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금갑천장
순식간에 반 시진이 지나갔다.
갑자기 야수의 울부짖음 같은 낮은 포효가 대전 안에 울리더니, 육진편 위에 일렁이던 검은 빛이 순식간에 열 배는 밝아지면서 철편 전체를 뒤덮었다. 사나운 검은 바람 한 줄기가 검은 빗속에서 솟구쳐 나와 심협을 둘러싸고 빙빙 맴돌며 날아가, 주위를 어둡게 만들었다. 동시에 반경 10여 장의 공기에서도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심협은 두 눈은 번쩍 떴는데, 얼굴에는 놀라고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시도해본 것뿐인데 단번에 육진편의 1층 금제를 제련하는 데 성공하니 스스로도 놀란 것이다. 더욱이 겨우 1층만으로도 이토록 놀라운 위력을 발휘하는 이 육진편의 모든 금제를 완전히 녹여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대단할 것인가!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심협은 육진편을 칠성필 공간에 챙겨 넣고는 손을 뻗어 금빛 보탑을 꺼내려 했다. 그 탑은 외관의 느낌도, 내뿜는 위력도 육진편보다 윗길이라, 등급이 더 높은 보물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금빛 보탑은 금갑천장의 손에 붙은 것처럼 아무리 용을 써도 꺼낼 수가 없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심협은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뗐다.
바로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금갑천장이 갑자기 두 눈을 번쩍 뜨더니, 눈에서 금빛 광채를 뿜어내 심협의 몸을 휘감은 것이다.
“헉!”
심협은 간담이 서늘해졌지만, 미동도 할 수가 없었다.
뒤이어 주위 풍경이 크게 변하더니 대전이 사라졌고, 온통 하얗고 아득한 세계가 나타났다.
이곳은 위에 하늘이 없었고 아래에 땅이 없었다. 그의 몸은 허공에 둥둥 떠 있었는데 불편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금갑천장은 여전히 그의 앞에 앉아 있었다. 다만 지금은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아 더 이상 시체가 아니었다.
그는 맑고 생기 있는 두 눈으로 심협을 쳐다보고 있었다. 심협은 몸의 통제권을 되찾았지만, 놀란 나머지 몸을 움직였다가 이내 뒤로 날아가 버렸다.
그러나 금갑천장이 빙긋 미소를 짓자, 오른손에서 금빛 보탑이 날아가 심협의 머리 위에 번쩍 나타나서는 위에서 금빛을 한 줄기 쏘아내어 그 몸을 뒤덮었다.
심협은 갑자기 몸이 거대한 산봉우리에 짓눌리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허공에서 털썩 고꾸라졌다. 그리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벌레가 산을 들쳐 멘 것처럼 옴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귀하께서 아직 살아계셨군요. 제가 아까 무례를 범하여 제멋대로 선배님의 법보를 취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제가 지금 당장 돌려드리겠습니다.”
그의 눈에는 한 줄기 두려움이 스쳤지만, 재빨리 마음을 가다듬은 뒤 입을 열었다.
이 말을 마친 심협은 신식을 품속의 칠성필로 뻗었지만 신식이 단번에 뚫고 지나갔다. 이 칠성필은 그저 허황된 그림자에 불과했다.
칠성필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입은 옷도 마찬가지로 허상인 듯 껍질만 있을 뿐이었다.
더욱이 그의 몸도 마치 영체(靈體)마냥 텅 비어 있었다.
‘방촌산에서 본 고서에 따르면, 신혼(神魂)의 힘이 어느 정도까지 강해진 자는 상대방의 신혼을 끌어당겨 환상 속에 집어넣을 수 있다던데…… 설마 지금 이게 그런 상황인가?’
심협은 그런 경지는 어느 정도일지 감도 오지 않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금갑천장이 갑자기 몸을 일으켜 성큼성큼 다가왔다.
“수련 경지가 좀 낮다고는 하나 심성은 꽤 괜찮으니 그냥저냥 참고 쓰는 수밖에…….”
심협이 채 입을 열기도 전에 금강천장이 담담한 목소리로 알쏭달쏭한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몸을 움직여 금빛 허상으로 변하더니 심협의 몸 안으로 녹아들었다.
한 줄기 뜨거운 기운이 몸에 주입되었지만, 심협은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이 모든 것을 두 눈 빤히 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 심협의 몸 안에 고여 있던 법력이 갑자기 저절로 움직이면서 눈부신 금빛을 피워냈고, 세 마리 용과 코끼리의 허상이 금빛 속에서 떠올라 울부짖었다. 몸 안에 주입된 뜨거운 기운은 이 용과 코끼리 허상에 가로막힌 듯 속도를 늦췄다.
하지만 금갑천장을 어찌 당해낼 것인가. 뜨거운 기운으로 변한 금갑천장은 순식간에 허상의 방해를 뚫고 계속 심협의 몸 안으로 녹아들었다.
세 마리 용과 코끼리의 허상이 분노에 찬 포효를 내지르자, 금빛은 눈 깜짝 할 새에 사발만 한 여섯 개의 금빛 부적 문양으로 변해 심협의 체내로 들어갔다.
무수한 금빛 불꽃이 그의 몸 안에서 터져 나와 작열하는 태양처럼 눈부시게 빛났다.
그 순간, 뜨거운 기운은 일시에 밀려나와 다시 금갑천장의 모습으로 변했다.
“이럴 수가! 이건 황정경이잖아! 네가 방촌산 제자란 말이냐?”
금갑천장은 깜짝 놀란 기색으로 한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금탑이 내뿜던 금빛이 사그라들며 심협의 머리 위에서 날아가 다시 금갑천장의 손에 떨어졌다.
“제가 방촌산과 인연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심협은 몸을 짓누르던 태산 같은 압력이 사라지자, 몸을 휙 뒤집어 일어나서는 어깨를 주무르며 금갑천장에게 답했다.
앞에 있는 사람의 실력이 헤아릴 수 없이 높고 깊어 감히 도망치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일단 뻔뻔스레 인정한 후, 임기응변에 맡기기로 했다.
“황정경은 방촌산 진파의 보전이다. 당시 제천대성(霽天大聖) 외에는 아무도 이 공법을 완성한 이가 없었지. 하늘의 뜻이요, 원인과 결과라. 설마…… 바로 그인가……?”
금갑천장은 심협을 살피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심협은 얼떨떨했지만, 감히 물어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얌전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금갑천장이 곧 고개를 들고 입을 벌리자 금빛이 한 덩이 쏘아져 나와 천책(天冊)으로 변했다. 이를 본 심협은 속으로 움찔했으나, 금갑천장은 개의치 않고 주문을 몇 마디 외우면서 손에 든 천책을 휘둘렀다. 그러자 그 위에서 금빛이 쏟아져 나와 심협의 몸을 감쌌다.
“선배님께서는 무엇을 하시…….”
심협은 낯빛이 변해 입을 다물었고, 다시 눈앞이 아득해지더니 어느 금빛 공간 안에 나타났다.
좀 전의 하얀 공간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그의 몸도 더 이상 허상이 아닌 실체로 변해 있었다. 다만 육신을 제외한 그의 옷과 칠성필 같은 다른 물건들은 여전히 실체가 없었다.
‘나의 실력이 너무 미약하여 이런 엄청난 신통력을 가진 이에게 함부로 농락당하는구나! 내 최대한 빨리 수련 경지를 끌어올려 적어도 대승기쯤은 되어야 천 년 뒤의 이 난세에 발붙일 곳을 찾을 수 있겠어!’
심협은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한탄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발밑으로는 수백 장 크기의 네모진 돌 받침대가 보였다. 이 돌 받침대는 투박한 푸른 돌덩이로 만들어 졌는데, 이 청석들은 평범해보였지만 아득한 옛날부터 온갖 풍파를 겪은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 범상치 않은 돌인 게 분명했다.
청석 위에는 적갈색 흔적이 언뜻언뜻 남아 있었는데, 피에 물든 듯 깊이가 일정하지 않았다. 또 이곳에서 피비린내 진동하는 격전이 자주 벌어졌는지, 짙은 살육의 기운이 배어 있어서 절로 흥분이 치솟았다.
돌 받침대의 네 모서리에는 각각 푸른 돌기둥이 우뚝 솟아 있었고, 끝부분에는 금빛 불꽃들이 타올랐다.
‘여기는 또 어디야?’
심협이 당혹스러워하고 있던 그때, 몇 장 앞에서 빛이 번뜩이더니 은빛 갑옷을 입은 사내가 나타났다. 턱수염이 얼굴에 가득했고, 골격이 커 매우 험상궂어 보였지만, 얼굴은 무표정 그 자체였다.
이 은갑 사내에게서는 웅장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는데, 심협과 같은 출규 중기의 경지였지만 그보다는 훨씬 강했다.
사내는 한 손에 양은창(亮銀槍)을 들고 있었는데, 창끝에서 무시무시하고 차가운 빛을 번득이는 것이 척 봐도 등급이 매우 높은 법기임을 알 수 있었다. 반월환보다는 확실히 뛰어났다.
심협은 슬며시 경계심이 일어 먼저 인사를 건네려 했다. 한데 은갑의 사내는 그를 휙 돌아보더니 멍한 두 눈에 맹렬한 전의를 담았고, 갑자기 손에 든 은창에 눈부신 빛을 피워냈다.
그 은빛이 너무나 눈부셔서 심협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데 바로 그때, 눈앞에 은빛이 번쩍이더니 은창의 창끝이 어찌된 일인지 그 앞에 이르러 아랫배를 곧장 찔렀다.
그러나 심협의 모습은 한 줄기 잔상에 불과해 천천히 흩어져 사라졌다.
“도우께서는 왜 대뜸 공격하는 거요? 내 그대에게 잘못한 것이 없거늘.”
심협의 모습이 10여 장 밖에 나타나더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은갑의 사내는 아랑곳하지 않고 즉시 몸을 돌렸고, 발을 들어 올리자 순식간에 10여 장을 뛰어넘어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심협 앞에 나타났다.
그의 손에 들린 은창은 한 줄기 은빛 그림자로 변해 별똥별처럼 심협의 가슴팍을 찌르려 했는데, 속도는 아까보다 더 빨랐다.
“귀하가 정말 싸우고자 한다면, 내 응당 응해드려야지!”
심협은 몸을 기울여 공격을 피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은갑의 사내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손에 든 은창을 휘둘렀고, 여섯 갈래 은뱀 같은 창 그림자가 번개처럼 날아와 심협의 몸 곳곳을 찌르려 했다.
“내가 그 천장은 어쩌지 못했지만, 너를 두려워할까보냐?”
눈을 가늘게 뜬 순간, 심협의 발에는 빛 그림자가 스쳐 지났다. 동시에 몸은 얇디얇은 금빛 그림자로 변하여 여섯 갈래의 창 그림자를 뚫고 지나가 눈 깜짝할 사이 은갑의 사내 앞까지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다섯 손가락을 짐승의 발처럼 구부리고 줄줄이 잔상들을 끌어내며 한손에 은빛 장창을 움켜쥐었다.
은갑의 사내는 낮게 포효하더니 손의 장창을 빠른 속도로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그러자 창이 커다란 뱀처럼 꿈틀대며 단숨에 심협의 손을 뚫고 나오면서 창 꼬리가 가로로 쓸고 지나가며 심협의 가슴에 반격을 가했다.
심협의 눈에는 놀란 기색이 언뜻 스쳤고, 발걸음이 흐트러지면서 가로로 휘둘러진 창 꼬리를 피했다.
방금 그가 창을 쥐었던 것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실은 전력을 다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상대의 장창을 쥘 수조차 없으니 이 은갑 사내의 실력을 다시 평가해야 할 것 같았다.
그는 몸을 휙 움직여 금빛 환영으로 변해 은갑 사내 곁으로 다가갔고, 곧장 주먹을 크게 휘둘렀다.
두 사람은 다시 한데 얽혀 싸웠지만, 은갑 사내의 창법이 너무나 정교하고 신묘했다. 은빛 장창은 때로는 변화무쌍하게 공격했다가, 때로는 은밀하게 변하기도 하며, 그의 깊은 경지와 호응해 상대가 막으려야 막을 수 없게 만들었다.
다행히도 원래 심협의 경지가 사내보다 크게 밀리지 않았던 데다가 황정경이 매우 정교하고, 사월보가 기이하기 이를 데 없어, 은갑 사내의 신출귀몰한 창법에 밀리지 않았다.
그림자가 엇갈리는 가운데, 심협과 은갑 사내의 싸움은 1각이나 지속되었다.
초반, 심협은 열세에 처했다. 그러나 몇 합이 지나자 차츰 상대 창법의 공격 수법을 파악했고,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반격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은갑의 사내가 갑자기 창을 휘리릭 뒤집고는 빠르게 휘둘러 심협의 온몸 곳곳을 향해 마치 비가 퍼붓듯 내찔렀다.
“또 이 수법이냐!”
심협은 눈을 날카롭게 번뜩이더니 물러나지 않고, 날아드는 창의 잔상들을 향해 곧장 돌진했다. 그의 몸에서는 스무 줄기 금광이 떠오르면서 스무 개 법맥 안의 법력이 전부 움직이기 시작했다.
콰르릉!
우렁찬 소리와 함께, 몇 배는 강력해진 법력의 파동이 그의 몸에서 폭발하며 은갑 사내의 기세를 가볍게 제압했다. 이어서 창을 잡아채려는 듯 오른손을 휙 내뻗으니 갑자기 탁자만 한 금빛 용의 발이 나타나 수많은 창의 잔상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끝없이 이어지던 창의 잔상들이 우뚝 멈추더니 곧 소리 없이 흩어졌다. 은빛 창이 금빛 용의 발에 꽉 붙잡힌 것이다.