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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235화 (235/1,214)
  • 235화. 협공

    검은 깃발 위로 시커먼 빛이 솟아나더니 깃발이 차츰 펼쳐졌다.

    심협은 탐욕스런 얼굴로 깃발을 빤히 쳐다보는 것 같았지만, 몰래 곁눈질로 동관을 주시하는 중이었다. 상대는 응혼 중기 수사로 자신보다 훨씬 경지가 높은 자가 아닌가.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했다.

    깃발의 검은 빛이 점점 더 강해지면서 또다시 검은 소용돌이가 나타났다. 그리고 오홍의 몸뚱이가 반절쯤 깃발에서 튀어나왔다. 하지만 여전히 깃발의 힘에 속박된 상태였다.

    심협은 그가 상처 하나 입지 않은 것을 보고 내심 안심하며 소매 밖으로 빠끔히 내민 두 손에 부적을 한 장씩 그러쥐었다.

    “여기서 더 나오게 하면 통제하기가 힘들다. 자, 시작하자!”

    동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지만, 마지막에는 목소리가 갑자기 힘겨워졌다.

    그 순간, 심협은 가슴이 철렁했고,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조심해!”

    동시에 그는 곧장 소매 속에 숨겼던 두 손을 꺼내 휘둘러 푸른색과 자주색 부적을 동관에게 내던졌다.

    그 순간, 동관 역시 심협을 향해 한 손을 내리쳤다.

    한편, 때를 같이해 봉수도 이미 물결 같은 무늬가 있는 물빛 장검을 사우흔의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

    사우흔은 반응이 약간 늦었으나, 심협의 경고에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콰르릉!

    폭발음이 울렸다.

    낙뢰부(落雷符)가 터지면서 굵직한 번갯불이 날아가 검은 빛으로 덮인 동관의 손바닥을 곧바로 내리찍었다. 그러나 그가 다섯 손가락을 오므리자 그대로 붙잡히고 말았다.

    새하얀 번갯불은 동관의 다섯 손가락 사이로 불규칙하게 줄줄이 뿜어져 나오면서 눈부시게 번득였다.

    어슴푸레한 자줏빛을 반짝이는 쇄갑부 위에 ‘파군(破軍)’이라는 두 글자가 빛났고, 뒤이어 전체가 환한 금빛을 내뿜었다. 그리고는 창과 방패 같은 금빛 허상으로 변해 동관에게로 곧장 날아갔다.

    동관은 손바닥으로 낙뢰부의 힘을 억지로 버텨냈으나, 부적의 위력이 예상을 뛰어넘어 팔의 감각이 사라질 정도였다. 이에 두 번째 부적에서 전해지는 강력한 살기를 느꼈을 때, 약간 두려운 마음이 들어 더는 모험을 감행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깃대를 쥔 그의 손에서 시커먼 광채가 피어오르면서 고요했던 깃발이 갑자기 촤라락 소리를 내며 휘몰아쳐 쇄갑부를 그대로 덮어버렸다.

    이는 실로 심협의 예상을 뛰어넘는 반응이었다. 고급 부적 두 장을 동시에 사용하느라 법력 소모가 커 싸움을 이어가기 어려웠던 그는 어렵사리 그린 쇄갑부를 검은 깃발이 거둬가는 걸 그대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다음 순간, 검은 깃발이 쇄갑부가 변한 빛을 집어삼켰다.

    “고얀 놈! 하마터면 네놈 수작에 걸려들 뻔했구나!”

    동관은 깃대를 쥔 채 물러나며 아직 두려움이 남은 목소리로 말했다.

    심협도 사월보로 그와의 거리를 벌렸다.

    그가 슬쩍 고개를 돌려 보니 사우흔과 봉수가 한창 뒤엉켜 싸우고 있었다. 당장 우열을 가리기는 힘들어 보였다.

    “여형! 천한 네년이 감히 우리 형님을 죽이고 성단(聖壇)을 배반하다니, 내 반드시 널 죽는 것보다 못하게 살도록 만들어주마.”

    봉수는 눈시울을 붉히며 사우흔을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 독살스럽게 말했다.

    사우흔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손에 붉은 비단을 들고 그에게 맞섰다.

    심협은 오래 한눈을 팔지 못하고 다시 동관에게로 눈을 돌렸다. 응혼 중기 수사와 정면으로 맞서야 하는 상황이니 그에게는 승산이 전혀 없는 셈이었다.

    그러나 그는 실성이라도 한 것인지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그리고 그 순간!

    쫘악!

    희미하게 천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동관은 표정이 급변해 손에 든 검은 깃발을 내려다보더니 대경실색했다.

    깃발 위에는 어느새 깨진 도자기 같은 촘촘한 무늬들이 나타났고, 실오라기 같은 하얀 빛줄기가 안에서 비쳐 나와 계속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다음 순간, 갑자기 깃발에서 맑고 우렁찬 용의 포효가 들려왔다.

    “캬오오오!”

    한 줄기 금빛이 그 안에서 폭발하며 부풀어 오른 하얀 빛의 갈라진 틈에서 거대한 용의 머리가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쳤다. 그리고는 마치 깊은 못과 긴 골짜기에서 기어 나온 것처럼 몸이 갑자기 깃발의 속박을 벗어나 단번에 하늘 높은 곳으로 솟구쳤다.

    동시에 검은 깃발이 하얀 빛 속에서 무수한 조각으로 찢어졌다.

    “안 돼!”

    동관은 안타까움과 분노가 뒤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그는 시선을 돌려 자신의 소중한 법기를 망가뜨린 심협이라는 놈을 노려보았다. 불꽃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은 눈빛이었다.

    뒤이어 그가 손을 뻗자 길이 1척 정도의 금빛 소도(小刀)가 소매 사이에서 미끄러져 나오더니, 금빛이 번쩍이면서 3척 길이의 금빛 장도로 변했다.

    동관은 발밑에 검은 바람이 휘몰아치는 듯 극에 달한 속도로 심협에게 달려들어 칼을 크게 휘둘렀다. 심협의 머리를 단박에 박살낼 참이었다.

    이미 대비하고 있던 심협은 발밑에 달빛을 반짝이며 사월보를 운공하며 재빨리 피했다.

    금빛 칼끝은 그의 머리 위를 바짝 스쳐 지나갔고, 10장이나 늘어난 금색 도광(刀光)이 놀라운 기세로 뻗어 나갔다.

    콰쾅!

    사방에서 연기와 흙먼지가 일어나며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고목 수십 그루가 도광에 맞아 잇달아 쓰러졌다. 그리고 밑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거대한 계곡이 눈앞에 나타났다.

    “사 도우, 싸움에 연연하지 말고 어서 갑시다!”

    심협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크게 외쳤다. 그리고 곧장 사월보를 운공하여 천갱 변두리로 내달리면서, 소매 속에 숨겨 놓았던 비행부를 틀어쥐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 갑자기 그의 발밑에서 익숙한 한기가 올라왔다.

    재빨리 고개를 숙여 보니, 땅바닥에 하얀 안개 같은 것이 흐르며 얼음 결정이 순식간에 응결되었고, 그의 종아리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사우흔은 몸이 거의 절반이 하얀 얼음결정 속에 얼어붙어 있었는데, 그녀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봉수가 결인한 채 하얀 김이 무럭무럭 솟아 나오는 둥근 나반(*羅盤: 풍수가가 사용하는 원판)을 쥐고 있었다.

    “죽어라!”

    동관이 심협에게 돌진해오더니 금빛 칼을 세로로 휘둘렀다.

    솟구쳐 나온 도광이 막 심협의 몸에 떨어지려는 찰나!

    쐐액!

    하늘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빠른 속도로 내려오더니 거대한 금빛 용의 발이 동관의 머리를 잡아채려 했다. 그 발에서는 금빛이 날카롭게 빛났고, 쇠를 자르고 옥을 끊을 듯한 용맹스런 기세가 담겨 있었다.

    동관은 움찔 놀라 즉시 칼의 방향을 바꿔 위로 비스듬히 쓸어 올렸다.

    챙!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동관의 칼은 방향을 급격히 바꾸느라 힘이 현저히 줄었으나, 금빛 도광은 용의 발에 스치면서 무수한 불꽃을 튀긴 후에도 금룡으로 변한 오홍을 베었다.

    칼끝이 지난 곳에서 핏빛은 보이지 않았으나, 금빛 비늘이 적잖이 벗겨져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이 일격에도 오홍은 물러서지 않았고, 발로 금빛 칼의 칼끝을 막아내면서 동관의 온몸을 깔아뭉개려 들었다.

    심협은 이 기회를 틈타 어수지술(御水之術)을 발휘하여 정강이를 붙잡은 얼음결정을 조금씩 녹이기 시작했다.

    “흥! 다들 물에서 다니는 것 중에는 용의 힘이 가장 강하고, 땅을 밟고 다니는 것 중에는 코끼리의 힘이 가장 세다 하여 용상지력(*龍象之力: 용과 코끼리의 힘)이라더니, 오늘 보니 용의 힘은 별것 아니구나. 하하하!”

    동관은 오홍의 거대한 발에 깔린 채, 차갑게 웃으며 내뱉었다. 그러더니 남은 손으로 칼등을 쳐올렸다.

    그러자 거대한 금빛 호(弧)가 퍼져 나가며 격렬한 진동을 일으켰다.

    쿵!

    오홍의 발에서 한 줄기 핏빛이 뿜어져 나왔고, 그 거대한 몸도 나가떨어졌다.

    그 무렵, 곤경에서 벗어난 심협의 발아래에서는 파도가 넘실거렸고, 그는 빠르게 뒤로 물러나 오홍에게로 향했다.

    한편, 사우흔도 작열하는 불로 단단한 얼음을 녹이고 심협의 곁으로 물러났다.

    “네놈들이 나를 건드렸으니 모두 다 죽여주마!”

    동관은 세 사람을 훑어보며 성을 내기는커녕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말을 마친 그는 허리춤에서 주머니 하나를 풀더니, 길이가 검지만 한 기둥 모양 인장을 꺼냈다. 빛깔과 재질은 백옥 같았고, 사면에는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문양의 형태는 각기 달랐지만, 모두 우뚝 솟은 산봉우리였다.

    인장 위쪽은 작은 산봉우리 형태로 조각됐는데, 아래쪽에는 진악(鎭岳)이라는 인문(印文) 두 글자가 옛날 전서체로 새겨져 있었다.

    그가 손을 뻗어 인장을 내던지자, 백옥 인장은 심협 등의 위쪽 허공으로 날아들었다. 동시에 ‘진악’이라는 인문이 강렬한 빛을 내뿜었다.

    심협과 두 사람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머리 위에서 보이지 않는 힘이 떨어져 내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무거운 물건을 짊어진 것처럼 순간적으로 허리가 휘었고, 팔을 드는 것조차 어려웠다.

    보이지 않는 힘이 점점 무거워지면서 허공에 모호한 도형의 허상이 떠올랐다. 놀랍게도 10여 장 높이의 험준한 산 모양 허상이었는데, 그 위에는 산등성이와 계곡이 세로로 퍼져 있어 마치 실재하는 것만 같았다.

    “오악진형인(五嶽眞形印)! 아니, 모조품이로군.”

    오홍은 도장의 정체를 알아차리고는 화들짝 놀랐으나, 이내 등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그대로 그 산봉우리 허상들을 밀어 넘어뜨렸다.

    “모조품이면 어쩔 것인가? 그것만으로도 네놈들 따위는 몰살시킬 수 있지. 크흐흐.”

    동관은 차게 웃으며 한 손으로 삼산결(*三山訣: 중지와 약지를 접고 나머지 세 손가락만 펴는 수인)을 맺은 뒤 손바닥을 뒤집어 아래로 꾹 눌렀다.

    그러자 허공에 떠 있던 인장에서 또다시 산악 문양이 번득였고, 도장의 몸체도 아래로 떨어졌다. 허공에는 다시 한번 산악 허상이 떠올랐는데, 앞서 나타난 산봉우리의 허상과 순식간에 겹쳐졌다.

    그 순간, 심협은 어깨 위의 중압감이 배로 커진 것을 느꼈다. 두 무릎은 거의 압력을 버틸 수가 없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사우흔은 이미 거의 무릎을 꿇은 상태였다.

    “크아아아!”

    오홍의 입에서 포효가 터져 나왔다. 그는 온몸에서 금빛을 뿜어냈고, 조각조각 금색 비늘을 끊임없이 떨었다. 온몸 곳곳의 근육들이 온힘을 다해 버티려는 듯했다.

    ‘오악진형인은 오악(*五嶽: 중국의 다섯 명산) 산봉우리의 진짜 형태를 옛 방법으로 탁본한 것으로, 오악의 무거운 압력을 잠시 빌려 적을 가두는 법보요. 이 늙은이가 쓴 것은 비록 모조품이지만, 그래도 극품 법기의 수준에 이른 것 같소. 그가 다섯 산악의 형상을 모두 찍어내면 우리는 절대 도망갈 수 없을 거요.’

    오홍이 신식으로 전하는 목소리가 심협과 사우흔의 귓속에 울려 퍼졌다.

    “왜 아직 안 오는 거야?”

    심협은 마음이 몹시도 초조해져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이를 악물고 버티는 사우흔의 두 귀에서는 이미 피가 배어 나왔다.

    “아직까지 버텨내다니, 내 너희를 과소평가했구나.”

    동관이 비웃으며 결인한 손을 다시 아래로 뒤집었다. 그러자 허공의 인장이 다시 빛을 번쩍이며 또 하나의 우뚝 솟은 산봉우리 문양이 번득였다. 이어서 허공에서는 산악의 허상이 또 하나 떠올라 무겁게 내리눌렀다.

    꽝!

    묵직한 소리가 심협을 비롯한 두 사람의 마음속에서 울리는가 싶더니, 그들의 몸을 짓누르던 힘이 마침내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심협과 사우흔은 앞으로 고꾸라져 마치 바닥을 기듯 엎어졌고, 뺨도 땅에 딱 붙은 채로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들에 비하면 오홍은 그나마 잘 버텨냈는데, 실은 그가 가장 큰 압력을 감당하는 중이었다. 실제로 온몸의 뼈마디에서 콩 볶는 소리가 울렸다.

    한편, 심협은 뺨을 땅에 바짝 눌린 채 속으로 통령구결을 가만히 외웠다. 그러자 위로 뒤집힌 손바닥 한가운데에서 납작한 소용돌이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소용돌이 한가운데에서 짙은 요기가 날아와 허공에서 한 바퀴 돌더니, 두 손에 검고 빛나는 구리망치를 든 커다란 새우 병사로 변했다. 바로 낭생이었다.

    쿵! 쿵!

    무겁고 둔탁한 소리가 두 번 이어지더니, 이제 막 전송되어 온 낭생이 나타나기가 무섭게 산악의 거대한 압력에 눌려 그대로 쓰러졌고, 두 자루의 구리망치도 땅에 세차게 떨어졌다.

    “하하하! 그게 네가 기다리던 지원병이냐? 우습구나. 하하하하!”

    동관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심협은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비죽이며 어렵게 물었다.

    “동해 용궁으로 가서 지원병을 요청하라 하지 않았더냐?”

    “용궁의 경비가 삼엄하여 들어가지도 못했습니다.”

    낭생의 새우 머리는 거의 납작해질 지경이었다.

    “이번에는…… 정말 끝장인 게로구나.”

    심협은 그 말을 듣고 완전히 낙담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제가 바다를 순찰하던 야차(夜叉)를 우연히 만나 설득했더니 그가 제 말을 믿고 달려오는 길이었습니다. 주인께서 저를 소환하셨을 때 그가 제게 이걸 주더군요.”

    낭생이 손바닥을 땅바닥에 붙인 채, 움찔거리며 힘겹게 심협을 향해 기어가 무언가를 건넸다.

    그것은 자줏빛 부적이었다. 그 위에는 영기가 넘쳐흐르는 것이, 딱 봐도 고급 부적이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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