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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229화 (229/1,214)
  • 229화. 줄어든 수명

    얼마나 지났을까. 심협은 가까스로 다시 정신을 차리고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아버지.”

    그는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 남자가 다정한 얼굴로 앉아 있는 것을 한눈에 보았다.

    “협아, 이게 어찌된 일이냐?”

    심원각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걱정스레 물었다.

    “공법 수행을 하다가 일이 좀 생겨서요. 괜찮습니다.”

    심협은 부친이 걱정할까 우려돼 둘러댔다.

    “식사 시간에 나오질 않기에 수련하느라 바빠 거른 줄 알았는데, 오후까지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아 내 들어와봤다. 한데 네가 안색이 파랗게 질려 침상 위에 누워 있지 뭐냐.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질 못하는 것이, 처음 네 몸에 악귀가 들었을 때 같아서…… 휴우.”

    심원은 예전 일을 떠올리며 깊이 탄식했다.

    “공법의 반서(反噬:반발작용) 때문에 일어난 일일 뿐입니다. 잠시 좌선하면서 몸조리를 하면 곧 괜찮아질 겁니다.”

    심협은 웃으면서 억지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으나, 사실 속으로는 이미 어찌된 일인지 알고 있었다.

    예전에 두 번째로 꿈속에서 돌아왔을 때 한 번 겪은 적이 있었기에 그는 아까 무언가가 생명력을 집어삼키는 듯한 느낌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지금 느낌은 그때와 똑같았다. 아니, 지금이 더 심각했다.

    “아버지, 약초들을 좀 준비해주십시오. 조금 있다 약욕을 좀 하려 합니다.”

    심협은 그렇게 말하고는 침상에서 내려와 책상 위에 놓인 붓을 들어 처방 약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약욕의 약방문은 백가의 것으로, 그 안에 진귀한 약재가 적지 않았지만 선약(仙藥)이나 영초는 필요치 않았다. 그러니 약방을 운영하는 심가로서는 준비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알았다, 기다리려무나. 내 금방 가서 준비하마. 네 둘째어머니가 이미 주방에 일러 음식을 준비하라 시켰으니, 조금 있다 가져다줄 것이다.”

    심원각은 약방문을 재빨리 받아들고 몸을 돌려 나갔다.

    심협은 입맛이 없어 거절하려 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심원각이 떠난 뒤에야 심협은 문 밖을 힐끗 보고는 하늘이 이미 어두워져 황혼 무렵이 가까웠음을 깨달았다.

    그는 침상으로 다시 돌아가 그 위에 놓인 옥침을 내려다보았다. 더없이 복잡한 심경이었다.

    ‘나의 수많은 기연은 모두 이 옥침으로 인해 얻은 것이지만, 두 번이나 수명을 소진한 것 또한 모두 이 옥침 탓이다. 그러니 이것을 아껴야 할지, 미워해야 할지 정말 알 수가 없구나.’

    하지만 몇 차례 꿈속을 넘나들었던 경험을 회상하면서 심협은 퍼뜩 무언가가 머릿속을 스쳤다. 바로 자신의 생명력이 축났던 것은 옥침이 직접 일으킨 일이 아니라, 꿈속에서의 죽음과 관련 있는 것 같다는 추측이었다.

    그가 맨 처음 꿈속에서 산골마을에 들어갔을 때, 죽었다가 되살아난 적이 있었다. 그리고 현실에 돌아와서는 온몸이 몹시도 쑤시고 아팠다. 두 번째 꿈속에서 늑대 요괴와 맞붙던 중에 죽었다가 되살아났고, 깨어난 뒤에는 수명을 거의 다 소진할 뻔했었다.

    이번에 그는 보탑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가히 백 번은 죽었으니, 기혈의 근간이 얼마나 큰 손실을 입었을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현실에서 근 200여 년의 수명이 동나게 된 것이다.

    이번에 느닷없이 꿈에서 깨게 된 것도 아마 남은 수명이 거의 소진되어 더는 꿈과 현실을 넘나들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고민하던 심협은 두 손으로 원을 끌어안은 듯한 자세를 취하고는 눈을 감고 체내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감았던 두 눈을 천천히 떴다.

    단전과 법맥에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다만 기혈의 손실이 너무나 컸고, 생명력도 많이 빠져나간 상태였다. 이전의 상황을 참고하여 헤아려보니, 남은 수명은 기껏해야 3년 남짓한 듯했다. 이 한바탕 대몽(大夢)이 그를 몇 년 전 죽음을 끼고 살던 때로 되돌려 놓은 것이다.

    원래는 꿈속의 깨달음과 경험을 잘 살려 최대한 빨리 수련 경지를 높이고 자신의 약혼녀를 찾으러 보타산으로 갈 계획이었지만, 이제 보니 짧은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 * *

    밤이 되자, 심협은 약재를 푼 욕조에 몸을 담근 채 묵묵히 무명공법을 운공하여 약의 흡수 속도를 높였다. 그는 지난번 나씨 도인이 목숨을 부지하려면 수련 경지를 높여 끊임없이 수명의 한계를 연장하거나, 영약과 선초를 찾아 생명을 연장해야 한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치대로라면 수행이 벽곡기에 접어들기만 하면 수명을 200살 정도까지 늘릴 수 있겠지만, 수명이 다시 바뀌려면 응혼기로 올라가야만 한다.’

    심협은 이제 막 벽곡초기에 들어섰으니 다음 경지인 응혼기까지의 거리는 실로 멀었다. 현재 그의 자질과 수련 속도로는 3년이 아니라 30년이 주어진다 해도 성공할 자신이 없었다. 즉, 지금 상황은 처음 수선자의 길로 들어설 때보다도 훨씬 안 좋다는 뜻이었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할 수 없으니 지름길을 찾아보는 수밖에…….”

    심협은 탁한 숨을 길게 내뱉으며 원기를 조금 회복했다.

    다행이라면 지금은 선약이며 영초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예전과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는 방촌산에서 <선령백초>라는 책을 통해 세상의 풀과 나무, 벌레와 짐승, 광석 등 여러 종류의 영약과 선초에 대해 이미 자세히 알고 있었다.

    다만 이 영약들의 가치도 덩달아 알게 됐는데, 어떤 것이든 부르는 게 값이었다. 또한, 우연히 얻을 수는 있으나 구할 수는 없는 보물이기도 했다.

    “설령 운 좋게도 그것들을 가진 사람을 만난다 해도 값을 치르기에 충분한 선옥은 내게 없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심협은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건업성으로 돌아가 백가에 도움을 구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바로 그때,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번쩍 스쳐 지나갔다.

    당시 그가 방촌산에서 본 것은 고서인 <선령백초>뿐만이 아니었다. 어느 방촌산 제자의 유람기도 본 적 있는데, 그중에는 육지마(肉芝馬)와 천년영유(千年靈乳) 같은 천지의 영재(靈材)들이 세상에 나타나게 된 과정이 기록되어 있었다.

    ‘유람기의 연호로 미루어 짐작컨대, 그것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숨겨져 있을 터. 누구도 모를 테니 내가 찾아낼 수 있다면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 아닌가?’

    심협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가슴이 뛰어 욕조에서 벌떡 일어났다.

    손을 대강 휘둘러 몸의 물기를 없앤 그는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탁자 앞으로 돌아와 앉았다. 그리고는 붓과 먹을 가져와 종이에 쓰기 시작했다.

    잠시 뒤, 종이 위에는 육지마, 천년영유, 뇌인(雷刃), 남구설련(南丘雪蓮), 벽안금섬(碧眼金蟾) 등이 적힌 명단이 생겨났다.

    “내 기억에 육지마는 동승신주의 담계산(潭稽山)에 나타난다고 했으니, 대당과는 거리가 너무 멀어. 내게 남은 2, 3년 동안 길을 재촉한다 해도 반드시 도착하리란 법이 없지.”

    심협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그 위에 가위표를 그었다.

    천년영유는 장안성과 가까운 달주(達州) 경내에 있었다. 다만 이 물건은 유람기에서 언급한 발견 시점이 고작 300년에 불과해 지금은 햇수가 천 년이 채 안 된다. 효능이 어떨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남구설련이 있는 곳은 북쪽 극한지대인데, 이곳도 이미 당나라 국경 밖인지라 너무 멀었다.

    심협은 그렇게 하나하나 따져가면서 많은 선택지를 지워나갔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마지막으로 천년영유와 벽안금섬 위에 머물렀다.

    이 둘은 하나는 달주에, 다른 하나는 우주에 있었다. 우주라면, 그가 조금 전까지 머물던 꿈속 세상에서 갔던 동해만에 위치해 있는 곳이다.

    심협은 잠시 망설이며 어디를 먼저 갈 것인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유람기의 내용으로 보아 벽안금섬에 비해 천년영유가 더 얻기 쉽겠지만, 천년영유는 햇수가 아직 부족하여 효능이 어느 정도일지 확신이 없었다.

    반면 유람기에서는 벽안금섬의 효능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기록자가 밝히길, 자신은 비록 물의 후예이나 월궁옥섬(月宮玉蟾)의 후손으로, 그것을 먹으면 물의 공법을 수련하는 사람에게 특히 도움이 되고, 법력이 폭증하도록 도와 수련 경지가 발전한다고 했다. 다만 금두꺼비는 천성이 조심스럽고 신중하여 찾아내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붙잡기란 더더욱 어려울 터였다.

    유람기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이를 붙잡은 이는 어느 대승기 운유도인이었다. 심지어 그가 어찌 이 금두꺼비를 발견했는지, 또 어떻게 유인해서 붙잡았는지까지 꽤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글귀 또한 평소보다 더 익살스럽고 다소 놀리는 듯한 느낌까지 있어 당시 심협은 읽는 동안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마도 이 방촌산 제자는 그 은유도인과 사이가 퍽 좋았던 모양이다.

    수차례 고민한 뒤, 심협은 우선 우주로 가서 벽안금섬을 찾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결정을 내린 뒤에도 급하게 출발하지 않고, 방에 틀어박혀 폐관을 통해 멀리 떠날 채비를 했다.

    7일 뒤, 심협은 마침내 방을 나와 서재에 계신 아버지 심원각을 찾아갔다.

    심원각은 심협이 손에 두툼한 종이뭉치를 든 것과 본래의 안색을 회복한 것을 보고, 마침내 표정이 풀렸다.

    “협아, 괜찮은 게냐?”

    심원각이 몸을 일으켜 아들을 맞았다.

    “소자 부끄럽게도 아버지께 심려를 끼쳐드렸습니다. 이제 괜찮아졌습니다.”

    심협이 죄송스런 마음을 담아 말했다.

    “무슨 바보 같은 소리냐? 그저 아비는 네 짐을 덜어줄 수가 없어 한탄스러울 뿐이다. 그동안 너 혼자 너무 힘들게 지내게 했구나.”

    심원각의 눈시울이 붉어진 것을 본 심협은 한 손으로 아버지의 어깨를 토닥이며 그를 책상 뒤편으로 이끌어 앉혔다.

    “소자 수행길에 올라 곁에서 모실 수 없으니, 송구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 또한 멀리 타지로 떠나야 하기에 작별인사를 드리러 온 것입니다.”

    심협은 심원각의 희끗희끗한 귀밑머리를 보면서 마음이 아파왔다.

    심원각은 아들이 집에 오래 머물지 않으리란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곧 떠난다고 하자 더없이 아쉬웠다. 그러나 아들의 앞길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애써 환하게 웃어보였다.

    “사내대장부는 천하에 뜻을 둔다지 않더냐. 협이 너는 원대한 포부가 있으니 우리 심씨 집안의 복이지. 이번에는 언제 다시 돌아올 생각이냐?”

    그는 아들의 발목을 붙잡고 싶지 않아 한 차례 격려해주었지만, 결국 아쉬움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 말에 심협은 대답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번에 집을 떠나는 상황은 그때 춘추관으로 떠난 것과 사실 별 차이가 없어, 이번에 떠나면 살아 돌아올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협아, 왜 그러느냐?”

    심원각은 심협이 한참이나 답이 없자 의아한 듯 물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단지, 이번에는 무척 멀리 떠나게 됐습니다. 먼저 우주로 떠났다가, 그 뒤에 다시 북으로 방향을 틀어 달주에 가야 하니,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는 말씀드리기 어렵니다.”

    심협은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 멀리 가야 한단 말이냐? 그럼 노잣돈이 두둑해야겠구나. 내 가게에 가서 은량을 좀 더 가져다주마.”

    심원각은 이렇게 말하면서 몸을 일으켜 나가려고 했다.

    “그건 급하지 않으니, 곧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다만, 당부드릴 일이 하나 있사온데…….”

    심협이 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심원각은 아들의 표정이 진지한 것을 보고 긴장하며 다시 되돌아가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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