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의심
심협은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급히 포권하여 예를 갖추었다.
“나를 살렸구려. 진심으로 감사하오.”
“됐어요. 지난번 장풍곡에서는 심 도우가 나를 구해줬으니 이제 빚을 갚은 셈 치지요.”
사우흔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내 방에 있던 쪽지도 사 도우가 남긴 거요?”
“물론이죠. 안타깝게도 심 도우가 남의 충고를 잘 듣는 사람이 아니었지만요. 원래 오늘 저녁 몰래 찾아가 상황을 좀 알려주려 했지요. 한데 그 용이 이리 참을성 없이 정체를 드러내고는 금섬을 깨울 줄이야 누가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어요?”
사우흔은 부인하지 않았다.
“그대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오? 그 사람들은 도우의 동료들 아닙니까?”
심협은 속으로 더욱 의심이 들었다.
“그들은 모두 연신단 사람입니다. 저도 백가를 떠난 뒤에야 가입했지요.”
“연신단? 그건 무슨 종문(宗門)이오? 처음 들어보는 것 같은데…….”
사우흔은 그의 말에 잠깐 머뭇거리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세상에 내놓을 만한 종문이 아닙니다. 제가 거기 들어간 것도 의지할 곳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고요.”
“그럼 왜 들어간 것이오?”
“사실대로 말하지요. 제게는 오라버니가 하나 있어요. 허나 오래전, 간악한 자에게 해를 입어 지금은 신혼이 온전치 않고, 단전도 모두 망가져 산송장이나 다름없습니다. 마침 연신단에 단전을 다시 세우고 법맥을 다시 열도록 돕는 독특한 법문(法門)이 있다는 정보를 얻었지요.”
사우흔은 주위를 살피더니 가볍게 한숨을 내뱉고는 설명했다.
“그렇다면, 그대가 백가의 강신비술을 훔친 것 역시 그 때문이었소?”
심협이 표정을 굳히며 물었으나, 사우흔은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강신술에는 신혼에 양분을 공급할 수 있는 법문이 하나 있거든요.”
“그랬군요. 혹시 나 때문에 지금까지의 공로가 수포로 돌아간 건 아니오?”
심협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으나, 사우흔은 싱긋 웃었다.
“괜찮아요. 심 도우만 속히 이곳을 뜬다면 그럴듯하게 속여 넘길 방법이 있으니까요.”
사우흔은 그렇게 말하면서 장심에 붉은 빛을 밝혀 얼굴을 문질렀다. 이내 그녀는 아까의 얼굴로 다시 돌아갔고, 그 상태로 몸을 굽혀 봉산의 얼굴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녀가 허리를 펴고 일어났을 때, 심협은 또다시 깜짝 놀랐다. 봉산의 얼굴이 자신과 똑같이 변해 있는 것 아닌가!
“이건……?”
“날골역용술(捏骨易容術)이에요. 살아 있는 사람은 기혈이 막힘없이 통해 열 시진 동안 변하지 않고 유지할 수 있지만, 죽은 사람은 기껏해야 1각 정도밖에 유지할 수 없지요. 그러니 저는 서둘러 이걸 가지고 돌아가야만 합니다. 여기서 이만 헤어지는 게 좋겠군요. 언젠가 또 만날 기회가 있겠지요.”
말을 마친 사우흔은 포권을 하고는 등에 봉산의 시신을 업은 채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
하지만 심협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사 도우에게는 미안하지만, 난 갈 수가 없소.”
“심 도우, 벽안금섬이 진귀하긴 하나 목숨보다 값지진 않습니다. 푸른 산이 남아 있다면 땔 나무 걱정은 하는 법이 없다는 이치야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동 노인은 대외적으로 자신이 응혼 초기 수사라 말하고 다니지만, 실은 이미 응혼 중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니 괜히 목숨을 걸지 말아요.”
사우흔은 진지하게 충고했다.
“나 역시 사실대로 말하자면, 내가 벽안금섬을 찾으러 온 것은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서요. 그러니 내게 그 금섬은 목숨만큼 값지지요. 그리고 그 용…… 이름은 오홍이라고 하는데, 동해 용궁의 구태자입니다. 내 벗이라고 할 수도 있으니 그를 구해야만 하오.”
심협은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사우흔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가 용궁의 태자라고요? 그럴 리가…… 그렇다면 어찌 종복 하나 안 데리고 홀몸 다닌단 말입니까?”
“그것까지는 나도 잘 모르오. 허나 어쨌든 그는 내 벗이니, 그가 목숨을 잃는 걸 이대로 지켜볼 수는 없소.”
심협은 이렇게 말했지만, 사실 스스로도 자신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사우흔은 한참을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사 도우. 그대의 상황을 알고 있으니 도와달라고는 하지 않겠소. 다만 그대가 이번 싸움에서 비켜나주길 바랄 뿐이오.”
“사람을 구하려면…… 잘 생각해 봐야지요.”
사우흔은 봉산의 시체를 발치에 내던지고는 한 손으로 입가를 매만지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
* * *
월아 호숫가. 동관은 몸 앞에 둘둘 말린 커다란 검은 깃발을 꽂아둔 채 위엄 있는 표정으로 돌 위에 앉아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결인하더니 작게 뭔가를 중얼거리고는 손을 한 차례 휘둘렀다. 그러자 새카만 빛이 그의 장심에서 날아가 검은 깃발 위를 쓸어내렸다.
촤르륵!
요란한 소리와 함께 깃발이 펼쳐졌다.
동관의 시선은 깃발 한가운데에 떨어졌다. 그곳에는 마치 금실로 수놓은 듯, 이를 드러내고 발톱을 잔뜩 세운 생생한 금빛 진룡이 떠올라 있었다.
노인이 다시 손을 휘두르니 깃발 위에 검은 빛이 일렁였고, 금룡 주위에 검은 소용돌이가 나타났다. 마치 칠흑 같은 커다란 구멍에서 용의 머리가 뻗어 나온 것만 같았다.
하지만 검은 빛은 잠시 번득인 것에 불과했고, 소용돌이도 용 머리가 나오자 곧 다시 굳어졌다.
용머리 위의 빛은 사그라들어 다시 사람의 형상으로 변했다.
“선배님, 이 후배가 뭘 어찌 해야 저를 자유로이 풀어주시겠습니까?”
오홍이 묻자 동관은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용서를 빌어야 하지 않겠나. 한데 감히 나와 거래를 하려 드는 게냐?”
“제 생각에는 선배님도 용서를 비는 것보다는 제 조건을 더 듣고 싶어 하실 듯싶은데요?”
오홍이 여유롭게 말했다.
“하하하! 재미있는 놈이로군. 좋다, 말해 보거라. 네 생각에는 네 목숨 값이 얼마나 되는 것 같으냐?”
동관이 호탕하게 웃고는 물었다.
“주도권은 선배님 손에 있으니, 선배님께서 먼저 값을 대시지요. 법보든 기물이든, 영약이든 선재(仙材)든, 아니면 선옥이든, 이 후배가 최대한 선배님이 원하시는 바를 충족시켜드리겠습니다.”
오홍은 여전히 태연자약했다.
“이런 상황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여유로운 걸 보니, 너는 절대 개천이나 우물의 용궁 따위에서 온 자일 리가 없겠구나. 동해 용궁에서 온 것이냐?”
동관의 표정이 차츰 진지해지며 신중하게 물었다.
오홍은 그 말에 표정이 살짝 변했지만, 여전히 태연했다.
“선배님의 도법(道法)이 높고도 깊으시니, 창과 방패를 옥과 비단으로 바꾸고자 하기만 하신다면, 제가 우리 일족의 귀빈으로 선배님을 추천하고자 합니다.”
그의 말은 정중하고 간곡했지만, 자신이 동해 용궁 후손의 신분임을 직접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이놈아, 말로 떠볼 것 없다. 네놈이 동해 용궁에서 온 게 아니라면 내 너를 죽여도 후환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네가 동해 용궁에서 왔다면 내 더욱이 너를 죽여 후환을 없앨 것이다. 그러니 너는 어쨌든 죽게 될 게야. 흐흐흐.”
동관이 갑자기 헤벌쭉 웃으며 말했다.
“저를 죽인다고 해서 후환을 없앨 수 있겠습니까? 제가 죽으면 용궁에서는 바로 살펴볼 터. 남은 혼백이든 약간의 핏줄이든, 제 흔적을 찾아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요.”
오홍은 여전히 비굴하지도, 그렇다고 거만하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허허. 내 당연히 그런 능력은 없지. 그래서 난 네놈을 죽이지 않고 총단으로 데리고 돌아갈 생각이다. 그때가 되면 성주님께서 네 온몸의 용혈(龍血)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제련하실 것이다. 용의 비늘과 용골(龍骨)도 신묘한 효능이 있지. 그리되면 너희 용궁도 분명 네 시체를 한 점도 찾을 수 없을 것이야.”
동관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오홍도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지금 그는 이 괴상한 검은 깃발 속에 갇혀 온몸의 신통력을 모두 속박당한 탓에 용궁에 소식을 알릴 방법이 있어도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네놈이 벽안금섬을 잡을 때 썼던 그 보물이 바로 소문으로만 듣던, 천하의 수족들을 제압할 수 있다는 용수루(龍須簍)겠구나. 네가 얌전히 그 물건과 벽안금섬을 내놓기만 한다면, 내 너를 총단으로 가는 동안 고생시키지 않을 거라 약속하마.”
“굳이 제게 말씀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가져가실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가져가시지요.”
오홍은 그렇게 말을 마치고는 눈을 감아버렸다.
이 모습을 본 동관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뭔가 말하려는 그때, 사람 형체 하나가 멀리서 쏜살같이 달려왔다. 봉수였다.
동관은 손을 대충 휘둘러 검은 깃발을 다시 말아 올려 오홍을 그 속에 감쌌다.
봉수는 가까이 다가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 세 개를 대충 휙 집어던졌다. 머리들은 동관의 발치까지 데굴데굴 굴러갔다. 머리는 각각 객잔 주인장과 점소이, 요리사의 것이었다.
동관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 어르신, 봉산과 여형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봉수가 사방을 쓱 둘러본 뒤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저기 돌아오지 않았느냐.”
동관은 월아호의 반대편 기슭을 가리키며 답했다.
봉수가 고개를 돌려 보니 마침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오고 있었다. 손에는 피범벅이 된 사람 머리가 하나 들려 있었는데, 보아하니 아까 달아났던 자였다.
그런데 곧장 걸어오는 두 사람 중 여형은 멀쩡했지만, 봉산의 몸에는 핏자국이 가득했고, 안색도 평소보다 더욱 창백했다.
이 두 사람은 당연히 날골역용술을 이용해 변신한 사우흔과 심협이었다.
“형님, 어찌 된 일이오?”
봉수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괜찮다. 잠깐 방심한 틈에 그놈 속임수에 말려들었어.”
심협은 마른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말을 마친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손에 들고 있던 머리를 내던졌다.
동관은 자리에서 일어나 핏물과 진흙이 덕지덕지 붙은 머리를 발끝으로 헤집고는 얼굴을 자세히 살펴본 뒤 웃으면서 말했다.
“이번 일은 이렇게 마무리됐으니 돌아가면 너희에게 상이 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동 어르신.”
봉수는 희색이 만면해 포권을 했고, 심협과 사우흔도 재빨리 감사를 표했다.
“동 어르신, 붙잡은 진룡은 어찌 처리하실 생각입니까?”
봉산…… 아니, 심협이 물었다.
“당연히 총단으로 데려가 성주님께 넘겨드려야지.”
동관은 별생각 없이 대꾸했다.
“듣자하니 진룡은 온몸이 보배라 피, 고기, 힘줄, 뼈, 수염, 발톱, 비늘, 뿔 할 것 없이 모두 천하의 영약이라더군요. 그냥 넘겨버리기에는 아깝지 않습니까?”
심협은 봉산의 말투를 흉내 내며 탐욕스런 표정으로 슬쩍 떠보듯 말했다.
“그래? 그럼 너는 어찌하고 싶으냐?”
동관이 눈썹을 치켜 올리며 물었다.
“제 말은, 어찌 그의 뿔 하나 꺾지 않고, 발 하나 끊지 않으며, 비늘 몇 조각 벗기지 않고, 고기 한 점 베지 않느냐는 겁니다. 총단에서 물으면 전투의 흔적이라 말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성주님께서 의심하신다 해도 이 진룡은 그저 전리품일 뿐, 분부대로 금섬은 붙잡았으니 죄를 묻지는 않으실 겁니다.”
심협은 은근히 알랑대며 싱글싱글 웃었다.
동관은 그 말에 곧장 대꾸하지는 않았지만, 퍽 마음이 동한 듯 망설였다.
“동 어르신. 봉산 도우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이 후배, 다른 것은 구하지 않습니다. 용 비늘 두어 조각만 받을 수 있다면 족합니다.”
사우흔도 옆에서 거들었다. 그러자 본래도 진용의 피와 고기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봉수도 자연스레 찬성하고 나섰다.
“좋다. 우리 모두 뜻이 모였으니 그럼 그리 하자꾸나. 허나 반드시 말을 맞추어두어야 한다. 함부로 지껄였다가는 내 인정사정 봐주지 않을 것이야.”
동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모두 동 어르신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심협이 곧바로 아첨하듯 말했고, 사우흔과 봉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동관이 손바닥을 가볍게 휘두르자 보이지 않는 힘이 땅 위에 세워져 있던 검은 깃발을 그의 손으로 끌어갔다.
“내 이 용을 잠깐 풀어 놓을 것이다. 각자 요령껏 피와 살, 비늘과 뿔을 떼어내거라. 그게 모두 우리의 수확이 될 게야. 명심해라. 손을 댈 때 분수를 잘 지켜야 한다. 절대로 용을 죽여서는 안 돼!”
동관은 얼굴 가득 냉혹한 웃음을 지은 채, 눈으로 세 사람을 훑으며 당부했다.
심협을 비롯한 세 사람은 흥분한 얼굴로 일제히 대답했고, 노인은 그제야 한 손으로 결인 하며 입으로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