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230화 (230/1,214)
  • 230화. 벽안금섬

    심협은 들고 있던 종이 뭉치들을 정리하여 재빨리 두께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누더니 심원각 앞에 늘어놓았다.

    “이것은……?”

    심원각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동안 제가 많은 책을 섭렵했다고 할 수는 없으나, 먼 옛날부터 전해져 오는 고본이며 선본(*善本:가치가 높은 희귀한 책이나 필사본) 같은 고서들을 조금 읽었습니다. 그중 몇몇 의서에서 많은 배움을 얻었지요. 지금은 전해지지 않으나 효험이 좋은 처방들을 베껴 적어놨으니, 후에 우리 약방에서 환약과 탕제를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우리의 비방이 되어 전해지는 셈이지요.”

    심협이 왼쪽의 종이뭉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위에 적힌 처방들은 대부분 그가 방촌산에 있을 때 읽었던 <금궤(金匱)>라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의서에서 본 것들이었다.

    한편, 심원각은 눈을 빛내며 재빨리 종이뭉치를 받아 들고 빽빽한 글자들을 자세히 훑어보았는데, 뒤로 갈수록 얼굴에는 희색이 짙어져갔다.

    심협은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말없이 조용히 지켜보며 방해하지 않았다.

    “협아, 아비는 이 경방(*經方: 고대의서에 기록된 처방전)들을 고서에서 이름만 본 적이 있을 뿐이다. 많은 처방들이 이미 실전(失傳)된지 수백 년이 되었는데, 너는 이걸 어디서 찾아냈단 말이냐?”

    심원각이 약간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실은 아직 당부드릴 일이 더 있습니다.”

    심협은 아버지의 손을 꾹 누르며 말했다. 이에 심원각도 자신이 조금 체통 없는 모습을 보였다고 느끼고는 멋쩍게 웃으며 경방들이 적힌 종이를 조심스레 한쪽에 내려놓았다.

    “이 두 곳에는 제가 익힌 두 가지 기초공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소화양공>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청전배원공(靑田培元功)>이라는 것이니, 앞으로 집안에 남겨두고 집안 제자들이 수련하도록 내어주십시오.”

    심협이 입을 열었다.

    이 두 공법 중 하나는 춘추관의 기초공법이고, 다른 하나는 방촌산에서 얻은 것이다. 후자는 그저 읽어본 뒤 그 내용만 기록했을 뿐, 수련해본 적은 없었다.

    한편, 심원각은 아들의 말에 깜짝 놀랐다가 곧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이게 설마…… 수선(修仙)의 비적이란 말이냐?”

    “비적이라고 까지 할 만한 건 아닙니다. 그저 근본을 튼튼히 하고 원기를 북돋아 몸을 단련하는 데 쓰이는 기초 공법일 뿐이지요.”

    심협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알았다. 내 꼭 네 분부대로 하마.”

    “비록 기초 공법일 뿐이나 강호의 무술과는 달라, 일단 소식이 새어나가면 노리고 덤벼드는 자들이 있을 겁니다. 공연히 큰 화가 될 수 있으니 비밀을 꼭 지키셔야합니다.”

    심협이 신신당부했다.

    “그런 이익과 손해는 나도 잘 알고 있으니 비밀을 반드시 지킬 것이다.”

    심원각이 엄숙하게 말했다.

    “그밖에, 이 두 가지 공법을 집안 제자들에게 전수할 때 반드시 먼저 그의 성정과 품행을 살펴보셔야 하고, 품행이 단정하지 않은 자에게 함부로 전해주셔서는 안 됩니다. 아니면…… 일단 심사와 목목에게 맡겨 수련해보도록 할 수도 있겠지요.”

    심협이 생각을 정리한 후 그렇게 말했다. 사실 그는 두 남매 중 누군가가 법성에 통달하게 되면 그들에게 무명공법을 전수해줄 심산이었다.

    “좋다. 네 뜻대로 하자꾸나.”

    심원각이 거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한쪽에서 그리 크지 않은 옻칠상자를 들고 와서는 경방과 공법이 가득 적힌 세 종이뭉치를 조심스레 넣고 꼼꼼히 잠근 뒤, 비밀 공간에 넣어두었다.

    이후, 오랫동안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던 두 사람은 모처럼 서재에서 한참이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심협은 문득 느릅나무 열매를 넣고 지은 밥이 먹고 싶다고 했지만, 아쉽게도 계절이 맞지 않았다.

    이튿날 새벽, 심협은 누구와도 작별인사를 나누지 않고 물품을 줄어들게 하는 석합만 가지고 서둘러 현성을 나섰다.

    * * *

    시간이 쏜살 같이 흘러 벌써 세 달이 지났다.

    때는 바야흐로 4월 말. 때마침 우주는 장마가 끝나갈 무렵이라 연일 내리던 장맛비가 잠깐 멈췄지만, 하늘에는 여전히 먹구름이 드리워 있었다.

    평구현(平丘縣)의 대력산(大曆山)은 몽롱한 안개가 한 층 덮여 있었다. 먼 산은 연달아 이어진 봉우리들이 희미하게 보였지만, 가까운 곳은 온통 축축한 푸른빛이었다. 그 사이로 회백색 산길 하나가 구불구분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조금 질척거리는 산길 위에 머리에는 삿갓을 쓰고 몸에는 두봉(*斗篷: 피풍. 소매 없는 외투)을 두른 늘씬한 인영이 나타났다. 그의 걸음걸이는 침착하고 여유로웠다. 인영은 검은 준마 한 필을 끌고 산길 끄트머리를 향해 발길을 재촉하는 중이었다.

    산길 끄트머리에 2층 정도 높이의 검은 목루(木樓) 한 채가 보였다. 목루의 앞마당에는 서너 장 높이의 장대가 하나 세워져 있었는데, 꼭대기에는 주(酒) 자가 큼지막하게 적힌 깃발이 걸려 있었다.

    인영이 말을 끌고 마당 앞에 이르니, 점소이인 듯한 젊은 남자 하나가 말구유에 여물을 붓고 있었다. 옆에는 말을 매어놓는 전마주(栓馬柱)가 보였는데, 이미 몇 필의 말이 묶여 있었다.

    점소이는 말발굽 소리에 얼른 여물을 몽땅 부어 버리고는 몸을 돌려 맞았다.

    “손님, 어서 오십시오. 요기를 하시렵니까 아니면 며칠 묵으시렵니까?”

    그가 능숙하게 고삐를 넘겨받으면서 물었다.

    인영이 삿갓을 벗자, 수려한 얼굴이 드러났다. 바로 심협이었다.

    “며칠 묵으려 하오.”

    심협은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점소이는 검은 말을 말구유 옆에 잽싸게 매어놓고는 길 안내를 하며 검은 목루로 걸어갔다.

    목루 앞에는 계단이 몇 개 있었고, 문 위에는 두터운 면포로 된 문발이 걸려 있었다. 점소이는 문발을 받쳐 든 채 몸을 기울여 심협에게 먼저 들어갈 것을 권했다.

    문턱을 넘어 안으로 들어선 심협은 진한 술 냄새에 콧잔등을 살짝 찡그렸다.

    슥 훑어보니, 내부는 공간이 그리 크지 않았다. 입구 오른쪽에는 허리 높이의 계산대가 놓여 있었고, 그 뒤쪽 선반에는 진흙으로 밀봉된 술 단지들이 쌓여 있었다.

    방 안에는 거무스름해진 탁자 일고여덟 개가 있었는데, 기름이 번들거리는 것이 오랜 세월 사용해온 물건임에 틀림없었다.

    대문 바로 맞은편 벽면에는 창문이 세 개 있었고, 창마다 나무 탁자가 하나씩 놓여 있었다. 그리고 가운데 탁자에는 푸른 비단옷 차림의 젊은 남자가 비스듬히 앉아 한 손으로 술잔을 받쳐 든 채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심협은 그를 힐끗 보고는 계산대 앞에 이르러 뒤편에 선 땅딸막한 주인장에게 말해 2층 방을 예약했다.

    “손님 지금 바로 올라가 쉬시겠습니까, 아니면 먼저 뭘 좀 드시겠습니까? 우리 객잔은 산에 있다 보니 산해진미 같은 건 없지만, 들짐승을 잡아 만든 요리가 제법 훌륭합니다. 집에서 담근 청매주 맛도 그럭저럭 괜찮습죠.”

    땅딸막한 주인장이 웃으며 물었다.

    “주인장께서 이리 열심히 추천하시니 당연히 맛을 봐야지요.”

    심협도 웃으면서 말했다.

    “좋습니다. 분명 만족하실 겁니다. 하하하!”

    주인장은 기쁜 듯 활짝 웃었다.

    심협은 간단한 음식 몇 가지와 청매주를 주문하고는 창가의 또 다른 탁자에 가 앉아 비단옷의 청년처럼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저도 모르게 눈을 반짝이며 한참 동안이나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알고 보니 창 바로 너머가 백길 낭떠러지였다. 낭떠러지 벽은 객잔 뒤쪽 양옆에서 활 모양으로 뻗어 나왔고, 각각 거대한 반원을 그리면서 객잔을 감싸고 돌아 멀리 천길 바깥에서 다시 합쳐졌다.

    객잔은 뜻밖에도 지름이 무려 천 장이나 되는 거대한 천갱(*天坑: 땅에 난 거대한 구멍으로, 밑에서 보면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보이는 지형) 가까이에 지어진 것이다.

    천갱 안쪽은 푸르고 무성한 식물로 덮여 있었고, 그 안에는 안개가 자욱하며 물안개가 솟아올랐다. 그야말로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이곳 경치가 아주 좋지 않소?”

    어디선가 들려온 온화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옆 탁자의 청년이 그를 보고 있었다. 한데 막 대답하려던 심협은 화들짝 놀랐고, 이내 거의 넋을 잃었다.

    청년은 부드럽고 긴 물빛 머리칼을 하얀 옥관으로 묶어 올렸고, 젊은 얼굴은 준수하고 비범해 보였다. 앞이마에 뿔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지만, 심협은 그가 동해 용궁의 구(九)태자 오홍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어째서 그인가? 그가 왜 여기에 나타났을까? 그도 벽안금섬을 찾으러 온 것은 아닐까?’

    심협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문제가 한꺼번에 떠올랐다.

    유람기에 기록된 대로라면, 벽안금섬은 우주 평구현 대력산의 천갱에 출몰한다고 했다.

    “흠흠! 어험!”

    심협이 멍하니 넋을 놓고 자신을 보고 있자, 오홍은 다소 민망한 듯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심협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포권하며 말했다.

    “아, 미처 대답을 못 했구려. 미안하오.”

    “그야 내가 갑자기 말을 걸어 그런 것이니, 내가 무례를 범했구려. 하하!”

    오홍도 포권하며 예를 갖추고는 웃으면서 온화하게 말했다.

    그때, 점소이가 청매주 한 주전자를 받쳐 들고 심협의 탁자에 올려놓았다.

    “우리 둘 다 홀로 여행 중인 듯하니, 내 공자와 합석하여 한잔해도 되겠소?”

    심협은 술주전자를 들고 웃으며 물었다. 그러자 오홍은 잠깐 다소 뜻밖이라는 기색이었으나, 곧 웃으면서 말했다.

    “귀하의 성의에 감사하오. 실은 내 은근 바라던 바요. 하하하! 나는 동해 사람 오홍이라 합니다. 공자께서는 존함이 어찌 되시오?”

    “나는 심협이라 하오. 등주 사람이지요.”

    심협은 그가 진짜 이름을 알려주는 것을 보고 즉시 답했다. 아마도 천 년 뒤에 오홍이 그를 알아본 것이 이번 만남 때문이리라.

    “등주라…… 꽤 멀 텐데, 심형께서는 어찌 여기까지 오셨소?”

    오홍이 잠깐 생각해보더니 물었다.

    “내 원래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오. 원래는 동해만에 드넓은 바다를 좀 보러 갈까 했는데, 평구현을 지날 때 사람들이 대력산 천갱의 경치가 아주 아름답다지 뭐요? 내 그 말을 듣고 서둘러 왔소. 보아하니 과연 헛걸음하지 않았구려.”

    심협은 그렇게 말하며 술잔을 들어 창밖의 아름다운 경치에 경의를 표하고는 단숨에 들이켰다.

    청매주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살짝 시큼하고도 달콤한 맛이 났다가, 뜨겁고 특이한 술 향기가 솟아나 혀와 목구멍 사이로 퍼져 나갔다. 이에 심협은 자신도 모르게 눈썹을 치켜 올리며 아주 놀라워했다.

    “옳은 말이오. 지금은 대낮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밤이 되면 이 천갱의 달빛은 절경이라오. 다만 그동안 장맛비가 계속돼 밤에도 짙은 구름에 가려질 수도 있겠지요.”

    오홍도 술잔을 들이켜며 말했다.

    때마침 음식들이 차례차례 나오면서 심협과 오홍은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한담을 나누었다.

    술이 세 순배를 돌고 다섯 가지 맛의 음식들을 맛보고 나니, 두 사람은 서로 말이 잘 통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때, 갑자기 입구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고개를 돌려 보니, 대문 밖 면포 문발이 이미 걷히면서 몇 사람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두껍고 무거운 도롱이를 입고 있었고, 머리에도 모두 대나무를 엮어 만든 삿갓을 쓰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온 그들은 삿갓과 도롱이를 벗어서 문 옆 벽에 기대어 놓았다.

    우두머리는 기골이 장대한 짧은 수염의 노인으로, 두 눈에는 번쩍번쩍 생기가 넘쳐 정정해 보였다. 곁에는 병이라도 있는 듯 낯빛이 하얗게 질린 두 젊은이도 있었는데, 용모와 체격이 매우 비슷해 마치 쌍둥이 같아 보였다. 그 외에도 앙증맞은 체구의 여자가 한 명 더 있었는데, 얼굴은 검은 천으로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네 사람 모두 도롱이 아래로는 간편한 갈색 옷차림이었고, 허리에는 엄지손가락 굵기의 삼밧줄을 두르고 있었다. 발과 다리 주변에 진흙이 묻은 것으로 보아 방금 숲속 진흙탕을 가로질러 온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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