐르는 물줄기가 그려져 있었고, 다른 면에는 벽수문(碧水門)이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벽수문의 신분을 나타내는 증표이리라.

    그는 영패를 한쪽에 내려놓고 이번에는 푸른 옥간을 집어 들어 정신을 집중하고 자세히 살폈다. 옥간 위에는 깨알 같은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너무 작고 빽빽해서 뭐라고 쓴 것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심협은 순양검결 때를 떠올리며 옥간에 법력을 불어넣어 보았다. 그러자 옥간에서 갑자기 푸른 빛이 뿜어져 나왔고, 작은 글자들이 부르르 떨리며 커지려는 듯했으나 이내 다시 멈췄다.

    ‘이 옥간에도 금제가 걸려 있는 것 같군. 시간이 나면 더 탐색해 봐야겠어.’

    일단 옥간을 챙겨 넣고는 청록색 작은 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주머니 입구는 붉은 실로 묶여 있었으나 심협은 곧바로 열지 않고, 주머니를 귓가로 가져가 눈을 감은 뒤 귀를 기울였다.

    “푸르륵, 푸르륵…….”

    주머니 안에서는 두어 차례 이상한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심협은 두 눈을 뜨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조심스레 붉은 실을 풀어 작은 주머니를 열었다.

    쉭!

    바람을 가르는 듯한 소리와 함께 피비린내가 훅 끼쳤고, 동시에 주머니 안에서 자줏빛 그림자가 튀어나와 심협의 팔뚝으로 달려들었는데, 더없이 빨랐다.

    하지만 심협은 이미 결인까지 한 상태로 대비하고 있었다. 그가 손을 휘두르자 한 줄기 푸른 빛이 자줏빛 그림자 앞을 가로막았다.

    쿵!

    굉음과 함께 자줏빛 그림자가 나가떨어지며 본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손바닥만 한 자줏빛 돌연변이 도마뱀이었다. 몸에는 반점이 가득했고, 머리에는 혹이 하나 돋아 있었는데 반점이건 혹이건 모두 핏빛이었다. 허나 그보다 특이한 것은 코가 보통보다 세 배는 컸고, 콧구멍 안에 검붉은 촉수가 가득 자라나 있다는 것이었다. 조금 섬뜩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심협은 다소 놀란 기색으로 손을 들어 허공을 잡아챘다. 그러자 물줄기 하나가 날아와 손이 되더니 도마뱀을 붙잡았다.

    “키야아아! 캭!”

    자색 도마뱀은 버둥버둥 몸부림치며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댔다. 하지만 기괴한 겉모습과 달리 힘은 약한 것인지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요기는 없지만 몸 안에 다른 기운을 지닌 것이, 보통 도마뱀은 아니로군.”

    심협은 도마뱀을 두어 번 살펴봤지만, 그 내력을 알아낼 수가 없자 손을 휘둘러 다시 작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안에서 희미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는데, 도마뱀은 원통하고도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심협은 아랑곳 않고 주머니를 묶은 다음, 마지막으로 검푸른 서책을 집어 들었다. 책 표지에는 거미와 전갈 같은 사나운 독충 그림이 많아 보는 것만으로도 불쾌했다. 게다가 표지의 재질은 마치 뱀 살갗처럼 서늘하고 미끄러웠다.

    심협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는 서책을 펼쳤다.

    “약선집(藥仙集)…….”

    서책의 첫 번째 장에 이 세 글자가 커다랗게 적혀 있는 것을 보니, 책 제목인 것 같았다.

    ‘약재에 대해 기록한 책인가?’

    심협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계속 책장을 넘겼고, 금세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훑어보았다.

    그 결과, 책의 내용은 그의 짐작과 완전히 달랐다. 영재에 대한 고서가 아니라 약선종(藥仙宗)이라는 어느 문파에서 남긴 고서였던 것이다.

    약선종은 고술(*蠱術: 독충으로 시전하는 주술)을 수련하는 문파였다. 책에 기록된 것 모두 이 고술과 관련된 것으로, 연고(*煉蠱: 독을 지닌 동물들을 한데 모아 서로 잡아먹게 하여 독충인 ‘고(蠱)’를 만드는 과정)에 쓰이는 갖가지 독충과 독초였다. 또한 연고 방법도 적혀 있었다. 다만 대부분은 독충과 독초에 관한 지식이었고, 연고 방법은 영고(影蠱) 딱 한 가지밖에 없었다. 영고는 사람을 찾는 데 쓰는 고충이었다.

    “이 도마뱀이 고충이었군. 어쩐지 기운이 남다르더라니.”

    심협은 녹색 주머니를 집어 들고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 자줏빛 도마뱀의 이름은 자주등 도마뱀으로, 남쪽 우림지역에서 사는 독충이었다. 타고난 후각만 해도 고양이나 개보다도 훨씬 예민한데, 고술을 통해 키우면 열 배 이상 향상 되었다. 이 놀라운 후각으로 영고는 10리 밖의 냄새도 맡을 수 있고, 상대의 발자국을 따라 추적하는 것은 더욱 식은 죽 먹기여서, 냄새를 없애는 수단을 써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다만 영고에게는 약점도 있었다. 후각이 예민한 다른 동물들처럼 영고의 약점도 물이었다. 일단 상대방이 물속에 들어가면 영고도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완구성을 떠난 뒤에 물속으로 긴 거리를 잠행했지. 그래서 그들이 곧장 내 냄새를 따라오지 못하고 사우흔을 추격해온 거야. 앞으로 비슷한 일이 일어나면 수둔술을 더 많이 활용해야겠군.’

    심협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는 흐뭇한 눈으로 손에 든 주머니를 바라보았다. 이 영고는 앞으로 쓸모가 많을 듯했다.

    다만 대머리 사내는 약선집 한 권만 가졌을 뿐, 고술에 정통하지 않았기에 온전히 자신의 피로 이 영고를 오랜 세월 기른 뒤에야 간신히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이 고를 이용하기는 쉽지 않을 터였다.

    그렇다고 영고 한 마리를 더 만들어내려면 우선 자주등도마뱀 서른여섯 마리를 잡아 특수한 약재를 먹여 기르고 특별한 비법으로 배양한 후, 서로를 잡아먹게 해야 한다. 그렇게 3년이 걸려야 한 마리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내게 그럴 시간 따위는 없지.’

    그러던 중 퍼뜩 무언가가 떠올랐다.

    ‘나의 통령역요 술법은 다른 요괴들의 사나운 성질을 제압해 상대를 억지로 굴복시킬 수 있으니, 이 고충에게도 효과가 있을지 몰라.’

    그는 이미 제한된 세 마리와 통령한 후라 더는 통령할 수가 없었지만, 통령역요 술법으로 다른 요수들을 제압하는 건 가능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심협은 다시 작은 주머니의 입구를 살짝 풀고는 통령역요 술법을 운공했다.

    무수한 검은 부적 문양이 갑자기 그의 손바닥에서 떠올라 주머니 안의 영고를 압박했다.

    영고는 통령역요 술법의 검은 부적문양이 몹시도 두려운지 주머니 속에서 울어대며 사력을 다해 주머니 깊은 곳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좁디좁은 주머니 안에서 피할 곳은 없었고, 이내 한 구석으로 몰려 애처롭게 울부짖을 뿐이었다.

    ‘효과가 있어!’

    심협은 크게 기뻐하며 계속 통령술을 운공해 고충을 압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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