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237화 (237/1,214)

237화. 사례

심협은 땅바닥에 나동그라진 뒤, 체내의 기혈이 크게 울렁거리다가 겨우 잠잠해진 후에야 손에 쥔 물건을 살폈다. 그러더니 기쁜 듯 활짝 웃었다. 그것은 바로 동관의 오악진형인이었다.

그 무렵, 오홍도 하늘에서 내려와 장검을 든 채 창백한 얼굴로 고목 옆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맞은편 멀지 않은 곳에서 처참한 모습의 동관도 다시 일어서는 것이 아닌가!

그는 오른쪽 몸통과 얼굴 절반의 피부가 벗겨진 것처럼 선혈이 낭자했는데, 그 와중에도 손에 쥔 금빛 장도를 질질 끌며 오홍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왔다. 지금 그는 분노와 원한에 사로잡혀 시뻘건 눈으로 용족 청년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금도가 땅에 질질 끌리면서 자갈에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고,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심협은 오홍이 먹은 환약의 효과가 이미 다해 지금은 거의 도마 위의 고깃덩어리처럼 반격할 힘조차 없음을 알아차렸다. 이에 그는 두 다리 위의 잿가루를 다시 빛내며 오홍을 구하러 가려 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상공에서 푸른 빛이 홀연히 날아와 번쩍이며 곧장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더니 그게 무엇인지 미처 제대로 알아보기도 전에 동관의 등을 향해 날아갔고, 푹 하는 소리와 함께 뜨겁고 붉은 피가 울컥 흩뿌려졌다.

쨍!

난데없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동관의 법기인 금도가 땅에 떨어져 있었고, 금도는 금빛이 사그라든 채 다시 길이 1척의 짧은 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주인인 동관은 커다란 삼지창에 찔려 죽은 채 땅에 박혀 있었다.

“누가 감히 우리 용궁의 태자 전하를 다치게 한 것이냐?”

하늘을 뒤흔드는 포효소리가 들려왔다.

말이 끝나자마자 커다란 형체가 하늘에서 운석처럼 떨어졌고,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부서진 돌들이 사방으로 튀면서 흙먼지가 일어났다.

심협이 집중해서 살펴보니, 이 커다란 형체는 반신을 드러낸 채였고, 서슬 퍼런 얼굴에 날카로운 이를 지녔으며, 머리에는 두 덩이 불꽃 머리카락이 자라 있었다. 등 뒤와 팔꿈치에 모두 지느러미가 돋아 있었고, 한 손에 귀면(鬼面) 방패를 든 채 입을 벌려 포효하는 모습은 흉포하기 그지없었다. 바로 바다를 순찰하던 벽수야차(碧水夜叉)였다.

그는 두 눈을 퉁방울처럼 치켜뜬 채 성큼성큼 동관 앞으로 걸어와 한 손으로 그 머리통을 철썩 내리치자 동관의 머리는 잘 익은 수박처럼 쫙 쪼개졌다.

갈라진 머리통에서 흘러나온 영혼이 막 흩어져 날아가려는 순간, 벽수야차가 그것을 덥석 움켜쥐더니 그대로 입에 쑤셔 넣고는 그대로 꿀꺽 삼켜버렸다.

심협은 이 장면에 놀라서 입이 떡 벌어졌다.

“네놈은 무사할 성싶으냐?”

퉁방울 같은 커다란 눈을 되록되록 굴리다가 심협을 발견한 벽수야차는 크게 포효했다.

그때, 오홍이 황급히 외쳤다.

“청질(靑叱), 무례하게 굴지 마라! 심형은 내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다!”

“소인이 너무 늦어 전하의 옥체가 상하였으니 벌해 주십시오, 구태자 전하.”

벽수야차는 언제 소리를 질렀냐는 듯, 서글픈 목소리로 그리 말하며 총총걸음으로 오홍에게 달려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무엇을 벌한단 말이냐? 제때 와서 내 목숨을 구한 것을 벌하랴?”

오홍이 퉁명스레 핀잔을 주었다.

그러자 청질은 헤벌쭉 웃고는 곧 다시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구태자 전하, 제가 전하를 꾸중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말 다른 이들 몰래 나오셔서는 안 됩니다. 이번에 꼬마 새우 한 마리가 제게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뒷일은 정말 상상하지도 못했을 거라고요!”

할 말을 잃은 오홍은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이 모습을 본 청질은 그에게 조금 더 다가가서는 부들부채처럼 커다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작게 말했다.

“용왕님께서도 이미 사실을 아셨으니, 이번에 복귀하시면 크게 나무라실 겁니다.”

“네가 부왕께 알렸느냐?”

“이리 큰일을 제가 감히 숨길 수 있겠습니까? 달려오기 전에 벌써 사람을 용궁으로 보내 보고하게 하였지요.”

청질이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넌 입이 어찌 그리 가벼운 게냐?”

오홍은 머리가 지끈 아파오는 걸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구태자 전하, 이건 제 탓을 하시면 아니 됩니다. 제가 만약 숨기고 아뢰지 않았다가 정말 태자 전하께 무슨 일이라도 났다면, 제 자손 9대를 멸한다고 해도 용왕님의 분을 풀 수 없을 겁니다. 이 일은 전하 탓을 해야지요. 전하께서 모두를 속이지 않으셨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 아닙니까? 제발 다시는 저를 속이지 마십시오. 제가 곁에 있으면 안전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청질은 시어머니마냥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를 멀찍이서 이를 지켜보던 심협은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저리 흉악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엄청난 수다쟁이로군.’

오홍은 어쩔 도리 없다는 듯 일어나 심협에게 다가와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손목을 뒤집어 하얀 도자기병을 꺼냈다. 그 안에서 나온 누런 단약 두 알 중 하나는 자기가 먹고, 다른 하나는 심협에게 건넸다.

“이건 우리 용궁에만 있는 보익단약(補益丹藥)이오. 회복에 도움이 될 거요.”

오홍은 심협이 빤히 바라보고 있자 걱정 말라는 목소리로 말했다.

심협은 잠시 망설이더니 단약을 받았지만, 바로 먹지는 않았다. 그 모습에 오홍은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재촉하지는 않았다.

“구태자 전하! 앞으로 이러시면 정말로 아니 됩…….”

어느새 따라온 청질이 또다시 잔소리를 하자, 오홍이 눈을 흘겼다.

“알겠다. 이제 나도 좀 쉬자꾸나. 그러니 그 입 좀 다물거라.”

그러더니 오홍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가부좌를 튼 채 호흡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심협도 잠시 망설이다가 단약을 먹고는 마찬가지로 좌선하며 호흡을 골랐다.

사우흔은 약간 떨어진 곳에서 부상을 돌보고 있었다.

“어이, 거기 꼬마새우. 이리 와봐.”

오홍이 부상 치료에 들어간 것을 본 청질은 저 멀리 낭생을 보며 손짓했다.

“선배님, 부르셨습니까?”

낭생이 손에 구리망치를 들고 얼른 다가와 허리를 굽혔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후배 낭생이라 합니다.”

청질의 물음에 낭생은 고분고분 답했다.

“너는 큰 공을 세웠지. 용궁에 돌아가면 용왕께 네 공을 아뢰어 주겠다. 그러니 앞으로 나를 따르겠느냐?”

청질이 낭생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웃자, 낭생은 크게 기뻐하며 땅에 엎드려 절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배님.”

청질은 새로 거둔 이 부하에게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님, 적이 하나 더 있었는데 물의 법술과 은닉에 능합니다. 아까 구태자 전하를 기습했다가 우리 주인님께 격퇴당한 뒤 몸을 숨기고 있습니다.”

낭생은 봉수가 아까부터 줄곧 나타나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말했다.

“아까 내가 이미 신념(神念)으로 사방을 살펴보았는데, 아무런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다.”

청질의 말에 낭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우두머리가 처참하게 죽는 것을 보고 도주했을지도 모르겠군요.”

“어쨌든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고, 저분들을 보호해야 한다.”

청질은 진지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고는 오홍와 심협 곁으로 돌아와 조심스레 주위를 경계했다.

잠시 뒤, 두 무리의 용궁 순해병(巡海兵)이 속속 나타났고, 월아호 인근 지역 전체를 둘러쌌다.

운기조식을 마치고 눈을 뜬 심협은 이 광경에 깜짝 놀랐다.

“심형, 깨어났구려. 우리 이야기 좀 할 수 있겠소?”

오홍이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오홍과 나란히 숲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심형, 솔직히 난 그대가 나를 구하러 돌아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소.”

오홍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내 오형을 처음 만나자마자 오랜 벗을 만난 듯하여 그대의 곤경을 차마 두고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면, 내 말을 믿겠소?”

심협의 말에 오홍의 표정은 기이하게 변했다.

“그야…….”

이렇게 얼버무리는 것이, 심협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그럼 만약 그대가 용궁 태자 신분임을 알아채고 교분을 맺으려 한 것이라 말한다면? 이는 또 어찌 생각하시오?”

심협은 여전히 덤덤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것만으로는 심형이 그리 큰 위험을 무릅쓰고 돌아올 가치가 없지 않겠소? 상대의 경지가 그대보다 훨씬 뛰어나, 죽을 공산이 더 컸으니 말이오.”

오홍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답이 나왔잖소. 내가 그대를 구하러 돌아온 이유는 당연히 벽안금섬 때문이겠지요. 하하하!”

심협이 시원스레 웃고는 말했다.

물론 이는 반만 맞는 이야기였다. 진짜 이유는 자신과 오홍의 관계가, 그리고 인연이 보통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말을 지금 내뱉기엔 너무나 터무니없어서 이유를 짜낼 수밖에 없었다.

오홍은 그 대답에 잠깐 말문이 막혔다. 다소 뜻밖이면서도 이치에 맞는 대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야 어찌 됐건, 심형이 내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소. 그러니 나의 작은 성의를 받아주길 청하오.”

오홍은 품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내 건넸다.

심협이 살펴보니, 그것은 은빛 금속 고리였다. 그 위에는 녹송석(綠松石) 모양의 보석이 여러 개 박혀 있었다.

“오형, 이런 여인네 장신구를 내게 줄 필요는 없지 않소? 차라리 사 도우에게 주는 게 낫지.”

심협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오홍이 웃으며 답했다.

“심형이 잘못 봤구려. 이건 여인네들 장신구 같은 게 아니라 임랑환(琳琅環)이오. 물건을 저장하는 저물법기지. 내 반지와 같은 것으로, 그대들 인간족의 방 두 칸 정도의 공간에 들어갈 만한 물건들을 수납할 수 있소.”

“저물법기? 임랑환?”

심협은 그제야 화들짝 놀랐다.

저물법기는 평범한 법기와 달리 공격이나 방어 수단 없이 그저 수납 용도뿐이었다. 그가 앞서 얻은 석합과 칠성필 모두 그런 법기였지만, 차이는 있었다. 일단 수납공간만 봐도 앞의 두 가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내 식견이 짧았구려. 그럼 오형의 호의를 감사히 받겠소.”

심협은 사양하지 않고 녹송석이 박힌 고리를 건네받으며 웃었다.

“제련 방법과 사용법 모두 간단하오. 법력만 주입해 넣으면 되지. 물건을 보관하든 꺼내든 약간의 법력을 불어넣고, 그 물건을 떠올리면 되오. 단, 살아 있는 것은 절대로 넣어서는 안 된다는 걸 명심하시오.”

오홍이 웃으며 당부했다.

“그건 왜 그렇소?”

“물건을 저장하는 공간에는 저절로 땅과 하늘이 만들어지지만, 천지의 영기는 돌지 않소. 그래서 생명은 살아가기가 어렵소. 그리고 저물법기 안에 다른 저물법기를 넣어서도 안 되오. 두 법기의 공간이 서로 겹치면 폭발할 수 있기 때문이오.”

오홍의 계속된 설명에 심협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심협은 오홍의 안내에 따라 빠르게 임랑환을 제련했다.

심협이 손목에 임랑환을 차고 손바닥을 내밀자 아까 얻은 금도가 소매 사이로 미끄러져 나와 그의 손바닥 위에 놓였다.

“법력을 발휘하고, 생각을 이끌어낸다…….”

심협은 오홍의 설명대로 임랑환을 금도에 겨눈 채 마음속으로 살짝 움직였다. 그러자 임랑환에서 푸른 빛이 번쩍이더니, 그의 손바닥 위에 있던 금도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심협은 법력을 발산하여 임랑환 내부를 살펴보았다. 놀랍게도 그 속에는 금도 한 자루가 한 구석에 얌전히 놓여 있었을 뿐만 아니라, 베개만 한 목합도 놓여 있었다.

“오형, 임랑환 안에 목합이 하나 있소만?”

심협이 의아한 듯 묻자, 오홍이 웃으며 답했다.

“그것 역시 그대에게 주는 것이오. 안에 선옥이 좀 들었는데, 그대에게 분명 쓸모가 있을 것 같아서…….”

심협은 그 말에 눈썹을 살짝 치켜뜨며 다시 물었다.

“오형, 이리 후한 보상이라면 내게 더 원하는 것이 있을 듯한데……?”

“심형, 나를 무시하는 게요? 그저 내 목숨을 구해준 은혜에 보답하고자 함이었을 뿐, 심형에게 더 바라는 건 없소.”

오홍은 심협의 말에 유감이라는 듯 말했다.

“정말 이 벽안금섬 때문이 아니란 말이오?”

심협은 허리춤에 걸린 용수루를 툭툭 치며 직설적으로 말했다.

“목숨을 구해준 것은 구해준 것이고, 금섬은 금섬이오. 이는 별개의 문제이니 따로 이야기합시다.”

오홍 역시 피하지 않고 솔직히 답했다.

“오형, 내가 속이 좁아 그러는 게 아니오. 이 벽안금섬은 내게 정말 큰 쓸모가 있소. 나는…… 그대는 이걸 가져다 어디에 쓰려는 것이오?”

심협은 상황을 설명하려다가 오히려 질문을 던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사람 하나를 구하기 위해서요. 그러니 심형 그대의 목숨과 관계된 일이 아니라면 금섬을 내게 양보해주시오. 내 반드시 몇 배로 갚겠소.”

오홍이 조금 난처한 듯 말을 꺼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