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240화 (240/1,214)
  • 240화. 시비에 휘말리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금세 성에 들어섰다. 사우흔은 이곳에 익숙한지 곧장 어느 작고 외진 골목으로 향했다.

    사우흔이 푸른 옥부(玉符) 하나를 꺼내 법결을 몇 마디 외우자 옥부에 푸른 빛 한 덩이가 떠올랐다. 그녀는 그 빛 덩어리를 잡아 앞의 담벼락 위로 휙 집어 던졌다. 그러자 옥부는 그대로 벽으로 녹아들어갔다.

    다음 순간, 푸른 벽돌 담 위에 줄줄이 파문이 일어나더니, 단단했던 돌벽이 빠르게 투명해지면서 잠시 후 푸른빛의 장막으로 변했다. 그 위로 무수한 물결 같은 빛 그림자가 일렁였다.

    “이곳 사람들은 건업성 사람들에 비할 바 없이 소박한 편인지라, 그들이 놀라지 않도록 벽수문에서는 금제로 방시 전체를 가렸습니다. 특수한 방법으로만 들어갈 수 있지요.”

    사우흔의 설명에 심협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각지의 수사들이 모이는 곳에는 세속의 세상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대부분 비슷한 계산이 들어 있었다.

    사우흔은 설명하는 동안 모자가 달린 장포를 한 벌 꺼내 입음으로써 몸과 얼굴을 가렸다.

    이를 본 심협도 장포 한 벌과 너울이 달린 삿갓을 꺼내 갈아입었다. 집을 떠나기 전에 특별히 사람을 청해 만든 옷이었다.

    “심 도우도 준비하셨을 줄은 몰랐네요. 가시지요.”

    사우흔은 살짝 웃어 보이더니, 걸음을 옮겨 푸른 빛의 장막 속으로 사라졌다.

    심협도 뒤를 따랐다.

    빛의 장막을 지나는 순간, 눈앞의 풍경이 아득해지고, 외진 작은 골목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서 갑자기 탁 트인 거리가 나타났다.

    두 사람 뒤에는 푸른빛으로 된 거대한 문 하나가 우뚝 솟아 있었다.

    거리 양옆으로는 크고 작은 건물이 40여 채 있었다. 어떤 집은 높고 큰 데다 말끔하며 지극히 화려하고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는 반면, 어떤 집은 널빤지 몇 개를 그대로 가져다 못이나 한 번 박고 날림으로 지은 것들이었다.

    건물 대부분은 상점들로, 온갖 영재와 부적, 부기 등을 팔고 있었으며, 수사들을 위한 술집과 객잔들도 보였다.

    거리에 오가는 수사는 그다지 많지 않았으나, 수시로 드나드는 것이 그래도 제법 떠들썩한 편이었다.

    이 수사들은 차림새가 가지각색이었는데, 심협과 사우흔처럼 얼굴을 가린 사람이 많아서 그들도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이곳 방시는 배치가 좀 어수선하긴 하지만 물건은 괜찮습니다. 쭉 가면 교역광장도 하나 있어서, 산수들이 거기에 노점을 차려 놓고 물건을 팔기도 해요. 심 도우도 흥미가 있다면 가서 보물이 있나 찾아보셔도 좋아요. 저는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먼저 가보겠습니다. 이따 앞에 있는 술집에서 봐요.”

    사우흔은 분명 이곳을 처음 온 것은 아닌 듯 간단한 설명을 남긴 뒤 손으로 어느 술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심협은 방시를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며 대꾸했고, 사우흔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몇 걸음 가다가 갑자기 멈춰 섰다.

    “한 가지 깜빡할 뻔했네요. 이곳 방시는 벽수문의 고수들이 지키고 있어 귀시와 마찬가지로 싸움을 엄금하고 있으니 명심하세요.”

    “안심하십시오. 내 말썽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니.”

    심협이 가볍게 웃으며 답하자 그의 성정을 잘 아는 사우흔은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심하고 멀어져갔다.

    사우흔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심협은 이내 시선을 거두고 방시 곳곳을 구경했다. 그리 넓지는 않아서 금방 대충 한 바퀴를 돌아볼 수 있었고, 그렇게 대략적으로 파악한 다음에는 어느 잡화점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에는 잡화점에서 나와 영재 상점으로 향했다.

    반 시진 후, 그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어느 재료상점에서 나왔다.

    그는 낙뢰부(落雷符)와 쇄갑부, 정신부 같은 고급 부적을 각각 백 번 이상 그릴 수 있을 만큼의 재료들을 빠짐없이 구입했다. 그밖에도 소뢰부(小雷符)와 신행갑마부의 재료들도 조금씩 산 덕에 기분이 좋았다. 다만 선옥이 꽤 많이 줄었다는 점은 아쉬웠다.

    “정말이지, 돈이란 벌기는 힘든데 쓰는 건 금방이구나.”

    심협은 임랑환 속에 반으로 줄어든 선옥을 확인하고는 장탄식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이 재료들이 부적으로 변하게 된다면 가치는 더욱 커질 테니 후회는 없었다.

    “흠, 고급 부적을 그려서 선옥을 좀 벌어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고급 부적은 선옥 일고여덟 개가 기본이었고, 그중 특히 진귀한 것들은 선옥 10여 개가 필요하니 그 가치는 소뢰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만약 성공률을 더 높일 수 있다면 선옥을 얻는 속도가 소뢰부를 그리는 것보다 훨씬 빠를 터였다. 게다가 지금 그의 실력으로는 완구성 같은 작은 도시에서는 사람들 눈에 띌까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한데 그때, 한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심협이 힐끗 보니, 일고여덟 명의 수사가 호화롭게 장식된 가게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장포를 입었는데, 소맷부리에는 물줄기 도안이 수놓아져 있었다. 선두는 남자 둘과 여자 하나였는데,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껄껄대며 대화를 나누었다.

    가장 왼쪽에는 체격이 크고 얼굴이 각진 청년이 서 있었다. 그는 물빛 장포 차림으로, 주위의 푸른 옷을 입은 사람들과 같은 세력임이 분명했다.

    가운데에는 백의를 입은 소녀가 있었다. 이제 열여덟 살가량 되어 보였는데, 용모가 수려했고, 주변을 돌아보는 시선에 어렴풋이 귀티가 풍겼다.

    오른쪽 남자는 청삼(靑衫) 차림에 키가 훤칠하고 외모가 준수했다.

    이들을 본 주위의 사람들이 갑자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어라? 벽수문의 소문주 엽중(葉重)이 어찌 여기에……?”

    “보아하니 다른 두 사람을 모시고 다니는 것 같은데, 저들이 어떤 신분이기에 엽중이 모시고 다닌단 말인가?”

    심협은 점점 멀어져가는 그 수사 무리를 쓱 보고는 곧 시선을 거둔 후, 앞서 하던 생각을 이어갔다.

    “됐다. 완구성에서는 얼마 머물지 않고 떠날 테니, 선옥은 부족해지면 그때 다시 생각해보자. 어차피 아직은 여유가 있지 않은가.”

    심협은 그렇게 결정하고는 발길 닿는 대로 방시를 거닐다가 금세 저잣거리 가장 깊은 곳, 사우흔이 말했던 교역광장에 이르렀다.

    이곳 역시 폭은 백여 장 정도였고, 몇몇 산수들이 드문드문 난전을 펼쳐 놓고 좌판에 물건들을 늘어놓았는데, 상점 쪽에 비하면 한산했다.

    심협은 여유로이 노점 사이를 누비며 한 바퀴 돌았지만, 숨겨진 보물 같은 것은 발견하지 못했다.

    ‘하긴, 그게 정상이지. 수사들은 하나같이 박학다식하고 안목이 예리한데, 보물이 있다면 어찌 그냥 두었겠는가?’

    그는 흥미가 시들해져 그 자리를 뜨려다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눈을 미미하게 반짝이며 한 노점으로 향했다.

    좌판 뒤에는 세상 풍파를 다 겪은 듯한 얼굴의 중년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의 왼팔은 어깨 아래로는 보이지 않았고, 텅 빈 소매는 허리띠 안으로 대충 구겨 넣은 모양새로 궁상맞아 보였다.

    “도우께서는 무얼 사시렵니까? 이 물건들은 모두 저의 오랜 소장품들입니다. 물건도 좋고 값도 싸니 천천히 살펴보십시오.”

    심협이 다가오자 외팔이 사내는 그렇게 인사를 건넸다.

    심협은 상대의 허풍을 한 귀로 흘리며, 좌판 위의 검은 돌덩이와 그 옆의 온통 회백색인 목재만을 바라봤다.

    검은 돌은 석탄처럼 새카만 것이 특별한 구석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지만, 윗면에 엷은 자줏빛 반점 몇 개가 간혹 나타났다.

    회백색 목재 또한 볼품없었으나, 잘린 단면의 나이테가 평범한 나무의 그것과는 전혀 달라 불규칙했는데, 함께 짜맞춰보면 활짝 핀 한 송이 국화 같았다.

    ‘과연 흑원석과 국화목이로군! 이런 데서 찾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는데…….’

    심협은 두 물건의 내력을 확인하고는 내심 기뻤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두 가지 모두 순양검배를 만드는 데 필요한 부자재로, 예전에 건업성에서 한 차례 수소문한 끝에 그는 이미 주재료인 화린목을 포함한 대부분의 영재를 모은 바 있다. 이제 흑원석과 국화목만 찾으면 모든 재료가 갖춰지는 것이다. 다만 이 두 가지 모두 아주 인기가 없는 재료인지라, 이런 곳에서 우연히 보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흑원석과 국화목을 구한다면 순양검배를 만들 재료는 이미 모두 갖춰질 터. 그럼 마지막 영화(靈火)만 찾아내면 된다.

    “이 두 물건은 얼마입니까?”

    그는 이리저리 둘러말하지 않고 흑원석과 국화목을 가리키며 외팔이 사내에게 물었다.

    “손님께서 안목이 정말 좋으시군요. 이 두 영재는 제가 수년 전 나라 밖의 어느 무인도에서 얻은 것들인데, 요즘 주머니 사정의 여의치 않아 내다 팔게 되었습니다. 오늘 제가 이곳에 판을 벌리자마자 첫 손님으로 오셨으니 당연히 좀 깎아드려야지요. 선옥 다섯 개면 됩니다.”

    외팔 사내는 한바탕 허풍을 늘어놓은 뒤, 손을 내밀어 허공에 숫자 오(五)를 그려 보이며 말했다.

    심협은 속으로 웃었다. 이 사내는 분명 흑원석과 국화목을 알아보지 못하고 이런 가격을 댄 것일 터였다. 이 두 가지 재료의 상태로 미루어 가격이 최소한 선옥 10개 이상은 될 테니 말이다.

    하지만 굳이 상대방에게 일깨워줄 필요는 없었기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선옥 다섯 개를 꺼내 좌판 위에 올려놓고 두 재료를 집어 들었다.

    그때, 옆에서 맑고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앗! 저기 흑운석이랑 국화목이 있어!”

    심협이 돌아보니, 용모가 수려한 백의의 소녀가 어느새 노점 근처로 다가와 놀랍고도 기쁜 표정으로 좌판을 보고 있었다.

    “령아(鈴兒) 소저, 이 재료들이 필요하십니까? 주인장, 얼마요? 내가 사겠소.”

    벽수문 소문주인 엽중이 백의의 소녀 옆에 서서 한 손을 허공에 휘둘렀다. 그러자 푸른 빛이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와 흑원석과 국화목을 향해 굽이쳐 갔다.

    이에 심협은 안색을 굳히며 오른손을 까딱 움직였다. 다음 순간, 어디선가 물줄기 하나가 나타나 순식간에 한 자루 검이 되더니, 허공을 갈랐다.

    철썩!

    파도가 치는 듯한 파공음과 함께 푸른 빛이 가볍게 잘려나갔다.

    그 사이, 심협은 다른 손을 뻗어 그 두 재료를 손에 쥐었다.

    “간덩이가 부었구나! 물건을 내려놓지 못할까!”

    엽중이 잔뜩 노한 얼굴로 손바닥을 짐승의 발처럼 오므리고는 허공을 그러쥐었다. 그러자 그의 손바닥이 아래로 움푹 들어가면서 다섯 손가락 위에 진주 같은 맑은 빛이 한 층 떠올랐다. 동시에 아까 부서져나갔던 푸른 빛도 즉시 다시 뭉쳐 물독만 한 파랗고 거대한 짐승의 발로 변했고, 그 위에도 맑은 빛이 한 겹 떠올랐다.

    거대한 푸른 발은 번개처럼 물의 검을 단숨에 으스러뜨리더니 쉴 틈을 주지 않고 재료를 들고 있는 심협의 손을 향해서 질풍처럼 달려들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심협이 짧게 외친 순간, 그의 왼손이 갑자기 흐릿해지면서 번개처럼 움츠러들며 거대한 발의 공격을 피했다. 이어서 그가 오른 주먹을 불끈 쥐자 그 위에서 푸른 빛이 세차게 뿜어져 나와 반경 삼장을 뒤덮었다.

    그러나 이 푸른 빛은 커다란 고래가 물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그의 주먹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뒤이어 심협은 그 주먹을 내뻗어 거대한 푸른 발의 한가운데를 곧장 내리찧었다.

    그 순간, 엽중의 눈에 섬뜩한 웃음이 스쳤다. 그러더니 그가 다섯 손가락을 오므리자 푸른 발도 따라서 오므라들었는데, 기세를 보아하니 심협의 팔을 단번에 으스러뜨리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바로 그때, 심협의 주먹에서 돌연 십여 갈래의 푸른 빛이 눈부시게 폭발했다. 하나하나가 마치 실체가 있는 것처럼 응결된 상태였을 뿐만 아니라, 검기처럼 예리했다.

    파팍!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이 빛들이 푸른 발을 꿰뚫고는 무수한 푸른 광점으로 부서져 사라졌다.

    심협의 눈에는 한 줄기 희색이 스쳤다. 그가 방금 시전한 것은 바로 예전 꿈속 금탑 안에서 맞서 싸웠던 장검천병의 수법이었다. 그 천병은 검술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온몸 곳곳의 규혈에서 검기를 뿜어내 사방을 공격할 수 있었다. 이에 가까이 다가가지도, 섣불리 손을 쓰기도 힘들었다.

    당시 심협은 무진 애를 쓴 끝에 가까스로 상대방을 이기고 이 신통력과 경험을 얻은 바 있다. 다만 아직은 경지가 낮아 그 천병처럼 온몸에서 검기를 뿜어낼 수는 없었다. 그저 가까스로 주먹의 규혈에서 검기를 내뿜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그 위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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