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용을 잡다
절벽에 난 돌계단을 통해 객잔으로 돌아온 뒤, 오홍은 먼저 자기 방으로 돌아갔고, 심협은 대당에서 아침밥을 먹고 나서야 방으로 돌아갔다.
한데 막 탁자 앞에 앉아 좌선하며 수련을 시작하려던 심협은 탁자 위에 손가락 두 개 정도 너비의 쪽지가 하나 있는 것을 알아챘다.
그는 눈빛을 살짝 굳힌 채, 쪽지를 훑어보았다. 그 위엔 커다랗게 여덟 글자가 적혀 있었다.
“막탐금섬, 공상성명(*莫貪金蟾, 恐傷性命: 금섬을 탐하지 말라, 목숨을 잃을까 하노라).”
심협은 당황했고, 내심 망설여지기도 했다. 누군가 주의를 주려는 것도 같았고 겁을 주려는 것 같기도 한 이 쪽지는 대체 누가 남긴 것인가!
“설마…… 오홍인가? 오늘 나도 천갱에 수색하러 간 것을 보았으니, 막고는 싶지만 말로 하기 불편하여 쪽지를 남겨두었나?”
심협은 의심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는 쪽지를 손으로 건드리지도 않고 그저 손을 대강 휘둘렀다. 그러자 쪽지가 허공으로 날아들어 물줄기에 짓이겨졌다.
“아니면…… 그 복면 여인인가? 아까 숲에서 몰래 내 뒤를 쫓던 이는 분명 그녀였지. 한데 그녀가 왜 내게 서신을 남긴단 말인가?”
심협은 아래턱을 문지르며 다시 생각에 잠겼으나, 한참이 지나도 답을 알 수 없었기에 결국 생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누가 보낸 쪽지든, 좋은 뜻의 충고건 악의적인 경고건 그는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객잔 주인장의 말에 따르면, 천갱 쪽의 기후는 이상하여 장마가 지나기만 하면 닷새 안쪽으로 밤에 반드시 한바탕 천둥번개가 친다. 이 또한 이곳만의 독특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지금 심협도, 오홍도, 제비집 채집꾼들도 모두 이 천둥번개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올해는 어째서인지 며칠째 대력산 상공에는 줄곧 두터운 비구름만 드리웠을 뿐, 벌써 5월이 다가오는데도 이들이 그토록 고대하는 뇌우는 좀처럼 내리지 않았다.
기다리던 사람들은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특히 시간이 부족한 심협은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그날 밤, 심협은 홀로 방에 앉아 낙뢰부(落雷符)로 벽안금섬을 놀라게 해야 하나 고민에 잠겼다. 그런데 갑자기 우르릉 하는, 무겁고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심지어 방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격렬하게 흔들릴 정도였다.
심협은 재빨리 달려가 창문을 홱 열어젖히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천갱 위, 구름층에서 광흔이 어렴풋이 어른거렸다. 머지않아 더 큰 벼락이 내리칠 것만 같았다.
“드디어 오는 건가?”
심협은 흥분을 감추기 힘들었다.
그때, 높은 하늘의 구름 속에서 갑자기 광흔 한 줄기가 번쩍였다. 비구름 너머로 거대한 그림자가 빙빙 맴돌고 있는 것 같았지만, 어느새 구름으로 숨어든 것인지 분명히 볼 수는 없었다.
심협은 흥분을 가라앉히며 뛰쳐나가 천갱을 향해 날아 내려갔다.
커다란 천둥이 울리면 벽안금섬이 깨어나 월아호(月牙湖)에 모습을 드러내 월백을 흡수할 테니, 최대한 빨리 가야만 했다.
그러나 그가 내려서기가 무섭게 아득한 용의 포효가 들려왔다.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니 먹구름들 사이로 길이가 백 장에 이르는 금룡이 굼실굼실 움직이며 맴돌았다. 이에 따라 구름바다는 세차게 용솟음쳤고, 이리저리 뒤섞였다.
심협은 퍼뜩 깨달았다. 아까 그 우렛소리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오홍이 기다리다 못해 신통력을 발휘하여 불러일으킨 천둥이 틀림없었다!
콰르릉!
또다시 굉음이 울렸고, 오홍의 거대한 몸에 격렬하게 뒤섞인 비구름이 갈기갈기 찢겨나가면서 중간에 깔때기 같은 거대한 구멍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구멍으로 오랜만에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마치 하늘에 창이 하나 난 것처럼 희뿌연 빛이 드리워 곧장 천갱 한가운데로 떨어져 내렸다.
월아호 수면의 반사작용인지, 새하얀 빛이 천갱 한가운데서 시작돼 밀림 전체를 환하게 밝혔다.
심협은 망설이지 않고 곧장 신행갑마부 두 장을 꺼내 두 다리에 붙였다.
화르륵!
부적이 타오르면서 생긴 재는 흩어지지 않고 심협의 두 종아리에 휘감겼다. 동시에 심협은 두 다리가 가벼워진 것을 느꼈고, 가볍게 발을 내딛은 순간 이미 몇 장을 이동해 있었다.
다음 순간, 심협은 두 다리를 맹렬하게 움직여 숲속에 흐릿한 그림자를 남기면서 뛰쳐나갔다.
숨 몇 번 내쉬기도 전에 심협은 10여 장을 훌쩍 뛰어넘어 호숫가에 내려섰다.
그런데 그 순간, 머리 위 하늘에서 온몸이 황금빛으로 번득이는, 손바닥만 한 금두꺼비가 네 발을 미친 듯이 허우적거리면서 힘차게 날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 위에는 어떤 넝쿨로 엮었는지 모를 통발 하나가 거꾸로 드리워져 있었다. 통발 주둥이에서는 금빛 소용돌이가 회전하면서 기이한 흡입력으로 금섬을 빨아들였다.
다급해진 심협은 손바닥을 휘둘렀다. 그러자 푸른 물줄기가 호수 중앙에서 뻗어 나와 벽안금섬을 향해 곧장 날아가 반대로 끌어당기려 했다.
하지만 물줄기가 금섬에 가까워진 순간, 갑자기 하늘에서 한 가닥 금색 빛무리가 물줄기를 쓸어내렸다.
픽!
바람 새는 소리와 함께 물줄기가 그대로 흩어져버렸고, 곧이어 사람 형체 하나가 하늘에서 내려와 허공에 걸린 통발 곁에 내려섰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통발을 움켜쥐었는데, 벽안금섬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심형, 미안하게 됐소. 허나 이 금두꺼비는 내게 매우 중요하다오.”
오홍이 얼굴에 웃음기를 띠고 심협에게 말했다.
심협은 소매 사이로 비행부를 틀어쥐고 그를 쫓아가려 했다. 벽안금섬은 그에게도 중요했다. 자신과 가족의 목숨이 달려 있으니, 오홍의 경지가 자기보다 훨씬 높다 해도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홍은 그에게 빼앗을 기회조차 주지 않고 금빛 통발을 허리에 매단 채, 몸을 펼쳐 금룡의 모습으로 변해 하늘로 멀리 솟구쳐 날아갔다.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촤르륵!
멀리 하늘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리더니 거대한 검은 장막이 날아와 천갱 위 하늘을 뒤덮으며 오홍의 앞길을 막았다. 동시에 천갱의 다른 한쪽 벽에서 느닷없이 하얀 빛이 터져 나오더니, 허공에 커다란 부적 문양이 줄줄이 떠올랐다.
쿠르릉!
천갱 전체가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심협이 고개를 숙였다가 발아래로 떠오른 거대한 법진 문양을 보고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돌아볼 것도 없이 황급히 전력으로 신행갑마부의 효력을 불러일으켜 먼 곳으로 미친 듯이 내달렸다.
발아래 대지 위로 한기가 솟구쳤다. 고개를 돌려 힐끗 보니, 놀랍게도 지면이 빠른 속도로 얼어붙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가는 눈과 얼음에 꽁꽁 얼어붙을 터였다.
심협이 단숨에 거의 백여 장을 내달렸다. 그제야 살기등등하던 서리도 마침내 멈췄다.
심협은 멈춰 서서 천갱 쪽을 돌아보았다. 검은 장막이 여전히 하늘을 뒤덮고 있었고, 장막 윗면은 계속 오르락내리락 일렁였다. 간간이 용의 포효가 들려오는 것이, 오홍이 그 아래에서 쉬지 않고 충돌하는 듯했다.
그때, 하늘에서 또다시 한 줄기 빛이 날아들었다. 이어서 동관이라는, 짧은 수염의 노인이 모습을 드러내고 호탕하게 웃었다.
“생각도 못 했구나, 생각도 못했어. 이번엔 벽안금섬 뿐만 아니라 진룡(眞龍) 한 마리까지 산 채로 잡다니. 제대로 된 진짜 용이라니, 무슨 이무기 같은 것도 아니고 말이야. 하하하!”
말을 마친 그는 한 손을 아래로 꾹 눌렀다. 그러자 검은 장막에서 시커먼 빛이 번쩍이며 빠르게 줄어들었다.
심협은 그제야 그 검은 장막의 다른 한쪽에 새카만 장대 하나가 더 붙어 있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뜻밖에도 그것은 커다란 검은 깃발이었던 것이다.
그 깃발의 높이가 1장 정도로 줄어들었을 때, 동관은 한 손으로 결인을 맺었다. 그러자 깃발이 휘리릭 말려 올라가 오홍을 그대로 가두었다.
동관은 깃대를 잡아 어깨에 걸쳐 메고 땅위로 내려갔다.
그곳에서는 이미 세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바로 여형과 봉산, 봉수 형제였다.
“동 어르신, 축하드립니다. 일거양득으로 벽안금섬뿐만 아니라 진룡까지 잡으셨으니 대단한 공로를 세우셨습니다. 성주께서는 아무리 못해도 어르신을 총단의 정사(正使)에는 봉하시지 않겠습니까?”
봉산이 얼굴 가득 웃음을 띠며 알랑거렸다.
동관도 그 말에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흡족해했다. 그러나 곧 주위를 훑어보며 미간을 찌푸리더니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놈은?”
“그놈이 갑마부를 사용하여 달아난 탓에 한빙진(寒氷陣)으로도 놓치고 말았습니다.”
봉수가 포권하며 고개를 숙였다.
“일개 벽곡기 수사일 뿐이니 별다른 말썽을 일으키진 못할 겁니다.”
봉산이 전혀 개의치 않으며 말했다. 그러나 줄곧 말없이 서 있던 여형이 갑자기 그 형제를 꾸짖듯 외쳤다.
“어리석기는! 금섬만 잡았다면 모를까, 우리는 진룡까지 잡았단 말이오! 만약 털끝만 한 소식이라도 새어 나가면 용궁이 우리를 가만히 놔둘 것 같소?”
그 말에 봉산은 버럭 화를 내려다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표정이 급변했다.
“어, 어르신.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가서 그놈을 잡아오겠습니다.”
“여형, 네가 이 봉산과 함께 쫓아가거라.”
동관이 못미덥다는 듯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예.”
복면의 여인은 짧게 대답하고는 봉산과 함께 몸을 돌려 심협이 달아난 방향으로 향했다.
“그럼 객잔의 사람들은 어찌 할까요?”
봉수는 약간 어두워진 눈빛으로 물었다.
“전부 죽여 없애라. 한 놈도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
동관은 오른손 엄지로 목을 베는 시늉을 해보였고, 봉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려 떠났다.
한편, 심협은 숲속을 빠르게 내달리는 중이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원래대로라면 벽안금섬은 저자들에게 발견되었다 해도 잡혀가지 않았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장래에 운유도인이 금섬을 잡을 수도, 유람기에 기록될 수도 없었을 테니까.’
기록된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유일한 변수는 자신이 끼어드는 것뿐이나, 정황상 그는 금섬을 잡는 일에 직접 끼어들 겨를도 없었다.
‘혹시…… 이번에 그들이 벽안금섬을 잡아가지 못하는 건 아닐까?’
심협은 그런 생각이 들자 발걸음을 급히 멈추고 밀림 깊은 곳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 망설임의 빛이 어렸다.
사실 그 추측에 대해 그다지 확신이 서지는 않았다. 자신이 이 사건에 끼치는 영향이 어디부터 시작되는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벽안금섬을 알게 되면서부터? 아니면 천갱 객잔에 들어서면서부터?
그럼에도 망설이는 것은 지금 이대로 가버린다면 벽안금섬을 얻을 기회는 영영 사라질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미 제법 시간을 들였으니 남은 시간은 더욱 줄어들었고, 게다가 오홍도 위험에 빠지지 않았는가!
“그래, 그냥 이렇게 떠날 수는 없어!”
심협은 눈빛이 굳건해졌다.
하지만 지금 그의 경지는 턱없이 부족하니 저들을 정면으로 상대해서는 승산이 없었다.
“방법은 그것뿐이야!”
잠시 생각한 끝에 심협은 눈을 번득이며 결단을 내렸고, 곧바로 손을 휘두르며 묵묵히 법력을 운공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