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224화 (224/1,214)
  • 224화. 단련

    “크아아아!”

    은갑의 사내는 크게 소리 지르면서 은빛 장창을 다시 빠르게 회전시키며 벗어나려고 했으나, 태산처럼 굳건한 용의 발은 끄떡없었다.

    그때, 심협이 다른 손으로 번개처럼 은갑 사내의 가슴팍으로 향하더니, 낮지만 섬뜩한 소리와 함께 사내의 등 뒤로 튀어나왔다.

    은갑 사내의 움직임이 굳어지더니 몸이 빠르게 반투명해졌다.

    그러나 심협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전에, 하얀 빛 한 줄기가 반투명해진 은갑 사내의 몸에서 솟아나오더니 심협의 체내로 파고들어갔다.

    “헛!”

    당황한 심협이 체내를 살펴보려는데, 눈앞의 금빛 세계가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정신을 차려 보니 다시 금탑 꼭대기 층의 대전 안이었다. 금갑천장은 여전히 시신의 모습으로 돌 의자 위에 앉아 있었고, 움직일 기미조차 없었다.

    심지어 심협 자신도 금갑천장 앞에 똑바로 선 그대로였다.

    “어찌 된 일이지?”

    심협은 백치라도 된 것처럼 멍했다. 만약 몸에 남은 피로가 아니었더라면, 그는 방금 전의 그 모든 것이 그저 한바탕 꿈이라고 믿었을 터였다.

    바로 그때, 그의 식해(識海)에 갑자기 하얀 빛 덩어리가 하나 떠올랐다. 그러더니 식해 속, 작은 사람의 모습을 한 신혼(神魂)을 향해 돌진하더니, 심협이 저지할 틈도 없이 그 안으로 녹아들어갔다.

    “크아아악!”

    심협은 갑자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으며 울부짖었다. 신혼이 한 차례 격렬한 경련을 일으키는 것이 느껴졌고, 뒤이어 머리가 쪼개질 것만 같아 견디기 힘들었다.

    신혼의 고통은 한참이 지난 뒤에야 점차 사라졌고, 그제야 두통도 서서히 멎었다.

    “정말 이상하군. 그 천병(天兵)은 분명 죽었는데도 신혼까지 공격할 수 있다니. 내 신혼의 힘이 굳센 편이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심협은 땅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눈썹을 치켜올린 그의 두 눈에는 놀라움과 기쁨이 가득했다.

    신혼의 힘이 순식간에 적잖이 증가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머릿속에는 낯선 장면들도 많이 나타났다. 알고 보니 아까 그 은갑 사내가 그간 싸워왔던 기억과 깨달음인 듯했다. 특히 쾌속한 보법과 맹렬하고 사나운 창법이 있어, 그에게는 꽤나 큰 도움이 될 터였다.

    ‘그 하얀 빛이 설마…… 은갑 사내의 공격이 아니라 그를 죽인 데 대한 포상이었던 건가?’

    심협이 그렇게 추측하고 있던 그때, 멀지 않은 곳에 있던 금갑천장 수중의 금탑이 갑자기 빛을 내기 시작하더니 쩍 하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고개를 홱 올려 보니 작은 금탑 가장 아래층의 탑문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막 알아보려 하는 찰나, 열린 탑문에서 금빛이 번쩍이더니 엄지손가락만 한 금빛 단약이 날아와 심협 앞에 둥둥 떠올랐다.

    단약에서 뿜어져 나온 맑고 상쾌한 약향(藥香)이 금세 대전을 가득 채웠다.

    단약에 대해 제법 지식이 있던 심협은 약향만으로도 이 단약이 최소한 몸에 해롭지는 않을 것임을 알아챘다. 틀림없이 보신에 좋은 것들이 많이 포함된, 근본을 튼튼히 하고 원기를 북돋우는 고본배원(固本培元)류의 단약일 터였다.

    ‘이것도 그 은갑 사내를 죽인 보상인가?’

    그는 또한 그렇게 추측하며 손을 뻗어 금빛 단약을 받았다. 그리고는 잠깐 망설였으나, 이내 단약을 꿀꺽 삼켰다.

    ‘어쨌든 여기는 꿈속 세계 아닌가? 설혹 단약에 문제가 있다 해도 기껏해야 꿈을 다시 꾸게 되는 것뿐이겠지.’

    한편, 뱃속으로 들어간 단약은 빠르게 녹아들어 무수한 뜨거운 기류들로 변해 몸 안의 각 경락과 법맥을 타고 곳곳으로 흘렀다. 순수한 법력인 이 뜨거운 흐름이 몸을 타고 흐르자, 마치 전신이 따뜻한 물에 잠긴 것만 같았다.

    심협은 크게 기뻐하며 재빨리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고 황정경을 운공하여 단약의 효력을 흡수하기 시작했고, 잠시 후 몽땅 흡수해버렸다.

    다시 두 눈을 떴을 때, 심협은 정신이 맑아졌고, 기분이 상쾌했으며, 수련 경지도 예전에 신혼의 힘이 증가했을 때 못지않게 크게 늘어나 있었다.

    일어서서 손발을 움직이자 뼈마디에서 우두둑 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그 이름 모를 금빛 단약의 약효는 신묘하여 육신도 적잖이 강해져 있었다.

    그때였다. 금갑천장이 다시 두 눈을 번쩍 떴고, 동시에 두 줄기 금빛이 날아왔다. 이 금빛은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거의 눈 깜짝할 새에 다가왔고, 심협은 다시 옴짝달싹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래, 천교병(天巧兵)을 무찔렀구나. 네가 만약 내 휘하의 삼십육 천강병(三十六 天罡兵)마저 무찌른다면 너를 탑 밖으로 내보내 주고 큰 기연도 선사해주마.”

    금갑천장이 입을 열었다 닫으며 거친 목소리로 느릿느릿 말했다.

    심협은 매우 놀랐지만, 깊이 생각해볼 틈도 없었다. 눈앞의 풍경이 빠르게 바뀐 것이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심협은 또다시 금빛 공간의 푸른 돌 받침대 위였다.

    ‘아까 그게 무슨 말이지? 삼십육 천강병이라니, 36번을 싸워야 한다는 건가? 뭐, 어쨌든 탑을 나갈 방법을 찾긴 했군.’

    그는 금갑천장의 말을 곰곰 되새겨보며 머리를 굴렸다.

    다음 순간, 몇 장 앞에 은빛이 번쩍였고, 이어서 은빛 갑옷을 입은 천병이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은갑의 청년이었는데, 용모가 무척 준수했으며, 등 뒤에는 푸른 대검(大劍) 두 자루를 메고 있었다. 그러나 표정은 예상대로 영혼 없는 꼭두각시처럼 뻣뻣했다.

    심협은 신식으로 은갑 청년의 몸을 훑고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상대의 기운은 아까의 은갑 사내보다 많이 강해, 출규 중기 정점까지 고작 반 걸음 정도 남은 상태였다.

    그가 더 생각할 틈도 없이 은갑 청년은 덮쳐왔다. 그는 두 손에 대검을 꺼내 쥐고는 번개처럼 빠르게 가로로 휘둘렀다.

    휙! 휙!

    분노한 두 마리 용 같은 검기가 튀어나와 서로 엇갈리며 심협을 베려고 들었다. 검기는 길이가 족히 10여 장쯤 되었고, 어슴푸레 푸른빛이 감돌았으며, 한기가 몸에 사무칠 정도였다. 딱 봐도 평범한 검은 아닌 듯했다.

    심협의 몸이 휙 스치는가 싶더니 두 발에 달그림자가 번뜩였고, 순식간에 20여 장을 가로질렀다. 아까 은갑 사내의 보법 경험을 흡수한 뒤, 그의 사월보가 저도 모르는 새 한층 더 정교해진 것이다.

    심협이 빠르게 피하긴 했지만 왼팔은 여전히 검기 끝부분에 닿았고, 몸을 보호하던 금빛은 푸른 검기 앞에서 헛것마냥 쉽게 뚫리고 말았다.

    쫘악!

    가벼운 소리와 함께 심협의 왼팔에 상처가 나면서 피가 솟구쳤다. 강인하기 이를 데 없는 피부도 상대방이 뿜어낸 푸른 검기를 당해내지는 못한 것이다.

    심협은 눈을 가늘게 떴지만, 겁먹은 기색은 조금도 없이 훌쩍 몸을 날렸다.

    지금 그의 몸은 놀라운 자질을 지녔고, 방촌산의 진파 보전인 황정경을 수행했으며, 사월보 역시 아주 정교하고 기이했다. 그러니 적절히 응용하기만 한다면 자기보다 어지간히 강한 상대도 대적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동급의 수사가 상대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두 사람은 즉각 함께 뒤엉켜 싸웠고, 금빛과 검기가 얽히면서 거대한 돌풍을 이루었다.

    순식간에 20여 합을 겨루던 중 심협이 갑자기 연이어 잔상을 드리우면서 뒤로 물러섰다. 그의 몸은 물론 팔에는 상처가 몇 개 더 늘어 피가 줄줄 흐르는 것이 궁지에 몰린 것 같아 보였다.

    반면 은갑의 청년은 그 자리에 꼿꼿이 서 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의 푸른 대검 두 자루는 그의 몸을 꿰뚫고 칼끝이 몸 뒤로 튀어나와 있었다.

    은갑 청년의 몸은 빠르게 투명해지더니 이내 완전히 사라졌고, 하얀 빛 덩이 하나만 남아 심협을 향해 날아왔다.

    심협은 피하지 않고 그 빛이 자신의 몸에 들어가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길게 숨을 한 번 내쉬자, 눈앞이 아득해지며 다시 금빛 대전 안으로 돌아와 있었다.

    다음 순간, 아까처럼 곧 하얀 빛이 식해(識海)에 나타나 신혼(神魂) 속으로 녹아들었고, 극심한 고통이 다시 한번 그에게 찾아왔다. 하지만 그는 이전의 경험이 있었기에, 전혀 당황하지 않고 가부좌를 튼 채 두 눈을 감고 참아냈다.

    잠시 뒤, 격렬한 통증은 썰물처럼 물러갔고, 심협의 신혼은 또다시 훌쩍 강력해졌다. 뿐만 아니라 이번에도 은갑 청년의 전투 경험과 쌍검을 조종하는 검술을 전수 받았다.

    심협은 내심 기뻤다. 아까 은갑 사내를 죽이고 얻은 창법보다 이번에 얻은 쌍검검법이 훨씬 쓸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황정경을 운공하면 두 손은 쇠보다 단단해져 쇠를 진흙 깎듯 깎아낼 수 있을 정도이니, 손바닥을 검 삼아 이 검법을 써 볼 수 있을 듯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금갑천장의 손에 들린 금탑에서 빛이 번쩍하더니, 금빛 단약 하나가 또다시 날아와 그의 앞에 떠올랐다.

    그는 잠깐 살펴보고 아무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뒤, 안심하고 단약을 삼켰다. 그러자 수련 경지가 꽤 많이 상승했고, 몸의 상처들 또한 기적처럼 전부 회복되었다.

    “좋아, 또 어떤 대단한 천병이 나타나는지 보자고!”

    몸을 일으킨 심협의 눈에는 전의가 불타올랐다.

    이 천병들과의 싸움은 결코 쉽지 않았지만, 그만큼 수확도 커서 고생스레 폐관수련을 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경지가 상승했다. 또한, 천병들과의 전투경험을 통해 법력과 육신의 힘에 대한 통제도 갈수록 능숙해졌다.

    이런 기연은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꿈속 세계에서 현실로 돌아갈 때, 수련 경지나 보물들은 가져갈 수 없지만, 기억에 새겨진 것들은 충분히 이어받을 수 있었다.

    그 무렵, 금갑천장이 다시 두 눈을 떴고, 두 줄기 금빛이 날아와 심협의 몸을 뒤덮었다.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또다시 푸른 돌 받침 대 위였다.

    이번에도 몇 장 앞에서 은빛이 번쩍였고, 은색 갑옷에 전극(*戰戟:창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 미늘창)을 쥔, 키가 크고 깡마른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에게서는 강력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는데, 출규 중기 절정의 경지에 이른 것이 분명했다. 앞서 두 명의 상대보다 더욱 강력한 것이다.

    하지만 심협은 두려움 없이 기합을 내지르며 먼저 달려들었다.

    그렇게 그는 연이어 금빛 공간에 들어가 은갑을 입은 천병들과 싸우며 계속해서 자신의 경지와 전투 기술을 끌어올렸다.

    황정경과 사월보에 힘입어 초반에는 무척 순조롭게 대여섯 번을 잇달아 승리하면서 수련 경지를 출규 후기까지 끌어올렸다. 매번 앞서보다 강력한 천병이 나타났고, 경지가 조금씩 상승할 때마다 실력 차이가 크게 벌어졌다. 천병들이 수련한 공법들 또한 갈수록 대단해졌고, 무예 역시도 더욱 정묘해졌다.

    황정경과 사월보의 우세로도 차츰 승리를 얻기가 어려워져 갔다.

    그리고 손에 쌍도(雙刀)를 쥔 은갑 천병과 마주하게 되었을 때, 마침내 심협은 순간의 부주의로 단칼에 몸을 찔리고 말았다.

    그가 어떤 반응을 하기도 전에 또 다른 새하얀 도광(刀光)이 번개처럼 날아와 촤악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을 위아래로 두 동강을 냈다.

    ‘여기까지인가?’

    심협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썩 달갑지 않았으나, 상대방의 실력은 어찌해볼 수 없을 만큼 위였다. 다만 이렇게 되면 금갑천장이 내린 시련은 실패로 돌아간 셈이었다.

    바로 그때, 눈앞이 돌연 아득해지더니 금빛 대전으로 되돌아갔다.

    심협은 조금 놀랐지만, 허리가 잘린 몸은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고, 곧 눈앞이 차츰 캄캄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앞에서 가벼운 울림이 들려왔다. 심협은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다. 어느 틈엔가 자리에서 일어난 금갑천장이 어두운 잿빛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두 눈동자에는 얼음같이 싸늘한 기운이 비쳤다.

    “패했으니 내가 기다려야 할 사람이 아니로구나!”

    금갑천장은 바짝 마른 입술을 열었다 닫으며 귀를 긁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손에 들린 금탑이 번쩍이더니 한 줄기 금빛이 날아왔고, 그 속에서 금탑의 허상이 떠올라 심협의 몸에 꽂혔다.

    퍽!

    가벼운 소리와 함께 심협의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몸뚱이가 마치 계란처럼 으깨지며 터져 나갔다. 심협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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